아름다운 삶의 마침표, 현재 삶의 이정표
당신의 비문, 어떻게 작성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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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 23,1). 용인 공원묘지 내 성직자묘역의 김수환 추기경 묘소 비석 문구. | 묘소를 찾아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비석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새겨진 글귀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길게 쓸 수 없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비문(碑文)은 고인의 삶을 보여주는 지표 같다는 점에서 한 자 한 자 의미가 깊다. 하지만 성명과 출생ㆍ사망일, 세례명 등을 새기고 나면 몇 글자나 더 적을 수 있을까. 위령성월을 맞아 삶의 마침표와 같은 비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본다.
#나의 비문은? "비석에 무슨 말을 새길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지면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대부분 "생각한 적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좌우명이나 성경 구절도 좋으니 하나만 꼽아보라"고 해도 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죽음이 멀리 느껴지거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죽음을 눈앞에 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의 경우는 어떨까. 성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 노유자(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는 "5년 동안 200여 명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지만 유언이나 매장방식 등을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며 "가족 역시 먼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불편해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꺼린다"고 말했다. 노 수녀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한국사회 정서상 유언 역시 '남은 가족을 부탁한다'가 대부분이다"며 "비석에 무슨 글귀를 새겨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는 단 두 번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평생을 뚜렷한 목표를 향해,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다 간 유명인들 비문에는 평소 그들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한 김수환 추기경의 비석에는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성구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 23,1)가 간단한 약력과 함께 새겨져 있다. 김 추기경이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과 그가 추구해 온 삶을 압축한 글이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1847~1931) 묘지석에는 "상상력, 큰 희망, 굳은 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라는 문구가,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1885~1970) 묘지석에는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면, 가치가 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웃음짓게 하는 글귀를 남겨 후세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의 비문을 준비하지 않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누구에게나 두려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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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령의 날 밈사에 참례한 신자들. 가을이 되면 낙옆이 지듯 인간은 누구나 생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죽음체험 피정을 15년째 진행해온 김보록(살레시오회) 신부는 "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해 논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한다"며 "교회 안에서도 죽음에 대해 언급을 잘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죽음체험 피정은 죽음 묵상법 강의와 수련, 예수님의 죽음 묵상법 수련, 자신을 위한 고별식 및 장례미사, 묘비와 유언서 작성, 입관체험 등으로 진행된다. 평균 150~200여 명이 참가하고 있다. 이 외에도 나눔의묵상회 등이 피정 프로그램 일환으로 죽음체험을 한다. 묵상회 측은 "죽음체험을 하는 동안 서럽게 우는 분들이 많다"며 "3분 남짓한 시간을 상당히 길게 느끼며 두려워하고 피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고 밝혔다. 김 신부는 "세상에서 마음을 떼기 쉽지 않지만, 우리가 보는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걸 안다면 죽음 역시 행복을 누리는 시발점으로 여겨질 것이다"며 "죽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영성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죽음은 주님이 주신 선물인 '생명'을 반납하는 일이다. 그것을 향해 가는 길이 행복하려면 매일의 삶의 고통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후손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 준비를 잘해도 비석에 남기고 싶은 말을 다 남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전교구 성환묘원 이병석(요한 사도) 사무장은 "많지는 않지만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는 성경구절 등을 후손들이 새기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 천주교 묘지의 묘비석은 좌우 크기가 70cm에 불과해 긴 글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이 지향해온 삶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야 새겨넣을 수 있는 상황이다. 노유자 수녀는 "비문을 생각하는 것 역시 그 문구에 맞게 평소 잘 살며 하느님 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며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들과 화해하고, 하느님 앞에 용서를 청하는 일 역시 죽음을 잘 준비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비문에 특별한 말 없이 고인의 이름 석자만 새겨져 있어도 후손들은 섭섭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성경 구절 혹은 전하고 싶은 말을 남긴다면 후손들에게 가슴 따뜻한 선물이 될 것이다. 주님을 향해 매일 한 발짝씩 다가가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비석에 새길 성경 구절 하나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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