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비는 좋아하지 않는다. 낮에 이렇게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도,
무릎 뒤에 닿는 소파의 질감은 물기를 머금고 있고,
페이지를 넘길 때도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특히 그렇다. 긴츠부르그의 건조한 문체마저도.
페데리카는 키가 크고, 허리 둘레만큼은 박력이 있지만 다른 부분은 야위었다.
거의 늘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굽 높이가 적당한 구두를 신고,
남편이 선물했다는 묘안석 반지를 한시도 빼놓지 않는다.
그 녹아 흐를 듯 색이 깊은 커다란 돌은,
마치 페데리카의 손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 반지를 동경했다.
친구가 있는 밤을 좋아한다. 시끌시끌하고 행복하다.
나는 보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는 여자의 생활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석을 사는 여자의 생활과 보석을 선물 받는 여자의 생활을.
마빈의 말에서는 거짓말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그 점에 매료되었으리라. 거의 동물적인 친근감이 느껴졌다.
도서실은 학교에서 제일 안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나는 쥰세이를, 헤어진 쌍둥이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아무런 분별도 없이.
쥰세이는 나를 모델로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나를 종이 위에 옮겨놓는
오른손의 정확한 움직임.
나는 자신이 종이 위에 정착되는 똑같은 리듬과 속도로 - 사락사락 연필소리와 함께 -
쥰세이 안에 정착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쥰세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웃는다. 떠든다. 걷는다.
생각한다. 먹는다. 그린다. 찾는다. 쳐다본다. 달린다. 노래한다. 그린다. 배운다.
쥰세이는 동사의 보고였다. 만진다. 사랑한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사랑한다. 느낀다. 슬퍼한다. 사랑한다. 화를 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욱 사랑한다. 운다. 상처 입는다. 상처 입힌다.
"그럼, 결혼은 왜?"
내 질문에 안젤라는 산 쪽을 본 채 분명하게, "사랑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홀딱 빠졌더랬어(I was so in love with him)."
아이 워즈 소 인 러브 힘. 안젤라는 'so'를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그렇게 말했다.
페데리카는 피렌체의 두오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라고 했다.
그녀의 사랑의 기억인 두오모. 초등학생 시절,
그녀의 집 거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
언젠가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르리라고.
......
- 약속해 줄래?
그 때 나는, 평소에 없는 용기를 그러모아 말했다.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으므로.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꼭 이 사람과 같이 오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쥰세이는, 너무도 쥰세이답게 주저없이 약속해 주었다.
- 좋아. 10년 뒤 5월이라. 그 때는 21세기네.
쥰세이의 웃는 얼굴은 언제나 들판처럼 편안했다.
라 미야 캄파냐(나의 들판). 장난삼아 그렇게 불렀다.
- 홍차가 얼마나 따끈하고 맛있게 끓여졌는지는, 찻잔에 따를 때의 소리로 알 수 있지.
- 하지만, 역시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싶은데.
적어도, 유랑할 틈새가 있다는 것은.
유랑할 틈새. 나는 그 말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쥰세이는 간혹 그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터프한 것인지 섬세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러나 아무튼 에너지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낭만주의자였다.
내게 없는 것만 갖고 있었다.
"쥰세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이름은 어두운 부엌에 엄청난
위화감을 가져다 주었다. 엄청난 위화감과, 눈사태 같은 그리움을.
나의 들판(La mia campagna).
과거 그렇게 부르며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들판처럼 넉넉하고,
환한 표정으로 웃는 사람이었다. 들판처럼 섬세하고, 그러면서 마음 어딘가에
야만적인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과 대리석 바닥의 모양을 바라보았다.
어린애 같은 단순함으로. 그리고,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편지 한 통으로,
쥰세이는 나를 이렇듯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간단하다는 것을.
그 파란 잉크의 볼펜 글씨.
나는 그 편지를 외우고 말았다.
아오이.
그 한 마디에 쥰세이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쥰세이는,
늘 쥰세이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이름을 발음하였다. 모든 언어를.
성실하게, 애정을 담아. 나는 그가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했다.
아오이.
아주 조금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 쥰세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듣고 싶었다. 세월 따윈 아무 소용없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을 전부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자유로운 일이다. 자유롭고 따분하고.
돌아갈 장소.
사람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그런 장소를 발견하는 것일까.
잠 못드는 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함과 애정을 혼동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매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나는 누구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누가, 있는 것일까.
고독할 때, 친절과 우정은 고독을 더욱 조장한다.
겨울은 기억을 소생시키는 계절이다.
내내,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만나고 말았다, 고 생각했다. 교외의 조그만 대학에서, 도쿄란 불가사의한 도시에서.
영원히,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손을 뻗지 못한다. 누군가 나에게 손을 뻗어도, 나는 그 손을 맞잡지 못한다.
누구한테 못할 짓을 하고 있다거나, 실례라든가,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안의 무언가 - 터무니없이 강하고, 천방지축인 무언가 - 가
나를 휘젓고 있는 것 같았다. 일을 정리했다. 차근차근, 하나씩, 쥰세이를 향하여.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그 때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알베르토의 공방에서, 아침 햇살 속에서, 나는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피렌체에 간다는 것을. 두오모에 오른다는 것을.
쥰세이와 나눈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발차 벨이 울리고, 문이 닫혔다. 기분이 몹시 고양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담담했다.
나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감정이,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쥰세이."
만나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돌아본 쥰세이의, 기억 속보다 야윈 볼.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피렌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두오모의 꼭대기에서. 부드러운 저녁 햇살 속에서.
언어가 기호 같았다. 기호이기에, 그렇게 쉽사리 입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리라.
소중한 것은 무엇 하나 말하지 못한 채.
옛날, 우리가 둘 다 학생이고 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던 연인 시절,
나는 쥰세이의 방에서 자는 날이 기뻤다. 섹스 때문이 아니라,
그냥 둘이 몸을 기대고 잘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인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