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과 망원경 이야기(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
플뢰티오(Pierrette Fleutiaux 1941- ),
- 피에레트 플뢰티오(Pierrette Fleutiaux 1941- ) 프랑스 여성 작가, 여행을 좋아한다. 영어교사 자격증. ��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 ��Nous sommes éternels, 1990��, ��L'Os d'aurochs, 2007��
이 작품의 번역이 우리나라에 없는 것 같다. / 플뢰티오, 「심연과 망원경 이야기(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 보기는 봐야 할낀데 ... 언제쯤이 될까(51OKD)
제목으로 상상해 보건데, 구렁(un gouffre)이란 용어가 흥미롭다. 윤구병이 80년대 초 대학원 시절에 결혼하는 한 녀석에게 한 말이 있다. 이제 너도 또한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라, 껄껄껄. 구렁텅이가 무엇인지 알 때쯤이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지, 그래도 한 번 해봐라는 투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최루탄 가스 맞는 시절이 지나갈 쯤, 80년 대 말쯤에, 대학원에서 앞날이 불투명한 철학과로 가려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그는 왜 구렁텅이에 스스로 빠지려고 하느냐고 좋은 길이 얼마든지 열려있는데, 그래도 하겠다고, 그럼 해봐 흐흐흐. 나중에 이야기지만 그는 다른 일을 해봐도 그렇고 저렇고 해서 철학공부라도 해봐야겠다는 유희 삼아 철학 또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유한계급의 직업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가가 있어야 학문한다고 했다고 해서 여가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사람(재벌의 아들)이 학문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삶에서 필요와 욕구 그리고 절박함까지는 아니라도 풀어야 할 과제가 있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을 것이고, 아마도 지금도 그런 말씀을 강연에서 하실 것이란 생각이 든다. (51OKD)
§8.023. Troisième nouvelle 245.
셋째 단편소설: 피에레트 플뢰티오의 「심연과 망원경 이야기(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 1976. (378)
어떤 절편들은 얼마간 인접해 있고, 또 어떤 절편들은 얼마간 떨어져 있다. 이 절편들은 심연을, 일종의 커다란 검은 구멍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다. 각각의 절편 위에는 두 종류의 감시자들(deux sortes surveillants), 즉 짧게 보는 자들(les courts-voyeurs)과 길게 보는 자들(les longs-voyeurs)이 있다. 그들을 감시하는 것은 심연 안에서 생산되는 운동, 돌출, 범법 행위, 소요, 반란이다. (245, 382)
하지만 두 유형의 감시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짧게 보는 자의 망원경은 단순하다. 이들은 심연 안에서 거대 세포의 윤곽, 거대한 이항적 나뉨의 윤곽, 이분법의 윤곽을, “교실, 병영, 서민 아파트(H.L.M.), 또는 비행기에서 본 교외”와 같은 유형의 잘 규정된 절편들 자체의 윤곽을 본다. 이들은 가지들, 연쇄들, 열과 행들, 도미노들, 줄무늬들을 본다. 때로는 이들은 가장자리에서 잘 못 만들어진 형태, 떨리는 윤곽을 본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광선만원경(Lunette à royon)>을 찾는다. 이것은 보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절단하고 재단하기 위해 쓰인다. 그것은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고, 거대한 기표작용적 절단이 도처에서 지배하도록 해주며 순간적으로 위협받은 그램분자적 질서를 복원하는 기하학적 도구이다. 재단하는 망원경은 모든 것을 덧코드화 한다. (245, 382-383) [상층은 표면을 재단하고 덧코드화한다.]
기하학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짧게 보는 자란 무엇인가? 이는 의미없는 물음이다(“나는 문자 그대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글이 아닌 선, 개인이건 집단이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의 윤곽을 따라 판단되고 교정되는 견고한 분할선을 효과적으로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45, 383) [소설을 읽고 분석 또는 설명을 보아야 하는데, 거꾸로 설명으로 소설의 내용을 구성하려는 이 상상, 서양철학 특히 라틴계를 하려는데 약점이다..] [짧게 보는 자는 예견이 정확한 것처럼 보인다. 길게 보는 자는 미래가 불투명하다. 인지론자는 미분적 결합인데 비해(요소들의 집합), 인식론자는 적분적 종합이다(너비와 부피들의 총합). 이런 후자의 이야기는 다음 문장에서..]
길게 보기, 길게 보는 자들의 상황은 모호(ambiguïté)하지만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수가 극히 적으며, 많아야 절편마다 하나이다. 그들은 섬세하고 복잡한 망원경(une lunette fine et complexe)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우두머리는 아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사물을 본다. 그들이 보는 것은 미시-절편성 전체이고, 세부의 세부이고, 가능성들의 미끄럼틀이고, 가장자리에 이르기를 기다리지 않는 작은 운동들이고 윤곽이 생기기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히는 선들이나 진동들이고, 요동을 통해 발아하는 절편들이다. 리좀 전체(Tout un rhizome), 즉 재단 기계처럼 기표에 의해 덧코드화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형태, 그런 집합, 그런 요소에 귀속되지 않는 분자적 절편성. (245-246, 383) - [로트만(Lautman), vol 1, Les Schémas de structure, Herman, 1938, pp. 31-40. 이 제1장, 1절에서 「le local et le global」에는 미분적으로 보는 짧게 보기와 적분적 결합으로 보는 길게 보기 사이의 관계를 군론과 행렬로서 설명하고 있다. 적분적 결합 또는 총체적 종합은 리좀 전체인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생물학도 사회학도 아니고, 이 둘의 유사성도 아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선들을, 글(écriture)의 선들을 그린다. 그런데 삶은 그 선들 사이를 지나간다. 유연한 절편성의 선은 해방되어 길게 보는 자들의 미시-정치에 의해 떨리는 방식으로 그려진 아주 상이한 또 다른 선과 뒤엉킨다. 그것은 정치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은 계단식이며 병치할 수 없고, 통약할 수 없는 형식으로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각, 기호계, 실천, 정치, 이론은 항상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246, 384)
사람들은 말할 때에만 문자 그대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지각하고, 문자 그대로 산다. 다시 말해 연결 접속될 수 있는 선이건 없는 선이건 선들에 따라. 그것들이 매우 이질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때때로 그것들이 등질적인 경우에는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384-385)
길게 보는 자들(les longs-voyeurs)이 처한 상황의 모호함(l‘ambiguït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심연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가장 가벼운 미시-위반들을 쉽게 간파해낸다. 하지만 그들은 재단하는 <la 망원경(Lunette)>이 허울뿐인 기하학적 정의(正義, justice) 아래서 야기하는 끔직한 폐해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들은 예견하고 앞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들의 눈에는 이미 일어났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247, 385) [주지주의의 기하적 판별은 미리 주어진 것을 존재라 믿고 예견하고 확신한다. 자연주의의 위상적 생성은 예견불가능하고 비결정적 상태로 활동성을 유지하는데, 전자는 이 활동성을 자신들이 재단했다고 믿는다. 이 경우에 통제와 억압, 그리고 지배와 질서 등을 유지했다고 한다. 후자에서 온사건은 항상 무엇인가를 생성하고 생산한다는 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길게 보는 자들도 짧게 보는 자들의 도구에 현혹될 수 있다. (내가 해석을 거꾸로 하고 있나?) (51OKD)]
그들은 가장 경직되고 가장 잔인한 통제의 기획에 가담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된[폭로된] 지하활동에 대한 모호한 공감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분자적 선의 모호함은 그 선이 두 개의 비판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어느 날(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떤 길게 보는 자(un long-voyeur)가 자기 절편을 버리고, 검은 심연 위에 걸린 좁은 가교로 올라가서 자신의 망원경을 부순 후 도주선 위에서 다른 쪽 끝에서 다가오는 눈먼 <분신(un Double)>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247, 385-386) [도주선을 가는 잠행자를 강조할 것 같은데, 단편소설은 분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 한계인가? ]
(옮김, 51OKD)
설1941플뢰티오1976심연.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