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배경 : 선종(禪宗) 최후의 공안집이라고 할 수 있는 <무문관(無門關)>을 중간(重刊)할 때 맨 마지막에, 남송(南宋)의 이종(理宗. 1205-1264) 황제가 하사한 서호별장(西湖別莊_에서 쓴 안만(安晩) 정청지(鄭淸之. ?-1251)의 발문(跋文)이 추가됩니다.
참고로 그는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으며,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었는데, 영종(寧宗. 1168-1224) 황제 시절 승상이었던 사미원(史彌遠)이 훗날 정치적 음모에 의해 이종 황제가 되는 조윤(趙昀)의 스승으로 그를 천거했습니다. 그는 1246년 당시 최고의 선사였던, 임제종 양기파 오조법연 선사 계열의 무문혜개 선사가 편찬한 <무문관>의 중간을 통해 날로 쇠락해가는 남송의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윤은 황제가 되고 얼마 안 되어 청루의 기생들까지 궁으로 들여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매우 무능한 황제였기 때문에, <무문관>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을 찍어냈다고 해도 국운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막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요즈음 온 나라가 불교계를 포함해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지러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마침 그동안 28차례에 걸쳐 선 수행의 입문자 분들을 위해 요긴한 점들은 거의 다룬 것 같아 온 나라가 어수선한 이때, 필자도 안만 거사와 같은 심경으로, 본격적인 선수행과 더불어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하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한 필독서로서 <무문관(無門關)>을 새롭게 제창(提唱)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롭게 제창한다.’는 뜻은 지난 40여년과 <무문관>을 옆에 끼고 살아온 필자가 그동안 아쉬워했던 점들을 채워가면서 오늘날의 선수행자들을 포함해 가능한 초심자 분들까지도 보다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올 수 있도록 <무문관> 48칙들을 일관성 있게 순서를 바꾸면서 새로운 틀 속에서 다시 다루겠다는 뜻입니다.
신무문관 : 습암(習菴)의 서문(序文)
먼저 이번 글에서는 들어가는 말로 ‘신무문관 제창을 시작하면서’와 <무문관> 맨 앞에 나오는, ‘유문(有門)’이니 ‘무문(無門)’이니 하며 머리로 헤아리지 말고 온몸으로 ‘무문관(無門關)’을 투과할 것을 다그치고 있는 습암 거사의 서문(序文)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신무문관 제창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지하철을 이용해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처음 가보는 역에 내렸을 때, 헤매지 않고 약속 장소까지 정확히 가기 위해서는 현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하고 약속 장소와 제일 가까운 출구를 통해 나가듯이, 혜개 선사는 <무문관(無門關)>의 도처에서 수행자의 현 위치를 일깨워 주고 있으며, 그는 <무문관>의 저술 속에서 간화선의 원류인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께서 새롭게 제창한 ‘무(無)’자(字) 공안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간화선 수행체계를 확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가 제자들의 수행 지도를 위해 요긴하게 활용했던 공안들인 ‘간시궐(乾屎橛)’, ‘마삼근(麻三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주인공(主人公)’, ‘수산죽비(首山竹篦)’ 등의 공안들을 모두 수용하여 대혜 선사의 가르침의 요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는 오조법연 계열 선사들의 공안들을 다수 수용하면서도 오가칠종(五家七宗)의 걸출한 조사들의 공안들도 함께 수용함으로서 어떻게 보면 실질적으로 선종(禪宗)의 통합(統合)하며 간화선 수행 체계를 완결 지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수행자들이 <무문관> 48칙 (사실은 각자에게 인연 있는 몇 개의 화두)의 철저한 점검과 함께 석가세존이나 역대 조사를 위시한 모든 선지식들의 치열했던 구도적인 삶을 조명해 보고, 이 분들의 삶과 비교해 각자 인생의 현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각자가 세운, 뜻 있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단도직입(單刀直入)한다면, 재가와 출가를 불문하고 누구나 언젠가는 대자유(大自由)를 얻어 불조(佛祖)뿐만 아니라 귀왕나타까지도 찬탄하는 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며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더불어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값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습암(習菴) 거사의 서문(序文)
“만일 ‘무문(無門)’이라 설(說)한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드나들 것이며 만일 ‘유문(有門)’이라 설한다면 우리의 스승께서 굳이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제목을 택해 맨 앞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스승께서) 이것에 억지로 주석(註釋)을 덧붙였다. (그런데 내 견해로는) 이것은 마치 삿갓 위에 삿갓을 쓴 격이다. (게다가) 나, 습옹(習翁)은 이 책을 찬양하는 글을, 막무가내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 또한 마른 대나무에서 즙을 짜서 이 유치한 책에 덧칠하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비록 어쩔 수 없이 서문을 쓰기는 했으나 부디) 나, 습옹이 (이 유치한 <무문관>을) 내던져버렸다는 소식을 기다리지 말고 내던져버려라! (절대로 사람들을 속이는 이 <무문관> 가운데) 글귀 하나라도 세상에 유포(流布)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리를 달리는 명마(名馬) 오추(烏騅)라 하더라도 이를 쫓아가 다시 거두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1228년 7월 그믐날 습암진훈(習菴陣塤) 쓰다.”
군더더기 :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혜개 선사께서 6년 동안 ‘조주무자(趙州無字)’를 참구하다가 타파한 이 체험을 바탕으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낸 <무문관>에 대해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쓴,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이 역설적인 서문을 통해 우리는 ‘무문관’에 담긴 혜개 선사의 주석, 즉 평창(評唱)과 송(頌)에 추호도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를 극찬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습암 진훈(習菴陣塤. 1197-1241) 거사가 매우 선지(禪旨)에 밝은 선장(禪匠)이였음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남송 시대를 살았던, 적지 않은 사대부들[오늘날의 전문직 종사자들]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고 여겨집니다.
참고로 진훈에 대해서는 송사(宋史) 제423권에 “그는 추밀원편수관(樞密院編修官), 국자사업(國子司業) 및 지방(地方)의 지사(知事) 등을 역임했으며, 강직(康直)하고 정의로운 직정경행(直情徑行)의 군자(君子)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6년 반 동안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노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노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노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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