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를 되찾은 골든벨 >/돌, 이종섭
2007년 8월 26일 저녁, kbs tv 채널에서는 이날도 다름없이 대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골든벨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시간을 거듭하면서 여느 날과는 사뭇 다른 흥미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40번 문제를 넘어오는 동안 총 3명이 남았지만 거기에는 약 16 세로 보이는 무척 어린 남학생 한 명이 끼어 있었는데, 바로 고등학교 1학년생인 김성환 군이었다. 얼굴의 표정에도 아직까지 장난기가 가시지 않은 듯 한 풋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겨우 중학과정을 마친지 불과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인데, 그 광경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아마도 그가 몇 문제까지 올라갈 것인가가 궁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갔으며 초조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41번 문제에 가서 또 한 명이 탈락되었으나 이번에도 그는 아니었다. 이제 3학년생 한 명과 1학년생인 김성환 군 한 명 도합 두 명만이 남았다. 해외 역사탐방의 기회가 주어지는 “Think Korea 우리 역사 바로 알기” 라는 43번 문제마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두 학생 나란히 통과하였다.
드디어 운명이 갈린 48번, 골든벨까지 남은 세 문제 중 첫 문제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실수는 허용되지 않으며 틀리는 순간 그 학생은 도전의 기회를 영영 잃고 만다. 두 명이 함께 올라왔으므로 한 명이 올라왔을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찬스’의 기회마저 날아가버렸다.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가 손에 땀을 쥐듯 장내는 조용하기만 한데, 문제를 읽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냉정하리만큼 차분하게 이어져 나아갔다.
“지난 7월, 유엔평화유지군의 일환으로 활동한 국군 동명부대 대원들이 이스라엘에 인접한 A국에 도착했습니다. 동명부대는 우리나라 해외파병 역사상 전투부대로는 B국에 파병된 상록수 부대에 이어 두 번째인데요,
......
A와 B는 각각 어느 나라일까요?”
고개를 숙인 두 학생은 문제를 듣고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사회를 주도하던 남자 아나운서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긴장시켰다.
“5초, 4초, 3초, 2초, 1초!
자~, 답을 들어주세요.”
답이 적힌 피켓을 든 두 학생의 표정은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1학년인 김성환 군은 “A - 레바논, B - 동티모르” 라고 적었고, 3학년 학생은 “B - 동티모르” 라고 적어 그 문제에 대하여는 김성환 군과 답이 같았으나 나머지 A문제의 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학생의 정답이 나머지 한 문제에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었으며, 따라서 두 학생 중 최소한 한 명은 반드시 탈락되어야만 하는 냉엄한 현실에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 골든벨 도전의 고지를 향해 높이 치켜든 양 팔은 조금씩 떨리는 듯 보였으며 정답을 발표하는 가는 목소리의 낭랑한 아나운서의 멘트, 그러나 그 시간은 숨이 넘어갈 듯 한없이 길기만 했다.
“B국, 동티모르...”
먼저 두 학생이 같이 쓴 정답이 발표되었다. 숨죽이며 바라보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입에서 작은 안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두 번째 문제의 답을 발표할 차례이다. 무정한 아나운서의 입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마지막 남은 정답이 발표되었다.
“A국,... 정답은, <레바논>입니다.”
거세게 폭발하는 함성과 갈채소리, 그러나 거기에는 희와 비도 함께 교차하였다. 예상과는 달리 3학년 학생이 탈락하고 도전 골든벨 방영 사상 처음으로 2학년생도 아닌 1학년 학생이 49번 문제에 올라서게 된 것이었다. 탈락하는 3학년 선배학생의 아쉬움과 새로운 도전의 발판을 디디고 선 1학년 후배의 정다운 위로와 격려에 이어 49 번 문제마저 가볍게 통과하였다. 이제 김성환 군은 50번 마지막 한 문제로 개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학교의 명예까지 달린 골든벨 타종을 결정짓게 된 것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문제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는 햇병아리 색인 노란 색 문제지였다. 그 햇병아리는 따사로운 햇살아래가 아닌 묵직한 황금색 골든벨 아래에 좌정하고 앉아 교장선생님께서 읽어주시는 문제를 경청하였다. 그동안 이 자리를 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학년의 선배들이 도전하다 쓰라린 고배를 들어야 했던가? 그런데 오늘은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 나이어린 저학년 학생이 겁도 없이 이 자리에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태연하면서도 자만하지 않았고 겸손하면서도 결코 비굴한 기색이 없었다. 골몰하는 머리를 덮어씌운 모자마저도 햇병아리의 노란색이듯이 몸과 마음, 표정까지 어느 것 하나 아직 때 묻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으며, 오로지 문제마다 집중하며 최선을 다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50번,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 건축을 대표한다면, 이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교장선생님께서 문제를 읽어 나가시자 도전하는 역전의 전사, 김성환 군은 생각이 난 듯 답을 적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이것을 가리키는데요, 하늘에 있는 신들과 지상을 연결시킬 유일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전의 기능과 천문관측의 기능을 수행한 이 건축물은 무엇인가요?“
마지막까지 다 듣고 난 후 어린 전사는 고개를 약간 기우뚱 하더니 다시 답을 고쳐 적었다. 군은 갑작스레 혼란에 빠져 갈등을 겪는 듯 했다. 이를 바라보던 모든 이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해 타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뇌를 거듭하는 도전자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비춰지는 화면속의 피켓에는 “지구라트” 라고 쓴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답을 발표할 때가 되었다. 과연 사상 최연소로 골든벨을 울리는 최후의 승리자가 탄생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어린 학생의 가슴에 실패의 흔적만 남긴 채 쓸쓸히 내려가야만 하는가?
“정답은......”
골든벨 정답은 관례에 따라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발표하셨다. 그러나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또렸하게 발표하셨다.
“<지구라트> 입니다.”
발표와과 함께 웅장한 골든벨이 타종되는 순간, 하늘에서는 축하를 알리는 오색의 색종이가 쏟아져 나왔고 종소리는 힘차게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졌다. 나이어린 소년은 이렇게 해서 최연소라는 기록을 남기며 기적 같은 영광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 어린 학생의 입에서는 지금까지 풀어낸 수많은 문제의 정답보다도, 어쩌면 그토록 영광스런 골든벨 타종보다도 더욱 소중한 말 한마디가 튀어나와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흔들고 있었다.
마지막 문제를 남겨둔 도전 직전과 골든벨 타종 직후 아나운서는 학생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도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매사에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던 아버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입에서 때마다 빠지지 않던 어머니에 대한 헌신의 고마움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어린 이 도전자의 입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듣지 못했던, 그러면서도 부모 못지않게 소중한 존재이신 또 한 분이 거명되었던 것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저를 업어주시고 보살펴주신 할머니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얼마나 오랫만에 듣는 정겨운 말인가? 모두들 성공한 자리에서마다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소리는 빼놓지 않았고, 또한 그것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 당연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의 입에서는 어김없이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으며, 거기에 한 마디 더 덧붙이지자면 선생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년의 입으로는 천진난만하게도 ‘가장 감사하는 분으로 할머니’를 꼽고 말았다.
“할머니!”
어찌 부모님의 은혜와 고마움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지 않겠는가만,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계시듯 우리에게는 우리의 부모님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할머니가 숨어 계시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할머니의 손자손녀에 대한 사랑은 구별된다. 할머니의 사랑은 다른 욕심은 없고 오로지 튼튼하고 행복하게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지극히 순수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때에 따라서 좋은 학교를 가고 훌륭한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기도 하시지만, 할머님의 사랑은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소박한 할머니의 사랑에는 어떠한 기대감이나 사심도 섞여있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깊게 패인 주름살마다 한없이 따사로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부족한 용돈을 아껴 지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손자손녀에게 먼저 맛있는 것을 사주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손자손녀에게 주기 위해 관절염을 앓던 불편한 몸으로 밭에 나가 정성스레 고구마를 캐시었으며, 보릿고개시절 혼자 다 먹어도 부족한 국물이 대부분인 저녁식사 때 입맛이 없으시다는 핑계로 국수그릇을 손자 앞으로 밀어 놓으시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시던 할머니, 자식에게는 엄격하셨으면서도 손자손녀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감싸줄 수 있는 정답고 아량 넓으신 분이 바로 우리들의 할머니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들 곁에서는 그러한 할머니가 사라지셨다. 지금의 시대는 평균수명이 70~80세를 오르내리는 노령화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할머니는 아직 건재하시지만, 우리 곁에선 어느 샌가 멀리 떠나버리셨다. 핵가족시대에 밀렸고, 개인주의와 노인 경시풍조에 밀렸고 자손들의 현명한 신세대 문화에 떠밀려 아파트에서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할머니를 잊었다.
하지만 지금도 어디에선가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생각하시는 다정스런 할머니께서 우리들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세월과 시대가 할머니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때 우리는 할머니를 잊었어도 할머니의 손자손녀에 대한 따사로운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못난 자식을 버린 부모는 간혹 있었어도 못난 손자손녀를 버린 할머니는 아직 없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제64회 골든벨이 울려 퍼지는 현장에서 앳띤 한 소년에 의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그때 울려 퍼지는 골든벨 소리가 tv를 보던 나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흔들어놓고 말았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