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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이블 뉴스 원문보기 글쓴이: 야곱
이 메시지는 요한복음 라이프 스타디에 대한 서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과거에 여러 번 우리는 성경이 두 가지 중요한 문제들-그리스도와 교회-을 다루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성경은 생명과 건축의 책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교회는 건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할 때,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교회는 건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교회는 건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단어들을 얘기한다면 그것들은 단순히 교리적인 낱말들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다(골 3:4).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건축이다.
성경은 매우 일관성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통찰력과 하늘에 속한 이상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생명과 건축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생명과 건축을 본다. 사람이 창조된 직후에 생명이 소개되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동산 안에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창 2:7-9). 생명나무를 언급한 데 이어서 흐르는 강과 세가지 보석들을 본다. 금과 진주인 베델리엄과 보석인 호마노이다. 성경의 계시를 따라 좀더 나아가면 특히 계시록 21장에서 이 보석들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들이다. 창세기 2장 22절에서 우리는 건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발견한다.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건축하시고 그를 남자에게로 이끌어오시니』(히브리어 참조). 하나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그에게 아내를 지어 주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창조되었고 여자는 건축되었다. 창세기 2장에서 생명과 생명의 흐름에서 나온 재료들과 아내의 건축을 본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는 생명과 건축이 있다.
계시록 또한 생명에 대해서 말한다. 계시록 2장 7절에서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한다. 분명히 이것은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이다. 계시록 2장 17절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성경에 의하면 건축의 목적 외에 다른 용도가 없는 돌을 말하고 있다. 성경의 마지막 두 장인 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에는 새 예루살렘의 건축이 있다.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강이 흐르고 그 생명강물로 생명나무가 자란다(계 22:1-2). 따라서 성경은 명백하게 시작할 때와 같이 생명과 건축으로 끝을 맺는다.
성경의 양쪽 끝인 창세기와 계시록 사이에는 넓은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이 그 다리이다. 요한복음은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열린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는다면 이 곳에 기록된 역사는 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영원 안의 과거인 태초에서 시작해서 무한한 미래로 지속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계시록 사이의 간격을 이어준다.
우리는 성경이 생명과 건축으로 시작하고 끝맺음을 보았다. 성경의 양쪽 끝을 연결하는 요한복음도 또한 생명과 건축의 책이다. 요한복음 1장의 몇 마디 말씀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 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1:1-4).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교리가 있고 그 안에 지식이 있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는 생명을 본다. 더욱이 같은 장 42절에서는 돌에 대해 말한다. 시몬이 그의 형제 안드레에 의해 주님께 인도되었을 때에 주님은 그에게 돌을 의미하는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동일한 장(章)에 주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과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돌이 된 것이 있다. 이것은 생명이 소생시키고 살아나게 하고 거듭나게 할 뿐 아니라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으로 인해 믿는이가 하나의 돌로 변화된다.
이 돌의 목적과 용도는 1장 51절에서 계시된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 이전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았다. 이것은 창세기 28장 10절부터 22절에 기록된 야곱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 꿈에서 야곱은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세워지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그 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창 28:12). 야곱은 그가 꿈을 꾸었던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인 벧엘이라 불렀다. 그날밤 야곱은 하나의 돌을 베개로 해서 잠을 잤다.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그곳을 벧엘이라 부르고 그 돌에 기름을 부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실 때 야곱의 꿈을 이야기하셨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와 같은 모든 말씀을 볼 때 요한복음이 생명과 건축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장 22절이 아담의 신부인 아내를 건축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임을 보았다. 요한복음도 역시 신부에 대해 말씀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요 3:29). 신부가 누구인가?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함께 연합된 모든 거듭난 자들이 신부가 된다. 더욱이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주님이 아버지 집에 많은 거처를 예비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가 아버지와 함께 오실 것이요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실 것이다(14:23).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많은 거처를 갖고 있는 건축인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를 건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생명과 건축에 대한 책이다. 당신이 성경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요한복음에서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전 성경에 대한 열쇠가 이 책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교회는 건축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우리에게 공급되어지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얘기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서 합당하게 체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공급되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깨닫는 데 있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부족하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말은 단지 하나의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생명이란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고 역사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비록 나는 알콜성 음료수를 마시지 않지만, 포도주 마시는 것을 예로 들어보겠다. 만일 하나의 커다란 잔으로 포도주를 마시면 내 신체에 대한 포도주의 영향 때문에 잠시 후에 얼굴색이 불그레해질 것이다. 나는 대담해지고, 행복감을 느끼고, 기쁨에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생명이 된 포도주의 결과이다. 그러나 밤낮으로 포도주에 대해 얘기하고 포도주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으면서 포도주라는 말의 의미만 배운다면 나는 아무것도 체험할 수 없다. 포도주는 나와 관계가 없게 된다. 이와 반대로 포도주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매일 큰 잔으로 하나씩 마신다면 여러분은 포도주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포도주가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빈약한 예일지 모르지만 상당히 많은 것을 예시해 준다.
생명을 실제화하지 않고 생명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 생명의 실제화란 무엇인가? 살아 계신 삼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짜여지는 것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주님은 그분이 생명의 떡이요 우리는 그를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6:57). 주님은 또한 그분이 생수이고 우리는 그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4:10, 14). 당신이 빵을 먹을 때 그 빵이 당신 속에 들어갈 것이요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당신 속에 공급된다. 당신은 더 이상 빵과 물만을 가지지 않고 생명을 갖게 된다. 당신에게 공급되고 짜여지는 삼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얼굴에 인위적으로 색칠하지 말라. 단순히 하늘에 속한 포도주를 마시라. 그러면 얼굴색이 좋아질 것이다. 당신이 슬픔에 차 있을 때 기쁜 척하지 말라. 삼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분배되었음을 안다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요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건축이란 말에 익숙하다. 청년들이 여러 번 나에게 말했다. 『오 형제님, 형제들 집에는 건축이 별로 없습니다.』 때때로 내가 그들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 보면, 그들은 『우리는 모두 너무 독자적입니다. 우리에겐 건축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묻건대, 건축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마 이 메시지를 읽는 어떤 사람도 적합한 정의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이해에 따르면 건축이란 말의 뜻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나 다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쉽게 교리적인 답변을 내릴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방법으로 답변하기는 어렵다.
건축은 사실상 하나님의 확장이다. 건축이란 하나님을 단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확장이다. 생명이란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되신 하나님 자신임을 보았다. 만일 진정으로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역사되었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확장이요 확대이다. 이 메시지 앞부분에서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부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한 사람만을 창조하셨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나와서 남편의 확장이 된다. 이것이 건축이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하나님이 건축하셨고, 이 건축은 아담의 확장이었다. 아담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상징(figure)이요 표상(type)이며, 하와는 하나님의 건축의 상징이요 표상이다. 왜냐하면 이 건축은 아담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그의 확장이요 발전이었다.
우리는 성경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홀로 계셨다. 계시록 끝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확장인 거룩한성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다. 태초에는 어떤 확장이나 발전이 없이 하나님 자신만 계셨다. 그러나 많은 세기와 세대를 거쳐서 하나님은 그분이 선택한 백성들에게 역사해 오셨다. 결국 우리는 그분의 건축이 될 것이며, 이 건축은 하나님 자신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이 건축은 하나님의 확장이 되고, 이 확장은 하나님을 단체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건축이다. 건축은 단순히 내가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은 나를 의지하고, 형제 자매들이 서로서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건축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아니다. 합당한 건축은 하나님의 확장이요, 단체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삼일 하나님의 확장이다. 이것이 정확한 요한복음의 계시이다. 요한복음은 삼일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그분의 믿는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삼일 하나님을 분배한 결과로 그분의 모든 믿는이들이 그분의 확장이 되는 것을 보여 준다. 삼일 하나님의 확장은 하나님의 발전이요, 건축이요, 표현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계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건축을 말할 때, 이것은 생명이신 삼일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역사되고 분배됨으로 우리가 그분의 한 표현이 되는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이 그분의 확장이요 발전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기 바란다.
Ⅰ. 성경의 중심 사상-생명과 건축
A. 생명4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나 있다. 창세기 1장에 대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읽는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생명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를 생명나무 앞에 두셨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그분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원하셨음을 가리킨다. 이것이 창세기 2장 8절, 9절에서 계시되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생명으로 누렸다. 심지어 시편의 기자들도 하나님을 이렇게 누렸다. 시편 36편 8절-9절에서는 『저희가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江水)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源泉)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말한다.
신약 시대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기 위해 아들의 인격 안에서 오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충분히 계시되었다. 특히 1장 4절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10장 10절에서도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는 신약의 믿는이들에게 생명이 된다(골 3:4).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갖고 있다.
영원 안에서 생명나무와 생명강은 새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며, 이것은 삼일 하나님이 영원히 그분의 모든 구속된 이들에게 생명 공급이 되실 것임을 가리킨다.
B. 건축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에덴에서 발원(發源)한 강의 흐름에서 금과 진주와 호마노가 산출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재료들이다(창 2:10-12).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그를 위한 신부를 지으셨으며, 이것은 교회 건축의 예표요 궁극적으로는 새 예루살렘 건축의 예표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 신부는 성(城)으로서 상징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성(城)은 항상 여자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은 단체적인 아내의 상징이다.
에녹 성의 건축
그러나 하나님이 이 땅에 그분의 단체적인 아내를 건축하기 전에 사탄은 가인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의 첫 번째 모조품인 에녹 성을 건설했다(창 4:16-24). 에녹 성은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사탄이 고안한 사탄에 속한 모조품이었다.
노아의 방주 건축
에녹 성은 전 인류를 타락시키는 문화를 가져왔고, 이 타락으로 인해 홍수의 심판을 초래했다. 홍수가 오기 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다(창 6:11-21).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 의하면 방주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방주의 건축은 사탄의 모조품인 에녹 성에 대립되는 것이다. 그 당시의 모든 세상 사람들은 에녹 성에 포함됐지만 노아는 따로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방주를 건축했다.
노아의 단(壇)과 장막 건축
홍수 후에 노아는 단을 쌓고 장막을 세웠다(창 8:20, 9:21). 이 단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고 장막은 그가 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노아가 건축한 것이었다. 그의 장막과 단은 후에 이스라엘 자녀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지었던 장막과 제단의 축소형이었다.
바벨 탑과 바벨 성의 건축
노아의 자손들은 바벨 탑과 바벨 성을 쌓았다(창 11:1-9). 이 탑은 노아의 단에 대치(對峙)되는 것이고, 성은 노아의 장막에 대치되는 것이었다. 이 건축은 하나님의 건축의 적수인 사탄의 두 번째 모조품이었다.
아브라함의 단과 장막 건축
노아의 반역적인 자손들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바벨탑과 성에 대항해서 아브라함은 단과 장막을 지었다(창 12:7-8, 18:1, 6, 9). 노아의 단과 장막은 에녹 성에 대립되는 것이었고, 아브라함의 단과 장막은 바벨탑과 성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바벨에는 탑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단이 있었고, 바벨에는 성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장막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있던 하나님의 건축은 바벨에 있는 사탄의 모조 건축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소돔의 건축
아브라함이 장막에 살고 있는 동안 그의 조카는 사탄의 또 다른 모조 건축이 있는 소돔 성에 빠지게 되었다(창 13:12-13, 18:20, 19:1). 역사에 의하면 바벨은 우상의 도시요, 소돔은 죄악의 도시였다.
야곱의 꿈 속에서의 건축-벧엘
바벨과 소돔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선택에 의해 야곱, 즉 「대신 들어앉은 자(supplanter)」를 방문하셨다.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알지 못했고 단지 교묘한 책략을 쓰는 것만 알았다. 결국 하나님께 주권이 있었으며 그를 밀어내어 부모의 집을 떠나게 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어느 날 밤 노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으며 꿈 속에서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다(창 28:10-22). 하나님의 사자가 이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야곱이 잠을 깨어 말하기를,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殿)이요 이는 하늘의 문(門)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미 지적했듯이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의미한다. 창세기 28장 18절은, 야곱이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고 말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돌은 변화된 사람을 상징한다. 성경에 의하면 기름은 성령, 즉 사람에게 이르는 신격의 세 번째 위격을 상징한다. 삼일 하나님이 성령의 위격을 통하여 사람에게 도달할 때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집인 벧엘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벧엘이다. 야곱이 어디서 기름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에 기름을 부었고 그곳을 벧엘이라 불렀다.
바로의 국고성(國庫城) 건축
그러나 야곱의 자손들은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바로의 국고성을 쌓도록 강요당했다(출 1:11-14). 이 성은 더 전진된 사탄의 모조품이었다. 당신은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 즉 하나님의 건축과 사탄의 모조품이 서로 엇갈려 있는 것을 보았는가? 이것은 밤과 낮이 번갈아 있는 것과 같다. 밤이 지난 후에 낮이 있고, 낮이 지난 후에 밤이 있다. 야곱의 적극적인 꿈 후에 세상적인 향락의 성들인 바로의 국고성들의 건축이 있다.
성막의 건축
바로의 국고성들의 밤 후에 성막 건축의 낮이 있다(출 25:1-9). 부정적인 측면의 모든 성들 가운데 적극적인 측면의 하나님의 성막 건축이 있다.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시내 산으로 인도되었다. 그들이 바로의 속박에서 풀려난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제사장 나라」가 되는 하나님의 자유민이 되었다(출 19:6). 그때 하나님은 땅에서 그들 사이에 거할 처소로서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으며, 그들이 그분의 계획과 설계대로 지을 수 있도록 하늘에 속한 모형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이에 따라 행했으며 이때부터 땅 위에 하나님의 처소로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건축이 있게 되었다. 단이 있는 이 성막은 노아와 아브라함의 장막과 단의 확장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성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확장인 교회의 예표이기도 하다. 성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은 교회의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면으로 나타낸다. 성막은 모형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표현했고, 하나님을 만족시켰다. 성막이 건축되고 세워진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곳에 충만했다(출 40:17, 34).
성전 건축
성막이 지어진 후, 성막은 광야를 거쳐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오게 되었으며,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서 남아 있었다(왕상 6:1-10). 그 역사는 대략 B.C. 1500년부터 B.C. 1000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되었으며, 출애굽기에서 열왕기 상까지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성막보다 더 크고 보다 견고했지만 그 목적과 기능은 동일했다. 성전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완전한 모형이었다. 성전 건축으로 최소한 어느 정도는 야곱의 꿈이 이루어졌다. 땅 위에는 견고한 기초 위에 돌로 건축된 하나님의 집이 있었다. 그것은 성막보다 형태에 있어서 훨씬 견고했다. 그 역사는 B.C. 1000년경부터 B.C. 600년경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열왕기상에서 에스라서까지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의 건축
예루살렘 성에 있는 성전에 대항해서 사탄은 더 큰 모조품인 바벨론 성을 지었다(단 4:28-3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군대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고 그 기구들을 바벨론에 가져와 그의 우상의 신당(神堂)에 두었다(대하 36:7, 18-19). 이것으로 우리는 어떻게 사탄이 땅 위의 그분의 거처인 하나님의 건축을 끊임없이 좌절시키고 손상시키려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성전과 예루살렘의 재건
성전이 훼파된 지 70년이 지난 후 유다 사람들의 일부가 사로잡힌 데서 놓임을 받고 돌아와 성전을 다시 건축했다(스 1:2-5). 성전의 재건은 하나님의 건축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성전을 다시 건축한 뒤에 이어서 예루살렘도 재건하게 되었다(느 2:17-18). 이것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아 있었다.
교회 건축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은, 그분이 땅 위에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막과 성전의 성취인 교회를 건축하리라고 예언하셨다. 주님이 구속을 이루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그 영을 보내 주시기 위해 하늘에 오르신 후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 건축은 19 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왔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방 교회들의 건축
교회 건축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지방 교회들을 세우셨다(행 14 :23, 딛 1:5). 교회 건축은 사실상 지방 교회들의 건축에 의해서 실현된다. 지방 교회들의 건축은 실제적이다. 교회는 우주적으로 하나이지만 우주적인 교회의 표현인 지방 교회들은 많다. 우주 교회의 건축은 지방 교회들의 건축으로 시작되었다. 이 건축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이렇게 나아갈 것이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바벨론의 건축
하나님의 교회 건축을 방해하고 좌절시키기 위해서 사탄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그의 궁극적 모조품인 커다란 바벨론을 세웠다(계 17:5, 18:2, 21). 종교적인 바벨론은 계시록 17장에, 그리고 정치적인 바벨론은 계시록 18장에 드러나 있다. 이 양 방면의 바벨론이 하나님의 건축을 좌절시키는 사탄의 가장 크고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모조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건축인 새 예루살렘에 대치(對峙)되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의 건축
주로 교회 건축인 하나님의 건축은 그분의 최종적인 건축인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이다(히 11:10, 16, 12:22, 계 21:2, 10, 22:2). 사탄의 건축은 거대한 바벨론에서 완성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건축은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룰 것이고, 하나님을 표현할 것이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킬 것이다.
생명과 건축의 두 노선을 보여 주는 전 성경에 대한 간략한 개요는 이상과 같다.
Ⅱ. 성경에 있어서 요한이 저술한 글의 위치
A. 요한의 사역-생명으로 보수(補修)하는 사역
요한의 사역은 보수하는 사역이다. 베드로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에 고기를 잡고 있었지만, 요한은 부르심을 받을 때 그물을 깁고 있었다(마 4:21). 베드로는 많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사역이 생명으로 보수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영적인 그물을 기웠다. 오직 생명만이 영적인 그물에 난 모든 구멍을 덮어서 보수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스도인들의 그물에는 너무나 많은 구멍들이 있다. 그것들을 보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명의 문제에 대해 거듭거듭 부담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생명이란 한 단어밖에는 아는 것이 없느냐? 라고 말하면서 비웃는다.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오직 생명밖에 다른 것은 모른다. 생명이 우리의 유일한 필요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필요하다. 다른 것들은 구멍을 크게 할지 모르지만 생명은 모든 틈을 메꿔 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요한의 사역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마지막 사역이요, 그로써 성경이 결론을 내리는 사역인 요한의 사역은 생명으로 보수하는 사역이다.
B. 요한의 저술들-신성한 계시의 최종 말씀
요한의 모든 저술은 성경에서 신성한 계시의 최종 말씀들이다. 최종적인 말은 항상 결정적인 말이다. 비록 많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결정은 마지막 말에 달려 있다. 요한복음은 사복음서의 마지막에 있고, 그의 서신들은 서신서들의 끝에 있고, 그의 계시록은 신약과 전 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그의 저술은 신성한 계시의 최종적 말씀이다.
Ⅲ. 요한복음의 내용
A. 전 성경의 초록(抄錄)
우리는 성경이 생명과 건축의 책이요, 요한복음도 역시 생명과 건축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았다.
1. 생명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1:4), 그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10:10下), 주님 자신이 생명이심을(11:25, 14:6) 계시한다. 더욱이 이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요(6:35), 그가 생수요(4:14), 그가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5:21), 심지어 그가 생명으로 사람 안에 살고 계심을 보여 준다(14:19).
2. 건축
요한복음은 건축을 드러낸다. 1장 14절에서 우리는 육신 안의 그리스도가 땅 위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장막임을 볼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그분이 죽기 전에도 부활하신 후에도 성전이었다(2:19-22). 그분이 죽기 전에도 그분의 육신의 몸은 성전이었으며, 그분이 부활한 후에도 그분의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이 건축이다. 더욱이 이 복음서는 믿는이들이 삼일 하나님의 처소로서 건축될 것임을 계시한다(14:2, 23).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이 장(章)에 의하면, 모든 믿는이들은 많은 처소들이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로 함께 지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주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가리키는 것과 같이 모든 믿는이들은 하나로 지어져야 한다(11절, 21-23절).
B. 두 부분
1. 첫째 부분-주님의 오심
앞의 열 세 장으로 구성된 요한복음의 첫째 부분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선포하기 위한 주님의 오심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해서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선포하기 위해 오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분이 성육신되기 전에는 사람에게서 분리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 오셨다. 하나님은 예수라 불리는 사람과 하나 되셨고, 이 사람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나님을 사람에게 생명으로, 빛으로, 은혜와 실제로 표명했다. 우리는 다음 메시지에서 이것을 더 보게 될 것이다. 당분간은 요한복음 첫째 부분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에게 오셨고 표명되었는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 둘째 부분-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다시 오심
마지막 여덟 장으로 구성된 둘째 부분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다시 오심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의 건축을 위하여 사람 안에서 사람과 함께 사심에 대한 것이다. 첫째 부분에서 그분은 하나님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셨고, 둘째 부분에서 그분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건축을 위하여 사람 안에서 사람과 함께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말은 단순하고 간략하나 이 책은 깊고 심원하다. 그 말들은 매우 기초적이어서 1학년생도 거의 읽을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이다』. 그처럼 사용된 말은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심원하다.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의해 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는 무슨 뜻인가? 생명이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 이해를 훨씬 넘어선 깊은 것이다. 간결하고 쉬운 이 복음서는 많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있고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네 개의 글자로 된 말씀(Word)이라고 생각지 말라. 여기에 있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의미하는 바를 묘사하는 상징이요 비유이다. 1장 14절에 장막이 있지만 그것도 그리스도이다. 더욱이 1장 29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실지로 네 개의 발을 갖고 있는 양이 아니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돌이라고 불렀지만, 이 돌은 영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단순히 문자에 따라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전 성경의 계시에 따라 적절하게 그것을 비유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의 거의 매 장에 어느 정도의 비유가 있다. 1장에는 말씀, 빛, 장막, 어린 양, 돌, 하늘에 속한 사닥다리가 있다. 2장에는 돌항아리 여섯, 포도주, 성전, 아버지의 집이 있으며, 3장에는 장대에 달린 뱀이 있고, 4장에는 야곱의 우물과 생수, 6장에는 산 떡, 7장에는 생수의 강, 9장에는 침과 진흙, 10장에는 문, 우리, 양무리, 꼴과 목자가 있으며, 12장에는 한 알의 밀, 13장에는 발을 씻기심, 15장에는 포도나무와 가지들, 16장에는 여자와 아이, 19장에는 뼈, 피와 물, 20장에는 숨을 내쉼, 21장에는 양과 어린 양이 있다. 이러한 모든 비유들의 의미를 풀지 않고서는 이 복음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문제들은 추상적이고 깊고 심원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의 언어로 그것들을 기술하고 표현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영적인 것들, 생명과 건축의 지극히 심원한 문제들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들을 참되게 이해하기를 기도하면서 요한복음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여러분이 요한복음 회복역을 읽고 모든 주석을 면밀히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 본문과 주석을 읽는다면 도움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