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월 1일 채용신체검사서를 들고 창원에 있는 경상남도교육청을 찾아갔더니 그 날짜로 바로 임용장을 주었다. 양산에 있는 장안종합고등학교 행정실 차석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장안종고가 양산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에 가서 버스를 타고 무작정 양산으로 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부산으로 되돌아왔다. 장안종고는 양산 동부지역에 있기 때문에 해운대에 가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빠르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부산 해운대를 거쳐 양산군 장안면 좌천리에 있는 학교를 찾아갔다.(지금 이 지역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었다.)
오후 늦게 되어서야 겨우 임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역이름이 “좌천”이라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좌천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국가직 시험 합격자가 지방직으로 발령난 것도 좌천이고, 고향이며 생활근거지인 부산을 놔두고 경남으로 발령이 난 것도 좌천이다. 본인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좌천발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며 우리나라 인사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사례이지만 개인적으로 불만을 가질만한 입장이 아니었기에 총무처 인사과에 전화 한통 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장안종고는 남녀공학으로서 보통과와 상과로 나누어진 12학급규모의 아담한 학교였다. 교직원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고 전체적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좋았다. 나는 7급이었지만 임용전에 아무런 연수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안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아주 멍청한 상태에 있었다. 함께 근무하는 기능직 여직원에게 업무를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전혀 생소한 업무에 접하여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헤매는 듯한 나를 보고 모두들 실망하는 눈치였다. 요즈음 9급으로 신규 임용된 후배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나의 초임시절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발령 며칠이 지난 후 폐결핵 치료를 위하여 대한결핵협회 부산지부 병원을 찾았다. 그동안 살면서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막상 죽음의 위험이 닥쳐오자 어떻게든 살아야 되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겨났다. 직장을 그만두고 요양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전문의의 처방을 받고나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요즘은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한주먹 수북이 되는 여러 종류의 알약을 매일 3회씩 1년가량 먹으며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결핵관련 서적을 보고 이러한 치료법이 여러 종류의 항결핵제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투여하여 치료효과를 높이는 ‘단기화학요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서 별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약을 먹는 것도 남몰래 먹었다. 치료를 받는 중에도 고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공부를 하려고 하였다. 공부가 되든지 안 되든지 관계없이 언제 어디를 가든지 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손에서 책을 놓으면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였다. 책을 보지는 않더라도 책 꺼풀이라도 한번 만져야 불안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8월중 방송대 출석수업이 있었다. 방학 중이라 업무는 별로 없었지만 발령받은 지 며칠도 안 되어 공부한다고 휴가를 내려하니 윗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법학과로 전과하여 편입한 이후에는 동아대학에 가서 출석수업을 받았다. 고시에 초점을 맞추느라 방송대 수업진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재학 중 2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매학기 성적우수 장학생 명단에서 빠지지는 않았다. 발령 초기 얼이 빠진 듯한 몰골과 서투른 업무처리 때문에 나의 능력을 의심하며 크게 실망하던 직원들은 공부할 때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업무능력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떡이기 시작했다.
당시 교복과 두발이 자율화되었던 때라 학생들이 모두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고 다녔는데 지나가는 여학생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 몸집이 큰 학생은 교사와 구분이 안 되어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방학 중 등교한 당번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놀다가 예쁘게 생긴 한 여학생에게 농담으로 언니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얘기를 했더니 이 학생은 다음 날 정말로 언니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당황하였다. 그 학생이 손을 잡아 끌면서 재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을 어귀에 있는 포도밭에서 만났는데 나는 몸도 안 좋은데다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포도를 먹다 얹혀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 나는 포도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나지 않는다.
두 달이 지난 1984년 10월 상급자인 M과장이 고향으로 발령이 나서 떠났다. 그는 인정이 많고 인성이 좋아 교직원 모두가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그는 떠나면서 정을 못 잊어하며 부하 직원이었던 행정실 직원들에게 1인당 1만원씩을 주고 갔다. 그 돈은 교장과 합의하에 학교운영비에서 지출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부하직원들에 대한 애정의 표시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돈을 학교운영비에서 변칙적으로 지출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내가 받은 그 돈을 지출업무를 담당했던 기능직 여직원에게 반납하였다. 그 이후 직원들은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이것이 내가 공직생활 중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경험이다. 그 후 각종업무와 관련한 대사를 하러 도교육청에 출장을 갈 때 찻값이라고 주는 촌지봉투나 상급기관에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여비조로 주는 촌지 또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나는 이러한 관행에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소신은 오래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동이 와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그러한 흐름에 따라 간적도 있다. 초임지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내손으로 변칙적인 회계업무처리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함께 근무했던 기능직 여직원이 나 대신 어려운 일을 했다는 사실을 그 학교를 떠난 후에 알게 되었다.
초임지 학교의 교직원 상호간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특별한 갈등은 없었지만 그래도 교무실과 행정실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때에도 내가 주장한 것이 학교예산의 전면공개였으며, 학교에 일반직을 없애고 교사들로 하여금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이원적 조직구조하의 갈등 문제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1년이 지나 직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될 무렵인 1985년 8월 9일 마음을 가다듬어 현실을 바탕으로 인생계획을 다시 수정하여 시행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