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박사 –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故 이휘소(Benjamin Whisoh Lee, 1935~1977) 박사는 한국이 배출한 가장 대표적인 물리학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52년 서울공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을 했고, 재학 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물리학과에 편입학을 하여 물리학을 전공하고 1년 반만에 동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휘소는 1958년에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0년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입자물리학을 전공하였으며, 동 대학교에서 “K+중간자와 핵자산란 현상의 이중분산 관계”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26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이 되었고, 2년 후에 부교수가 되었으며, 다시 2년 후에 정교수로의 '고속 승진'을 했다. 이휘소는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연구원, 페르미연구소의 부장, 시카고대학교 교수 등을 거치며, 미국 물리학계에서 혁혁한 명성을 쌓아나갔다.
이휘소 박사의 연구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발적 대칭 깨짐과 관련한 연구를 통해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를 계산해냄으로써 힉스 매커니즘의 등장에 기여했으며, 1974년에는 참 쿼크(Charm quark)의 존재를 가정한 셸던의 논문을 토대로 동료 학자들과 함께 참 쿼크의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
생전에 이휘소 박사는 140여 편의 논문을 남겼으며, 그 중에서 60여 편의 논문은 인용된 횟수가 1만 4000회를 넘었다. 이 박사가 학계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입자물리학을 연구했거나,
그의 도움으로 이론을 완성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훗날에 노벨과학상을 수상했다.
특히, 197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고,
199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제라드 토프트는
"양자역학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를 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게 내려준 행운이었다. 이 박사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방법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휘소를 만난 건 참으로 하늘이 내게 내려준 크나큰 행운이었다"라고 수상 소감을 피력했다.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현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이라 불리는 와인버그-살람-글래쇼의 이론이 전자기현상과 약작용을 통합하는 전약작용이라는 통합이론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휘소 박사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논문이었다. 그들 역시 197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수상 당시 살람은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수상소감을 피력했다. 살람은 와인버그보다 1년 늦은 1968년에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나, 이휘소가 강연에서 와인버그 이론과 동등한 자격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 줌으로써 ‘와인버그 모형’이 ‘와인버그-살람모형’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덕을 톡톡히 보았던 것이다.
그밖에 ‘참(Charm) 입자’로 구성된 새로운 소립자의 이론적 예측을 한 것도 이휘소 박사의 또 다른 큰 업적으로 꼽힌다. 이 박사는 1974년에 쓴 ‘참 입자들의 탐색’이란 논문을 통해 이들 입자를 찾아내는 방법과 성질 등을 예언했는데, 그로부터 몇 달 후에 참 입자의 결합상태인 차모니움이란 새로운 소립자가 발견되어 물리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의 모 물리학자는 ‘이휘소 평전’에서 만약, 이 박사가 생존해 있었다면 1999년에 토프트 및 벨트만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동안 입소문으로 전해온 이야기들이나 소설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핵무기 제조 전문가로 잘못 알려진 이휘소 박사는 1977년 6월 16일 페르미연구소의 자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에 고속도로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에서 당시 페르미연구소장이던 윌슨은 그를 이렇게 추모했다. “이휘소가 다빈치나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특별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했습니다. 근대의 이론물리학자 20인을 거명한다면 이휘소는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인물입니다.”
현대물리학 이론의 기반인 ‘게이지 이론’을 최초로 주창한 것은 1967년 와인버그, 살람, 글래쇼였다. 그러나 게이지 이론을 사용하여 실제로 의미 있는 계산이 가능한지는 확인이 안 된 상태였다. 그때 유한한 답이 나오는 계산이 가능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이가 바로 벨트만과 당시 그의 지도를 받고 있던 대학원생 토프트였다.
토프트는 스승인 벨트만의 관점에 따라 게이지 이론의 수학적 방법을 연구하다가 이휘소의 강연을 들은 후, 그 접근 방법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처음엔 벨트만이 반대했지만 오랜 설득 끝에 컴퓨터 프로그램에 적용해본 결과, 수년 동안 모든 방법을 시도해도 안 되던 계산이 예상한 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논문은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여 물리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때 이휘소가 토프트의 지원자로 나서서 간명하고 일반적인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결국 학자들에게 벨트만-토프트의 방법론이 옳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즉, 논문의 연구 방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 논문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워줌으로써 주목을 받게 했으니 토프트가 수상소감에서 그 같은 말로 수상연설을 했을만 것이다.
이 박사의 연구는 훗날 10여 명의 과학자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이들의 연구는 모두 이 박사의 연구를 기초로 확립됐거나 검증됐으며, 영향을 받았다.
* 1979년 와인버그, 살람, 글래드쇼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 이 박사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검증을 통해 그들의 이론이 학계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 토프트, 벨트만 역시 1999년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입자인 ‘쿼크’의 비밀을 알아낸 그로스, 윌첵, 폴리처 등 3인의 물리학자도
2004년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 이밖에도 1976년 참 입자의 질량을 계산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버턴 리히 터와 새뮤얼 팅의 연구에도
앞서 이론적 기틀을 닦아 놓았던 이박사의 영향 이 있었다.
- 1979년의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는 현 대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 이 부끄럽다"라고 했다.
-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토프트는 "이휘소를 만난 건 하늘이 내게 내려준 행운이었다"라고 말했다.
이휘소 박사가 대한민국에 협력한 업적
1. 이휘소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훌륭한 조언자이자 멘토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한국의 오펜하이머’로도 불렸으며, 그는 생전에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계 이론물리학계를 당당히 선도해나갔다. 그의 논문 중에서 60여 편은 인용 횟수가 1만 3400회가 넘을 정도로 괄목할만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2. 이휘소는 초기의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 진흥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4년에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교 이공계 교육증진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그를 통해 국내 대학교육용 기자재 구입과 실험시설을 확충할 수 있는 획기적인 토대가 구축되었다.
3. 당시 미국의 차관 지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박사는 "한국과학원(KAIS)이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같은 응용 위주의 기관이 산업의 초기단계에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한국도 일반대학원을 활성화시켜 기초연구를 강화할 단계"라고 강조하며 조국의 과학 발전을 적극적으로 응원하였다.
4.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무렵에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77년 향년 42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거학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1977년 6월 18일 중앙일보에 실린 이 박사의 부고 기사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내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한국인으로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가장 유망한 과학자였는데…”라고 모두들 아쉬워했다.
그가 세상을 뜬 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짧은 생애였지만, 이 박사가 보여준 학문을 향한 굳건한 자세는 후학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과학자 이휘소 박사!!!
위대한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가 이루지 못한 노벨상의 영광을 후학들이 반드시 이루어낼 것으로 우리 모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