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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명 칭 |
직 책 |
재임기간 |
건립시기 |
유시회(兪是會) |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
현 령 |
1626 ~ 1627 |
1628 |
박 병(朴炳) |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 |
현 령 |
1627 ~ 1633 |
1636 |
이명달(李命達) |
선정비(善政碑) |
현 령 |
1633 ~ 1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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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표(黃表) |
청간애민선정비(淸簡愛民善政碑) |
현 령 |
1657 ~ 1659 |
1659 |
황유수(黃裕秀) |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 |
현 령 |
1850 ~ 1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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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신(李騏新) |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현 령 |
1859 ~ 1864 |
1863 |
박영보(朴永輔) |
청덕불망비(淸德不忘碑) |
관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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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
김도희(金道喜) |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관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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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 |
김재순(金載舜)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현 령 |
1883 ~ 1885 |
1885 |
심 창(沈昶) |
선정비(善政碑) |
현 령 |
1613 ~ 1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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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 구씨 |
공덕비(功德碑) |
영의정 심순택 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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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추정) |
윤광적(尹光迪) |
청간애민비(淸簡愛民碑) |
현 령 |
1746 ~ 1749 |
1752 |
이 위(李瑋) |
청간애민비(淸簡愛民碑) |
현 령 |
1719 ~ 1721 |
1721 |
이하구(李夏龜) |
청간애민선정비(淸簡愛民善政碑) |
현 령 |
1734 ~ 1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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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석(睦養錫)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현 령 |
1872 ~ 1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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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두(徐光斗) |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현 령 |
1869 ~ 1875 |
1873 |
이의연(李宜演) |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 |
현 령 |
1727 ~ 1728 |
1700 |
기타 1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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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향교 앞 선정비각 안에는 모두 18개의 비(碑)가 있다. 향교가 위치한 봉남리는 삼국시대부터 1938년 진위군이 평택으로 개편될 때까지 평택지방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곳곳에는 진위현을 거쳐간 수령(首領)이나 관속, 토호들의 선정비(善政碑)나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졌다. 그러던 것을 향교 입구에 보호각을 짓고 한데 모아서 보호하고 있다.
위 비(碑)들은 건립 연대가 전부 조선후기라는 점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는 관료기강이 흔들리고, 붕당과 학벌 그리고 가문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지배층들은 기득권을 강화하고, 개인과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던 시대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선정비나 공덕비의 건립은 진위현 백성들이 선정(善政)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보다는, 수령(首領)들의 강제와 아전들이 농간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이같은 현상은 위의 수령들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 행적이 기록된 인물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양난 후 무너진 진위현의 관아를 정비하고 향교를 재건하는 등 많은 치적을 세운 남두극이나 이산뢰 같은 현령들의 선정비는 건립된 흔적이 없는 것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능성 구씨의 송덕비(頌德碑)는 주목된다. 능성 구씨는 개화기 때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의 부인이다. 심순택은 개화기 때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던 온건개화파의 중심인물로서, 을사조약 체결 후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에 자결했던 인물이다. 능성 구씨는 심순택이 자결한 후 진위군 봉남리로 이주하여 살면서 궁민(窮民)을 구제하고, 1912년에는 구씨 학원이라는 2년제 강습소를 세워 후세교육에 힘썼다. 이 학원이 발전하여 4년제 금릉학원이 되었으며, 해방 전까지 운영되다가 폐교되었다. 송덕비(頌德碑)는 이와 같은 능성 구씨의 공덕(功德)을 추모하여 주민들의 발의로 건립된 것으로 의미가 높다.
2)평택향교 앞 선정비군
*위치 :팽성읍 객사리 185(향교말)
*시대 :조선시대
<사진 :평택향교 앞 선정비군>
이 름 |
명 칭 |
직 책 |
재임기간 |
건립연대 |
강대선(姜大先) |
청덕비(淸德碑) |
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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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昭和 8년) |
이현재(李賢在) |
시혜비(施惠碑) |
지주(地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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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昭和 18년) |
박세보(朴世輔) |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
? |
? |
1919(大正 8년) |
유영환(兪英煥) |
청간애민선정비(淸簡愛民善政碑) |
현감 |
1835~1839 |
1837(헌종 3년) |
남명학(南溟學) |
거사비(去思碑) |
현감 |
1777~ ? |
1785(정조 9년) |
유맹환(兪孟煥) |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
현감 |
1835~1839 |
1810(순조 10년) |
권택수(權宅洙) |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
군수 |
1899~1900 |
1901(光武 5년) |
윤대동(尹大東)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현감 |
1817~1822 |
1821 |
정의준(丁義準) |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
현감 |
1826~1828 |
1828 |
팽성읍 객사리는 삼국시대 이후 평택현의 읍치(邑治)였다. 그래서 평택현의 행정관서들이 자리잡았고, 지방 수령 및 관속들이 거주하였으며, 곳곳에 이들에 대한 선정비나 지방 유지들에 대한 공덕비가 건립되었다. 이것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 평택향교 앞의 선정비각이다.
평택향교 앞의 선정비, 공덕비는 조선후기 평택현에서 재임했던 현감 5명, 대한제국시기에 군수 1명, 일제강점기 면장 1명, 그리고 일제강점기 지주 1명, 신분이 확인되지 않는 사람 1명 등 도합 9개이다. 이 가운데 일제강점기 지주였던 이현재의 시혜비(施惠碑)는, 자선에 힘쓰고, 궁민(窮民) 구제에 힘썼으며, 춘궁기에 소작인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선행에 감사하여 소작인 일동이 시혜비를 세운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현감을 지냈던 유영환의 청간애민선정비는 재질이 쇠(鐵)인데, 이와 같은 비(碑)는 다른 지역에서 간혹 확인되기도 하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비(碑)여서 눈길을 끈다. 대부분의 비(碑)들은 건립된지 200~100년밖에 안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3)대동법 시행기념 선혜비
*위치 :평택시 소사동 140-1(원소사)
*시대 :조선시대
*지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사진 :대동법시행기념 선혜비>
이 비(碑)는 김육(金堉, 1580-1658)이 호서지방에 실시한 대동법에 감사하여 그가 죽은 이듬해 충청도민이 소사동에 세운 선혜비이다. 김육은 조선 인조, 효종 때 영의정, 우의정,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던 당대 최고의 문신관료로서, 인재의 고른 등용, 동전의 전국적 유통, 시헌력의 사용, 대동법의 전국적 확대실시 등 많은 치적을 쌓았던 인물이다. 이 가운데 김육은 대동법의 전국적 확대실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지방이 집권 서인의 본거지였던 충청도지방과 지주들이 많았던 전라도 지방이었는데,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651년에는 충청도에, 1658년에는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 지방에 대한 대동법의 확대실시는 지역 백성들의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1658년 김육이 죽자 충청도 백성들은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그의 공적을 기리며 애통한 마음으로 제문(祭文)을 지어 추도하였고, 부의금을 모아서 조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부의금은 유언에 따라 상가(喪家)에서 받지 않았다. 그러자 충청도민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 허락을 받은 후, 김육의 공덕을 기리는 선혜비를 죽은 이듬해인 1659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관문(關門)이었던 소사동에 세웠다.
비문(碑文)은 인조 때의 문장가였던 이민구가 지었다. 현재의 비(碑)와 비각은 본래 현 위치보다 남동쪽으로 아래쪽에 세워졌었는데, 1970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비(碑)는 높이 2.1m, 폭 75cm로 규모면에서 큰 편에 속하며, 이수와 귀부의 조각은 매우 힘차게 표현되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4)소사동 대동법시행비 앞 선정비군
*위치 :평택시 소사동 140-1(원소사)
*시대 :대한제국시기
<사진 :소사동 대동법시행비 앞 선정비군>
소사동은 한양에서 충청, 전라도를 거쳐 경상도 삼랑진까지 연결된 삼남대로의 길목이었으며,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관문이었다. 또한 행정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만 해도 양성현(군)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이후 안성군에 속하게 되었고, 1981년에는 평택시에 편입되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위치와 교통의 발달 때문에 한 때는 소사원(素沙院)이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시행선혜비도 세워졌고, 소규모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다.
이 름 |
내 용 |
직 책 |
재임기간 |
건립연대 |
이관구(李觀九) |
선정비(善政碑) |
양성군수 |
광무년간(1897~ 1907년) |
1899(光武 3년) |
윤영열(尹英烈) |
불망비(不忘碑) |
안성군수 |
광무년간(1897~ 1907년) |
? |
이원철(李源喆)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안성군수 |
광무년간(1897~ 1907년) |
? |
이중철(李重哲)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양성군수 |
광무년간(1897~ 1907년) |
1904(光武 8년) |
대동법시행선혜비 앞의 선정비군(善政碑群)에는 모두 4개의 비(碑)가 있다. 이 비(碑)들은 안성군수(安城郡守) 또는 군수(郡守)라는 직책을 표기하고 있어서, 행정구역 변천을 고려할 때 대한제국시기 안성군수를 역임하였던 인물들과 양성군수를 역임했던 인물들의 선정비(善政碑)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이관구와 이중철의 비(碑)는 건립연대가 표시되어서 연대 확인이 가능하지만, 윤영열, 이원철의 비(碑)는 표시가 안되었거나 마모가 심하여 확인할 수 없다. 이관구와 이중철은 광무 연간에 군수를 했으므로 행정구역으로 추정할 때 양성군수가 분명하고, 나머지 유영열, 이원철은 양성, 안성, 죽산군이 안성군으로 통합된 후 일제강점기에 안성군수를 역임했던 인물들일 것이다. 특히 윤영열의 불망비는 상민들의 상업활동을 도와준 것에 감사하여 상민들이 돈을 모아 세운 비(碑)인데, 소사동의 지리, 경제적 역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비(碑)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비(碑)들은 본래 소사동 원소사 마을 입구의 대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대동법시행선혜비가 이전할 때 함께 이전된 것이다.
5)조광조, 오달제 유허비
*위치 :평택시 이충동 산 37-1
*시대 :조선시대
*지정 :평택시 향토유적 제5호
<사진 :충의각 사진>
충의각은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에 진위유림들이 세운 비(碑)이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정치를 주도하다가 기묘사화(1519년)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홍익한, 윤집과 같은 척화파의 한사람으로서 일명 삼학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 곳에는 조광조 집안의 전장(田場)과 집이 있어서 어려서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달제는 집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이 비(碑)는 1800년(순조 즉위년)에 진위현의 유림들의 발의로 나라의 허락을 받은 후 건립되었으며, 비(碑)가 있는 위치는 오달제 선생의 집터 뒤의 산 윗 부분에 해당한다. 이 비가 건립됨에 따라 이 지역의 명칭이 이충동(二忠洞)이 될 정도로 비(碑)가 갖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 충의각은 1976년에 건립되었으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평택시 향토유적 제40호로 지정되었다.
4)이혜주 선정비
*위치 :평택시 칠원동(원칠원)
*시대 :조선시대
<사진 :이혜주 선정비>
이혜주(李惠疇)는 1695년 4월 22일부터 1697년 1월 6일까지 진위현령으로 재임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진위현령 재임 때 굶주린 백성들을 잘 구휼(救恤)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와 같은 선정(善政)을 기려서 그가 전임한 후 1697년 3월 진위현 백성들의 발의로 삼남대로 변 갈원(葛院) 길옆에 청간휼민선정비(淸簡恤民善政碑)를 세우게 되었다. 현재의 비(碑)는 길옆에 있던 것을 1990년에 옥관자정 옆으로 옮긴 것이다.
5)이용손 시혜비
*위치 :평택시 장안동(중간들)
*시대 :일제강점기
<사진 :이용손 시혜비>
이용손(李容孫, 1901~1943)은 장안도의 토호였다. 이용손은 1939년 가뭄으로 흉년이 들고 궁민(窮民)이 발생하자, 사비(私費)를 들여 서정리에서 장안리에 이르는 도로개설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는 도로개설에 필요한 토지를 희사하였을 뿐 아니라, 이 사업에 궁민(窮民)들을 고용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구제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비(碑)는 본래 이용손이 생존해 있던 1940년에 마을 주민들의 발의로 건립되었으나 6. 25전쟁으로 훼손되었고, 현재의 비(碑)는 198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6)최남순 시혜불망비
*위치 :평택시 송탄동(막곡)
*시대 :해방 후
<사진 :최남순 시혜불망비>
송탄동의 막골마을은 송탄초등학교가 자리한 마을이다. 송탄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의 송탄동 내 가제리 강습소가 모체이다. 가제리 강습소는 해방 후 서정리 초등학교 분교로 발전하였고, 1949년에는 초등학교로 승격하였다. 최남순(崔南淳)은 이 과정에서 학교 운동장을 희사하는 등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이와 같은 공로를 기리기 위해 마을 유지들과 강습소 및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송탄초등학교 맞은 편에 시혜비를 세웠다.
7)목양석 청간선정비
*위치 :평택시 칠원동 (원칠원)
*시대 :조선시대
<사진 :목양석 청덕선정비>
목양석(睦養錫)은 1872, 11, 21~1875, 7 24일까지 진위현령에 재임하였다. 그는 재임기간 중 백성을 위한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 공훈으로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다. 이 선정비는 재임 중의 공덕을 칭송하여 진위현의 읍치(邑治)였던 진위면 봉남리에 영세불망비를 세우고,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던 갈원(葛院-지금의 칠원) 도로변에 청덕선정비를 세웠다.
8)이민훤 기념비
*위치 :평택시 세교동 (중앙초등학교 정문 앞)
팽성읍 객사리 (평택향교 앞)
포승면 내기리 (내기초등학교 옆)
*시대 :현대
<사진 :이민훤 기념비>
이민훤(李敏煊)은 이민훤은 근, 현대기의 인물로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용성사숙에서 일어를 공부했으며, 독학으로 근대학문을 터득하였다. 그는 일제하에서 지역사회활동과 교육사업 등 각 분야의 활발한 활동으로 지역주민들의 인망이 높았다. 그는 일제하에서 진청학원을 설립하여 무산아동의 교육에 힘썼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평택중앙초등학교가 되었다. 뿐 만 아니라 내기초등학교 등 지역 내 어린이 교육기관 설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평택향교 전교(典敎)를 지내면서 향교의 중수와 포의각 건립, 유도사상 확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기념하여 3곳에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특히 중앙초등학교 앞의 기념비는 1946년 학부형과 졸업생들이 건립한 것이어서 의미가 깊다.
9)박양훈 공적비
*위치 :팽성읍 노양리
*시대 :현대
<사진 :박양훈 송덕비>
박양훈(1910~ ?)은 팽성읍 도두리 출신으로 배제고보를 졸업하고 평생 초등교육에 전념해 온 교육자이다. 1930년에는 계양지역에 도청강습소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신학문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도청강습소를 팽성초등학교 분교로 승격시켰고, 1953년에는 계성초등학교로 승격시켜 초대교장을 역임하였다. 또 현재 폐교된 대추분교를 대추초등학교
로 발전시키는 일과 평택초등학교 설립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공적비는 이와 같은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학부형들과 제자들이 건립한 것이다.
10)안종철 시혜비
*위치 :평택시 동삭동 (서재)
*시대 :일제강점기
<사진 :안종철 시혜비>
안종철은 일제강점기 평택시 비전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1939년 전국적인 가뭄으로 평택지방에서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안종철은 자비를 들여 하천을 파고 수로와 뚝을 만들어 가뭄을 극복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또한 지주로서 수 백 석의 소작료를 전부 탕감하고 극빈자에게는 양식을 나눠주는 선행을 하여 지역사회에서 큰 칭송을 받았다. 이와 같은 선행에 감동한 주민들이 1941년 서재마을 뒷 쪽에 시혜비(施惠碑)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11)김사억 시혜비
*위치 :평택시 안중면 대반리(창동)
*시대 :일제강점기
<사진 :김사억 시혜비>
김사억은 일제강점기 대반리 창동에 거주하던 지주였다. 당시 이 지역의 논은 물이 부족하여 넝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김사억은 자신의 돈을 들여 해안에 제방을 축조하여 염해(鹽害)를 방지하고 보를 축조하여 물의 부족을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창동의 지주들과 일부 소작인들이 시혜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는 본래 대반리 용두마을 서북쪽에 세웠던 것을 경지정리를 하면서 창동 서쪽 도로변으로 옮긴 것이다.
12)이재의 시혜불망비
*위치 :안중면 용성리(강길)
*시대 :일제강점기
<사진 :이재의 시혜불망비>
이재의(1900~ ?)는 덕우리 원덕우 마을이 고향이다. 그는 1919년 대 가뭄으로 빈민들이 굶주리자 집안의 곡식으로 기민을 구제하였다. 이와 같은 선행에 감사하여 마을 주민들의 발의로 강길마을 정미소 옆에 시혜비를 세워 뜻을 기렸다.
13)김명기 시혜불망비
*위치 :안중면 대반리(창동)
*시대 :일제강점기
<사진 :김명기 시혜불망비>
김명기는 조선 말 고종 때의 인물로 북청현감, 승지 등을 지냈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때 관직을 버리고 대반리 창동 마을로 낙향하였다. 낙향 후 김명기는 자신의 재산을 들여 염해(鹽害)를 방지하기 위하여 해안 제방을 축조하고 수리사업을 실시하여 농업을 진흥케 하였다. 또한 향약을 만들어 향촌교화에 힘썼으며 근면,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는 등 향촌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가 죽은 후 1918년 마을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창동마을 입구 도로변에 시헤불망비를 건립하였다.
2.신도비(神道碑)
1)원준랑 신도비
*위치 :평택시 도일동 (신촌)
*시대 :조선시대
<사진 : 원준랑 신도비>
원준랑(元俊良 ? ~1557)은 원릉군 원균의 부친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57(명종 12년)년에는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으나 사림파에게 화를 당한 후 향리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 후 아들 원균이 선무1등공신이 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신도비는 1800년(정조 24년)에 건립되었는데, 김재찬이 찬(撰)하고 민병승이 썼다.
2)장우 신도비
*위치 :팽성읍 노양 1리(계양)
*시대 :일제 강점기
<사진 :장우 신도비>
장우(張羽)는 본관이 덕수로 고려가 멸망한 뒤 두문동에 은거했던 72인 중 한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조선 태조의 부름에 응하여 이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실록에는 장우에 관한 기록이 태조 2년 3월에 한 번 나오기 때문에 관료로서 그의 행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예악(禮樂)에 밝아 조선의 예악을 일으키는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는 1921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비문은 후손인 장세기가 찬(撰)하였고, 장익진이 썼다.
3)심순택 신도비
*위치 : 진위면 봉남리 (동부마을)
*시대 : 대한제국 시기(1908년)
<사진 :심순택 신도비>
심순택(沈舜澤, 1824~190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개화기 때 온건개화파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며 강화도조약, 청일전쟁, 갑오개혁, 광무개혁을 거치며 온건개화파로 정부의 개화정책을 이끌었다. 청년공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공이다. 신도비는 1906년 그가 을사조약을 비관하여 자결한 뒤 1908년(융희 2년)에 세운 것으로, 김학진이 찬(撰)하였고 민병석이 썼다.
4)이대원 장군 신도비
*위치 :포승면 희곡리 산 83-6
*시대 :조선시대
*지정 :경기도 기념물 제 56호
<이대원 장군 신도비>
이대원(李大元, 1566~1587)은 무신(武臣)으로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녹도만호를 역임하였다. 1587년에는 남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들을 무찔러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홍양에 왜구가 침범하자 다시 출전하여 1백 여 명의 군대로 적과 전투를 벌이다 사로잡혔다. 적은 장군을 회유하였으나 항복을 거부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고향 희곡리에 충신정문이 세워졌다. 비문은 1699년(숙종 25년)에 소론의 거두였던 남구만이 찬(撰)하였고, 조상우가 썼다.
5)이정좌 신도비
*위치 :진위면 가곡리 (신가곡)
*시대 :조선시대
<사진 :이정좌 신도비>
이정좌는 조선 숙종 때 태어나 정3품 통훈대부 선공감 부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집안은 이항복의 현손이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와 재종간이며, 좌의정을 지낸 이태좌와는 형제간이다. 신도비는 1829년(순조 29년)에 세운 것으로, 이덕수가 찬(撰)하고 서명균이 썼다.
6)이계조 신도비
*위치 :진위면 가곡리 (신가곡)
*시대 :조선시대
<사진 :이계조 신도비>
이계조(李啓朝, 1793~1856)는 이항복의 증조부인 이성무의 후손으로 1831년(순조 31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료로 진출하였다. 그는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 동지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뒤로는 공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의 조부이기도 하다.
3.묘비(墓碑)
1)최진운 묘갈
*위치 :평택시 도일동 (신촌)
*시대 :조선시대
<사진 :최진운 묘갈>
최진운(崔振雲, 1564~1623)은 본관이 수성(隋城)으로 판서 최보한(崔輔漢)의 증손이다. 1612년(광해 4년)에 생원, 진사시에 동시 합격하였고, 1616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도사, 정랑 등 5품관의 벼슬을 하였다. 그는 시재어사(試才御使)로 제주도에 갔다가 1623년(인조 1년)죽었다. 묘갈은 1711년(숙종 37년)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현손인 최겸제(崔謙濟)가 찬(撰)하였다.
2)최형록 묘갈
*위치 :평택시 도일동(신촌)
*시대 :조선시대
<사진 :최형록 묘갈>
최형록(崔亨祿)은 최진운의 아버지로 종9품 예빈시 참봉을 지내고, 죽은 후 좌승지에 추증된 인물이다. 예빈시 참봉직은 예조의 예빈시 직제에는 없는 점으로 미루어 실직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좌승지에 추증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비신은 오랜 세월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3)최경 묘갈
*위치 :평택시 도일동 (신촌)
*시대 :조선시대
<사진 :최경 묘갈>
최경(崔涇)은 세조에서 성종 때의 인물이다. 그는 도화원 출신의 화가로서 세종(世宗) 비(妃)였던 소헌왕후, 세조, 덕종, 예종, 의경왕의 어진(御眞)을 그려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화원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최경은 인물황와 산수화를 잘 그려 안견과 함께 15세기의 대표적인 화원출신 화가로 꼽히고 있다. 죽은 후 수성군에 봉하여졌고, 안양(安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절충보국공신(折衝輔國功臣)에 올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갈은 1934년에 세운 것으로, 민병승이 찬(撰)하고 윤용구가 썼다.
4)최희효 묘갈
*위치 :평택시 독곡동(오좌동)
*조선시대
<사진 : 최희효 묘갈>
최희효(崔希孝, 1509~1589)는 무인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급제 후 젊고 무재(武才)가 있는 인물로 인정받았으며, 창성부사, 전라병사, 경상좌도병사, 가선대부 회령부사, 해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목민관으로서 뿐 아니라 무장(武裝)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묘갈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며, 건립연대도 확인하기 어렵다.
5)정담수 묘표
*위치 :팽성읍 근내리
*시대 :조선시대
<사진 : 정담수 묘표>
정담수(鄭聃壽, 1550~1604)는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장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선봉장 겸 응양장군으로서 영등에서 당항포까지 수비를 맡았으며, 왜군 전함을
30여 척이나 격파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그는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절영도시(絶影島詩)를 남겼다. 묘표는 그의 묘 남쪽에 있으며, 송근수가 찬(撰)하였고, 이헌식이 썼다.
6)정담수 묘갈
*위치 :팽성읍 근내리
*시대 조선시대
<사진 :정담수 묘갈>
정담수(鄭聃壽)의 묘표는 그의 묘에서 10미터 가량 아래쪽에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휘하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장수이다. 묘갈은 1899년(광무 3년)에 건립하였으며, 서정순이 찬(撰)하고 정태규가 썼다.
7)홍익한 묘갈A, B
*위치 :팽성읍 본정리 322
*시대 :조선시대
<사진 :홍익한 묘갈과 묘표>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이다. 그는 이괄의 난 때 피난지 공주에서 실시한 행재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간 후에는 주로 삼사(三司)에서 사서, 장령 같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파의 한사람으로서 남한산성이 함락된 후 김상헌, 윤집, 오달제와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압송되어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처형되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정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를 모시는 포의사는 사액(賜額)되었다.
그의 묘소와 묘갈은 본래 함정1리 서원말 앞 미군부대 안의 소나무 밭에 있었으나, 일제말기 이 곳에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묘소만 본정 1리 꽃산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묘소가 이장된 후에도 묘표와 묘갈은 그대로 방치된 체 함정리 서원말 길가에 방치되었던 것을, 1964년 비각을 지어 보호하였고, 1982년 홍익한의 무덤 앞으로 이전하였다. 무덤 앞에 있는 묘갈 A는 오랜 세월 마모되고 이끼가 많아서 판독이 어렵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8)홍익한 묘표
*위치 :팽성읍 본정리 322
*시대 :조선시대
<사진 :홍익한 묘표>
팽성읍 본정리 포의각 안에 있는 묘표이다. 포의각 안에는 홍익한 뿐 아니라 아들 홍수원, 증손 홍대성의 묘표도 함께 있는데, 홍익한의 묘표는 중앙에 있다. 이 묘표는 옆의 묘갈에 비하여 규모나 건립연대가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상석(上石)이 있고 비신(碑身)은 깨끗하다. 비문(碑文)은 이의현(李宜顯)이 찬(撰)하였다.
9)홍수원 묘표
*위치 :팽성읍 본정리 322
*시대 :조선시대
<사진 :홍수원 묘표>
홍수원은 홍익한의 아들이다. 그의 묘소는 처가(妻家)의 선영(先塋)인 성남시 분당구의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데, 묘표(墓表)만 따로 이곳에 보관되었다. 비(碑)의 전면에는 “효자홍공지묘, 열녀한산이씨부좌(孝子洪公之墓, 烈女韓山李氏祔左)”라고 쓰여있고, 뒷면에는 대략적인 행적이 음기(陰記)되었다. 비신은 하단부가 절단된 것을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10)홍대성 묘표
*위치 :팽성읍 본정리 322
*시대 :조선시대
<사진 :홍수원 묘표>
홍대성(洪大成)은 홍익한의 증손이다. 그의 행적은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묘소마저 확인이 안 된다. 묘표(墓表)만 포의각 안에 보관되었다. 비문(碑文)은 후손인 홍우석(洪禹錫)이 지었다.
11)이성무 묘갈
*위치 :진위면 마산리 (수촌)
*시대 : 조선시대
<사진 : 이성무 묘갈>
이성무(李成茂)는 경주 이씨로 이항복의 증조부이다. 묘갈은 1712년(경종 4년)에 세워졌지만 한동안 땅 속에 묻혀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이항복과 그의 아버지 이몽량의 이름이 적힌 비문을 땅 속에서 찾아내어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묘갈은 재질이 대라석 계통이어서 다른 비석에 비하여 색이 검은 편이기 때문에 일명 “거먹비”라고도 부른다. 비문에 의하면 이성무는 안동판관을 지냈으며, 죽은 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이정좌 묘갈
*위치 :진위면 가곡리 (신가곡)
*시대 : 조선시대
<사진 : 이정좌 묘갈>
이정좌(李鼎佐)는 이성부의 후손이며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이태좌의 동생이다. 벼슬은 종3품 선공감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묘갈은 1762년(영조 38년)에 세워졌고, 글은 윤동도(尹東度)가 지었다.
13)남두징 묘갈
*위치 :고덕면 당현리(원당현)
*시대 :조선시대
<사진 :남두징 묘갈>
남두징(南斗徵, 1617~ ?)은 현종과 숙종 때의 문신(文臣)이다. 아버지는 서반(西班)직인 정3품 절충장군 중추부 지사를 지낸 남정이며, 그는 벼슬이 정3품 통훈대부까지 올랐다. 묘갈은 옛것과 새것 두 개개 있다. 옛것은 1688년(숙종 14년)에 세워진 것으로 숙종 때 소론의 거두(巨頭)였던 남구만이 글을 썼다. 옛 비(碑)의 건립연대를 볼 때 그가 죽은 시기를 짐작할 수 잇다.
14)김만근 묘표
*위치 :청북면 옥길리 (원옥길)
*시대 :조선시대
<사진 :김만근 묘표>
김만근(金萬謹, 1667~1705)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정9품인 승문원 정자(正字)와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1702년(숙종 28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정5품 사헌부 지평을 지냈던 인물이다. 묘표는 1817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후손인 김상휴가 글을 지었고 유한지가 글을 썼다.
15)김무택 묘갈
*위치 :청북면 옥길리 (원옥길)
*시대 :조선시대
<사진 : 김무택의 묘표>
김무택(金茂澤, 1715~1778)은 영조 때의 문신으로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고, 정5품 한성부 판관까지 올랐다. 죽은 후 5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 묘표는 1818년(순조18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김상휴가 글을 지었고 유한지가 썼다.
16)김진륜 묘표
*위치 :청북면 옥길리(원옥길)
*시대 :조선시대
<사진 :김진륜 묘표>
김진륜(金鎭崙, 1695~1750)은 사헌부 지평등을 역임한 김만근의 아들이다. 정2품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하였던 손자 김상휴(金相休)의 현달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묘표는 1817년(순조 17년)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김상휴가 지었고 유한지가 썼다.
17)박지형 묘갈
*위치 :포승면 방림4리
*시대 :조선시대
<사진 :박지형의 묘갈>
박지형(朴之亨, 1525~ ?)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이다. 1555년(명종 1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명종 19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정3품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4.충효비(忠孝碑)
1)이효순 효열비
*위치 :진위면 가곡리
*시대 :조선시대
<사진 :이효순 효열비>
이효순(李孝順)은 19세에 진위면 가곡리의 권창수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5년만에 남편은 집을 떠나고, 늙은 시부모를 혼자 봉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효순은 날품팔이 등으로 30여 년 동안 늙은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특히 시아버지가 중풍을 앓을 때에는 5~6년간 불평을 않고 돌봤으며, 죽은 후에도 3년 간 시부모의 매일 집상(執喪)하는 것을 거르지 않을 정도로 효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은 효성이 동리(東籬)에 퍼져 타인의 귀감이 되었고, 진위유림회의 건의로 1940년 4월 표창했으며, 1975년에는 효행비와 비각을 받았다.
2)오학린 효자비
*위치 :청북면 어소리
*시대 :조선시대
<사진 :오학린 효자비>
오학린은 어소리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다. 37세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병이들어 위독하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다려서 먹게하여 완쾌시켰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온 산을 헤매며 꿩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잡지 못했는데, 그의 효성을 갸륵하게 여긴 산신령이 꿩을 집안으로 날아들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의 갸륵한 효성이 나라에까지 전해져서 나라에서는 당시 수원부 수북면이었던 너터리장터에 세우게 하여 귀감이 되게 하였으며, 194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3)경주 이씨 효열비
*위치 :현덕면 신왕리 185-2
*시대 :조선시대
<사진 : 경주 이씨 효열비>
경주 이씨는 방수길의 처이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뜨고 삯바느질과 삯방아로 어린 딸과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마침 9년 동안의 큰 흉년이 들자 이씨 부인은 시어머니를 등에 업고 영남지방으로 유리걸식을 다녔다. 그러나 걸식에 나선 지 1년이 못되어 시어머니가 죽자 시체를 등에 지고 7백리 길을 걸어서 고향에 장사지냈으며,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와 같은 이씨 부인의 효성에 감동하여 지방 유림에서 나라에 진정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정문을 내려 효행을 기렸다.
현재의 정문과 효열비는 이씨 부인의 딸과 외손 서택보가 초옥을 짓고 위토를 마련하여 세운 것을, 1982년 현덕면 광덕학구 노인회 운영위원회 일동이 기와로 된 효열비각을 세웠다.
4)김정한 효자비각
*위치 :현덕면 장수리
*시대 :조선시대
<사진 :김정한 효자비각>
김정한(金正翰, 1864~1907)은 장수리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해 겨울에는 아버지가 병환 중에 숭어가 먹고싶다고 하자 엄동설한임에도 바닷가에 나가 숭어를 잡아서 드시도록 하였다. 또 아버지가 노환으로 생명이 위독하자 가운데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러 넣게 하는 효성을 보였다. 아버지가 죽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탈상 후에는 집에 돌아와 임종 때 무명지가 더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부모님께 무명지를 드리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무명지를 잘라 환(丸)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908년(순종2년)에 정문을 내리고 장수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도 1937년에는 지역 유림에서 비각을 건립하였고, 1975년에는 목조 기화로 신축하였다.
5)박제만 효자비
*위치 :안중면 덕우리 산 54
*시대 :조선시대
<사진 :박재만 효자각>
박재만(朴再蔓, 1630~1671)은 조선 인조, 효종 때의 인물이다. 그는 품행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학문과 효행으로 성균관 진사에 천거되었지만 부모를 보양하기 위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지성으로 간병하였다. 하루는 병으로 위독한 아버지가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자 강가에 나가 얼음위로 뛰어오르는 고기를 잡아다가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겨울에 앵두가 먹고 싶다고 하자 눈 속을 헤매어 앵두를 찾아서 먹게 하여 병을 낳게 하였으며, 부친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소생시킨 일도 있다고 한다. 그가 죽자 백헌(白軒) 이경석과 동춘당 송준길의 건의로 1783년(숙종 9년) 효자문이 내려졌으며 이듬해 효자각을 세웠다.
5.기타
1)정도전 제단비
*위치 :진위면 은산리 (기동)
*시대 :조선시대
<사진 :정도전 제단비>
정도전(鄭道傳은, 1337~1398)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죽임을 당한 후 묘(墓)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은산리에 허묘(墟墓)를 만들고 사당을 지어서 제향해왔다. 제단비는 허묘(墟墓) 앞에 표식을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은 후손 정봉시가 짓고 정재훈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