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1장 너는 어디에 있느냐?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창세 3, 9)
질문의 힘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위해 통과해야만하는 문이다. 질문에는 마력이 존재한다. 새로운 삶을 찾으려 어둠의 골짜기를 헤맬 때, 사람을 통해서든 자연을 통해서든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의 운명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는다.
우주의 원칙, ‘마아트’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선을 향해 노력하는 과정인 ‘도(道)’와 같다. 도는 노력과 과정이지 결과나 목적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최선을 향한 도를 ‘마아트(maat)’라불렀다. 마아트는 고대 이집트문명을 3천년동안 지탱시킨 영적매트릭스다.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임무가 있다. 그 임무를 신약성서에서는 ‘달란트’라 한다. 사후 심판자들은 무엇보다 죽은 자가 자신의 달란트를 알고 있었는지를 심문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큰 죄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고대이집트는 남쪽 누비아와수단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기원전3,100년에 처음 왕조를이루었기에, 오래된 아프리카의식을 상당부분 흡수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건물이나 신전의 중심, 우주의 중심을‘타조의깃털’로 표시하고 이것을 ‘마아트’라 불렀다. 피라미드가 4,700년이지난 지금까지 건재한 이유는 지면의 높낮이와 평평함, 견고함 등을 고려해 실질적인 중심, 즉 마아트를 찾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해 유연한 중심을 찾는 이러한 행위는 고대 그리스나 중국의 ‘중용’ 개념과 유사하다.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이며,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일생동안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최선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개인의 최선은 우주와 자연의 원칙을 깨닫고 그것과 자신의 미션을 일치하려는 노력에서 온다고 믿었다. 마아트는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미션을 찾는 행위다. 이를 가장잘 표현한작품이 바로 이집트의 『사자의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생전에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사후 세계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믿었다. 신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아트는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뜻한다. 자신의 마아트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는 삶, 그 과정이 바로 ‘도’다.
고대이집트인들에게 구원이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깨닫고, 자신에게 맡겨진 그 마아트를 이루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마아트는 무엇인가? 성서에서 신의 첫 질문은 바로 마아트에 관한 것이다.
에덴동산과 모든 지식의 나무
창세기 편집자는 2장 4절b부터 P저자(사제)의 창조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임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과땅”이라는 표현을 “땅과하늘”로 표현해 두 단어의 위치를 바꿨다. J저자(야휘스트)는 “땅과하늘”이라는 표현을통해 자신의관심은 하늘이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암시한다. 야훼 엘로힘은 우주와 인간을 한마디 말로 창조하는 신이 아니다. 그 신은 땅으로 내려와 인간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을 예측할 수도 있다.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다름 아닌 삶의 터전인 ‘동산’을 일구는 일이었다. 신은 이곳을 인간의 거주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신은 동쪽에 위치한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만든다. 히브리어로 ‘동쪽’이라는 단어인 ‘케뎀(qedem)’은 ‘먼 과거/태초’)라는 의미와 ‘먼 장소/해 뜨는 쪽(동쪽)’이라는 의미를 갖고있다. 이 단어는 시간적 의미와 공간적 의미를 모두 지니는 심오한 단어다.
동산의 중앙에는 두 그루의 특별한 나무가 있으며, 하나는 ‘생명나무(tree of life)’이고,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다.
나무는 예로부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서있는 이 두 나무는 신과 인간,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을 하나로 만드는 성스러운 물건이다.
생명나무는 영생을 보장하는 열매를 맺으며,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우주의 신비와 비밀을 푸는 ‘지식’이 담긴 열매를 맺는다. 이 표현에서 중요한 점은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이 아니라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는 ‘전체성’이다.
니체는 진리와 거짓, 선과악이라는 이원론에 근거한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을 비판하며 도그마에 기초한 철학의 종말을선언한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사상인 관점주의(觀點主義; perspectivism)를 주장한다. 한마디로 이세상에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에 대한 지식에는 고정된 불변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의미로 이루어진 해석들만이 존재하며, 그 해석은 규범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합쳐진 관점일 뿐이다. 사람들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각인 관점은 필연적으로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리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니체의 관점주의를 통해 해석하면, 이 신비하고 원초적인 나무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선과 악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는 지식의 나무다. 선과 악의 분리는 불가능하며, 이나무는 그것을 넘어서는 전체를 아우른다. ‘선과 악’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을 나열시켜 전체를 의미하는 메리즘(merism)의 한예다. 그러므로 ‘선과악’은 ‘남녀노소’와 같은 표현처럼 ‘모든것/전부’를 의미하며,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모든 지식의 나무’로 번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지식’이다. 이 지식은 신에게만 있는 특별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동산의 정원사로 임명하고, 언제든지 신의 정원에 들어가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신은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금지하면서, 인간이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선언한다.
아담과 이브가 먹은 열매는 무엇인가?
신이 이들에게 따먹지말라고 한 ‘모든지식의나무’에는 그들의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지식의열매’가 있었다. 이 알레고리를 풀수 있는 핵심 단어는 바로 ‘지식’이다.
지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다아쓰(daath)’에는 다른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번째는 우주의 원칙과 삼라만상의 운행방식을 아는 지식이고, 두 번째는 남녀의 성적인 행위를 통해 상대방에 대해 알게 되는 ‘앎’이다. 다아쓰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 즉 ‘카발라(kabbala)’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카발라는 ‘수용한다/받는다’라는 뜻의히브리어‘카발라(qabbalah)’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의 가르침을 직접받는다는 의미다.
이 전통에서 우주의 지탱하는 열 가지 철학적인 원칙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바로 다아쓰였다. 다아쓰는 신의 생각이 지상에서 지혜(통찰력)와 명철(분별력)이 승화되어 통합된 최고의 원칙이다. 신은 에덴동산의 중앙에 이 깨달음의 열매, 즉 우주의 원칙을 알 수 있는 열매의 나무를 놓아둔 것이다.
이브와 아담이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에 관한 지식이 담겨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메타포는 창세기 1장 26절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 즉 ‘인간이 신이다’라는 혁명적인 주장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인류는 모두 자신의 DNA속에 발아를기다리는 다아쓰라는 위대한 씨앗을 품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깨달은 자’가 된다. ‘배움’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이다아쓰를 흔드는 작업이다. 성서에서 인간의 이같은 위대함을 깨울 동물이 바로 ‘뱀’이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신이 만든 모든 동물과 달리 “알 수 없고 똑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 수 없고 똑똑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룸(arum)’은 동시에 ‘벌거벗은’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뱀의 특징은 사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신약에서 예수는“뱀처럼 지혜롭기”를 주문한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바로‘모든 지식의 나무’에 살며 이브를 유인한다. 뱀은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신과 같이”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담과 이브는 무료한 에덴동산에서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은, 그래서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줄 것 같은 그 열매를 보자 먹어버린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이 ‘모든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상징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처음으로)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는 성서의 표현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옷을 만드는 행위는 곧 인류 문명의 시작을 상징한다. 그들은 신으로부터 자신들을 가리기에 ‘나뭇잎’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신의 첫 번째 질문, ‘아이에카’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던 신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다.
신이 인간에게 한 첫질문인 이 말은 히브리어로는 딱 한 단어 ‘아이에카(ayyeka)다.
신은 이러한 질문을 다수에게 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아이에카!” 신은 나에게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정답이다. 그 사람이 자주 가고 머무는 곳은 곧 그 사람을 의미한다.
이 질문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인위적인 틀을 깨트린다. 히브리어가 속한 셈족어에는 원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이 없었다. ‘아이에카’에서의 ‘어디’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깨닫고 도달해야 하는 완벽한 자기만의 장소, 신이 개인에게 할당한 장소를 의미한다. 신은 아담에게 ‘너는 그 장소를 아느냐?’, ‘너는 지금 그 장소에 있느냐?’ 혹은 ‘너는 그 장소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냐?’라고 묻는 것이다.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모든 인류에게 신이 묻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이자, 욥과 예수가 그랬듯 거꾸로 인간이 신에게 외치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꼭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에덴동산에서 방황하던 아담과 이브처럼,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신은 묻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