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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조는 조리있게 설명을 이어갔다.
“더구나 사년 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지독한 기근이 들어 아직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은 오랜 전쟁에 지쳐 전쟁 공포증을 겪고 있사옵니다. 밖으로는 토번과 북적이 아직 온전히 굴복하지 않고 있으니 바야흐로 내치에 힘쓰며 국력을 길러야 할 때인 줄 아옵니다.”
이다조가 결론을 내렸다.
“고중상과 그의 선조들의 본 터전은 원래, 한나라가 번조선으로부터 빼앗아 설치한 발해군이옵고, 지금 고중상이 성을 쌓아 웅거하고 있는 곳은, 고승도 말했듯이, 홀한하忽汗河(모란강) 가라고 하옵니다. 그러므로 소신의 소견으로는, 이미 고중상의 할거 지역을 홀한주도독부로 명명하고, 그에게 사자를 파견해 고중상에게 발해군공 겸 홀한주도독을 제수했으니, 이 국서는 그에 대한 수락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줄 아옵니다.”
“하지만 국서에서 번국藩國으로서의 예의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가 황제(임금)를 참칭하고 있으니, 어찌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소?”
“체면상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승과 조영을 인질로 삼도록 부탁한 것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제후국으로 인정한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고승과 조영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소?”
무 태후가 이다조에게 물었다.
“고중상의 부탁대로 그들을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합당한 줄 아옵니다. 하오나 폐하와 폐하께서 오히려 고중상의 부친과 자식에게 너그러움을 보여주신다면, 동이의 고중상은 감격해하며 우리와 대대로 평화롭게 지낼 것이옵니다.”
“너그러움을 보여주라니, 무슨 뜻이오?”
“그들을 영주 계성薊城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옵니다.”
“나는 그보다 더한 인자도 베풀고자 하는데, 어떻소?”
“그보다 더하다면······?”
“조영을 내 머리 지키는 자로 삼고 싶소.”
“마마, 소신의 추측으로는 조영이 그걸 원치 않을 것이옵니다.”
“경은 어찌 그렇게 잘 아오?”
“그의 조부 고승이 우리 조정에서 일하기를 극구 사양했사옵니다. 그 조부에 그 손자라. 보지 않아도 훤합니다. 아마도 저들의 자격지심이나 자존심 등이 그걸 가로막고 있을 것이옵니다.”
“혹시 경에게 그들의 의지를 꺾을 만한 묘책이라도 있소? 만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 경에게 큰 상을 내리겠소.”
“마마, 소신에게 그런 계책이 있었다면, 어찌 고승이 아직까지 변방에 칩거하고 있사오리까? 진즉 조정으로 달려왔을 것이옵니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무승사武承嗣(649-698)가 입을 열었다.
“마마, 이다조 장군의 의견도 일리가 있사오나, 소신의 우견으로는, 고승과 조영을 처단하고, 고중상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이 합당하리라 사료되옵니다. 동북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는 그 자의 이런 오만방자함을 묵과한다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함부로 날뛸까 걱정이옵니다.”
무 태후가 대답했다.
“내 뜻이 바로 그거요. 고승과 조영이 나의 인자함을 무시한다면, 그들에게 닥쳐올 일은 죽음 밖에 없소.”
“마마, 통촉하소서. 이 일은 결코 감정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옵니다. 여러 날 말미를 두고 충분히 고심한 끝에 현명한 단안을 내리소서.”
이다조가 제지했다.
“내 알았으니 다들 물러가시오.”
잠시 후 무 태후는 내시를 불러 명했다.
“옥에 갇힌 동북의 영웅들을 일단 숙소로 돌려보내고, 고조영에게도 그 사실을 통보하도록 하시오.”
아침에 무 태후가 몇몇 대신들과 나눈 대화는 곧장 승려 회의의 귀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회의는, 반역자 처단으로 악명이 높은, 무 태후의 저승사자 내준신來俊臣(651-697)에게 달려간다.
“내 대인, 폐하께서 조영을 곁에 두려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회의의 물음에 내준신이 대답했다.
“나도 들었습니다. 대사께서는 무얼 걱정하십니까?”
내준신이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되물었다.
“으흠! 오랑캐가 감히 폐하 곁을 지키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그건 폐하의 신상을 매우 위태롭게 하는 처사가 아니겠소?”
“그래서요?”
“그래서 말인데, 그 조영이란 자에게 부처님의 가장 큰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어떻겠소?”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다니요?”
“소승은 오랜 세월의 수행으로 마침내 득도해 천리안을 소유했는지라, 그가 폐하 곁을 지킬 경우 반역죄를 저지를 것이 벌써 훤히 내다보이고, 그 소리까지 들립니다.”
“오, 그렇습니까?”
내준신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대역무도의 죄를 지을 경우,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야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지 않겠소이까?”
“불쌍한 중생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어찌 차마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회의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대사님의 뜻은?”
“그에게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베풀어야죠.”
“어떻게요?” “그가 죄를 짓기 전, 미리 극락으로 보내주는 게 큰 자비를 베푸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내준신은 두 눈을 멀뚱거리다가 미소를 흘렸다. 회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문기술자, 저승사자, 색마, 염라대왕의 가장 악랄한 부하로 두루 칭할만한 형옥刑獄의 관리 내준신과, 회의는 평소에 죽이 잘 맞았다.
내준신은 본래 강도강간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였는데, 무 태후가 밀고를 장려하던 그 시기에, 온갖 두뇌를 다 짜내 밀고에 밀고를 거듭하다가, 우연히 밀고 하나가 히트를 치는 바람에, 무 태후에게 기용되어 형옥을 맡게 된 인물이다<신구당서/내준신열전><자치통감>.
내준신의 부친은 원래 친구의 처와 통정하는 등 음란한 도박꾼이었는데, 노름빚을 갚을 길이 없어 자기 처를 채주에게 헌납해야 했다. 그의 처는 시집오기 전 임신한 상태였으며, 시집와서 낳은 그 아이가 바로 내준신이었다<신구당서/내준신열전>.
내준신의 악명은 조정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아주 높았다. 내준신의 잔인 독랄한 성품은 그를 고문기술자로 만들었다. 기가 막히게 참혹한 각가지 형벌도구를 고안해, 피의자들에게 이를 보여주며 고문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준다. 피의자는 고문 도구를 보며 그의 말을 듣기만 해도 벌벌 떨고 거짓으로 죄를 자백해 버렸다.
내준신은 색을 얼마나 밝혔는지,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그녀의 남편을 밀고해 감옥에 가두고 기어이 그 여자를 차지해 버렸다고 한다. 그의 정실도 그렇게 해서 얻은 여자였다.
무태후의 측근인 무삼사, 무승사 등과 무 태후의 딸 태평공주는 내준신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멸시할 정도였다<자치통감>.
내준신은 얼굴이 미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무 태후가 그를 오랜 동안 감싼 것을 보면,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승려 회의는 저승사자 내준신을 적절히 이용해 먹을 줄 알았다. 내준신도 머리 하나는 내로라하는 사람이었지만, 승려 회의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게다가 회의는 무 태후의 최측근이다. 무 태후의 친정 조카들이자 측근들인 무삼사나 무승사까지도 자청해 회의의 말고삐를 잡을 정도였다. 그러니 내준신이 회의를 어떻게 대하겠는가?
회의가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이었다.
“대인의 수하에 무술에 능통한 자들이 몇이나 있소?”
내준신은 수하에 백여 명 이상의 무뢰배들을 두고 있었다. 그건 승려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쓸 만한 놈은 대여섯 명 정도 됩니다.”
“그들의 무예가 어느 정도요?”
“웬만한 장수 하나 해치우기는 식은 죽 먹기요.”
“조영은 어떻소?”
“그런 애송이 하나 다루는 건 감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감 주워 먹기보다 쉬운 일이오.”
“하지만, 그 자의 무예가 보통이 아니오.”
“대사님! 무예는 보조수단일 뿐입니다. 머리를 놓아두었다 어디에 씁니까?”
“그를 모반죄로 다스릴 방안이 없겠소? 나는 이미 천리혜안으로 그의 모반죄를 내다보았지만, 폐하께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시는 구려.”
“하하하! 대사님의 천리안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지만, 모반죄는 미래의 죄까지 포함하는 게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죄만을 다룹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어찌 용납하시겠습니까?”
내준신이 은근히 비소했다.
“아, 이거 참, 내 눈에는 훤히 내다보이는데, 사람들이 도통 믿어주질 않으니, 도가 너무 깊어도 쓸모가 없구려.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라.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요?”
회의는 자탄하듯 말하며 내준신에게 물었다.
“대인은 죄수를 다루는데 능통한 대가이니, 그를 쥐어짜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저지른 반역죄가 드러나지 않겠소?”
“그런 게 있다면 왜 대사님의 천리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벌써 보았소. 하지만 그 놈이 반역죄를 심중에만 품고 있어서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낸들 어찌하겠소?”
“그렇다면, 그를 족쳐 자백을 받아낼까요?”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제가 폐하께 문책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염려 마시오. 내가 다 무마하리다.”
이어서 회의는 품에서 묵직한 돈 일민一緡(한 꾸러미)을 꺼냈다.
“이걸 우선 받아두시오. 난 선사에 있어서 이런 건 도통 필요하지 않소. 누가 내게 주었는데, 아마도 대인이 이 물건의 임자인 것 같소.”
내준신의 입이 금방 크게 벌어졌다.
“이 일은 저와 대사님이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제 삼자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누구, 적당한 인물이 있소?”
“저의 부하들 가운데는 흑도黑道(범죄집단)의 고수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다만 돈이 좀 필요할 뿐입니다.”
“돈이라면 염려 마시오. 선불금과 후불금을 충분히 드리리다.”
회의는 돈을 흙 쓰듯(우리식 표현으로는, 물 쓰듯) 썼다고 한다. 무차회無遮會(일종의 법회)를 열 때마다 사용되는 돈이 일만 꾸러미(아마 수억 원)였으며 주전鑄錢 열 냥을 바닥에 흩뿌려 사람들로 하여금 앞 다투어 줍게 했는데, 이 때문에 사람이 밟혀 죽은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를 가급적 궁성으로부터 먼 곳으로 끌어내는 게 문젭니다.”
“적당한 관작이 내려지면 어딘가에 집을 마련하지 않겠소?”
“낙양성 밖으로 유인할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오늘 아침 폐하께서 몇몇 대신들을 불러 후고구려의 고중상이 보내온 국서를 놓고 대책을 의논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다조 장군은 고승과 고조영을 영주 계성으로 되돌려 보내자고 요청했답니다.”
“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마침 잘 되었습니다. 두 사람만 우선 계성으로 돌려보내면 우리의 일이 아주 수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하건대, 폐하께서 조영을 돌려보내고 싶어 하시지 않을 겁니다.”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극락에 보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원, 중노릇 못해 먹겠구먼.”
“하하하! 중생을 제도하기가 그렇게 쉽다면, 대사님 같은 고승들이 발붙일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하지만, 내 법력도 보통은 아니오. 내 휘하에도 내가 제도한 중생들이 수백 명이나 되오.”
회의는 강호의 무뢰배들을 수백 명이나 휘하에 거두어 들여 키우고 있었다<자치통감>. 그들은 좋게 말해, 그가 제도한 중생들이다.
“그 분들 가운데도, 극락으로 보내는 전문 기술을 익힌 이들이 꽤나 있을 터인데?”
“어허! 그런 말 마시오. 그들은 다 옛 죄를 참회하고, 이젠 수행에 전념하고 있소이다. 어흠!”
회의는 헛기침을 했다. 내준신이 못을 박듯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습니다.”
그 밤에 조영은 잠이 오지 않아 자신의 정황을 생각하며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소지품 가운데서 경승 고양원이 써준 시문과 여미아가 비단 폭에 전해준 시구를 펴 음미하고 있었다.
武 境 渺 深 難 苛 思 무경묘심난가사
眞 寶 神 光 不 可 遮 진보신광불가차
失 色 一 道 滾 滾 走 실색일도곤곤주
燃 戀 洗 世 牧 丹 花 연연세세목단화
아득하다 무예의 길 애써 찾기 어렵고
참 보배의 신광이여 가릴 것이 없어라
크게 놀라 한길로만 강물처럼 내달으니
그리움을 불태워 세속 씻자 모란화야
오랜 시간동안 사색해 보았으나 처음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를 해득할 수 없었다.
“전설야화傳說野花”라는 고양원 대덕의 시도 나직이 읊어보았다.
비바람만 머무는 곳 휑한 들판에
애처로이 핀 들꽃 한 송이
정다운 이름 없고 고운 모양도 없어
눈에 띄지도 않아, 길손마다 지나치는 들꽃
그대여, 그래도 어이하여 그 자리 지켜
봉오리가 휘어지도록 온종일 누굴 기다리는가?
마침내 어여쁜 임 오셔서
고운 눈길 한번만 주시길 기다리겠지.
그 땐 모든 고독 떨치고
정원의 화사한 꽃들 부럽지 않아
환히 웃음 짓는다네.
임 가시면 또 다시 머리 숙여
언제 오시려나 헤아리는 나날
그러다, 그러다, 찬바람 불어와
들꽃은 먼 길로 사라졌다네.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어디선가 기어코 그린 임 찾아내
그 앞에 엎디어 울며불며 간청하고 있겠지.
내년에 다시 피게 해 달라고
화려하지 않아도, 볼품없어도, 눈에 띄지 않아도
다시 피게 해 달라고.
어진 님 오셔서 고운 손길로
딱 한 번만 쓰다듬어 주시면
그걸로 마냥 행복할 테니까.
아, 금년에도 다시 피었네,
비바람만 머무는 곳 휑한 들판에 들꽃 한 송이,
고운 님! 고운 님! 목 놓아 부르며.
하지만 이번엔 길고 긴 날들 다 가도록
임은 왜 오시질 않나?
울며불며 애타하고 있을 때
드디어 어여쁘신 임, 채색 옷 입고 나타나셨지
그리고 들꽃을 송두리째 캐어내
임의 동산에 고즈넉이 옮겨 심었지.
거기 있던 목련화, 매화, 장미
봉선화, 난초, 국화, 동백꽃···
사계절 모든 꽃이 들꽃을 멸시하고 시기했다네
야! 꺼져! 들꽃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넌 들꽃이야, 들꽃! 알았어?!
따스한 미소를 보낸 건 오직 환꽃 뿐.
들꽃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지.
그 때, 어진 님 웃음 짓고 또 오셔서
들꽃에게 새 이름을 주셨네.
나는 환꽃, 너는 모란 꽃
나는 꽃의 왕, 너는 왕의 꽃.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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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11. 10.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