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 국립묘지의 이승만 대통령 비석(碑石)에 얽힌 이야기
●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조국과 민족에게 자유와 민주, 평등과 인권, 법치의 세상을 만들어 준 이승만,
임종(臨終)하시기 전날, 유언(遺言)이 되어버린, 대통령의 마지막 기도.
"하나님, 저는 너무나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민족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은, 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에 있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평소에 늘 하던 기도를 유언으로 남기고,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층,
고국산천 가는 길목, 태평양이 바라다 보이는 병실에서,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양자 이인수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파란만장했던 삶을 뒤로 하고, 90세를 일기(一期)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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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장(國葬)은 커녕, 국립묘지 안장조차 곤란하다고 거부당한 건국(建國)대통령의 죽음.
살아생전 영부인에게,
"내 조국 한국땅에 묻어달라, 약속하고 맹세하라."던 대통령의 소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영부인이
"가족장으로 하겠으니 국립묘지에 안장케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여,
결국 "동작동, 가족장"으로 결정을 얻게 되었다.
21일 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교민 등 700여 명이 모인 영결식장,
대통령이 누운 관(棺) 위에 태극기가 덮였고,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상반신쪽 관뚜껑을 반쯤 열어 놓았다.
대통령의 독립운동 당시 동지 겸 비서 임병직(林炳稷) 당시 인도 총영사 (6.25 당시 외무장관)가
개인자격으로 조문했으며, 美 정.재계 인사 및 현지인과 교민의 조문이 이어지던 중,
그 영결식장에 미국인 <윌리엄 보스윅 (William Bothwick)>이 들어섰다.
<윌리엄 보스윅>,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이 하와이 망명 당시인 1919년,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일제의 현상수배자 (현상금 미화 36만불) 신세가 되어 부임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12월, 중국노동자들 시체를 싣고 상해로 가는 중국화물선 제일 밑칸의 시체실에,
비서겸 동지 임병직과 함께 숨어, 20여일의 항해끝에 상해로 갈 수 있었는데,
그때 이승만이 시체실로 숨어 들어가 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이승만의 50년 절친,
장의사 출신의 사업가, 그가 바로 <윌리엄 보스윅>이다.
그가 영결식장으로 들어섰다.
대통령 유해 앞에 선 그는, 고인의 얼굴에 덮여있는 베일을 걷어올리더니,
그 얼굴에 손을 얹고 어루만지며 절규했다.
"친구야!
내가 자네를 알아,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내가 잘 알아,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야,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해 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영결식이 끝난 다음 대통령의 유해는,
美 존슨 대통령이 "최고의 예우로 모시라."면서 배려한 美공군 C-118 특별기로,
퇴역한 前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등 운구호송단 14인의 정중한 호위를 받으며 하와이 공항을 출발했다.
23일, 한국시간 오후 3시경에 대통령의 유해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오매불망 그렇게도 오고파하고 그리워 하던 고국땅을,
살아서 오지 못하고, 영접 나온 5,000 시민의 애도 속에, 죽어서야 밟았다.
유해는 김포가도를 지나 이화장(梨花莊)으로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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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동작동으로 가는 날, 이침 8시에 상여(喪輿)는 이화장을 나섰다.
대통령을 추모하는 573 장의 만장(輓章)이 따르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애도하는 100만 인파의 곡성이 가시는 길을 지척대게 했다.
대통령 유해는 8시간이 넘는 긴 운구 끝에, 오후 4시45분에 동작동에 이르렀다.
5시40분 하관(下棺)을 하는 순간, 한줄기 소나기가 주루루룩,
하늘도 비운의 대통령을 눈물로 영접하시는듯 했다.
위대한 한국인 이승만,
조국과 민족을 위한 험난했던 인생여정을 마치고, 호국영령(護國英靈)이 되어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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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비석(碑石)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세워지지 않았다.
쓸쓸히 묻힌 대통령.
가신지 6년이 지난 1971년,
승당 임영신 (承堂 任永信, 초대 상공장관, 前중앙大총장),
대통령을 마음속에 평생 모시겠다고, 호를 承堂 (이승만承, 집堂)이라고 지은 대통령의 최측근,
그분이 미국 나들이길에 하와이에 들려, 대통령이 하와이 망명당시인 1921년 만든,
독립운동가 이승만 후원단체 <대한동지회> (大韓人 同志會) 동지들을 만났다.
"대통령 묘소에 비석도 없다."라고 개탄하자, 동지들이 일어났다.
"비석을 우리가 세우겠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프란체스카 여사,
대통령 서거후 모국(母國) 오스트리아 친척집을 떠돌며 살다가,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배려로 1970년 영구귀국해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
그분이 하와이 동지들의 뜻을 전해 들었다.
"돌(石)만 보내주면 비문(碑文)과 비석작업은 우리가 하겠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제2의 고향, 정든 땅 하와이 돌(石)은 인천항을 거쳐 동작동으로 운반되어,
비로소 작은 비석 한 개 세우게 되었다.
('헌시'를 조각한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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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李),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파란눈의 퍼스트 레이디,
그 분도 1992년, 남편의 뒤를 따라 이 세상을 하직(下直)했다.
손때 묻은 성경책과, 독립운동시절부터 간직해온 빛바랜 태극기,
대통령이 "남북통일"(南北統一)이라 쓴 휘호를 가슴에 안고 떠났다.
향년(享年)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부인이 돌아가시자,
양자(養子) 이인수 박사가 대통령과 합장(合葬)하고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처음 비문(碑文)은,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내외분의 묘> (建國大統領 雩南 李承晩 내외분의 墓)라고 새겼다.
그런데,
디 제이 피 (DJP) 정권이 들어섰다. 1998년 얘기다.
김대중이 김종필의 도움으로 39만 557표차로, 보수의 이회창을 눌렀다.
세상이 바뀌었다. 진보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건국(建國)' 대통령 비석은 세울 수 없다." 왜?
"이승만을 건국(建國) 대통령이라 하지 말라." 왜? 왜?
"이 나라는 이승만이 건국한 나라가 아니다."
"이승만은 건국(建國) 대통령이 될 수 없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이승만,
1948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이분을 '建國' 대통령이라 해서는 않되는가?
결국, 양자(養子) 이인수씨는 '建國' 비석을 치우고, '初代'로 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建國' 비석은 '초대'(初代) 비석 뒤쪽, 대통령이 묻힌 곳에서 조금 떨어진 묘지마당에 묻었다.
나라는 새로 세웠는데,
'建國' 대통령이라 부를 수 있는 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될 것인가?
이승만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언제쯤 논쟁이 멈출 것인가?
땅에 묻힌 건국대통령(建國大統領) 비석은 햇빛을 볼 수 있는가? 없는가?
ㅡ받은 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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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재평가 흐름 지속, 기념관 건립 필수"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 김남수/ 부회장 손현모 목사
지난 7월 19일 서거 59주년 (서거 1965, 7, 19) 추모식에 손현모 부회장의 추모식사를 간추려 등재합니다. (Daum에서 발췌)
"대통령께서는 일제강점기
가장 어둡고 암을한 시기에 민족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꿈꾸셨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바쳐 헌신하셨다.
그 담대하고 위대한 꿈은 역사 가운데 이루어 졌고,
드디어 이 땅에 자유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국가마다 건국대통령 동상을 세워 교육의 장으로 삼는다.
어찌 우리나라만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동상 하나를 세우지 못 하는가?
이분은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선물했으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낸 위대한 분이었다.
아울러 그 분은 친미도 친일도 반미도 반일도 아니다.
오직 국민을 위한다면서 그 길을 택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