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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1호 양호거사비 [楊鎬去思碑]
1993년 4월 3일 지정, 조선 선조 31년(1598),
1기(基), 전체 높이 248㎝, 비신 높이 172㎝, 너비 67㎝, 화강암,
학교법인 명지학원 소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
사진
설명
정유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흠차경리조선군무(欽差經理朝鮮軍務) 도찰원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使) 양호(楊鎬)를 기리는 비이다. 연꽃잎 무늬를 새긴 네모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비석 위쪽을 쌍룡으로 새긴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비에는 "欽差經理朝鮮都御使楊公去思碑"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양공(楊公)의 이름은 호(鎬), 호는 창서(蒼嶼)로 하남인(河南人)이다. 1580년 진사가 되었고 1597년 경리조선(經理朝鮮)의 명을 받았는데, 그 해 가을 왜적이 삼도를 유린하고 서울로 진격하자 그는 평양에서 달려와 싸움터에 나가 장수들을 독려하며 적을 격퇴시켜 우리 나라를 보전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몸소 출전하여 적의 사기를 꺾었고, 다시 출전하여 섬멸하려던 차 아무 죄 없이 유언비어 때문에 파직되었다. 조선 백성이 그의 떠남을 막았으나 머무르게 할 길 없어 눈물을 흘리며 비를 세운다.
이 양호거사비와 함께 옛 모화관(慕華館)의 동쪽 언덕(현 종로구 행촌동 171 대신고등학교)에는 또 다른 양호거사비가 있다(전체 높이 266㎝, 비신 높이 243㎝·너비 98㎝·두께 32.5㎝). 비문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낸 경위, 정유재란 때 파견된 양호의 활약상과 그의 초상을 얻어 사당을 세우게 된 내력이 적혀있는데,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양호는 1597년 7월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는데, 왜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 북상하여 그 선봉이 서울 가까이 왔다는 보고를 받자 행군을 재촉하여 9월 3일 서울에 들어와 마귀(麻貴) 제독과 함께 남산에 올라 호령(號令)을 포고한 뒤, 날래고 건장한 군사를 뽑아 왜적을 막게 하고 기병 2천명을 뽑아 뒤에서 돕게 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동작진(銅雀津)으로 건너가 방어책을 살폈는데, 9월 7일 장수들이 직산(稷山)에서 대승을 거두어 적의 기세가 꺾였다.
이에 양호는 형개(邢玠) 총독에게 글을 보내 먼저 울산에 진을 친 왜장 가토(加藤淸正)를 쳐서 적의 한쪽을 끊고, 마귀 제독과 4만의 군사를 남하시켜 순천에 진을 친 고니시(小西行長)를 치게 했다. 그는 12월 8일 용감한 군사 수백 명과 함께 조령(鳥嶺)을 넘어 의성을 거쳐 20일 경주에 이르러 장수들과 합류했다. 22일에 적진 10리 밖에 진영을 치고 소수 군대로 적을 유인하자 왜적은 정예병으로 추격했고, 이에 마귀 제독과 함께 적 1천 여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튿날 몸소 싸움터에 나가 적의 진지 두 곳을 빼앗자 가토는 도망갔다. 이에 그는 각 군영으로 하여금 번갈아 포위하여 적을 더욱 곤궁하게 하니 곧 적이 항복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적의 후원군이 도착하자 다시 경주로 물러나 군사를 쉬게 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재차 출병을 꾀했다. 그때 하급장교 중 그에게 죄지은 자가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에게 무고(誣告)했고, 평소 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정응태가 황제에게 보고하여 그를 탄핵하였다. 당시 명나라 대신과 선비가 그의 억울함을 진언했고 선조도 그를 머물게 하라고 청했으나 결국 1598년 여름 파직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양호가 떠난 뒤 조선에서는 그를 기리는 비를 세웠고, 선조도 그를 흠모하여 연경에 가는 사신에게 초상을 구해오게 했으나 몇 해가 지나도록 구하질 못했다. 그러다가 광해군 2년(1610) 마침내 구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生祠)에 봉안했다. 당시 그는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로 있었다.
비문은 1617년 5월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지었고 동지돈녕부사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두전(頭篆)은 한성판윤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그 뒤 헌종 1년(1835) 봄 화재로 비문이 훼손되자 호조판서 장지연(張止淵)이 옛 비문을 모각하자고 건의했고, 이에 지중추부사 신재식(申在植)이 적고, 용양위 호군 신위(申緯)가 써서 그 해 8월에 다시 세웠다.
이들 거사비와 관련하여 1599년 형개 제독을 모신 선무사(宣武祠)가 남대문 안쪽의 태평관 서쪽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현재 중구 서소문동 120번지에 해당되며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건립 당시 선조는 "再造藩邦(재조번방)"이란 현판을 써서 걸었고, 1610년에는 형개의 초상과 함께 양호의 초상도 이곳에 안치되었다.
위치 명지대학교 내
약도와 가는 길 신촌역에서 명지대방면 7713버스 승차하여 명지대학교 역에서 하차. 전방에 보이는 학교 입구로 들어가면 학생회관 건물이 있는데, 건물 뒤편 주차장에 양호거사비가 위치하고 있음.
관련정보 전화 명지대학교 총무시설계 02)307-6171
홈페이지 주소
http://sca.visitseoul.net/korean/stone_construction/i_tombstone08013.htm
문제점 없는 것 같다
모니터링 결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문화재가 그다지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듯 했다. 단지 측면부가 훼손된 흔적이 보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호 화산군신도비 [花山君神道碑]
1980년 6월 11일 지정, 조선 영조 23년(1747),
1기(基), 전체 높이 495㎝, 비신 높이 295㎝, 너비 104㎝, 두께 62㎝, 화강암,
국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73-3
사진
설명
조선 영조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화산군 이연(李渷, 1647∼1702)의 신도비이다. 화산군의 자는 여원(汝源), 호는 자이당(自怡堂)으로 선조의 7남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손자이다. 부친은 해원군(海原君) 이건(李健)이고 모친은 풍산 심씨(豊山沈氏)인데, 해원군의 동생 해양군(海陽君) 이희(李僖)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이에 후사가 없자 그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양자로 들어간 뒤에도 두 집을 오가며 양가 부모를 지극히 섬겼다고 한다.
현종 2년(1661) 화산부정(花山副正)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생부의 상을 당해서는 삼년을 하루같이 하여 뼈만 앙상하게 남아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였으며, 탈상 후에도 애모함이 지극하여 제사 때 손수 제기를 씻고 초상 때처럼 애통해 하여 모두들 그의 효성에 탄복했다고 한다.
현종 15년(1674) 왕이 승하했을 때 혼전(魂殿, 왕·왕후의 국장 뒤 삼년간 신위를 모시는 전각)의 향관(享官, 祭官)에 제수되었고, 그 노고로 명선대부(明善大夫, 정3품)에 올라 도정(都正)에 제수되었다. 숙종 6년(1680)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자 다시 혼전 향관에 제수되었는데, 삼년을 마치기 전 양부의 상을 당하였다. 탈상 후 왕은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고 화산군에 봉하였다. 숙종 13년(1687) 생모의 상을 당해서도 생부의 상 때처럼 비통해 하였고, 두 아우와 함께 시묘(侍墓)하기를 밤낮으로 통곡하고 묘를 맴돌며 차마 내려오지 못하여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탈상 후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숙종 26년(1700) 신경통을 앓아 여러 해를 끌다가 2년 뒤 윤6월 11일 향년 56세로 사망하였다. 그 해 8월 경기도 양주 가좌동(嘉佐洞)의 선영 옆에 안장되었다. 영조 2년(1726) 아들 낙창군(洛昌君) 이당(李樘)의 공로로 현록대부(顯祿大夫)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증직(贈職)되었고, 영조 22년(1746) 경연관 송인명(宋寅明)의 건의로 특별히 효간(孝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자손으로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1651∼1680) 사이의 밀창군(密昌君) 이직(李職)과 상주 황씨(尙州黃氏, 1662∼1729) 사이의 낙창군 이당·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의 삼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영조의 총애를 받아 정1품에 올랐다.
비는 1747년 아들 오위도총부 도총관 낙창군 이당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은 좌의정 송인명이 지었고 글씨는 화산군의 조카 오위도총부 도총관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썼으며, 전서(篆書) 제목은 낙창군 이당이 썼다. 비문 글씨는 조선초기 이래 유행되던 조맹부(趙孟 ) 풍을 따랐다.
비는 귀부(龜趺)·비신(碑身)·개석(蓋石)을 갖춘 것으로 조선중기 이래의 석비 양식을 잘 따랐다. 특히 크기가 강조된 귀부 머리의 힘찬 조각과 개석에 표현된 용마루와 공포(栱包, 기둥과 처마 사이의 짜임)의 섬세한 조각이 뛰어나다. 신도비 바로 옆에는 문인석(文人石) 하나가 있는데, 네모진 신체에 앳된 얼굴,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18세기 문인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위치 증가 중앙교회 앞
약도와 가는 길
관련정보 전화 없음
홈페이지 주소
http://sca.visitseoul.net/korean/stone_construction/i_tombstone08031.htm
문제점 문화재가 잘 홍보 되어있지 않을뿐더러 주택가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지역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찾아가기가 매우 힘들다.
모니터링 결과 신도비 주변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훼손 없이 비교적 깨끗하게 잘 보존 되어있으나, 문화재를 보러 가기까지 찾아가는 길이 매우 복잡하고 위치 표지판도 없음. 인근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는 길에 있는 공인중개사무소에 들러 물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 보도각백불 [普渡閣白佛]
1973년 6월 7일 지정, 고려시대, 13∼14세기,
바위 전체 높이 10m, 마애불 높이 5m, 화강암,
옥천암 소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 2동 8번지
사진
설명
보도각백불의 정확한 명칭은 '홍은동보도각마애보살좌상(弘恩洞普渡閣磨崖菩薩坐像)'이다. 흰색의 호분(胡粉)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 때문에 백불(白佛) 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불상에 호분을 칠하여 백불로 부르고 있는 예로는 이 불상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 안암동 보타사마애보살좌상과 안성 굴암사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는데 특히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보도각백불은 홍지문아래 홍제천 개울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 절인 장의사(藏義寺)의 경내로 추정되나 현재는 옥천암이라는 작은 암자만 남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상 앞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고 하는 왕실과 관련된 관음보살 도량으로 유명하다. 현재 마애불상은 근래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도각이란 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마애보살상은 커다란 사각 형태의 바위면에 저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바위의 남면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내곡(內曲)된 구조로 되어 있다. 바위의 왼쪽 편과 뒷면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를 갈았던 붙임바위가 남아 있어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애보살상은 바위의 크기에 맞게 양 무릎을 넓게 벌리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에 쓴 원통형의 보관(寶冠)이나 목걸이 장식, 그리고 대의(大衣) 안쪽으로 보이는 대각선으로 입혀진 내의(內衣)의 표현에는 금색을 칠하여 장식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또한 관의 좌우에 뻗어 있는 관대(冠帶)에도 타원형의 금판(金板)이 달려있어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조각기법에서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며 관 밑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다. 이 불상은 머리에 쓴 보관으로 보아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짐작되지만 대부분의 관음보살이 보관에 화불(化佛)을 새기는 것과 달리 이 보살상의 보관은 세 칸으로 나뉘어 각각 그 중심과 모서리에 연꽃을 장식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입이 표현되어 있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 주름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면서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손에는 지물(持物)을 들지 않고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대고 있다.
보도각백불은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대체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된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구제하는 매우 대중적인 보살로 관음보살의 보살행에 대해서《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무고한 형벌을 받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맹수에 쫓길 때, 화재를 만났을 때 등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도움을 주는 자비의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관음보살은 민간에서 많은 신앙을 받고 예배되었던 불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조성되었다.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 2동 8번지 옥천암
관련정보 전화 옥천암 02-395-4031
홈페이지 주소 http://www.okcheonam.com/
http://sca.visitseoul.net/korean/buddhism/i_buddhist_image07022.htm
문제점 문화재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
모니터링 결과 옥천암의 보도각백불 앞에는 사람들이 절을 할 수 있도록 나무 마루와 방석 같은 것을 깔아놓았고, 백불 바로 앞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켜 놓은 초와 향들이 놓여있어서 자칫하여 그것들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화재가 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백불의 아랫부분의 칠은 다 벗겨져서 회색이 드러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