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첨점(尖點) : 카이로스(Καιρός)
2019년 입하(立夏)후 엿새째
범이 가다.
산대리 들판을 지나
훨훨 날아가다.
추가령지구대를 너머
개마고원을 지나
백두산에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만주벌판으로
바이칼 호수로...
청춘, 시대를 깨우다(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
여정남기념사업회/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삼천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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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 사건 243
3. 구속자 석방 운동 270 [1974, 10월 16일]
사건의 중심인 문리대 학생들은 인문관에서 수업하던 철학과, 사학과, 사회학과 소속의 학생들이었다. 임근태(사회학과 72학번), 신수만(사회학과 72학번) 김치영(사회학과), 권용원(철학과 72학번 학회장), 장명재(사학과 72학번) 등이 주요 참여자였다. 인문관 통합 강의실에 학생들을 모아서 임근태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일청담으로 집결하여 임근태와 권용원이 시위를 주동하면서 “유신독재 철폐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김영희 총장 퇴진하라!” “침묵을 지키는 언론은 민주수호에 앞장서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가두 진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농대 뒤편 및 후문에서 100여명의 경찰과 대치하게 되자 시위대 300여 명이 공대 옆길로 빠져나가 신암동 신도극장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북부경찰서 소속 경찰에 의해 본교로 되돌아와 오후 1시 쯤 자진 해산했다. // 이날 시위로 경북대는 임근태, 신수만, 권용원, 이종주(사범대 독어전공 72학번)에게 무기정학을, 송점종(법학과 68학번) 유석호(법학과 72학번), 김영욱은 근신처분을 받았다. (272쪽)
1974년 10월 19일 닫힌 경북대 교문은 11월25일 개강이 결정되면서 다시 열렸다. 경북대 본부는 10월 19일 휴교의 결정적 계기 되었던 10월 18일 시위로 징계를 받은 학생들을 구제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생 징계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12월 2일 학처장회의에서 징계를 받은 7명의 학생 가운데 문리대 사회학과 임근태와 신수만, 철학과 권용원을 제외시키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는 지난 10월 29일 개최된 교수회의에서 문리대 교수들이 총장에게 처벌 학생의 구제를 건의하겠다고 나선 일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추측된다. (273-274)
제10장 유신 체제 후기 민주화 운동 281
1. 1975년 봄 투쟁과 침묵 285
거덜나버린 학생 운동권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군사 독재에 맞설 수 있기에, 운동권은 조직 활동부터 시작했다. 권용원이 조직 재건에 나섰다. 권용원은 다른 ‘빵잽이’보다 활동 조건이 유리했다. 빵잽이들의 행동은 금세 눈에 띄고 문제가 생기면 곧장 제명처리 될 가능성이 높지만, 권용원은 경찰서에 들락거렸어도 ‘별을 달지는’ 않았다. 권용원은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조직 재건에 매달렸다. 순전히 학내 학생운동 조직 재건을 목적으로 1977년에 교육대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생이 학교에 있을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직 재건이란 “혁명적 운동을 도모할 직업적 운동가”를 키우는 일이었기에 쉽지는 않았다. 조직 재건을 위해 가장 먼저 서클과 엠티를 통해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다. 이 무렵 언어문화연구회와 그에 이어 복현독서회가 만들어지고, 서클 회원들은 자주 엠티를 갔다. 함께 모여 결의를 다지고 연대 의식도 높였다. 학교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민청학련 관련자를 비롯하여 외부선배들과 접촉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권용원은 선배 전정효, 강기룡, 황철식과 은밀히 만나 학내 문제를 의논했다. 그 중에서도 강기룡은 경제적 지원을 많이 했다. 학교 안팎에서 차근차근 민주주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296쪽)
2. 1978년 11월 민주구국 대투쟁 299
* 2차 민주구국 선언 대투쟁 (307)
1978년 11월 7일은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전국 40여만 수험생들이 입시 1차 관문을 넘던 날이었다. 요즘이라면 대학 입시날 모든 뉴스는 입학시험에 묻혀 버리기 일쑤지만, 1978년 언론의 1면을 차지하는 건 늘상 박정희 정부 관련 소식들이었다. 그날 김병호(철학과 71학번)와 손호만(역사교육과 77학번), 권용원, 그리고 유병렬, 최상림 등은 각자 자리에서 2교시 수업 마칠 시각만 기다리고 있었다. 11시는 오전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의 학교를 빠져 나가기 전이고, 오후 수업 수강자들도 학교로 들어오는 시각이라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모이는 시각이었다. 이날이 오기를 며칠 전부터 기다렸다. 2차 민주구국선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병호와 손호만은 함께 작성한 선언문을 들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1차 투쟁 소식을 듣고 투쟁 의지가 불타올랐던 김병호와 손호만을 한양서점 주인이자 경북대 제적생이었던 박명규가 연결시켜 줬고, 둘은 만나 2차 시위를 기획했다. 두 사람은 태극기를 하나씩 사고 유인물도 넉넉히 준비했다. 밤새 900장의 유인물을 등사기로 밀었다. (308)
*여학생 운동의 등장 (324)
1977년 최상립의 등장은 참신한 광경이었다. 침묵에 빠져들어 있던 교정에 가을 찬바람이 불던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학생이면 철저한 부정과 비판 정신으로 시대를 짊어져야 한다. 소수의 창조적 엘리트로서 대학생은 시대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경북대학보에 실린 글 「시대의 등불」은 최상림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이 기사가 계기가 되어 최상림은 조직 재건을 준비하고 있던 권용원 등과 연결되어 그 해 겨울 청천으로 의식화 엠티를 떠났고, 이후 메아리야학과 복현독서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운동권이 된 것이다. (325)
(2:40, 52P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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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권용원동지의 영전에 드립니다
그대는 가셨습니다
새벽별 영명한 빛을 발할 때
그대는
별이 되어 가셨습니다
아직
못 다 물리친 어둠이 남아있을 때
그대는
마지막 빛을 발하며
원래 그대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사실 그대는
큰 병이 있었지요
우리 모두가 아는데 그대만
모르는 ᆢ
그 병은 제 몸 먼저 돌보기 보다
동지의 몸 먼저 돌보는 병
그 병은 제 가족 먼저 챙기기 보다 동지의 가족 먼저 챙기는 병
사실 그대는 무식도 했지요
그대는
동지가 무엇인지 한번도 설명하지 아니하셨죠 무식해서ᆢ
단지 동지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셨죠
그대는
혁명이 무엇인지 한번도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죠 무식해서 ᆢ
단지 혁명을 하고자하는 자들은 어떠해야 하는지 몸으로 보여주셨죠
그대
민중이 도탄에 빠져 한톨의 쌀을 위해 허우적 거릴때
그대는
드넓은 영혼의 양식을 일구어내고자 하셨죠
그대
민중이 독재의 탄압 아래 한줌의 자유를 위해 허우적 거릴 때
그대는
드넓은 이성의 지평을 열어놓고자 하셨죠
이제
별이 된 그대는
1895년의 별님들과
1945년의 별님들과
1960년의 별님들과
1975년의 별님들과
1980년의 별님들과 함께 자리하여
이 땅에 남아있는
어둠의 마지막 끝자락까지
다 비추어 놓고야말겠지요
이제
남겨진 우리도
그대가 던져놓은 빛 하나 가슴에 품고 지켜나가다보면
그대 별님들 계신
먼 옆자리에라도 걸쳐 앉을 수 있을까요?
꼭 다시
그대 별님들의 둥지 옆에서
다시 뵙기를 고대합니다
마지막 어둠마저 사라지고
그대 별님들도 다 사라질 그때까지
고이고이 동지의 정
이어갈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2019.5.12
권 형우 드림
맥1953권용원2019안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