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수필|송태규
몸 그릇 마음 그릇
송태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넘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 스타이자 인권운동가인 알리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알리의 경기 중 가장 유명한 건 조지 포먼과의 대결이었다. 포먼은 당시 24세의 압도적 챔피언이었고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핵주먹이었다. 반면 알리는 25세부터 3년 7개월간 링에 오르지 못했고 강펀치 스타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32세로 주무기인 순발력과 민첩성도 떨어졌다. 이런 불리함을 극복하려는 듯 알리는 갖은 쇼맨십과 특유의 입담으로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경기 전에 허세를 떤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떠버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알리의 승리를 믿는 사람은 알리뿐이었고 모두 챔피언 포먼의 승리를 점쳤다. 1974년 포먼과 맞붙었을 때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과연 세기의 대결이었다.
알리가 포먼에 맞서 특유의 경쾌한 몸놀림과 빠른 펀치로 공격을 적중시켰다. 5라운드에서는 포먼에게 맞으면서도 미소 짓는 여유까지 보였다. 8라운드 종료 20초 전, 알리의 오른 주먹이 포먼에게 적중했고 종료 10초 전 카운트에 들어가서 라운드 끝날 때 KO 선언이 되었다. 이는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기로 평가받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속열차는 날렵한 몸으로 정해진 시간에 제 길을 달린다. 새해 달력을 넘긴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남원에서 문우들 만날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내린 대설주의보에 승용차를 포기하고 기차를 타러 역으로 갔다. 진눈깨비가 결국 폭설로 쏟아졌다. 하늘이 도끼에 찍혔는지 온통 시야를 가리고 앞서가는 사람이 점점 눈사람으로 변했다. 이럴 땐 일기 예보가 너무 잘 맞아서 탈이다.
어제 지는 해와 오늘 뜨는 해가 다르랴.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지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마음을 다지기도 한다. 집 뒤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 이따금 해맞이하러 다닌다. 이번에는 알리의 주먹에 포먼이 주저앉듯 연초 계획이 양지 끝 볕에 고드름 되어 푹 꺼졌다.
내 몸의 고삐를 바짝 조이려고 해마다 2월이나 3월에 열릴 장거리 마라톤 대회를 신청한다. 나태해지는 나를 경계하려 건강 보험을 드는 셈이다. 연말연시 하루도 거르지 않는 어지간한 모임은 핑계를 대고 빠진다. 어쩔 수 없는 술자리에서 그나마 잔 수를 줄일 구실이 된다. 철인클럽 단체대화방에는 매주 정기 훈련 일정이 뜬다. 게으름 부리거나 겨울잠에 푹 빠지고 나면 뱃가죽이 두둑해지고 그해 기록은 죽을 쑤게 마련이다. 나 없는 훈련 사진이 올라오면 조급하고, 마음의 뒷모습이 걸레질하지 않은 창문 같다.
지난해 말에 2025년은 내 달리기 여정에 새로운 이정표를 그을 생각으로 한껏 부풀었다. 당장 2월 하순 대구마라톤 풀코스, 6월 말 몽골 고비사막 160km 울트라마라톤 참가를 예약했으니 말이다. 이런 대회는 절대 호락호락 결승선을 내어주지 않는다. 날씨가 춥다고 움츠릴 일이 아니다. 새벽마다 헬스장 트레드밀에서 몸을 달궜다.
포먼을 상대하는 알리가 그랬을까. 몸 상태가 좋았다. ‘오늘은 20km다.’ 속도를 점점 높이는데 오른쪽 무릎에 신호가 왔다. 여기서 멈추면 포기도 습관이 된다. 내가 나를 이기려면 남은 2~3km를 마저 달려야 한다. 달리면서 나의 목표는 오로지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몸이 지칠대로 지치면 머릿속이 온통 구겨진 백지가 된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내가 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속열차가 종착역에 몸을 부리듯 기어이 거리를 채우고 나서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들풀 뜨락’(글 쓰는 작업실)에 가는 내내 무릎이 시큰거렸다. 평소처럼 하룻밤 자고 나면 좋아지려니 했지만, 월세도 내지 않는 통증은 내 몸 구석을 비집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방치할 일이 아니었다. 한의원에 개근 생처럼 드나들었다. 양쪽 다리에 고슴도치가 앉았어도 증세가 심상치 않아 정형외과에 들렀다. 담당 의사가 X 레이 사진을 보자마자 관절에 염증이 있으니 다짜고짜 달리기를 그만두란다. 훈김이 통하지 않는 Chat GPT나 할 법한 뻔한 처방이다.
달리면서 사는 재미를 얻는 나 같은 사람은 몸이 재산이다. 그런 내게 지금이 최대 위기이다. 그 위기란 몸을 마음대로 굴리지 못하는 부상이다. 러너들 사이에 크고 작은 부상이야 늘 달고 사는 법. 대신 일찍 발견하고 치료와 적절한 휴식이 최고의 처방이다. 운동 중독자들은 아프다고 내색하지 않는다. 이때는 알리처럼 떠버리가 되면 안 된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는 게 낫다.
떠버리가 되는 순간, 여기저기서 뻔한 반응이 한결같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만하랬지.’ ‘나이도 들고 했으니 그만둘 때도 되었잖아.’ 이런 사람들 얼굴엔 나를 가엽게 여기면서도 고소하다는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한물갔다던 알리를 바라보며 포먼의 승리를 점치던 전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술 밥에 체했다고 밥을 원망할 수는 없는 일. 내가 잘 이겨내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승부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상대를 이기려면 자신을 이겨야 한다. 내가 나를 넘어서야 하는 싸움도 결국은 승부다. 단, 내 몸 그릇이 넘치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몸 그릇이 흘러넘치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채우려는 마음 그릇을 억제하지 못하면 몸 그릇은 금이 가고 결국 산통이 깨진다.
몸이 근질거리는데 달리러 나갈 수 없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 이러다가 평생 달리기와 담을 쌓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조급함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요즘 내 몸 그릇은 낡은 잡지 겉장처럼 덜렁거린다. 문은 열었지만, 손님 들어올지 겁나는 주인의 마음이 이럴까. 그렇다고 주저앉아 한숨만 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직진도 충분히 아름답다』라는 산문집을 냈다. 생각이 구겨질 때마다 책 제목처럼 직진할 방법을 떠올리며 허물어지는 나를 다잡는다.
나비처럼 날리던 눈발은 독오른 땅벌처럼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남원으로 가는 기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플랫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치 없는 통증은 여전히 똬리를 틀고 누워있지만, 일어나야 한다. 간절히 믿는다. 눈보라를 뚫어야 할 어려운 시간이지만 다시 달릴 수 있도록 몸 그릇 키울 기회는 충분하다. 마음 그릇에 시린 바람을 담으며 기차에 몸을 얹는다. 오늘 기차도 내 몸도 눈길을 헤치며 벌처럼 직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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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규|2019년⟪에세이 문예⟫, 2020년 ⟪시인정신⟫으로 등단했으며 한국에세이문학상을 받았다. 수필집 『직진도 충분히 아름답다』 외, 시집 『말랑한 벽』 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