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 : 23 - 48절
“성령 부어주심”
초청을 한 고넬료와 초청을 받은 베드로가 함께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오고 있는데 이 대화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참 황당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 자신이 베드로를 초청해 놓고서도 왜 초청을 했는지 확실하게 모르는 상태였고 베드로 또한 2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찾아 왔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왔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이 두 사람은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을 했을 뿐이고 그런 결과로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계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 본다면 두 사람은 굉장히 좋은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확실하지도 않는데 믿는 것이 믿음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확실하지도 않은데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이 믿음이고, 확실하지도 않은데 모세를 쫓아 애굽을 떠나는 것도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확실하지도 않은데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을 쫓기 위해서 자신의 배와 직업과 과거의 많은 것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보시고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모든 것들이 무모한 도전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바로 그런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관점에서 믿음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말하려면 베드로처럼, 고넬료처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성령님의 음성을 의지하여 움직여야 진정한 믿음이 되고 건강한 믿음이 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 계산해 보고 상황 봐 가면서 확실해 지면, 확률적으로 높아졌을 때 움직이고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온전한 순종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지극히 이성적인 수준에서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절대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모습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경우가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습니다. 300명을 데리고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적군과 맞선 것도 미친 짓이었고, 자신의 목숨을 해치려고 애를 쓰던 원수 같은 사울을 그냥 살려 보낸 것도 미친 짓이었고, 100살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드린 아브라함도 미친 짓이었고…. 그 어느 것 하나 이성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성령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따진다는 것은 믿음의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사회적인 통념이나 전통보다 더 앞서는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고 주관하심이고 역사하심이라고 믿었을 때 우리의 믿음이 건강한 믿음, 성장하는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처럼, 베드로처럼 이런 신비로운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리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하고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었을 때 성령님의 음성과 이끄심과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보면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영문도 모른 채 만나게 된 고넬료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만 전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본 그대로 증언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것을 들은 고넬료에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그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냥 성령님의 맛만 볼 수 있게 임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 부어 주심,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받아서 은사가 나타날 정도였던 것입니다.
보통은 물세례를 받고 나서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성령님을 체험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런 보편적인 현상이 완전히 깨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 그리고 물세례를 주게 되는 첫 사례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세례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성령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로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시길 간절하게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도 받지 않은 성도가 성령 세례를 받아서 방언을 하고 각종 은사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의심을 갖기 전에 물세례를 받기 전에도 성령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구나.’ 우리가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설사 복음을 들은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도 성령님을 부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면서 성령님을 부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편견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본문 말씀에 보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느냐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통해 성령 부어주심의 은혜를 누렸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마다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느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오순절에 임하였던 성령 충만한 장면만 인상 깊게 생각하고 강조를 하다보니까 고넬료를 통해 보여 주신 이런 방법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학생 때나 청년 때 어떤 훈련을 받으면서 자라났냐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회나 수련회에 참석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엄청 들으면서 자라났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틈만 나면 교회에 모여서 기도회하고 수련회 가서 밤늦도록 기도를 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그런 훈련을 받으면서 자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다른 성경도 아니고 똑같은 사도행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 방법을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성령님과 교제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들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도 성령 부어주심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 밭이 길가가 되느냐, 돌짝밭이 되느냐, 가시덩쿨이 되느냐, 옥토가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듣다가 성령 부어주심을 받게 된 고넬료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33절 말씀을 통해 고넬료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일단은 말씀을 듣기 전에 긍정적인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고넬료는 영문도 모른 채 베드로를 초청해서 데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난 베드로에게 했던 말은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였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베드로를 보면서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런 자세와 태도로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있어야 그 복음이 우리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고 그 소식을 통해 듣는 우리가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오기를 잘 했어. 오늘 찬양하기를 잘 했어. 오늘 말씀 듣기를 잘 했어.’ 이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야 우리의 마음이 옥토와 같은 마음이 돼서 말씀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지 이미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오늘 괜히 교회 왔어. 오늘 괜히 저 사람 만났어. 오늘도 지겹게 사도행전이야. 오늘 저 사람이 또 설교야.’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긍정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 시간뿐만 아니라 혼자 말씀을 묵상할 때도 ‘오늘 말씀 묵상하기를 잘 했어.’ ‘오늘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말씀해 주셔서 복을 받고 은혜를 누리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될 거야.’ 이런 긍정적인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해야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주고 싶어 하시는 성령님을 부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마음이 중요하냐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심지어 그 사람들이 물세례조차 안 받는 사람일지라도 성령님을 부어 주시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세례조차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신데 세례를 받고 성령의 갈급함을 가지고 말씀도 듣고 기도에 힘을 쓰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녀들에게 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복음이 우리에게 참된 복음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씀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듣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성령 부어주심을 포기하거나 가볍게 보시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자신의 힘이나 공로로 기도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기대하며 살면 짧은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도 성령님은 우리의 잔이 넘치도록 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부어 주심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를 찾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런 가운데 부어 주시는 성령 충만함을 가지고 성령님과 수시로 교제하면서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다가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