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일본 풍속도의 대가 東州劑(동주제)는 김홍도일 가능성
작가 이영희 선생의 <노래하는 역사>의 신문 연재물을 발췌하여 올리면서, 옮기지 못한 회차가 적지 않다.
그것은 이두체의 한자로 기록된 「만엽집」의 시가에서 우리의 고대어를 찾아내어,
그 단어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해석의 수단으로 삼는데,
거기에는 차마 옮기지 못할 남녀의 성기, 또는 성애를 노골적으로(때로는 비속어를 사용하며)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일본어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한 내용을 우리 옛말 풀이로,
겉으로 표현한 의미와 더불어 속뜻으로 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지금까지 옮긴 바로는, 일본의 고대사는 한반도의 가야의 문화로 시작해,
백제계 인물들(천지왕 등)의 지배에 이어 고구려계 인물(천무왕)의 정권 찬탈,
그리고 결국 백제계의 혙통이 오늘날의 일본 황실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전 일본왕 히로히토도 스스로 백제계임을 인정했다.)
나는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일본의 정사서「일본서기」를 비롯한 「고사기」, 「풍토기」를 망라한 이영희 선생의 박식에 그저 놀랄 뿐이며, 거기에 더해 우리의 고어, 그것도 백제말, 신라말까지 찾아내는 열정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오늘 이야기는 이제 조선조 김홍도(金弘道, 1745년 ~ 1806년 ?)에 이른다.
일본의 역사 속에는 정체불명의 말과 인물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 없이 <말뜻, 알 수 없음>, <이력, 알 수 없음>으로 간단히 넘기고 있다.
일본의 에도(江戶; 강호)시대 또는 도쿠가와(德川;덕천) 시대라 불린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까지의 그림 양식에는 우키오에(浮世繪;부세회)가 있다.
기녀와 배우의 모습이나 씨름 경기 등을 그린 풍속화이다.
그 수준이 높아 19세기 후반의 유럽 화단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도슈사이 사라쿠(東洲齋 寫樂; 동주제 사락)는 손꼽히는 대가였다.
그는 1794년 5월에서 1795년 정월까지 약 10개월 사이에 무려 150여 점의 작품을 폭발적으로 그린 후 종적을 감춘 화가라고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생몰이 모두 불상이며 출신지와 이력, 가족 상황까지도 불명이란다.
그 시기 대부분의 화가들과 비교해 두드러지게 비정상이다.
그림의 대상을 미화한 당시의 화가와는 달리 긴장의 순간을 포착하여 주관적인 화풍과 힘찬 필치로 뛰어난 작품을 남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여기에서 작가는 연회자, 씨름꾼들, 서민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 단원 김홍도를 떠올린다.
마침 연재 당시(1994년 4월), 일본에서 찾아진 단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우리 문화재 전문가 임창순의 말을 빌려 <단원이 조선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전한다.
단원은 1745년생으로 그 역시 죽은 해는 알려지지 않다고 한다.
1786년 왕명으로 금강산과 영동 일대의 명승지 풍경을, 그리고 1791년에는 정조대왕의 어진을 그리는데 참여한 공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재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감 퇴임 후에는 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불우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50세를 전후한 그의 후기 작품 중에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해학적인 풍속화가 많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당대의 신필(神筆) 김홍도와 일본의 최고봉 도슈사이 사라쿠는 동시대를 산 같은 경향의 화가라는 것이다.
즐겨 그린 소재도 서로 비슷하고 개성적인 화풍도 서로 비슷하여 흡사 쌍둥이 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단원은 실제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다고 전해지고
연풍 현감으로 있었던 1794년에도 일본에 가서 살았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며, 작가는 ‘혹시 동일인이 아니었을까?’라고 드디어(?) 추측한다.
그러면서 단원의 말년이 불우한 처지가 된 것은, 궁중 화가로서의 빛나는 경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현감으로 재직하며 일본에 간 죄로 곧장 면직당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부연한다.
거기에 더해 동주제 사락(東洲齋 寫樂; 도슈사이 사라쿠)이라는 이름도 어쩐지 단원의 취향을 풍긴다고 말한다.
단원은 익살스런 여러 개의 호(呼)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畵師), 첩취옹(輒醉翁) 뿐만 아니라. 기거한 장소에 따라 단구(丹邱), 서호(西湖) 등의 호도 있단다.
따라서 동주제 사락(東洲齋 寫樂)은 ‘동쪽 섬(일본)의 서재에서 그림 그리기를 즐김’이라는 익살스런 호가 아닐까 추측한다.
眠:잠잘 ‘면’ 醉:취할 ‘취’ 輒: 문득 ‘첩’
어쨌든 일본사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한반도 도래인인 경우가 태반이라고 작가는 늘 말한다.
고대는 물론이고 근세에도 그렇단다.
연개소문과 일본의 천무왕, 백제 왕자 교기와 일본 천지왕, 신라 문무대왕과 일본의 문무왕. 그리고 단원 김홍도와 일본의 동주제 사락....
작가는 오늘의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이러한 인물들에 관한 비교연구가 한-일 간에 있음직하지 않은가.
그들이 반드시 동일인이 아닐지라도 이웃 나라인 한국과 일본의 동시대를 산 비슷한 인물들에 대한 비교연구는 흥미진진한 추적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광고 : 세상의 모든 딸들
인내와 희생, 배려와 양보....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그러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은 세상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특히 자녀의 교육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녀들의 모습에서 더욱 그렇다.
운동회가 열리지 않는 이유가, 일기장을 쓰지 않는 이유가, 학부모 면담이 없어진 이유가 우리의 엄마들 책임은 아닐텐데....
아빠들 책임이 더 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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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회사 이름이 주식회사 코로나였을까^^
이 양반이 TV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손가락과 숟가락만으로 타악기 연주하듯 신명나게 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엊그제 <아침마당>에서는 시골 장터 약장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가사로 노래를 부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