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회사 대웅전
한국불교의 용신앙
안 환기
목차
I. 서론
II. 본론
1.지역별 용신앙 고찰
(1) 인도 1)토착신앙으로서의 용신앙 2)불교와 토착 나가신앙과의 관계
(2) 중국 1)토템신앙의 대상인 용 2)중국불교속에 나타나는 용의 역할
2.한국불교의 용신앙
(1)한국의 역사에 나타나는 용의 모습
가. 삼국유사 나.고려사 다. 조선왕조실록
(2)불교 경전에 나타난 용
III 결론
I. 서론
본 연구는 한국 불교 속에 유입된 용(龍)신앙이 불교의 기본 틀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현재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면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에 도입된 불교는 불교 교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 및 예술을 전파하게 된다.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사찰이다.
사찰은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거주지이며 또한 세속인들이 가족및 자신의 안녕을 빌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즉 세속인과 수행자들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이 사찰에는 석가모니상과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있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탑, 종(鐘), 삼신각 등이 있다. 특히 벽이나 처마 밑에 새겨진 조각품과 탱화, 벽화 등은 불교의 교리를 쉽게 보여 준다. 석가의 일대기와 성도후의 모습 등을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와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십우도(十牛圖)가 그 예이다. 또한 곳곳에 용의 모습을 띤 조각품과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대웅전 내부 및 지붕을 유지하는 기둥, 종에 새겨진 모습 등이 모두 용의 형상이다.
이와같이 화려한 탱화속에 용의 모습은 다소 생소하다는 인상을 준다. 과연 이 상상의 동물의 근원은 무엇일까? 12간지로서, 꿈풀이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용이 어떻게 불교라는 틀속에 자리잡았을 까? 어떤 역할로서 사찰속에 남아있는 것일까?
본 논문은 이러한 물음을 출발점으로 불교의 원류를 따라 인도, 중국에 나타난 용의 모습을 살펴보고, 한국 역사서인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및 불교 경전을 토대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II. 본론
1. 지역별 용신앙 고찰
(1) 인도
본 장에서는 불교의 근원지인 인도에 나타난 용신앙을 알아보기로 한다. 이러한 시도를 위해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는 용의 원류를 탐구하기 위한 시도로서 인도 고유의 토착 신앙인 나가(naga)신앙에 대한 고찰이다. 두 번째는 인도에서 토착신앙인 나가 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불교에 유입되는 가에 대한 고찰이다.
1) 토착신앙으로서의 용신앙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불경이 번역되던 중, 인도의 나가(naga)가 龍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을 고려 해보면, 龍이라는 말의 전래는 불교 전래 경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교의 龍관념은 불교의 고유사상이 아니었고, 인도의 토착신앙인 龍신앙이 불교와 습합된 것으로 본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인도에서 나가(naga)라는 말의 의미는 물과 비의 정령으로서 신화속에서는 수호신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나가는 보통 독사, 코브라 모양으로 표현되는데 인도의 고전인 리그베다에 브리트라는 용과 비슷한 괴물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인도에는 고대부터 이러한 뱀모양의 형태를 띤 것이 신화적으로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리그베다에 나타난 아리아인은 매우 종교적인 민족이었다. 그들은 神에게 讚歌를 바쳤고, 그것에 의해 현실적인 생활속에서 행복을 얻고자 했다. 리그베다에 나타난 신들은 원시 인도인, 유럽인의 사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주로 자연계의 구성요소․여러 현상 혹은 그들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되는 지배력을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인드라 신과 브리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나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드라는 리그베다가 만들어질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主神으로 전쟁의 신, 비의 신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명령으로 하늘은 대지에 비를 내려 만물을 성장하게 한다. 이러한 인드라의 창조 행위가 바로 브리트라와 관계를 맺고 있다. 브라트라는 용과 비슷한 괴물로서 물을 지배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힌두의 신인 인드라와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브리트라는 인드라의 적으로서 리그베다에 나타난다. 아리아인들이 기록한 문헌에 표현된 나가(naga)즉 브라트라는 당시의 토착민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리아인들은 인도의 원주민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나가(naga)를 숭배하는 종족과 접하게 되었는데 그 부족의 이름이 바로 나가족이었으며, 이들은 이란의 고원지대(산스크리트어로 naga)에 기원을 둔 혼혈 몽고인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나가족은 태양과 나가를 숭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나가를 숭배하는 인도의 원주민들과 아리아인들의 관계가 브라트라와 인드라의 관계로 묘사가 된다. 즉 아리아인들이 나가족 및 인도의 원주민과 유대를 맺기보다는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나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마하바라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하바라타 신화에 의하면 모든 나가들은 다 카드루가 낳은 자식들이다. 태초의 나가로 알려진 쉐샤(Sesha), 또는 아난타(Ananta), 그리고 신들이 불사주를 만들 때 도구로 사용했던 바수키(Vasuki), 이외에 마나사(Manasa), 타크샤카(Takshaka), 그리고 크리슈나에 의해 퇴치를 당하는 칼리야(Kaliya)등이 모두 카드루의 자손들이다. 마하바라타에는 나가의 이름들이 많이 보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름만 열거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된 나가는 많지 않다.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나가는 비쉬누 신의 상징동물이며 새들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가루다와 적대 관계이다. 이 신화는 나가의 어미가 술책을 쓰는 교활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교활한 술책을 통해서 타인을 곤경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나가는 가루다와 인드라에 의해 따돌림을 당하고 만다. 그 후 나가의 자손들은 가루다나 그와 관련되는 새들의 먹이로 전락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
리그베다나 마하바라타에서 묘사되는 모습과는 달리, 힌두교에서는 휴식처이며 모든 나가들의 왕이며 조상으로 묘사되는 완전히 달라진 형태를 볼 수 있다. 즉 힌두 신화에서는 전쟁에서 뛰어난 용맹과 능력을 지닌 용신들과 용왕들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신들과 항상 가까이에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그림이나 신상들을 보면 장식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혐오스럽게 느껴졌던 나가에 신앙들이 아리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토착신앙이었던 나가신앙이 인도의 아리아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져 왔는가를 리그베다 마하바라타 힌두교의 전통을 통해 고찰해 보았다. 대체로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두 층이 점점 융합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나가는 비를 관장하는 역할에 대한 쟁탈전 및 따돌림에서 神과 가까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바로 神을 의미하고자 했던 아리아인들과 나가(naga)를 대표하는 원주민들간의 융합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불교와 토착 나가(naga)신앙의 관계
그렇다면 인도에서 용신앙은 불교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인도의 나가는 蛇의 일종으로, 이를 崇仰하던 종족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나가(naga) 역시 불교에 유입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변모된 것이다. 불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나 가(naga)는 처음에는 포악하고 난폭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었는데 석가세존의 戒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그러한 면이 없어졌다고 전해온다. 포악하고 간교함으로써 공포의 대상이며 위령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蛇龍이 불타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교정신을 구현하는데 큰 힘이 되고 좋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인도민중을 위협하던 龍이 感化崇佛한다는 것은 곧 대중의 불교귀의에 일대전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기에 초기불교에 있어서 나가의 비중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불교설화에 나타난 나가와 「불본행집경」에 나타난 예이다. 각각에 나타난 나가모습은 善/惡의 두 층면을 다 보여준다.
불교의 전승설화 가운데 무차린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무차린다, 즉 거대한 코브라는 나무뿌리들 사이의 한 구멍에서 살고 있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황홀경의 상태에 도달해 있을 때 거대한 폭풍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알아차리고 어두운 나무 구멍사이에서 조용히 나와 부처의 몸을 일곱 번이나 둘둘 말아 감았다. 그리고 거대한 머리를 펴서 우산처럼 만들어 부처의 머리를 덮어 주고 비를 피하게 하였다. 7일 동안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날씨도 추었지만 부처는 명상에 그대로 잠겨 있었다. 7일째 되던 날 폭풍우가 물러가자 무차린다는 또아리를 풀고 멋진 젊은이로 변해서 두 손을 합장하고 세상의 구원자인 부처에게 예배를 드렸다.
이 전승설화에 의하면 무차린다와 부처의 이미지를 통해서 나가와 불교에 대한 적대적 원리들의 완벽한 화해가 나타나고 있다. 즉 인도에서 부처와 나가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모든 자연의 신들은 지고신들과 함께 육화된 구원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반면 「불본행집경」 迦葉 삼형제품 제 44 를 보면 부처가 毒龍을 교화시킨 내용이 나온다. 마가다국의 동쪽에 이웃한 앙가국에 많은 신자를 거느렸던 가엽 삼형제를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처는 그들을 방문하게 된다. 가엽형제는 불을 절대적으로 신성시하고 존중하여 불의신 ‘아그니’에게 제사지내고 있었다. 신성한 불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火堂에는 불가사의한 마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용이 살고 있었다. 여기서 부처는 용의 화염과 맞서서 대결한다. 다음날 마력을 잃은 용을 탁발용 발우 속에 가둔 부처는 가엽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우안에 든 이것이 독을 품은 용이다 당신들은 독룡이 두려워 화당안에 들어 갈 수 없었지만 나는 법력으로 이 포악한 용을 굴복시켰다.” “어제밤 나는 이 난폭한 용을 교화시켰다. 이 龍은 이제 다시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지 않을 것이다. ” 이후 가엽형제는 부처의 여러 가지 이적 행위를 보고 불문에 귀의하게 된다.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중요한 것은 나가(naga)가 양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전속에서는 포악성, 간교성등과 같은 부정적 성격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불교가 나가를 타종교의 신으로서 다시말해 종교적 대립존재로서 파악한 데서 연유된 것이라 할 것이다.
나가가 포악하면 할 수록, 간교하면 할 수록 불교의 위용과 불법의 가치는 더욱 고양되기에 나가의 부정적인 측면이 보다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가가 불교화되기 이전에는 독용, 악용으로서 질병이나 뇌우같은 재앙의 원인이었는데 불교화된 이후에는 선용이 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교적 측면에서의 사유인 것이다. 따라서 나가(naga)는 지고지존한 석가세존에 조복하면 선용이 되지만 이에 반발 저항하면 퇴치의 대상인 악독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화 과정속에서 대부분 나가는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불교에서의 용은 석가에게 교화된 이후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재구성되어 십대제자와 함께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 안에서는 지위가 낮은 하위 신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불교가 발생됨에 따라 기존의 나가 신앙의 형태가 어떤 방식으로 유입되었는 지를 「불본집행경」과 불교설화를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대체로 포악함으로 표현되는 나가를 교화시킴으로써, 나가를 숭상하던 비불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불교인으로 되는 과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리아인들이 토착원주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리그베다나 마하바라타에서 볼 수 있었고, 후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힌두교전통속에서는 친숙한 융합의 형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불교 속에 유입된 나가는 부처와의 대결속에서 굴복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나가를 숭상하던 비불교인이 불교화되는 과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용은 불교속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 중국
중국의 용은 인도의 나가신앙을 그대로 유입한 면이 있지만, 중국 나름의 독특한 성격을 띠면서 중국인의 의식속에 살아 있다. 인도의 신화적인 틀속에서 생겨난 나가와는 달리, 중국의 용은 토템의 문화속에서 생겨나 후에 유가의 정치적 정당화를 위한 기반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본장에서는 토템신앙으로 출발한 용과, 불교의 유입후 좀 더 이론화된 용의 문화를 살펴 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불교속에서 용의 역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토템신앙의 대상인 용
앞에서 나가(naga)가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파되어, 불교적인 용의 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음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용은 전적으로 인도 나가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일까? 은대에 발견되는 도철문 등의 문양을 살펴보면 뱀의 형상에 두 뿔이 달린 초보적 형상의 용이 등장한다. 이는 불교가 전파되기 훨씬 이전에 중국 본래의 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근대 사학자 이 종동은 토테미즘으로 용의 기원을 설명했다. 그는 중국 고대부족의 종교적 습관이 용의 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고대 중국에는 이와같은 토템이 수없이 많았다. 지금 우리가 성스럽게 여기는 기린, 현무, 주작, 백호등도 모두 부족의 토템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상고시대의 토착민들은 장강과 황하 및 흑룡강 등을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스스로가 처한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특유의 원시예술을 창조․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씨족․부족간의 투쟁과 융합 등에 걸맞는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창조해 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점점 집단적 만남과 그에 따른 융합에 의해 두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용족문화(용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와 봉족문화(봉황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이다. 이와같이 용봉문화는 바로 중화민족의 문명과 그 기원의 표본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의 원시 上古와 近古 문화는 실제로 이 두 문화의 부단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원시인이 어떤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그곳엔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물건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해를 끼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곧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로 인해 원시토템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자연토템 숭배대상물은 자기들 이외의 다른 군중집단과 구별되는 표지로 발전한다. 원시의 용토템은 이러한 상황아래 고대 중국에서 탄생되었다.
봉건 사회에 이르러 제왕의 권력이 일체의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되었을 때 예술적 용봉은 제왕에 의해서 이용되어 제왕․황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에 용은 남성 최고 통치자를 대표하기 시작했고, 봉건제도가 점차 완비되어짐에 따라 용 역시 한 걸음씩 엄격과 복잡함을 띠게 된다.
많은 중국제왕들이 자신의 사회적 권위를 정당화 하고자, 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방이나 한고조( B.C. 204-194)에서 이러한 것을 찾을 수 있다. 한고조는 어머니가 용을 만나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으며, 자라서 용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유방의 경우는 불확실한 가족배경 때문에, 용을 통해 자신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한나라를 세우면서, 용이 하늘과 구름 비 바람을 지배한다는 점을 보고 용의 자손임을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토템문화속에 나타난 용의 모습과, 제왕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용문화는 주역에서 보다 추상화된 이론의 형태로 논의 되고 있다.
御纂周易折中에서는 각각 궤의 형상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진다. 예를 들면 初九 : 潛龍勿用.물에 잠겨있는 용은 쓸모가 없다. 활동하는 때가 아니다. 九二: 見龍在田. 利. 見大人 용이 밭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익. 대인이 나타날 것이다 등이다.
이처럼 주역에서 용은 농경문화에 필요한 비를 관장하여 풍년, 길흉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용은 겨울 동안 연못에서 잠을 자고 봄에 깨어나는 수중 동물이며 천둥신이어서, 밭에 나타나면 풍작을 가져오며, 하늘에 나타나면 비를 내린다. 또한 용이 너무 높이 올라가서 돌아올 수 없을 때 가뭄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미 중국인들은 자신의 토템 신앙으로서 용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후에 유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위한 토대가 된다. 인도에서 보여진 나가 신앙과 기존의 신앙과의 갈등과정과는 달리 중국의 용은 이미 토템신앙으로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로 인해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인도의 용이 쉽게 중국의 용에 유입되었다고 볼수 있다.
현대 중국인들은 그 자신을 “용의 종자” 또는 “황제의 후예”라 고 부른다. 즉 황제는 중국인의 조상, 중국인의 주요신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용은 원시 중국 부족의 토템이었고, 중국 제왕들은 이러한 강력한 상징들을 잡고 수천년동안 권자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2)중국 불교 속에서 나타나는 용의 역할
중국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규명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과 서역지방과의 교통로가 본격적으로 열려진 전한의 武帝시대 (B.C 139-126), 동서 무역에 종사한 상인들로부터 불교를 보고들을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후 불교는 경전의 번역과정인 격의 불교시대를 거쳐 점점 체계를 이루어 중국만의 독특한 천태, 화엄, 법상, 선등의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불교문화속에서 용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고찰해 본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도에서 유입된 나가와는 달리 중국은 고유의 용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토템의 대상에서 왕의 권력의 정당화를 위한 토대를 이루기 까지 용은 중국인의 의식속에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용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주역에서 본 바와 같이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적당한 비는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우물속에서 살고 있는 용,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이미지는 물을 지배하는 힘으로 여겨졌고, 이에 대해 祈願을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 것이다.
중국 불교에서 용은 바로 이렇게 비를 내리는 역할로서 묘사되고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儀式에서 경전을 암송한다. 그들은 비를 내리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경전이 “佛說大方等大雲請雨經” “大雲請雨經” “大雲輪請雨經”등이라고 여겼다.)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벨과, 드럼, 심벌즈와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냄으로써 강력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비가 내릴 때까지 이러한 의식은 지속된다. 기우제에서 “佛說海龍王經”, “佛謂海龍王說法因經”(붇다에 의해 설해진 바다용왕에 대한 경) 등도 암송된다.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과정에서, 죄를 범한 業이 經을 암송함을 통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뭄은 일종의 벌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붇다, 보살, 용왕, 성인 등이 깊은 禪定속에서 心眼에 의해 기도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깨어나게 됨으로써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불교에 있어 용의 모습은 기우제의 대상으로서, 농경문화에서 가장 필요한 비를 관장하는 역할로서 나타난다. 업의 결과로서 가뭄이 생기고 이러한 업의해결을 위해 경전의 암송과 함께 의례가 이루어 진 것이다.
2. 한국불교의 용신앙
이상 인도와 중국의 용신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신앙과 토착신앙과의 갈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도에서는 아리안족과 나가족과의 자리다툼의 과정을 지나 점점 융합의 과정이 이루어 졌고, 이후 불교라는 새로운 틀속에 유입됨에 의해 불교의 세력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중국의 경우도 인도불교가 들어오기전 토착 신앙으로서 용봉문화가 중국인의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인도의 나가 신앙이 자연스게 토착신앙과 융합되었다는 것을 볼 수있었다. 이것은 이미 용이라는 문화가 농경생활에 바탕을 둔 중국인에게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있었고 이 때문에 비슷한 기능을 가진 나가의 신앙은 그대로 융합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용신앙은 어떠한가? 본장에서는 인도와 중국의 사례를 토대로 한국 불교 용신앙의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속에 면면히 살아 있는 용의 모습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주지하듯이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2(372년)때이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에 받아들게 되고 후에 신라가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를 기점으로 불교가 들어오게 됨에 따라, 불교는 국가의 정신적 토대로서 막강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본장에서는 우선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에 나타나 있는 용의 모습을 통해서 역사서에 나타난 용의 모습을 고찰해 본다. 이와 더불어 불교경전내에 묘사되어 있는 용의 모습을 알아본다.
1)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용의 모습
용이 역사의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이다. 여기서 용은 대부분 개국설화적인 내용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의 용은 권위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져, 태조 왕건은 민심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왕통에 용을 끌어들인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왕의 상징으로 쓰이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용의 승천을 주제로 한 「용비어천가」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어진 성군이 태평성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용은 왕이나 권력의 상징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국가적인 용신제나 기우제등에 약간씩 언급될 뿐이며 장원급제와 입신출세, 만사형통 등 상서로운 측면으로 강조되어 기록된다.
즉 용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왕권의 절대적인 토대였으므로 권력층과 민중모두의 의식속에서 자연스럽게 숭상되었으나, 유교를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에서는 점점 정치권과 멀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고려와는 달리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출발한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왕권의 정당화를 용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기 보다 유교의 기본원리를 통해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고 했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의 결과였다.
따라서 유교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더 기반을 확실히 잡은 중국의 용신앙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권력층에서 멀어지면서 민중속에 흡수되어 12지 및 꿈풀이에서만 살아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선 역사서에 나타난 용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 삼국유사
삼국유사에는 불교와 관련된 용이 많이 등장한다. 저자인 일연의 신분이 승려였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또한 유사에서 볼 수 있는 용의 관계는 대부분이 신라에 관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용은 3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불교를 배경으로 등장한 護法龍의 모습이다. 이는 원한을 가진 악룡이 있었는데 이 악룡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둘째는 나라를 수호하는 용이 있다. 이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용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목적은 확연히 다르다. 문무왕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호법용과 호국용의 양면을 드러낸 사례이다.
황룡사 9층석탑(제 27 선덕왕대)條의 대화지룡과 그의 장자인 황룡사 용이 불법수호자이다. 이 條에서 慈藏의 이상은 보리를 구하려는 개인적 이상과 신라의 평온과 삼국의 통일이라는 국가적 이상으로 구분된다. 개인적 이상은 문수보살에 의해 성취되며, 국가의 이상은 두 용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명랑신인(제 27 선덕왕대)條에는 明朗의 이상은 불교 弘布라는 불교적 이상과 신라의 평온이라는 국가적 이상으로 대별된다. 여기서 해룡의 역할은 두 가지를 다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호국룡과는 반대로 악룡도 묘사된다. 악룡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룡의 前身이거나 아니면 그저 악행을 일삼는 용이다.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예가 수로부인을 납치한 해룡이다.
어산불영(가락국 수로왕대)條의 독룡(毒龍)은 훼방자로 묘사된다. 이 條에서 수로의 이상은 가락국의 평온이라는 국가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부처의 위력에 의해 쉽게 성취된다.
혜통강용(제32 효소왕대)條에서 혜통의 이상은 해원(解寃)이라는 개인적 이상, 佛敎弘布라는 불교적 이상, 신라의 평온이라는 국가적 이상으로 대별된다. 이러한 것은 불교적 주술에 의해 성취된다.
수로부인(제 33 성덕왕대)조에서 수로부인의 이상은 신라의 평온이라는 국가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의에 의해 또는 군중의 노래에 의해 성취된다.
이러한 3가지는 용이 훼방자로서 국가적 이상을 위협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처음과 두 번째는 악독룡의 폐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를 불력에 의해 해결하는 반면 세 번째에서는 이러한 폐해가 미미하게 드러나 군중의 노래에 의해 해결하고 있다는 차이가 보인다.
나. 고려사
고려사는 세종 31년(1449)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2년 후인 문종 1년(1451)에 완성된 총 139권의 고려시대 역사서를 기전체로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는 용의 출현과 왕권의 정치적 정당화를 위한 탄생기, 기우제에 나타난 용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종 2년 4월 정사일에 태자가 서경에 갔는데 창고에 청룡이 날아들어와 공중으로 올라 갔는데 잠시후에 창고에서 불이 났다.”
또한 태조 왕건이 태어날 때 신기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용과 같은 형상이 되어 방을 비추고 뜰에 가득 차서 하루종일 서려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였으며 세상을 건질만한 도량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종 12년 4월 날이 가물었다. 경오일에 비를 빌었다. 5월 경진일에 남성 뜰안에서 토룡을 만들어 놓고 남녀 무당들을 모아 비를 빌었다.경인일에 비가 왔다.
숙종 6년 4월 계사일에 날이 가물어 천지, 종묘, 산천에서 비를 빌었다. 갑진일에 다시 태일신에게 제를 지내고 비를 빌었다. 을사일에는 해별에서 무당이 비를 빌었고 정미일에는 임해원에서 용왕도량을 열고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기유일에 또다시 종묘에서 비를 빌었고 병진일에는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양에 비해 용에 관계된 직접적 기록이 드문 편이다. 여기에는 풍수의 용이 비교적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언급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은 대략 기우제의 용과 용의 출현 및 용꿈, 그리고 풍수의 용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먼저 기우의 용은 농경이 중심인 사회에서 강우량은 그 사회의 흥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옛제도는 용을 그려놓고 비를 빌고 나서 3일동안 비가 흡족히 오는 것을 기다려서 수퇘지를 잡아 報祀하고 용의 그림을 물속에 던지는 것이었는데 본조에서는 화룡기우제나 오방토룡기우제에 대한 보시를 입추뒤에 거행하고 있으므로 이는 옛제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화룡과 토룡의 기우제를 지낸 뒤 3일 안에 비의 은택이 흡족하면 곧 입추를 기다리지 말고 길일을 가려서 보사를 지내고 3일안에 비가 오지 않으면 보사를 지내지 말도록 하고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두 번째는 용의 직접적 출현 및 용꿈에 관계된 것이다. 용꿈은 예부터 대길몽중의 길몽이며 왕이 되거나 황제가 될 사람이 꾸는 꿈이거나 횡재수를 만날 꿈으로 여겨져 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용꿈기사는 대개 왕손의 탄생을 알리는 조짐으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용과 관계된 것은 오직 왕만이 누릴 수 있었다.
세 번째는 풍수에 관련된 것들이다. 풍수에서는 起伏이 심한 산을 일컬어 용 혹은 용날이라 하여 용이 굽이치는 모양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기복의 변화가 무쌍한 산이 마치 음양조화를 마음대로 부리는 용의 조화와 서로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산은 반드시 종산이 있고 그로부터 연면히 수만리에 이르는 큰 산맥을 이른다. 풍수설에서는 모든 산의 종산을 태조산이라 하는데 곤륜산은 중국의 태조산이고 백두산은 우리의 태조산이다. 이 태조산에서 뻗어나온 큰 산맥을 지룡이라고 한다. 용에도 귀천 및 장단, 노약이 있어 이를 판별하는 것은 것도 풍수의 큰 목적 중 하나이다. 이렇게 분류된 용은 길룡, 진룡, 흉룡, 독룡, 사룡, 생룡등의 이름이 붙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역사서에 나타난 용의 모습은 당시 정치이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통일신라의 정신적 배경인 불교의 사상을 토대로 호법과 호국용으로서 나타났고, 고려 시대도 마찬가지로 왕권의 불교정책과 더불어 정치적 힘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았듯이 용은 불교적 요소라기 보다 기우제, 풍수사상속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바로 개국의 정치적 이념이 무엇이었는 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현상이다. 조선은 유교라는 틀을 통해서 이루어 졌고 이 때문에 고려시대까지 지배했던 불교는 당연히 억압을 받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삼국시대 이후 護法과 護國龍은 조선 후기에 접어 들면서 기우제 및 풍수사상과 관련된 양상을 띠면서 민중속에서만 살아있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다음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사찰을 토대로 한국속에 살아있는 불교속에서의 용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불교경전속에 나타난 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2)불교 경전에 나타난 용
경전에 의하면 많은 용왕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였다고 한다. 특히 ‘佛本行集經’에 의하면, 석존이 성불한 뒤에 가장 먼저 불타로부터 삼귀오계를 받고 세간에서 최초의 우바새(재가 제자)가 된 것이 용왕이라고 되어 있다.
즉 석존이 성불한 직후에 아직 이 世間(天, 人, 畜生 등의 모든 세간)의 어느 누구에게도 불법의 참 도리를 설하기 전에 천인이나 인간보다도 먼저 축생에 속하는 용에게 설법하여 제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또하나 중요한 것은 이 용이 비록 석존에게 제도되어 우바새가 되긴 하였지만, 석가세존 이전의 拘留孫佛 ․拘那含佛․ 迦葉佛등의 과거불에게도 궁전을 보시하여 인연이 깊다는 것이다. 즉 불법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불타에 귀의한 용의 사례들은 석가불의 출세를 기다리다가 녹야원으로 붇다를 찾아가 삼귀오계를 받고 붇다에게 귀의하였다는 용왕과 일만사천 제용이 삼귀를 받고 모든 고뇌로부터 해탈하여 삼보를 믿었으며, 다시 80억제용중이 삼보에 귀경심을 일으켰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因緣僧護經’같은 經에는 大海龍王이 사람으로 변하여 붇다가 주하는 기원정사로 가서 비구가 되어 수도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도 보이고 있다.
‘대방등대집경’에 의하면 불타가 모든 용왕등에게 불법을 수행하고 받드는 성인주처의 사탑을 수호하고 불자들에게 고양할 것을 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모든 용왕들은 오랜 과거로부터 부촉을 받아 수호하였으며, 현재와 미래에도 세존의 부촉대로 다짐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용은 불법에 귀의하여 정법을 수호하였다. 그러나 모든 용들이 다 불법을 신봉하고 수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용의 세계에는 인간 세상의 이익을 위하는 복덕용이 있는가 하면 세간을 파괴하고 해롭히는 악독용도 있게 된다.
‘정법념처경’에 의하면 “ 용왕에는 2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法行龍이며, 또하나는 非法行龍이다. 하나는 세계를 수호하고 하나는 세계를 파괴한다. 법행용왕이 사는 곳에는 뜨거운 비가 내리지 않고 비법용왕이 사는 곳에는 항상 뜨거운 비가 내려서 불붙는 것처럼 뜨거우며 궁전을 태워버린다.... 福德諸龍은 법행을 따라서 마음이 선하므로 때를 맞추어 비를 내리고 모든 세간에 있는 오곡을 성숙시킨다. 불법승 삼보를 믿으며 佛舍利를 수호한다. 악룡들은 법행을 불순하며, 모든 중생들이 불선법을 행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불경하면 이들 비법 악용의 세력이 증장된다.”
앞에서 보았던 歸佛 護法의 용왕들도 이 法行龍王에 속하며 법행용왕은 법행을 따라서 세간의 이익을 옹호 증장한다는 것이다. 세간의 중생들의 행위에 따라 법행용왕과 비법행용왕의 세력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선업을 많이 쌓게 된다면 법행용왕은 더욱 힘을 얻게 되어 때맞추어 비를 내려 오곡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佛母大孔雀明王經’에는 모든 용왕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생각하면 모든 독을 제거하게 되며 복덕용왕의 이름만 생각하여도 큰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용왕들은 모두가 법행용왕들인 것이다.
아함경에 의하면 용에는 3가지 근심이 있다고 한다. 즉 “하나는 閻浮提에 있는 모든 용이 뜨러운 바람 때문에 피부 및 뼈가 타서 괴로워 한다. 그러나 阿耨達龍은 이런 근심이 없다. 두 번째는 염부제에 있는 용궁에 나쁜 바람이 사납게 일어나 궁내에 불어서 옷을 날려버려 용의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고뇌가 있다. 오직 아누달용왕은 이런 근심이 없다. 세 번째는 염부제의 용왕들이 궁중에서 오락을 하고 있을 때 큰 새가 궁내에 들어와 용들을 잡아먹기 때문에 모든 용왕은 두려워하며 고통을 받게 된다. 오직 아누달용만은 이와 같은 근심이 없다. 그래서 아누달(無熱惱)라 한다.”
아누달용왕에 대해서 ‘홍도광현삼매경’에는 “오랜 옛날부터 복을 지어 보살행을 닦고 六度의 대승행에 견실히 주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구제하여 일찍이 96제불을 섬겨 쌓은 공덕이 헤아릴 수없이 많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일체를 제도하여 죄를 불쌍히 여겨 용으로 나투었으며 ....”라고 한다. 아누달용왕은 비록 용의 몸을 나투고 있으나 보살행을 닦은 대승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경전을 살펴 본 바와 같이 불교속에서 용은 과거의 선업을 통해 붇다의 최초의 재가제자가 될 수 있었고 세간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보살이다.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경우 불교는 보다 큰 세력을 통해 호국과 호법이라는 정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용도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후 권력층에서 밀려나 억압의 상태에서도 민중속에 흡수되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을 제공한 경전을 통해서였다.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윤회의 과정에 엄연히 존재하는 용은 사찰의 탱화나 조각품을 통해서 나타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용은 현재까지 불법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켜주는 존재로서 불교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III. 결론
본 논문의 출발점은 한국 불교속의 용은 어떻게 자리를 잡았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였다.
용의 근원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불교에서 용은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용은 석가가 출가하여 득도한 후 최초의 재가신도였고 축생으로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에 선업을 많이 쌓은 결과라는 것이다. 상상의 동물로서 인식되는 용은 불교의 이론속에서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속에서의 용을 관찰하기 위해 인도, 중국에서의 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의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통해 유입되었고 이러한 과정에 따라 본 논문의 진행도 인도, 중국, 한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인도에서 나가는 뱀의 형상을 가지면서 토착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 아리안족의 인도 정복과 더불어 토착인과의 문화적 갈등은 토착신앙 대상으로 이어졌고 오랜 세월이 지나 나가는 아리안족과 융합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나가는 불교가 발생됨에 따라 불교속에 융합된다.
중국에서 용은 인도의 나가가 유입되기 이전 토템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이후 유교의 발전에 따른 정치적 상황속에서 왕권의 정당화를 위한 상징으로서 자리매김을 한다. 농경문화속에서 비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용은 바로 비를 관장하는 것으로 기우제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의식이 불교에서는 경전의 암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토착신으로서 용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거의 대부분 중국의 용과 같다는 의견이다. 왕권의 정당화를 위한 토대로서 용은 자신의 역할을 해왔으며, 삼국시대, 통일 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불교가 왕권의 정신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호법룡, 호국룡으로서의 역할은 불교에 토대를 두로 이루어 진 것이었다.
조선시대로 바뀌면서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택되고 불교는 억압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용에 대한 관념도 기우제 및 풍수지리사상과 연관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즉 권력층보다는 민중속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고, 사찰속에서 그림이나 조각품으로 살아남아 불교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정치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민중속에서, 불교속에서 영향을 발휘해오고 있는 것은 용의 이미지 속에 의식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기때문이다. 불교는 경전속에 이러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불교를 따르는 자가 있는 한 여전히 龍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