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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성결운동과 동양선교회
박명수
들어가는 말
한국성결교회의 뿌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지금까지 철저하게 무시되었던 것이 영국의 성결운동이다.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은 영국에도 영향을 미쳐 영국에서 큰바람을 일으켰다. 그래서 수많은 성결단체가 영국에서 생겨나게 되었고, 이 단체들은 세계선교에 열심을 가졌다. 이러한 것이 연원이 되어 동양선교회의 형성에 영국의 성결단체들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사실 성결운동은 원래 환대서양(Trans-Atlantic) 운동이었다. 영국에서 일어난 웨슬리의 성결운동은 웨슬리의 생전에 미국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형성된 미국 감리교회는 19세기에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숫자적인 측면이나 영적인 측면에서 영국의 감리교회를 능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 미국에서 다시금 일어나기 시작한 성결운동은 영국에 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매우 왕래가 빈번했다. 특별히 부흥사들 사이의 교류는 매우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디의 부흥운동이다. 무디는 미국과 영국 사이를 오가며 대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무디뿐 아니라 팔머(Phobe Palmer)여사와 같은 많은 성결파 부흥사들도 대서양을 넘나들며 성결의 복음을 전했다. 18세기에는 웨슬리와 휫필드 같은 영국의 부흥사들이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면, 19세기에는 팔머와 무디 같은 미국의 부흥사들이 영국을 방문해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결운동은 단지 환대서양운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시금 아시아의 대륙으로 이어져 전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남아프리카와 인도의 성결운동은 긴 역사와 상당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극동지방에서는 일본과 한국에서 성결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 성결교회는 개신교의 중요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미국과 더불어 세계성결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영국의 성결운동과 그것이 동양선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영국성결운동의 개관을 살펴본 다음에 주로 동양선교회와 관련된 단체들의 지도자들과 특색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영국성결운동
18세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영국에서 미국에 와서 큰 부흥을 일으킨 것처럼 19세기에는 반대로 많은 미국의 부흥사들이 영국으로 가서 큰 부흥집회를 가졌다. 19세기 중엽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이며, 성결 지지자들인 챨스 피니(Charles Finney)와 팔머(Walter and Phoebe Palmer)부부는 영국에 가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피니는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성결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며, 팔머는 웨슬리안 계통에서 성결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19세기 후반에도 또한 많은 미국성결운동의 지도자들이 영국으로 가서 집회를 인도했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에 가서 성결운동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한나 스미스(Hanna Smith)부인이었다. 한나 스미스는 1873년 영국에 도착하여 성결집회를 인도하였다. 당시에 한나 스미스와 더불어 영국을 휩쓸던 부흥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무디였다. 그러나 무디의 메시지는 구원에 관한 메시지일 뿐 그 다음에 온전한 크리스천에 대한 강조는 없었다. 그래서 무디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강조하는 스미스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스미스의 성결운동과 무디의 부흥운동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무디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스미스의 온전한 성화에 대한 강조가 환상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즉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디 진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의 성결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죄에서의 용서가 아니라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성결운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죄의 정복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결운동에서 신앙의 한 차원 높은 단계를 본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성결운동은 무디진영의 비판을 이기기 어려웠다. 무디진영은 영국의 보수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미스의 남편인 로버트 스미스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자 영국에서 스미스의 성결운동은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그래서 스미스는 영국 성결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스미스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몇몇 사람이 다시금 성결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케직성결운동이다.
케직성결운동은 스미스의 성결운동의 계승이다. 그러나 케직운동은 영국의 보수적인 칼빈주의자들의 비판을 의식해서 스미스의 성결론을 칼빈주의적인 용어를 써서 설명했다. 케직성결운동은 웨슬리안 성결론을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이런 케직의 입장은 많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응을 얻게 되었고, 나중에는 영국 복음주의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케직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웨슬리안의 입장은 달랐다. 원래 스미스의 주장에는 웨슬리안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었다. 하지만 케직사경회는 웨슬리안의 입장을 극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비판하였다. 19세기 영국에서 웨슬리안적인 성결운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구세군운동이다. 구세군은 원래 부드(William Booth)에 의해서 시작된 성결단체이다. 부드는 원래 감리교의 교역자로 출발하였으나, 독립된 전도활동을 하기 위해 감리교를 떠나서 구세군을 조직하였다. 구세군은 케직과는 달리 성결에 대해 분명한 웨슬리안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케직파들 가운데는 케직집회가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되어 구세군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케직파와 웨슬리안에 속한 구세군 사이에는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부드는 원래 미국의 성결운동가인 팔머에 의하여 은혜를 받은 바 있으며, 그 뒤에 스미스부부의 집회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부드는 구세군의 성결론을 미국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성결론을 받아 들여서 설명하였다. 부드는 미국의 전국성결연맹의 이론적인 지도자였던 우드(J. A. Wood)의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의 판을 수입하여 영국의 구세군들에게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부드의 구세군은 비록 영국에서 시작했지만 미국 성결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부드에 의하면 성결이란 중생 이후에 주어지는 이차적인 은혜로, 이 은혜를 받으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성이 제거되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새사람이 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부드의 구세군의 특징은 성결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을 결합한 것이다. 부드는 영국의 가장 어려운 환락지대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였다. 이들 환락지대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장소로서 기존교회가 거들떠보지 않은 곳이다. 부드는 이곳에 들어가서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부드는 이런 환락가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드는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속에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인간 내면의 죄성이 제거되어야만 진정으로 환락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부드의 구세군은 성령의 역사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을 강조하는 부흥회를 강조하였다. 물론 구세군이 이들 빈민들을 위하여 구제활동을 하였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강조점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인간 내면의 변화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던 것이다.
부드의 구세군을 비롯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다. 케직사경회가 주로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성결운동이라면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주로 도시빈민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다. 케직사경회는 일정한 곳에 캠프장소를 만들어 놓고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이끌어 갔다. 따라서 케직운동은 주로 이에 합당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서 웨슬리안 운동은 원래 웨슬리가 그랬듯이 도시의 빈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많은 성결단체들은 도시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벌렸다. 온전한 사랑의 실천으로 기존교회가 버려 둔 지역에 들어가 그들을 구원하자는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말한다면 주로 칼빈주의 운동이 중산층을 배경으로 한다면, 웨슬리안은 주로 도시 빈민층을 배경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영국의 성결운동은 세계선교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말, 영국인에 의해서 시작되어 세계선교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한 단체가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이다. 원래 테일러는 중국복음선교회의 소속으로 중국에 선교사로 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 왔다. 영국에 돌아온 테일러는 당시 영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성결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860년대 영국에서는 밀드웨이집회를 중심으로 성결운동이 일어났다. 테일러는 거기에 참여하여 영적인 힘을 얻었다. 그리고 1870년 이후에는 케직집회에 참석하여 자기의 신앙을 간증하기도 하고, 이런 집회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현재 전세계 50여개 나라에 1,400여명의 사역자를 파송하고 있으며, WEC (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으로 알려진 선교단체를 세운 찰스 토마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도 성결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캠브리지대학교의 크리켓선수로 전국민의 스타였다. 스터드는 무디의 부흥집회에 참여하여 회심의 체험을 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보다 깊은 체험을 원했으며, 바로 그것이 성령의 이차적인 세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구세군집회에 참여하여 그가 원하던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었다. 그후부터 그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후 그는 케직집회에도 참여하고, 한나 스미스의 베스트 셀러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이라는 책도 읽었다.
스터드가 어떤 특정한 성결론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신자는 온전한 성결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WEC의 정신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WEC는 성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한 삶(Practical Holiness)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의 증거가 거룩한 성품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이 거룩한 성품은 효과적인 전도사역에 필수요소라는 것을 인정한다. 모든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피부색과 계층과 배경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도 그에 해당한다. WEC은 거룩함에 대한 어떤 특정한 교리를 지지하지 않으나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모든 간증을 기뻐한다.
이상의 것은 영국의 성결운동이 세계선교에 미친 단적인 예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선교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령의 역사는 성결운동가들이 성결을 체험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한데서 출발한다. 성결운동과 성령운동, 그리고 선교운동은 이렇게 상호 연결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 1904-5년 사이에 일어난 웨일즈의 부흥운동이다. 웨일즈의 많은 신자들이 케직집회에 참석하여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런 집회를 웨일즈에서도 열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집회를 준비하였는데 1903년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04년에 다시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죄를 자복하며 성결의 은혜를 간구하였는데, 마침내 1904-5년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 때 칼빈주의 감리교회의 교역자 후보생이던 이반 로버트(Evan Robert)가 이때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로버트가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는데 은혜가 충만하여 8시간이나 계속하여 찬송을 부르는 일이 일어났다. 그후에 로버트는 웨일즈 지방과 각지에 다니며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런데 웨일즈에서 로버트가 인도한 부흥집회는 케직사경회 보다는 오히려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가까웠다. 케직은 조용히 성경공부하는 사경회 스타일이었는데 비하여, 웨일즈의 집회는 열정적인 찬송과 통성기도로 이루어진 집회였다. 무엇보다도 성결론에 있어서 로버트는 분명한 웨슬리안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눌서선교사는 로버트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라벝트목사가 성신에게 직접 지시함을 받아 권면한 대지는 넷이니 (1)은 제죄(諸罪)를 신전(神前)에 마땅히 자복하고, 또 사람에게 해롭게 한 것을 고칠 것, (2)는 생활하는 중에 의심이 나는 일을 버릴 것, (3)은 성신에게 온전히 복종할 것, (4)는 타인 앞에 예수를 믿는다고 명백하게 말할 것 등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으려면 마땅히 남의 죄를 용서해야 할 것과, 성신의 중생시키시는 은혜와 신자에게 성신셰례를 베프시는 것을 구분하여 힘써 가르쳤다.
여기에서 로버트는 중생과 분명히 구분되는 이차적인 은혜로서의 성령세례 곧 성결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런 로버트의 주장은 케직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웨슬리안의 입장에 가까운 것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역사가 베빙톤은 따라서 케직과 웨일즈의 부흥운동은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1907년 대부흥운동은 이 웨일즈의 부흥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영국의 독립적인 웨슬리안 성결단체들
부드의 구세군운동이 19세기 후반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구세군 외에도 많은 성결단체들이 새롭게 생겨나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와 같이 이들도 처음에는 어떤 교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즉 순수한 신앙선교운동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구세군과는 다르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강력한 지도력 밑에 일사불란한 전도활동을 하였지만, 여타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몇몇 개인을 중심으로 신앙으로 뭉친 작은 선교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토마스 쿡(Thomas Cook)을 중심으로 한 클리프대학(Cliff College), 프랑크 크로슬리(Frank Crossley)의 스타홀(Star Hall)선교회, 리더 해리스(Reader Harris)의 오순절동맹(The Pentecostal League), 데비드 토마스(David Thomas)의 만국성결선교회(The International Holiness Mission) 등이 있다. 여기에 또한 영국인 바클레이 벅스톤(Barclay Fowell Buxton)이 일본에서 시작한 일본전도대(Japan Evangelitic Band)도 포함된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는 이들 성결단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9세기 말에 많은 웨슬리안들은 독자적으로 성결단체들을 조직하고, 성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쿡(Thomas Cook)이다. 토마스 쿡은 1884년 성결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클리프대학(Cliff College)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의 책 「신약의 성결」(New Testament Holiness)은 영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성결운동가들에 의해서 사랑 받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은 감리교총리원에 의해서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쿡은 이 책에서 성결에 대한 웨슬리안적인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쿡의 후계자로서 클리프대학을 이끌어 갔던 채드윅(Samuel Chadwick) 역시 영국의 성결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채드윅은 당시의 신학교육에 대해서 “대학교육은 받았지만 성령충만하지 못한 목회는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채드윅은 성결이란 곧 성령충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없는 목회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보았다.
토마스 쿡은 1885년에 몇몇 동료들과 함께 웨슬리안 성결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사우쓰포트집회(Southport Convention)를 개최하였다. 이 집회의 주요한 인물들은 쿡 외에 채드윅, 틴달(W. H. Tindal), 페이지(Isaac E. Page), 브래쉬(John Brash), 맨틀(Gregory Mantle) 등이었다. 이 중에서 맨틀은 1907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감리교선교사 존스의 안내로 전국적으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클리프대학을 중심으로 한 성결운동가들은 <기쁜 소식>(Joyful News)이라는 신앙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성결운동은 대체로 성결지도자를 만들어 내는 학교와 성결의 체험을 강조하는 집회, 그리고 이것을 널리 전하는 잡지, 이 세 가지가 어울려져서 널리 확산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같은 모습은 영국뿐 아니라 이미 미국에서도 널리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결운동이 비기독교국가에 전해질 때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스타 홀 선교회는 프랑크 크로슬리에 의해서 세워졌다. 크로슬리는 영국의 사업가이며, 동시에 구세군운동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그는 일찍이 미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부흥사인 미스 레오나드(Miss Leonard)의 집회에서 성결을 체험하였다. 그는 1889년 8월 4일 영국의 산업도시인 맨체스터의 우범지대인 안코트(Ancoats)에서 한 장소를 빌려 도시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장소는 원래 스타 뮤직 홀(Star Music Hall)이라는 연예인들이 공연하는 음악홀이었는데 이것을 개조하여 도시선교의 센터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웨슬리의 사역을 본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구세군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크로슬리는 이 선교회의 첫 집회를 알리는 안내장에서 “스타 홀 선교회는 현재의 구원(present salvation)을 믿기 때문에 세워졌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케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 이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며, 대신 사랑, 기쁨, 평화, 그리고 안식으로 가득하게 된다”고 기록하였다. 이 안내문에서 알 수 있듯이 크로슬리는 웨슬리안 성결론에 충실했다.
크로슬리는 1890년 봄부터 유명한 웨슬리안들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는 토마스 쿡, 맨틀, 그리고 렌델 해리스(Rendel Harris)부부와 리더 해리스 부부 등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와서 집회를 인도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전국성결연맹 지도자들인 맥도널드(William McDonald)와 왓슨(George Watson) 같은 인물들도 종종 초청되어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흑인 여인이며, 성결운동의 지도자인 아만다 스미스(Amanda Smith) 같은 사람도 초청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경험을 강조하는 성결운동은 인종적인 편견을 뛰어 넘어 성령의 역사에 겸손하게 순종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래서 스타 홀 선교회는 영국의 중요한 웨슬리안의 센터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크로슬리는 모든 죄에서의 해방을 외치는 웨슬리안의 메시지가 온갖 죄로 물든 범죄도시 맨체스터를 변화시킬 수 믿었다. 여기에서 크로슬리는 성결운동과 도시갱신운동을 결합한 것이다.
크로슬리는 “할렐루야! 나는 온전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주로 칼빈주의자들이 웨슬리안 성결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웨슬리 시대부터 있어 온 비판이다. 그러나 크로슬리는 결코 절대적인 완전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결코 절대적인 완전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케직진영과 웨슬리안 진영사이에 성결론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논쟁이 계속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타 홀 선교회는 웨슬리안의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 두 번에 걸쳐 미국의 유명한 성결신학자인 힐스(A. M. Hills)를 초청하여 집회를 인도하게 했다. 이것은 후에 「정결케 하는 세례」(Cleaning Baptism)와 「성서적 성결과 케직의 비교」(Scriptural Holiness and Keswick Compared)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동양선교회가 한국선교를 확장하기 위해 한국선교를 책임질 수 있는 경험 있는 선교사를 찾다가 스타 홀 선교회에서 사역자로 일하고 있던 존 토마스(John Thomas)를 발견하고 그를 한국선교담당자로 임명했다. 존 토마스는 1910년부터 약 10년 동안 한국성결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배경이 되는 단체가 바로 스타 홀 선교회이다. 스타 홀 선교회는 영국에서 대표적인 성결집회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자체 내에 성경학교를 만들어 사역자를 양성하였고, 또한 <성결의 길>(Way of Holiness)라는 잡지를 만들어 그들의 사역을 널리 알렸다. 토마스가 여기에서 미래의 사역을 준비했음은 분명하다.
오순절동맹은 리더 해리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해리스는 볼리비아의 재무관으로 일한 바 있으며, 후에는 영국에서 유명한 변호사로 활약했다. 그는 무디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으며, 또한 케직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몰(H. C. Moule)의 영향도 받았다. 해리스는 1885년에 스펙 로드 홀(Speke Road Hall)을 사서 부흥집회를 열고 스펙 홀 선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87년에는 부속 건물까지 사서 약 1,400석 규모의 집회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 해리스는 1889년에 웨슬리안 부흥사가 인도하는 성결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영국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해리스는 미국의 왓슨이나 샌포드(F. D. Sanford) 같은 웨슬리안들과 많은 교류를 나누었고, 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런 영향의 결과로 1890년대 말에는 스펙 홀 선교회를 “오순절 선교회”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여기에서 19세기 말의 웨슬리안은 성결과 성령세례를 동의어로 사용하였고, 더 나아가서 이것을 오순절운동이라고 불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웨슬리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성결운동은 오순절운동으로 이해되었으며, 여기에서 근대의 오순절 운동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해리스는 스펙 홀에서의 사역외에 초교파적으로 기도동지들을 모으고, 오순절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오순절선교기도연합회(Pentecostal Mission Prayer Union)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두 단체를 합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 1891년에는 두 단체를 합하여 오순절기도동맹(Pentecostal League of Prayer)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해리스가 “동맹”(leagu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가들은 교파조직을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가능한 대로 기존교파와 같은 조직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교파조직 보다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교제하며 선교하는 선교회 조직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동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런 용어는 이미 미국의 성결운동가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해리스는 1891년 1월에 신앙잡지 <불의 혀>(Tongues of Fire)를 시작하였다. 이 잡지에서 해리스는 오순절기도동맹의 특별한 기도제목을 밝혔다. 그것은 모든 회원들은 서로를 위하여, 오순절적인 선교사역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성령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체는 교파확장이라는 세속적인 방법을 배제하며 영국과 전세계에 성서적 성결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선언하였다. 성결운동은 초기부터 세계선교에 힘을 썼던 것이다. 이 오순절동맹은 1896년에 미국지부를 결성하고, 19세기가 지나갈 즈음에는 영국과 전 세계에 50여개의 집회소를 갖게 되었다.
해리스는 성결론과 오순절신앙에 대해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중구원」(Fourfold Salvation), 「죄는 필수적인가?」(Is Sin a Necessity), 「섬김을 위한 능력」(Power for Service) 등이다. 그리고 해리스는 스펙 홀 집회 외에도 스타 홀 집회와 같은 웨슬리안 성결운동 집회에서 강사로서 활약했다. 이러는 가운데 그는 케직사경회의 지도자인 웹-펩로(Webb-Peploe)와 성결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웹-펩로는 케직의 지도자 마이어(F. B. Meyer)와 함께 웨슬리안을 가장 많이 비판한 사람이다. 웹-펩로는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을 동안은 어떤 인간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해리스는 케직파들에게 만일 성서에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살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한 구절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는 100파운드를 상금으로 주겠다는 공식적인 제의를 하였다.
해리스는 인간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궤계 가운데 가장 교묘한 것이 죄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탄은 정통 기독교인들에게는 죄를 너무 과장해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가르치고,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너무 무시해서 아예 죄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안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죄성을 무시하지도 않고, 정통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웨슬리안의 입장은 인간의 심각한 죄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다는 것이다. 케직과 해리스 사이의 논쟁에 많은 웨슬리안들이 해리스를 지지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사람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유명한 감리교도 휴즈(Hugh Price Hughes)였다. 휴즈는 스미스부부에게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개혁을 복음적으로 잘 연결한 사람이다. 휴즈는 바로 해리스의 입장이 정확하게 웨슬리가 가르친 것이라고 해리스를 지원하였다.
해리스의 사역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영국의 유명한 회중교회 지도자였던 홀톤(R. F. Horton)을 웨슬리안 진영으로 인도한 것이다. 경건한 신앙인이며, 지성인이었던 홀톤은 무디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았으나 어딘가 영적으로 공허함을 느꼈다. 그는 무디의 집회에 대해서 “무디의 집회는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했으나 그 뒤에는 공허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공허함 때문에 많은 교회는 쇠약해져 가고 있다”라고 비판하였다. 홀톤은 1890년에 해리스의 집회에 참석하여 제 2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죄의 용서뿐 아니라 죄 자체로부터의 해방까지도 경험했던 것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역사가인 베빙톤은 19세기 말 영국 성결운동의 부흥을 빅토리아시대의 낭만주의와 관련시켜서 해석한다. 영국의 성결운동은 당시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복음주의는 칼빈주의와 웨슬리안의 양 진영에서 커다란 성결운동을 만들었다. 물론 교리적인 차이는 있지만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신자가 오순절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할 때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결운동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베빙톤의 주장이다.
해리스의 오순절동맹은 동양선교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나까다 쥬지에게 영향을 미쳤다. 나까다 쥬지는 미국에서 무디성서학원을 다닐 때 이 오순절 동맹과 관계를 맺었으며, 영국에 가서 이 오순절동맹의 스펙 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도 받았다. 나까다가 일본에서 만든 신앙잡지의 이름은 바로 오순절동맹의 잡지와 같은 이름인 <불의 혀>이다. 나까다는 오순절동맹에서 해리스의 후계자로 활동했던 오스왈드 챔버스를 일본에 초청하여 함께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만국성결선교회는 리더 해리스의 추종자의 한 사람인 데이비드 토마스에 의해 세워졌다. 토마스도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무디의 집회를 통하여 중생하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1890년대 초 토마스는 해리스의 집회에 참석하여 성결에 대해서 들었고, 1891년에는 미국 성결운동의 지도자인 왓슨(G. D. Watson)의 집회에 참석하여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이때부터 토마스는 철저한 웨슬리안 성결운동가가 되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영국의 성결운동은 미국의 성결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6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전국성결연맹(National Holiness Association)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이들은 세계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영국이었고, 이미 스미스부부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던 성결운동이 이들 미국의 웨슬리안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게 되었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주로 스미스의 후계자들이 칼빈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웨슬리안의 진영을 형성하였다. 토마스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영국의 성결운동에 미친 미국 웨슬리안의 영향은 매우 지대한 것이다.
해리스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토마스는 오순절동맹의 사역자가 되었다. 토마스는 해리스의 정신에 동의했지만 한 가지 점에서 해리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그것은 조직의 문제였다. 해리스는 결코 자기의 조직을 강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해리스는 성령충만한 교인들을 만들어 그들이 각자의 교회에 들어가 그 교회를 갱신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오순절동맹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교회에 돌아가면 그들의 교회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뜨거운 신앙을 잃어버리고 옛생활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토마스는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고, 계속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마스는 1906년에 독자적으로 성결선교회를 만들었으며, 1917년에 만국성결선교회로 그 이름을 개칭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은 대부분 기존교파제도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토마스의 경우에서처럼, 20세기 초에는 많은 성결단체들이 조직의 필요를 느껴, 유사교파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이나 영국이나, 또는 아시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의 만국성결선교회도 다른 성결단체와 비슷한 발전을 했다. 이 단체는 매해 부활절을 기해서 배터시(Battersea)에서 연례성결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에는 스타 홀 선교회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전국성결연맹의 인사들이 강사로 참석하였다. 1918년에는 <성결선교지>(Holiness Mission Journal)를 창간하였는데, 여기서 이 선교회는 “온전한 구원의 진리, 즉 죄인을 위해서는 중생의 도리를, 모든 신자들을 위해서는 신자의 특권으로서 성령과 불세례를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즉 불신자에게는 중생의 복음을, 신자에게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성결교회의 초대 감독인 존 토마스(John Thomas)는 바로 데이비드 토마스의 친동생이다. 토마스는 형의 영향을 받아 성결운동가가 되었다. 그가 비록 스타 홀 선교회에서 일했지만 형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데이비드 토마스는 스타 홀 선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영국에서 동양선교회를 지원한 주요인물이다.
일본전도대(Japan Evangelistic Band)
영국에서 생겨난 성결단체 가운데서 가장 직접적으로 동양선교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가 일본전도대이다. 일본전도대는 파젯 윌커스(Paget Wilkes)가 바클레이 포웰 벅스톤(Barclay Fowell Buxton)과 함께 1903년에 만든 일본선교를 위한 영국의 성결단체이다. 비록 일본전도대는 1903년에 만들어 졌지만 이들의 활동은 이미 1890년부터 일본에 선교사로 와서 활동한 벅스톤의 사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벅스톤은 일본에서 많은 성결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일본의 성결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벅스톤을 “일본성결운동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 동양선교회의 중요한 일꾼들이 거의 벅스톤과 일본전도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벅스톤은 영국의 성공적인 사업가요 열심있는 평신도인 토마스 벅스톤(Thomas Fowell Buxton)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토마스 벅스톤은 선교에도 열심이어서 대영성서공회의 위원이었으며, 런던도시선교회의 회계로서 활약하였다. 벅스톤의 생애에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버지였고, 또한 그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그를 재정적으로 책임져 주었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부유한 영국의 상류가정에서 태어난 벅스톤은 거기에 걸맞게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79년 캠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벅스톤은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운동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벅스톤이 캠브리지대학교 생활 중, 그의 미래의 사역을 위해서 가장 의미있었던 일이 바로 캠브리지대학교 내의 기독학생회(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에 가입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 대학생들과 같이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82년 11월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가 캠브리지대학생들의 초청으로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이 집회의 마지막 날에 벅스톤은 무디의 설교를 따라 결단하게 되었으며, 그후 그는 전도자의 길로 가기로 작정을 하였다.
벅스톤은 그후 케직사경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무디의 집회에서 중생의 경험을 한 그는 보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중생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의 정결과 성령의 세례”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다. 케직은 중생 이후의 더 큰 은혜를 추구하도록 가르쳤다. 캠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벅스톤은 성공회의 성직자가 되기 위해 케직의 지도자인 웹-펩로의 부제(副祭)로 들어갔다. 웹-펩로는 케직파 가운데서도 가장 반 웨슬리안적인 경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벅스톤은 웹-펩로와는 달리 케직파 중에서 가장 웨슬리안에 가까운 성결론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케직은 어떤 교파가 아니기 때문에 분명한 교리 같은 것을 정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모임에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용인될 수 있었다.
벅스톤은 신자가 온전한 성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 곧 심령의 성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벅스톤은 성결은 “낡은 부패성은 제거되고,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깨끗한 마음이 덧입혀지는 마음의 성결이다. 성결은 단지 죄의 억압(suppression of sin)이 아니다. 죄의 억압은 단지 인간의 덕목의 결과일 뿐이다. 오히려 성결은 죄악에 물든 본성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웨슬리안적인 견해이다. 벅스톤은 일본에서 이런 성결론 때문에 성공회 성직자들 가운데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자기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벅스톤은 원래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산골도시인 마쯔에(松江)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선교를 자원하여 성공회의 해외선교기관인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소속으로 1890년 일본에 오게 되었다. 일본에서 벅스톤은 위에서 언급한 성결론 이외에도 몇 가지 점에서 성공회 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첫째는 선교지에 관한 문제였다. 일본의 성공회 주교는 벅스톤에게 성공회 교구에서만 사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벅스톤은 복음은 지역의 한계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성공회 교구의 범위를 넘어서서 활동했다. 둘째는 우상숭배의 문제이다. 영국성공회는 일본의 종교적 작품들을 존경했다. 하지만 벅스톤은 그것들을 우상숭배로서 비판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기존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벅스톤은 성공회의 고교회적인 전례주의를 비판하고, 은혜의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가졌다. 벅스톤의 이러한 태도는 성공회의 감독과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도 벅스톤은 비교적 자유롭게 자기의 선교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벅스톤의 선교에 대한 모든 비용은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가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미국의 심프슨(A. B. Simpson)으로부터 벅스톤에게 일본선교의 책임자로 일해 달라고 하는 부탁이 왔다. 벅스톤은 심프슨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심프슨도 벅스톤과 비슷한 성결론을 갖고 있었고,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벅스톤은 성공회를 떠나지 않았다.
벅스톤과 같이 일본의 성결운동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 파젯 윌커스였다. 벅스톤은 1897년에 윌커스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함께 사역을 하였다. 윌커스는 벅스톤과 더불어서 일본의 성결운동을 위해서 크게 일했다. 윌커스는 1892년 3월에 마이어(F. B. Meyer)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 회심 후 몇 주 후에 윌커스는 스타 홀 선교회의 프랑크 크로슬리, 오순절동맹의 해리스, 신앙선교회의 고반(John George Govan), 그리고 케직과 구세군에서 활동하던 그럽(George Grubb) 같은 웨슬리안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윌커스는 웨슬리안 성결론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이 성서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윌커스는 1892년 가을에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윌커스는 웨슬리의 저서들을 공부하게 되었다. 웨슬리 역시 옥스퍼드의 학생이었다. 또한 윌커스는 캠브리지기독학생회를 본 따서 만든 옥스퍼드기독학생회에 참가해서 열심히 성서를 공부하고, 기도회에 참석하며,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후 그는 스타 홀 선교회에서 일하는 바트로프(Gertrude Barthrope)와 만나서 1897년 결혼하게 되었다. 원래 윌커스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갈 생각이었으나, 그의 성결론이 웨슬리안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이때 마침 일본에서 벅스톤이 윌커스를 초청한 것이다. 그래서 1897년 8월 14일 윌커스는 일본선교를 위하여 영국을 떠나게 되었다.
비록 윌커스가 웨슬리안 성결론을 믿었지만, 성결의 체험은 분명하지 않았다. 윌커스가 보다 분명한 성결의 체험을 한 것은 일본에서였다. 벅스톤은 일본에서 영어권의 선교사들을 위해 성결집회를 매해 개최하였는데, 그때 중국내지선교회의 허드슨 테일러가 강사로 초청되어 설교하였다. 이 집회에서 윌커스는 그의 오순절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윌커스는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갖고 성결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윌커스가 5년 동안 일본에서 선교한 뒤에 안식년을 맞이해 영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윌커스는 영국의 여러 집회에 다니면서 성결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첫 사람의 부패성이라고 지적하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것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외쳤다. 윌커스는 동시에 일본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일본선교를 도우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전도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대표는 벅스톤이었고,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단체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실질적으로 일본전도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윌커스였다. 또한 벅스톤은 윌커스에게 모든 선교사역을 넘겨주고 1902년에는 일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후에도 벅스톤은 일본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1908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에서 대규모의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일본전도대는 일본과 영국에서 성결집회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또한 많은 성결책자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윌커스는 성령의 결과로서 성결뿐 아니라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무디가 매우 강조하던 것이었다. 사실 19세기 후반의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에게는 성령의 역사란 성결과 능력이었다. 그래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지도자인 힐쓰는 「성결과 능력」이라는 책을 썼고, 이것은 웨슬리안 운동의 고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윌커스 역시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윌커스의 사역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사역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미국 나사렛교회는 교역자 후보생들에게 윌커스의 책을 필독서로 요구하고 있다. 무디성서학원의 교장을 지낸 토레이는 윌커스의 섬김의 원동력을 세 번이나 읽고, 성서 외에 다른 한 권의 책을 추천하라면 이 책을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벅스톤과 윌커스의 사역이 일본성결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일본인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일본전도에 나서게 하였기 때문이다. 벅스톤은 일본 마쓰에 근처의 아름다운 산골 아까야마(赤山)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일본 전역의 젊은 청년들을 모아 성서와 전도훈련을 하였다. 벅스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도하는 것보다 일본인이 직접 일본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곳 아끼야마 산장을 통해 많은 일꾼들을 길러내어 일본교계에 배출하였다. 벅스톤과 윌커스는 결코 자신들의 교파를 따로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능한 전도자를 양성하여 일본교계에 배출하므로 일본을 복음화하는 데 공헌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카우만과 나까다가 일본에서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벅스톤은 사사오 데쓰사브로와 같은 인물들을 보내어 그들의 사역을 돕게 하였다. 사사오 데쓰사브로 외에도 이다니와 요네다 같은 일본성결교회의 지도자들도 벅스톤의 제자들이다. 동양선교회 외에도 구세군, 자유감리교회 등에서도 벅스톤과 윌커스의 많은 제자들이 활약하였다.
나오는 말
이상에서 영국의 성결운동을 웨슬리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영국의 성결운동은 동양선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물론 동양선교회의 주요 배경이 미국의 성결운동이지만 영국의 성결단체들이 동양선교회에 미친 공헌도 간과할 수 없다. 나까다 쥬지는 오순절동맹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초대 동양선교회선교사인 존 토마스는 스타 홀 선교회의 사역자였다. 그리고 스타 홀 선교회와 더불어서 만국성결선교회의 데이비드 토마스는 영국에서 동양선교회를 지원하는 주요인물이었다. 또한 사사오 데쓰사브로를 비롯한 동양선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은 벅스톤의 제자들이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이들에게 빚진 것이 많이 있다.
이와 같이 동양선교회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한 영국성결운동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가? 지금까지 서술한 것을 토대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의 성결운동의 지도자인 팔머부부와 스미스부부가 영국에서 대규모의 집회를 인도했고, 특별히 19세기 말에는 미국의 전국성결연맹의 지도자들인 왓슨, 우드, 힐쓰, 맥도널드 같은 사람들이 대거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성결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성결론 자체에 있어서도 영국의 성결운동은 미국의 성결운동가들의 성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은 칼빈주의자들과 심각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의 영국교회는 무디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영국교회 내에는 또한 무디의 메시지에 만족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무디가 단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할 뿐, 그 이상의 차원 높은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케직사경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케직운동은 대부분 칼빈주의적인 경향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모든 죄에서의 온전한 해방을 주장하는 웨슬리안을 반대하였다. 여기서 케직과 웨슬리안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사실 많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지도자들은 무디에게서 은혜를 받고, 케직을 거쳐 웨슬리안으로 전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웨슬리안의 온전한 성화가 가장 성서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셋째, 영국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도시선교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주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던 케직과는 달리 웨슬리안은 기존교회가 버리고 간 도시빈민굴에 들어가서 그들을 온전한 성화의 복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웨슬리안은 모든 도시문제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죄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이 제거 될 때만이 그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도시선교의 모습은 구세군이나 스타 홀 선교회 등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넷째, 영국의 성결운동은 세계선교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다. 신자들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는 전도의 사명을 갖고, 미전도지역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 생긴 성결단체들은 곧 바로 세계선교에 나서 자기들의 나라와 거의 동시에 세계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어떤 단체들은 “만국성결선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의 단체에 “만국”(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세계선교에 대한 자신들의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010.2.18. 니나]
단림세 10.02.18. 19:51
폴.. 10.02.19. 0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