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칠금동에 위치한 탄금대는 울창한 송림과 조각공원 그리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표기는 탄금공원으로 되어 있다.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되고 조정지댐의 호수와 근접해 있어 주변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으로 지방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륵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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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인데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실왕(嘉悉王) 당시 가야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건너오게 되었고
진흥왕은 신라의 청년 중 법지(法知)·계고 (階古)·만덕(萬德)을 뽑아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자, 이곳을
탄금대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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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장군이 왜군을
맞아 격전을 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는 바위 절벽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이곳을 12번이나
오르내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보기에도 매우 가파르고 위험스러워 보여 그 위급했을 전시에
어떻게 이곳을 오르내렸을까 싶다. 하지만 열두대에서 보는 강변의 경치는
참 아름답고 물의 흐름이 마치 가야금 소리에 흔들리는 듯 보인다.
충주호의 건설로 많은 곳이 물속에 잠겼지만 이곳은 오히려 경치가 좋아져
특히, 탄금대입구~탄금대의 구간은 벚꽃계절이 되면 많은 사람이 봄을 느낄수 있다.
탄금대에는 악성 우륵 선생 추모비, 신립 장군 순절비, 감자꽃 노래비,
이승만 친필휘호가 새겨진 충혼탑, 탄금대비 등이 있다.
「탄금대에서 본 충주댐 조정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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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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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공원은 산책로를 따라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는 충혼탑과
감자꽃노래비, 신립장군 순절비, 악성우륵선생 추모비 등을 차례로 지나며
탄금정과 열두대 그리고 대흥사를 볼 수 있다.
당일 여행 코스로 중앙탑(중앙탑 공원)과 중원고구려비(10분거리) 그리고 탄금공원을
연계해서 여행을 하기에 부담이 없어 가족 나들이로 제격이다.
「탄금대 신립장군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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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우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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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가는 길
< 자가운전 >
영동고속도로 이천I.C를 빠져나와 충주 방면으로 가는 3번 국도를
이용한다. 3번 국도를 달리다가 장호원에서 38번 국도로 이어지는데 이
도로를 타고 계속 직진을 하면 도로 양쪽으로 온천지구에 접어든다.
온천지구를 지나 계속 직진하다가 충주·탄금대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여 지방도로를 달린다. 왼편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하지만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다. 한참을 달리다보면
중원고구려비, 중앙탑을 차례로 지나고 충주 시내 방면으로 진입하자마자
탄금공원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간다.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할 때에는 일죽I.C를 빠져나와 충주·제천 방면으로
가는 38번 국도를 이용한다. 나머지는 위의 방법과 동일하다.
< 대중교통 >
서울 동서울버스터미널이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충주행 시외버스를
이용해 충주에 도착한후 탄금공원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거나 택시이용시 기본요금거리이다.
입장료는 어른 800원, 청소년 500원, 어린이 300원이며 주차료는 1일 1,000원이다.
▣ 탄금대의 유래 ▣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륵은 가야국의 음악가로서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 곡조 12곡을 지은 사람이다. 진흥왕 12년(서기551) 쇠퇴해 가는 가야국을 떠나 가야금을 들고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받아들여 국원성(지금의 충주)에 살게 하면서 계고와 법지, 만덕을 보내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우륵은 세 사람의 재능에 따라
각각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그런데 세 사람은 우륵이 가야에서 지은 12곡의 곡조가 번거롭고 음란하다 하여 따로 다섯 곡을 지었다.
우륵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5곡을 다 들어본 후에 "재미있으되 저속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올바른 음악" 이라고 하며 "왕에게
나아가 연주하라"고 했다. 왕이 듣고 기뻐하자 신하들이 "가야는 망한 나라인데 그 나라의 음악을 취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간언 했다.
그러나 진흥왕은 "나라를 잘못 다스려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하면서 이 음악을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는 막중해서 거의 통치행위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녔다. 즉 음악은 구성원의 일체감과 결속력을 강화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방편
구실을 했다. 그러므로 가야의 음악가가 신라로 넘어오고 가야의 곡조가 신라에 와서 개작되었다는 것에서 이제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륵은 경치 좋은 강가 산 위의 높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며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탄금대라 전한다. 탄금대 아래의
나루터는 우륵이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가 쉬던 곳이라 하여 금휴포(琴休浦)라 하며, 강 건너 마을인 가금면 창동리 창골에는 우륵이 탄금하던
때 그 소리가 들렸다 하여 청금대(聽琴臺)라 불리는 곳이 있다.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申砬, 1546∼1592)의 군대가 왜적에게
크게 패한 뼈아픈 전적지이기도 하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의 대병력은 조선 땅을 파죽지세로 내달아 겨우 십여
일이 지나자 문경새재를 넘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동안 북방의 육진방비에 공이 커 용맹한 장수로 이름을 떨치던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충주로 내려보냈다. 문경새재와 충주일대의 형세를 살핀 신립은 아군의 병세가 약하고 왜군은 수가 많으니 지형이 험한 새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깨뜨리자는 부장 김여물과 막료들의 건의를 제치고 탄금대를 싸움터로 정했다. 왜적들을 충주들판으로 끌어들여 기병으로 물리치려 했던 것이다. 신립은
본디 북방 유목민을 상대로 무명을 날리던 사람이라 기병전에 익숙했고 온성병사와 함경도부병사로 근무할 때도 늘 500명의 정예기병을 두어 야인을
물리치곤 했다. 또 왜적이 이미 새재 바로 아래까지 이르렀고 휘하의 군사는 거의 오합지졸이었으므로 서둘러 진을 옮기기보다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워야만 승산이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4월 28일 새벽,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의 본진이 충주성으로
쳐들어갔다. 신립은 충주성으로 내달았으나 전날 내린 비로 들판과 논이 곤죽이 되어 기병은 맥을 못 추었고 아군이 채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일제히 출격함으로써 조선의 관군은 크게 지고 말았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십 명을 죽인 뒤 마지막
힘이 다하자 강물에 몸을 던졌다. 신립의 군대를 믿고 피난하지 않았던 충주지방 사람들은 다른 지방보다 더 많은 희생을 당했다. 신립마저 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왕은 피난 짐을 싸기 시작했고 충주를 뚫은 왜적은 곧장 쳐 올라가 5월 2일에 서울마저 함락 시켰다. 이로써 조선 전체는
오랜 대란에 휩싸였다. 탄금정 뒤편의 강 쪽으로 향한 벼랑은 열두대라 불린다. 신립은 최후의 싸움을 펼치며 군사를 독려하느라 또는 뜨거워진
활줄을 식히느라 이 벼랑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지만 끝내 이 곳에서 몸을 던졌다. 탄금대에는 1953년에 세운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1977년에
세운 악성우륵추모비, 1978년에 세운 신립장군전적비, 1968년에 건립된 권태응의 감자꽃노래비등이
있다.
지명 유래 그리고 전설
1. 대문산(견문산)(현재 지명 - 칠금동에속한다.)
대문산이란 칠금동에 있는 한 개의 구릉지대인데 일명 "탄금대"라고 부르는 곳이다. "조선사"란 책자에 보면 신라 때
"김생"이 금가면 반송에서 거주할 때 일이다. 그 때만 해도 이 대문산은 금가면 반송산의 연맥으로서 북창 강물이 이 견문산을 안고 돌아
달천평야의 일부를 침식하고 나갔다고 한다. 따라서 여름 장마 때가 되면 달천평야는 물바다가 되어 농사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
때 우륵도 이 견문산에 와서 가야금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 장마 때의 광경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을 하였다
한다. 어느날 김생을 찾아가 불심은 자비가 앞서야 하는 법인데 어찌 농민들의 이 고통을 외면하느냐고 간곡한 말을 하니까 김생이 그
사실을 알아본 후에 어느날 밤 김생사 법당에 들어가 주문을 외우고 난 뒤 부적을 써서 한 바위에 붙이고 나서 하늘을 향해 합장 재배하자 별안간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이 반송산 한 구석을 수십차례 내려 때렸다. 천지가 무너지는 굉음이었다. 다시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니 이번에는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의 소나기가 퍼부으며 강 바닥을 파서 달천평야 쪽을 막고 벼락으로 잘라진 반송산 허리로 물을 넘겨 강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로 인해 한줄기로 이루어 졌던 반송산과 대문산은 끊겨 대문산은 홀로 떨어진 독산(獨山)이 된 것이라 하며 그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다른 속설에 의해서이다.
2.대문산이라고 불리우는데.
천지가 개벽할 때에 달천강의
상류인 보은 속리산으로부터 한 작은 산덩어리가 떠 내려왔는데 그 위에 개가 타고 내려와 충주에 들어오게 됐다고 해서 개견자의 견문산(犬門山)이
된 것이라 말한다. 견문산이라고 하던 것이 어느새 점 하나가 빠져 큰대자의 대문산(大門山)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한양에서 충주를
찾아올 때 이 산이 대문의 역할을 했으므로 대문산이라고 지은 것이라고 하며 현재는 통상 탄금대와 더불어 견문산 대신 대문산이라 부르고
있다.
3.신립장군의 숨은 이야기
신입장군이 젊어서 도총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라일로 인해 동분서주하다가 지금의 양주 근처에서
날이 저물었는데 밤길을 걷다가 어두워서 하룻밤을 쉬어 가려고 인가를 찾다보니 산중에서 등잔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반갑게 달려가
보니 고래등같은 큰 기와집이었다. 대문간을 들어서며 주인장을 불렀는데 나타난 것은 어여쁜 처녀였던 것이다. 신립이 "나는 과객인데
일모하기에 하룻밤을 쉬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오" 하고 승낙하기를 청하니 그 처녀는 한 마디로 거절을 하고 나서는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신립은 "어른들은 다 어디 갔기에 소녀가 나왔으며 눈물을 흘리는 연유가 무엇인고..." 하고 다그쳤다.
처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하기를 "저희는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밤중이면 괴물이 나타나서 가족을 차례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홀로 남은 소녀의 차례입니다." 하고는 흐느껴 울어댔다. 신립은 자못 기이한지라 한참 눈을 감고 섰다가,
소녀 보고 울음을 그치라고 하더니 두 눈섭을 곤두세우며 말을 이었다. "걱정말라. 그것은 오늘 밤 내가 내가 처치해 주마" 하고 장담을
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앉아서 상세한 내막을 듣게 되었다. 밤도 오래되니 괴물이 나타날 시간이 되었다. 신장군은 투구를 갖춘 후
문 옆에 잠복하고 서 있었다. 과연 야삼경이 되자 닭의 홰치는 소리가 나면서 공중으로부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더니 온 집안을 한바퀴 돌아서
소녀가 있는 방을 향해 덤벼 드는 것이었다. 신장군은 때를 놓칠 세라 장도를 빼어 들고 비호같이 덤벼서 내려치니 괴상한 소리와 함께 마당
복판에 나뒹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 마리의 닭이었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처녀는 실신을 하고
누워있었다. 신장군은 처녀를 소생시키고 나서 닭괴물의 내력을 들었다. 이 집에서 수 십년간 길러온 암탉이 있었는데 늙어서 알도 못낳고
보기도 싫고 해서 강물에다 버린 일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닭이 다시 들어왔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닭의 보복이 아니었나
추측이었다. 원인이야 어쨋든 흥분과 감격으로 밤이 밝았다. 신장군은 처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부디 굳세게 살라고 당부를 한 다음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 때 처녀는 갑자기 신장군의 손을 잡고 또 울면서 이몸은 이미 죽은 목숨이오니 생명의 은인에게 수족이 되겠으니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신장군은 그 당시 권율장군의 사위였는데 명문가로서의 엄한 교훈도 있었거니와 천하명장으로서 한 소녀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은 대의명분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냉정하게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쯤 가자니까 뒤에서 "장군님, 장군님"하는 애닯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장군이 조급히 돌아보니 그 집은 화염에 쌓여 있고 그 처녀는 지붕에서 손을 흔들며 "장군님은 나를 버려도 나는 죽어서
장군님을 따르겠습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분신자살하였다. 그 후부터 신립에게 무슨 애로사항이라도 있으면 그 처녀가 꿈에 나타나서 암시를
해주므로 의사 결정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장군이 도순변사로 임명을 받고 국토방위의 중책을 지게 되었는데 신립이 충주지방으로 가서 조령에서
왜적을 분쇄하려고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조령에 포진을 하고 하룻밤에 꿈을 꾸니 역시 그 처녀가 나타났다. "장군님 어째서 그
험한 산에서 포진을 하려고 하십니까? 저 넓은 충주평야로 적을 유도해서 초개처럼 섬멸시키는 것이 천하명장의 기개라고 생각되옵니다." 이
꿈을 깨고 보니 오합지졸을 데리고 산중에 풀어 놔 봐야 도주자가 생기는 등 대열에 질서만 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로 인해 결국 패전을 하고 신립이하 수천명의 장병이 죽음은
그 원망은 그 처녀에게 탓으로 돌아갔다..
탄금대 동편 늪언덕에 있는 마을을 옷갓이라고 부르는 유래는
탄금대 동편 늪언덕에 있는 마을을 옷갓이라고 부르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옷갓서 올려다 보면 목행동쪽에 있는 마을이 능바우 마을이다. 이 마을에 복성군 사당이
있는데 이 복성군이 마을에 살 때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복성군의 이름은 권언이고 조선 세조 때의 무신이며 중추원 부사까지 지내던 분인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계유정난 때 정난공신이었다. 그래서 반역도로 몰리게 되자 낙향을 하게 되었는데 은신처로 찾아온 곳이 그의 고모부가
살던 이 옷갓마을이었다. 그 당시 옷갓마을은 보잘 것 없는 농촌이었으며 농민들의 생활이란 예절면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홀로 예절을 지키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며 굳이 예절을 고집한다면 비정상으로 보일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권언 선생은 예의 범절이
유다르고 이웃엘 가나 먼곳을 가나 항상 의관을 갖추고 다녔다. 시골 농촌에서 의관을 갖추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가까운 동네에서 말하기를 "저
동네에는 의관을 갖춘 양반이 산다"고 하여 의관동(洞)이라고 불렀는데 의관은 우리말로 옷갓이라고 했으므로 마침내는 옷갓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한가지 설은 옛날 이 강언덕에 옻나무 많아서 옻나무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밭이라는 말은 옛말로 갓이라고도 했다니까 옻나무
밭이나 옻갓이나 같은 뜻이 된다. 그리고 한자로 쓸 때도 옻나무 칠(漆)자와 땅 지(地)자를 써서 칠지라고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갓을 가지로
풀이하고 있는 듯 하며 일제치하 때 지명을 한자로 정리할 때 꾸며 써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열두대의 유래는
열두대하면 탄금대 서북편의 층암절벽을 지칭하는 말이다.
속칭 바위의 층계가 12단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숫자는
기준하기가 힘들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탄금대 배수진으로 왜병과 싸울 때 교전중 병사들을 격려하느라고 열두 번을 오르내리며
지휘했다고도 하고 활을 너무 빈번히 쏴서 열이 나서 물에 식히느라고 수백척의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등 구구한 말이
전해진다.
신립장군의 옥관자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의 관리들이 망건에 달고 다녔던 장식품 신립장군이 탄금대 열두대에서 몸을 던져 물결 따라 내려
가다가 가금면 창동 암벽에 다달아 자화상을 그려 놓고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어 순결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립장군이 자결한 후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낚시 꾼이 낚시질을 하다가 잉어 한 마리를 낚았는데 그 배를 갈라보니 옥관자가 들어 있었다. 이 옥관자를 관에 고하였더니 신립장군의 것임이 판명되어 그 자손들이 오갑뒷산에다
안장을 했다고 한다. |
첫댓글 봄날 충주나들이하기 좋은곳...아들녀석도 정말 좋아하는 곳...회원님들도 김밥사들고 나들이한번 다녀오세요...벗꽃보러 충주댐을 가야할까?.. 이고민 저고민 중입니다
좋은글과 사진 감상 잘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곳이 사유지라 임대료로 충주시청에서 지불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토지는 부의 원천이라는 말이 그냥 생각 났습니다.
네...그랬군요. 장모님 농사일 돕느냐고 가끔 주말에 농사일을 합니다만.. 땅이 제대로 대접받는날 얼마 안남은듯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