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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칙 부시심불不是心佛1
南泉和尙, 因僧問云: “還有不與人說底法麽?” 泉云: “有。” 僧云: “如何是不與人說底法?” 泉云: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남전 화상에게 한 승이 물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
“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입니까?”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라는 것이다.”2
無門曰: “南泉被者一問, 直得揣盡家私, 郞當3不小。”
무문이 말하기를,
남전은 이 한 질문을 받고 자기 살림살이를 몽땅 드러내 내보였으니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頌曰: “叮嚀4損君德, 無言眞有功。任從滄海變5, 終不為君通。”
노래하기를,
지나친 친절은 그대의 덕을 손상시켰으니,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이 참 공로라 하리라.
설사 푸른 바다가 뽕밭으로 변한다 해도,
그대를 위하여 결코 설하지 않으리라.
I. 배경背景
남전보원南泉普願6 선사는「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에 이미 나왔다. 이번에는 남전이 한 승으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데,『벽암록碧巖錄』에는 앞에 ‘종상제성從上諸聖’이라는 구절이 더 붙어있어 “예로부터 성인들이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從上諸聖, 還有不爲人說底法]?”라는 질문이 된다. 한 마디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법心法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법이라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지는 법으로 말로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선가에서 흔히 쓰는 상투적常套的인 수법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질문을 하여 남전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남전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不是心, 不是佛, 不是物]’라고 대답한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설할 수 없는 불법입니까?」라는 질문에 남전은「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이라고 대답했다.『화엄경』에「三界唯一心」「一切唯心造」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心法」이다. 그래서 경전에는 한결같이「三界唯心」「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하며,『화엄경』「야마천궁품」에도「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라고 하였고, 마조도「卽心是佛」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불법을 체득한 남전은 독자적인 안목으로「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이라고 설하고 있다.7
이류중행異類中行
이 공안은 그 원류를 따라가다 보면 가깝게는 남전의 스승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법을 만나는데, 마조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라는 질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기도 한다.8 여기에 남전이 “중생도 아니다[不是物].”를 덧붙인 꼴인데, 마조 또한 ‘물건도 아니다’라고 설한 기록이 보인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선문답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 조사(馬祖師)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화상은 어찌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 하십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서이니라.”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울음이 그친 뒤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이런 두 가지를 제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물건은 아니라 하리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홀연히 그 안의 사람이 오면 어찌하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우선 그에게 대도(大道)를 알게 하리라.”9
마조는 ‘어찌하여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하였느냐는 물음에는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서’라고 답하였고, ‘울음이 그친 뒤에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는 ‘非心非佛’이라고 답하고 있다. 다음 ‘이 둘이 아닌 다른 사람[除此二種人]이 오면 어떻게 지도하겠는가[如何指示]’라는 물음에는 ‘그를 향해 물건은 아니라 하리라[向伊道不是物]’라고 답하고 있고, ‘돌연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만나면[忽遇其中人來] 어찌하겠는가’라는 물음에는 큰 도를 깨닫게 하겠다고 답한다. 묻는 이의 수행정도에 따라 다르게 대응하겠다는 말이다.
충 국사(忠國師)가 마조의 제자인 복우(伏牛) 선사에게 묻기를 “대사께서 무슨 말씀이 계시던가?” 하니, 복우가 대답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국사가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무슨 말씀이 계셨던가?” 하니, 복우가 대답하기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不是心不是佛不是物]’라고 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였으니, 아니라는 말[不是之爲言]이 비(非)자에 비해 더욱 끊어 부정하는 뜻이 짙다.10
여기서 ‘物’은 앞서 본칙 각주에서 밝힌 대로 ‘중생衆生’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이미 ‘非心非佛’의 경지에 들었다면 “중생도 아니다[不是物].”라는 것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터이다. 다만 ‘비非’자에 비해 ‘불不’자가 부정하는 뜻이 더욱 더 짙다고 하면서 이어 그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한 것은 공행(功行)이 극치에 이른 곳이니, 이른바 사문의 과위[果]를 말함이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不是心不是佛]” 함은 이 두 가지를 제한 곳이니, 이른바 사문의 이류(異類)를 말한다. 그러한즉 마음이 곧 부처란 말은 꼭 사문의 과위를 증득한 뒤에 사문의 이류를 원만하게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이류행으로 곧장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간혹 이러한 근기를 대하여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니라”고 한다.
‘非心非佛’은 공행功行의 극치에 이른 사문沙門의 “과위果位”11를 말함이요, ‘不是心不是佛’은 ‘사문의 이류異類를 말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사문의 이류’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정신을 조사선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차이라고 보아도 해설의 뜻과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간단히 말해 ‘非心非佛’은 소승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에 해당하고 ‘不是心不是佛’은 대승으로 하와중생에 해당한다는 해설로 이해해도 되겠다.
그런데 해설에는 이른바 이류의 경지에 든 사문이라도, 이류를 원만圓滿하게 증득한 것이 아니라 간혹 ‘이류행異類行’으로 곧장 들어간 이에게는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이라고 ‘不是物’을 추가해서 설한다고 하고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과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이류행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무엇을 말하기 위함일까?
한편 ‘사문의 이류’는 ‘이류중행異類中行’12을 말하는데, 이류중행이란 보살이 6도六道 가운데 윤회하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과 같이 선사들도 다른 부류 속에 들어가 수행하면서 교화하는 행을 말한다. 이는 곧 세상의 시비와 사상으로부터 벗어나 중생의 불성이 청정함을 깨닫고 이들 가운데서 수행하면서 교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사들이 수행자나 일반인과 함께 생활하며 수행과 교화에 힘쓴다는 심우도尋牛圖의 최후경지인 ‘입전수수入廛垂手’ 즉, 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경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남전은 30년 동안 산에서 밭을 갈며 수행하였는데, 남전이 말한 ‘아랫동네의 시주 집에 수고우水牯牛로 된다.’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不是物의 의미
남전과 조주의 선문답이다.
남전이 시중(市衆)하여 말하였다
“여여라고 불러도 벌써 변했다.13 그러니 요새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류(異類)속에서 행해야 하느니라.”
조주가 승당(僧堂)밖에서 선사를 만나 대뜸 물었다.
“이(異)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거니와 어떤 것이 유(類)입니까?”
이에 선사가 두 손으로 땅을 짚거늘 조주가 발로 한 번 밟으니, 선사가 땅에 쓰러졌다. 조주가 연수당(延壽堂)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외쳤다.
“후회한다. 후회한다.”
선사가 시자를 보내 물었다.
“무엇을 후회하는가?”
조주가 대답하였다.
“다시 한 번 밟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14
여기서 ‘여여如如라고 하면[喚作如如] 벌써 변했다[早是變也]’라는 말은,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무엇으로 극칙極則을 삼느냐’는 남전의 물음에 ‘여여로써 극칙을 삼는다’는 강사講師의 대답으로부터 기인하는데, 열반적멸涅槃寂滅, 즉 진정한 깨달음은 본래 이름이 없는데 여여라고 하는 순간 그르친다는 뜻이다. 그러고 나서 남전은 ‘모름지기 이류중행을 행해야 하느니라[須向異類中行]’고 말한다. 그런 교적인 것 보다는 실천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조주가 이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이류중행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뜻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투의 “‘이異’는 묻지 않겠지만[異則不問] 도대체 어떤 것이 ‘유類’입니까[如何是類]?”
이류중행의 뜻을 보면 동류同類를 사람이라 하면 이류異類는 귀축鬼畜이 되어 다른 부류 속에 들어가 수행하고 교화하는 행의 의미도 있지만, 이류異類에는 또 다른 뜻이 있으니 ‘異’와 ‘類’를 구분해서 살피는 것이다. ‘異’는 다른 것, ‘類’는 같은 것을 뜻하여, ‘이류중행’은 ‘異’도 아니고 ‘類’도 아닌, 다시 말해 ‘異’에 즉卽하지도 않지만 ‘類’를 등져서도 안 되는 중도中道의 행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들어 조주가 남전을 시험한 것인데, 그 물음에 남전은 두 손을 땅에 짚어[以兩手托地] 네발짐승 흉내를 내고, 조주는 이를 밟아 쓰러뜨린다[以脚一踏].
겉으로 보기에는 남전은 짐승을 나타내어 ‘異’를 보여주고 있고, 조주는 발로 차서 쓰러뜨리므로 서 ‘類’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조주가 남전을 쓰러뜨리고 연수당으로 가면서 ‘후회한다. 후회한다[悔悔]’고 한 대목이다. 왜 척척 맞는 장단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스승을 찰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것일까? 차별 ‘異’를 뛰어 넘지 못한 남전을 탓한 것일까? 혹은 평등계인 ‘類’를 물었는데, 차별계인 ‘異’로 답한 남전의 허물을 탓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모든 것을 뛰어 넘지 못한 스승과 거기에 대해 반응한 상황이 싫었던 것일까?
해답은 다음 남전의 대응에 있다. 후회한다는 조주의 대응에 시자를 보내 무엇을 후회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발로 찬 조주의 대응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뜻을 다시 확인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다. 그리고 가관可觀인 것은 이에 대한 조주의 대답이다. “거듭 더 밟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悔不更與兩踏].”
이를 두고『선문염송·염송설화』에는 “남전이 땅에 쓰러진 곳에 다시 두 번 밟아 주었어야 솟구쳐 나올 길이 있었을 것이란 뜻이니 무슨 까닭인가? 이異와 유類를 모두 밟아 쓰러뜨리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형이상학적인 해석보다는 인간적인 설명을 붙이고 싶다.
즉, 아무리 조주라도 스승을 무참하게 밟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한 번 더 밟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제대로 밟아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뿐이다. 더 똑 부러지게 잘할 수 있었는데, 그놈의 정 때문에 그렇게 못한 것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설프게 밟은 것을 후회하고 탄식할 게 아니라 연극으로라도 한 번 더 밟아 주었더라면 그런대로 완벽한 연출이었을까?
아니다! 살벌한 선가에서도 사제 간의 정은 펄~펄~ 살아있는 것이다. 스멀스멀 인간 냄새가 난다. 스승은 짐승 흉내를 내므로 써 조주의 공부를 점검하고 있고 조주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發露요, 제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단면斷面이다. 그리고 그렇게 후회는 했지만 조주가 누구인가? 그렇게 후회했던 조주의 그 의지만은 투철透徹하고 결연決然했다.『조주록趙州錄』을 보자.
조주 스님은 또 말하였다. 내가 90년 전에 마조 대사 문하에서 80여 명의 선지식을 뵈었지만 한 분 한 분 모두 훌륭한 본분 작가(本分作家)였다. 요즘 사람들의 정신은 가지와 덩굴만 무성한 채 대도시에 들어가므로 성인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일대(一代)마다 점점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다만 남전 스님이 “이류(異類) 중에 나아가라.” 하였는데 또한 그 뜻을 알고 있기나 하는가? 요즘 부리가 노란 햇병아리들이 네거리 가두에 나아가 어지러운 덩굴 덩어리를 설법하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예배할 것을 원하고, 3백 명, 5백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나는 선지식이고 너희는 학인이다.” 하고 떠들고 있다.15
‘非心非佛’의 경지에 들지 못했으면서 ‘할喝’과 ‘방棒’ 등을 남발하며 앵무새처럼 이런 문구나 주절대는 선사들의 분발을 요구하고 있다. 남전의 이류중행을 강조하면서도 그 참 뜻을 온전히 전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다시 말해 부처도 인간이고 조사도 인간이다. ‘非心非佛’도 모자라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이라고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은, 이를 염려한 선사들의 노파심老婆心이요 조주의 당부임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류를 원만하게 증득한 사문과 이류행으로 곧장 들어간 이의 차별을 두면서 까지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不是物’을 덧붙인 이유이다.
남전 스님은 <조주록> 앞부분에서 ‘도를 얻은 사람은 산문 앞 시주집의 소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류 중에 들어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문답에는 먼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도를 알지 못하고 시정에 나아갔다가는 자신이 먼저 흙탕물에 빠져버릴 수 있으므로 남을 제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하나 단속도 못하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도를 얻었다하여도 한낱 이류의 심부름꾼이나 일꾼일 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16
설해 버렸군[說了也]!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남전이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이라고 대답하였다. 본칙은 그것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당시는 핫 이슈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명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선문답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전화상이 백장산의 열반 화상을 참문하자, 열반 화상이 질문했다. “예로부터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
남전화상이 말했다. “있지요.”
백장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입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설해 버렸군!”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不會).”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너무 많이 말했군!”17
이 선문답은 원래『전등록傳燈錄』제9권「백장유정百丈惟政」장에 전하는 일화로 남전이 동문인 백장유정 화상을 찾아가 문답한 내용이다. 백장은 남전의 대답에 즉각 ‘설해 버렸군[說了也]!’이라고 하면서 설하지 말아야 할 법을 설하고 있음을 힐난詰難하고 있다. ‘설하지 않은 불법’이란 부처나 조사도 설할 수 없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心法으로 설해서도 안 되지만 설할 수도 없는 법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도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이 우리들의 절실한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운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한 것은 이 말이라는 것이 가지는 모순이 원인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은 개별적으로 말해지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다. 철학은 이러한 말의 이중성 가운데에서 보편적인 것, 변화하지 않는 것을 골라냄으로써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 왔다. 그런데 모든 오해를 막기 위하여 말을 엄밀히 정의하려고 하면, 우리들에게 절실한 문제를, 말은 무엇 하나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18
서양도 “진리는 말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명제는 같은가 보다. 선가에서는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한 법문을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고 잘라 말한다. 부처가 깨달은 내용은 말이나 글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불법의 진실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것이지 불법 그 자체는 아니라는 주장이다.『벽암록』「평창」에도 남전이 “하늘의 달을 탐하다가[這漢貪觀天上月] 손바닥 안에 있던 구슬을 잃어 버렸다[失卻掌中珠].”고 평하고 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말로 표현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언어 문자는 방편법문이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부처나 조사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여 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설불급(言說不及),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불법은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깨닫고 체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물을 마셔보고 차고 따듯함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냉난자지(冷暖自知)는 선불교의 체험종교인 것을 대변하는 말이다.19
사실 진정으로 마음이 부처라면, 불법의 진실은 그야말로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표출되는 마음의 지혜작용,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을 선가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그 지혜작용을 ‘마음이다’ 혹은 ‘부처다’라고 정의해봐야 그것은 단지 말이나 문자일 뿐 그 실체를 명확하게 정의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라고 해봐야 이 역시 그 실체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것이 말이나 문자가 가지는 한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직접 체험하고 깨닫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남전은 백장의 ‘설해 버렸군!’이란 말에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라고 의견을 묻는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별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는 항변抗辯이기도 하다. 그러자 백장은 “나도 큰 선지식이 아닌데,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어찌 알겠소이까[爭知有說不說].”라고 한 발 물러선다. 문제 제기는 하였지만 그뿐, 나도 모른다고 슬쩍 발을 뺀 것이다. 남전도 이에 호응해서 “나도 모르겠소[某甲不會].”라고 말한다. 둘 다 선가의 보도寶刀인 “모른다.”로 면피免避를 하고 있다. (면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한 해답일까?)
남전 화상도 “나도 모르겠소(不會).”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말한 ‘불회(不會)’는 백장이 말한 ‘부지(不知)’와 같이「설할 수 있는 불법」과「설할 수 없는 불법」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중생의 분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근원적인 불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을 포용한 본래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달마가 양무제에게 말한 ‘불식(不識)’도 같은 의미이다.20
설두중현雪竇重顯은 “조사나 부처는 예로부터 사람들을 위하여 말하지 않았는데[祖佛從來不為人], 납승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투어 말들을 쏟아내네[衲僧今古競頭走]. 밝은 거울에 비친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明鏡當臺列像殊], 모두 남쪽을 향하면서 오히려 북두성을 바라보네[一一面南看北斗].”21 라고 송頌을 붙이고 있다. 쏟아내는 말과 행동은 다르지만 똑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 “북두칠성 국자의 자루는 드리웠는데 북극성은 어디에도 없네[斗柄垂無處討]. 콧구멍은 잡았지만 입을 잃었다[拈得鼻孔失卻口].”고 노래하고 있다. 원오극근圓悟克勤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평을 붙였다.
왜 듣지 못하였는가? 소수산주(紹修山主)22의 말을.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고 49년을 설하셨으며,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지 않았는데도 소림에는 오묘한 비결이 있었다.”
(중략)
실제로 불조는 예부터 지금까지 남에게 설하지 않으셨다. 바로 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까닭을 자세히 참구해야 좋을 것이다.23
남에게 설하지 않는 까닭을 참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어 “만약 한 구절을 말해주면 꿀처럼 달콤하겠지만[若是添一句 甜蜜蜜地], 잘 살펴보면 그것은 독약이다[好好觀來 正是毒藥]. 등줄기에 몽둥이질을 하고[若是劈脊便棒], 주둥이를 틀어막고 쫓아내야[驀口便摑 推將出去] 비로소 진정 그 사람을 위한 것이리라[方始親切為人].” 라고 덧붙이고 있다. 본칙에서 무문이 노래한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진짜 공덕[無言眞有功]!”이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하려고 한다. 인간의 속성은 원래가 그런 것이어서 아무리 단속을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의 세상에 이르게 한 동력이 아니겠는가! 무언가 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발전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일이 없다고 한가로워지는 동물이 아니다.24
백장은 남전의 ‘나도 모르겠소.’ 라는 말을 기다려 ‘내가 그대에게 너무 많이 말했군!’ 이라고 말한다. “나도 더 이상의 방법은 없소이다. 진리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시오!” 마지막에 선사로서의 체통만은 지키면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다. 남전 또한 이때의 교훈을 바탕으로 내내 후학들을 시험하고 단련시키는데,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는 조주가 발군拔群이다. 다음의 일화는 무문의 송 ‘무언진유공無言眞有功’을 군더더기 없이 실현하고 있다.
『전등록』제6권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남전화상은 어느 날 말했다. ‘강서의 마조선사는 卽心是佛이라고 설했는데, 王老師(남전)는 그렇게 설하지 않고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이라고 설한다. 이렇게 설하는 것에 허물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조주가 예배하고 나갔다. 그때 한 스님이 조주를 따라가서 조주에게 질문했다. ‘상좌가 예배하고 곧장 밖으로 나온 뜻이 무엇인가?’ 조주가 말했다. ‘그대는 남전선사에게 가서 질문하시오.’ 그 스님이 남전화상에게 질문했다. ‘조금 전에 조주상좌가 밖으로 나간 의미는 무엇입니까?’ 선사는 말했다. ‘그(조주)는 노승의 의지를 체득했다네.’」25
참고로『벽암록』은 백장유정百丈惟政 화상을 남전의 동문인 백장회해(百丈懷海, 749(720?)~814)의 법을 이은 백장열반百丈涅槃 화상으로 간주하여 ‘열반 화상’이라고 잘못 기술하고 있다. 백장열반 화상은 백장산百丈山 제2대인 열반법정百丈法正 화상으로 항상『열반경』을 외울 뿐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열반 화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26 백장이 백장열반이라면 남전이 백장회해의 제자인 열반 화상을 참문參問 한 것이 되어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남전이 그의 법형제인 백장유정을 찾아가 문답한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II. 사설辭說
남전은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수고우南泉水牯牛> <남전목단南泉牧丹> 등 수많은 공안들을 남겼다. 남전과 조주와의 선문답이 특히 많은데 이미 앞 칙에서 많이 논의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몇 개만 더 거론한다.
남전의 일원상一圓相
남전은 도반인 귀종지상歸宗智常, 삼산지견杉山智堅, 그리고 신라 승려 무염(無染, 801~888)27의 스승인 마곡보철麻谷寶徹 등과 함께 강서와 호남 지방을 행각하였는데, 어느 때 당시 선계에서 명성이 높았던 장안長安 광택사光宅寺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를 참문하려고 가는 길에 있었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전, 귀종, 마곡화상이 함께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는 도중에 남전화상이 땅에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말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안목으로) 한마디를 올바르게 말하면 가겠다.’
귀종화상이 그 일원상 가운데 앉았다.
마곡화상은 여인이 절하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남전화상이 말했다. ‘이러한 즉 가지 않겠다.’
귀종화상이 말했다. ‘이 무슨 수작인가?’28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는 길에 <일원상一圓相>에 대해 문답한 내용이다. <일원상>은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선법의 수행과 깨침 등에 대한 모습을 일상의 언어를 떠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29 혜충은 이 일원상을 제자를 지도하는데 활용한 최초의 선사로 알려져 있는데, 남전은 혜충의 일원상을 땅에 그려놓고 귀종과 마곡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다. 일원상에 대한 후학들의 논의는 대부분 귀종과 마곡의 대응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30 그들의 경계에 대한 해설이 분분한데 그중 하나를 보자.
귀종화상은 남전화상이 그린 일원상 가운데 앉았다. 우주 만법을 상징한 일원상 한가운데 앉은 것은 우주와 천지 건곤이 모두 귀종 자신과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된 경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혜충국사의 법문인 일원상의 정신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법신으로 귀향시켜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임을 나타내고 있는 행동이다.
(중략)
마곡화상은 여인이 절하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여인이 예배하는 인사를 관인배(官人拜)라고도 하는데, 여인과 관료들은 머리에 두관을 쓰고 머리를 장식을 하였기 때문에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오체 투지하는 인사가 아니라 허리를 약간 굽히고 가볍게 합장하는 인사이다. 마곡이 여인의 예배를 올린 것은 일원상의 법문을 제시한 혜충국사를 향한 인사이다. 지상에 그려진 그림의 일원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혜충국사의 법신불에 대한 예배인 것이다.31
간단히 말하면 귀종은 자신과 우주 만법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로 일원상에 앉았고, 마곡은 일원상의 법문을 제시한 혜충국사에 대한 예를 올린 것이라는 해석이다.32 원오극근 선사는 “한 사람이 북을 치니[一人打鼓] 세 사람의 성자를 얻었네[三箇也得].”이라 하여 남전과 귀종, 마곡 등 세 사람의 거량을 칭찬하였다. 당시 일원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던 것 같은데, 다음과 같이 뒤통수를 치는 문답도 있다.
[마조] 스님께서 한 스님을 시켜 경산 법흠(徑山法欽: 714-792)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일원상(一圓相)이 그러져 있었다. 경산스님은 뜯자마자 붓을 찾아 가운데 한 점을 찍었다. 그 뒤 어떤 스님이 혜충국사(慧忠國師: ?-775)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국사는 말하였다.
“법흠스님이 오히려 마조대사에게 속았구나.”33
어쨌든 남전은 ‘그렇다면 가지 않겠다[恁麽則不去也].’고 말한다. 그 정도의 경지라면 갈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남전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귀종은 ‘이게 무슨 실없는 짓거리인가[是什麽心行]?’라고 남전을 책망하고 있다. 원오가 당시에 따귀를 한 차례 올렸어야[當時好與一掌] 했다고 평하였듯, 혜충국사를 보러가는 것이 어디 일원상 하나 때문이겠는가? 한 바탕 놀았으면 다시 길을 재촉해야 할 것이다.
대각련(大覺璉)이 송했다.
국사가 혼자 앉아 대단히 도도한데 사방에서 모여든 이 공연히 바빴구나.
세 사람이 도중에서 다 알았으나 장안으로 다시 감이 무방한 일일세.34
남전의 선농일치禪農一致
남전은 정원貞元 11년(795) 지양池陽(안휘성) 남전산南泉山에 오두막을 짓고, 스스로 ‘왕노사王老師’라 칭하며 30년을 하산하지 않고 논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선종의 선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농일치禪農一致,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정신으로 일과 수행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동문인 백장회해百丈懷海처럼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실천하며 살았으리라. 그때의 일화 하나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전이 순채를 베고 있는데, 한 중이 물었다.
“남전(산)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남전이 낫을 들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낫을 30냥에 산 것이요.”
그러자 그중이 말하기를,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니고, 남전으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내가 써보니 정말 잘 듭디다.”35
자기가 바로 남전이라고 계속 가리키고 있는데도 중은 못 알아듣고 있는 모습이다. 남전은 자신의 무심한 본래면목을 일상의 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동종曹洞宗 부용도해芙蓉道楷의 법제자인 고목법성(枯木法成, 1071~1128) 선사는 “얼굴을 마주 보고 길을 물었는데, 낫을 들어 넌짓넌짓 대꾸하였네. 애석하다. 금강의 눈 갖추지 못해, 공연히 구름 걸린 산을 해매다 어느새 가을이 다 간다.”36라고 송을 붙이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대응해야 했겠는가?
「제20칙 대력량인大力量人」에 나왔던 송원숭악(松源崇岳, 1132~1202) 선사는 다음과 같이 착어 하고 있다. “그때 ‘나는 신나게 쓴다!’하는 남전의 말을 듣자 얼른 한 걸음 나서면서[便乃轉身一步云] ‘나를 속이는군요[賺我來]!’ 했더라면 속절없는 남전도[大小南泉] 뒤로 넘어지면서 물러났을 것이니라[也須倒退].”37
이렇게 순간순간 항상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는 남전의 모습이 애절한데, 다음 무명승에 대한 일화 또한 맥을 같이 한다.
스님이 암자에 주석할 때 한 스님이 찾아오자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산위에 올라가 일을 할 터이니, 밥 때가 되거든 밥을 지어 너 먼저 먹고 한 그릇만 보내다오.”
얼마 후 그 스님은 혼자서 밥을 지어 먹고는 그릇을 몽땅 박살내고 스님의 침상에서 잠을 잤다. 스님은 밥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돌아와 보니, 그는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이 곁에 눕자 그는 일어나서 가버렸다. 뒷날 스님이 말하였다.
“내 지난날 암자에 있을 때 영리한 스님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까지 소식을 알 길이 없다.”38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훌륭한 승려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 일감一感이다. 그러나 선에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무명승의 배포는 높이 살만하다. 물론 그런 행동을 보고도 묵묵히 그의 곁에 눕는 남전의 배포는 또한 어떠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한 불량한 중에게 남전이 당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다만 영리하고 근기 있는 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지도자의 회한悔恨이 엿보인다.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이 있겠는가? 탁마琢磨가 필요할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 남전은 조주종심趙州從諗, 장사경잠(長沙景岑, ? ~868), 자호이종子湖利蹤 등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었고, 태화太和 초년에는 전태수前太守 육긍陸亘의 귀의를 받는다. 다음은 우리나라 선사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육긍대부陸亘大夫와의 일화이다.
남전(南泉)에게 육긍(陸亘) 대부가 물었다.
“옛사람이 병 속에다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거위가 점점 자라서 병에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병을 깨뜨릴 수도 없고, 거위를 죽일 수도 없으니, 어찌해야 거위를 꺼내겠습니까?”
선사가 불렀다.
“대부여.”
대부가 대답하거늘, 선사가 말하였다.
“나왔다.”39
『선문염송·염송설화』에는 ‘병 속에다 거위를 길렀다’는 것은, 법신法身이 형상의 껍데기에 숨었고, 참 지혜가 분별심[緣廬]40속에 감추어졌다는 뜻이니, 이것이 거위를 기르는 것이다. ‘거위가 점점 자라서[鵝漸長] 병에서 나올 수 없게 되었다[出甁不得]’ 함은 안에 있는 집착이 견고해져 간다는 뜻이요, ‘병을 깨뜨린다[毁甁].’ 함은 외도가 다섯 가지 열로써 몸을 뜨겁게 하는 것이요. ‘거위를 죽인다[損鵝].’ 함은 2승乘의 회심멸지灰心滅智41요. ‘나왔다[出也].’ 함은 온 마음과 온몸 전체가 그대로 부처란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수긍이 가는 해설이지만 선적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부르고 답하는 순간은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없다. 대부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거위도 병도 떠보려는 마음도 모두 사라진다. 아집과 망상, 온갖 사심과 잡념이 일시에 멈춘다.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 무심의 상태 즉 본래의 빈 마음인 본래면목이 언뜻 드러나, 한 번도 유리병 속에 갇힌 적이 없는 자유 거위,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 당처當處는 자기를 가두고 있는 육신도 생각도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다.
부연敷衍하면『무문관無門關』「제10칙 청세고빈淸稅孤貧」에는 청세가 외롭고 가난하니 구제해 달라고 하자, 조산은 즉시 “세사리稅闍梨!”라고 부르고 청세는 “예!”하고 대답한다. “스님!” 하고 부르고,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 가난한 자도 부자도, 나도 그도 없게 된다. 또,「제22칙 가섭찰간迦葉刹竿」에는 아난이 가섭에게 ‘세존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 외에 따로 무슨 물건을 전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가섭이 “아난아!”하고 부르고, 아난이 “예!”하고 대답한다. 이에 가섭은 ‘문 앞의 찰간을 내리라’고 하고 있는데, 부르고 답하는 것으로 세존이 전하고자 하는 법은 모두 다 전했다는 뜻이다. 선가에서 부르고 답하는 것은 불법의 대의大義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참고로 남전 문하에는, 28세 때 유학留學길에 올랐던 신라승新羅僧 철감도윤(澈鑒道允, 797~868) 선사가 있었다. 남전이 여러 제자들 앞에서 “내 가르침의 핵심核心은[吾宗法印] 해동海東으로 돌아간다[歸東國矣].”고 하였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조당집祖堂集』은 전한다. 도윤은 스승인 남전이 열반(834년)한 뒤에도 중국에서 13년을 더 머무르다,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폐불會昌廢佛 때인 847년(문성왕 9) 사굴산문闍堀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한다.
귀국 후 금강산에 머물다 855년(문성왕 17년) 무렵 전남 화순 쌍봉사雙峯寺로 옮겨 10여 년간 머물면서 종풍을 떨치는데, 선사의 선풍을 이어받은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 826~900)이 강원도 영월 홍녕사(지금의 법흥사)에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열어 도윤은 사자산문의 개산조가 된다. 도윤의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로, 현재 국보 제57호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과 철감선사비가 쌍봉사에 있다.
III. 참구參究
남전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종달 노사님은 ‘불법은, 아니 진리는 ’공空‘이라고 했다.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고 착어 하셨다. 불법은 이치를 캐려고 하면 할수록 어려워진다. 즉심의 경계를 살피시라.
그러나 한편 ‘그렇다고 해서 설하지 않는다면 그 ’종宗‘을 어떻게 선양할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공‘에 이르렀다가 그 ’공‘에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그러니까 현상계 그대로가 불법이고 진리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설치 못할 바가 어디 있겠는가? 산은 높고 강은 낮다고 설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덧붙이셨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의 경계를 만난다. 문자에 걸리지 않는 적극적인 활용의 경계를 참구해 보시라.
방장 스님 앞에서 본칙 전문을 외우고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입니까?” 공안에 대해,
김 :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방장 : ‘설하지 않은 법’을 묻는데, 너는 지금 설하고 있지 않느냐?42
방장의 말에 그대는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그리고 그대가 방장이라고 가정하고 김사업 거사도 남전처럼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라고 되물었다면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될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전만 같아라!”
IV. 상당上堂
백련암에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급하기만 했다. 빨리 공부해서 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사실 그때 나는 이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중략)
나는 노장님께 “공부 좀 빨리 가르쳐 주십시오. ‘나’란 존재를 빨리 깨닫고 싶습니다.”라고 재촉을 했다. 노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급한 게 아이다. 시키는 대로 해라.”
백련암에서 행자가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은『능엄경楞嚴經』의 능엄주를 외우는 것이다. 마음은 급했지만 시키는 대로 그것을 외웠다. 한 달 만에 꽤 긴 주문을 외우고 나자『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과『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라고 하셨다. 두 책을 읽고 나니 하루빨리 참선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어를 배우라고 했다. 나는 노장님 방으로 들어가 도대체 왜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일본 사람들이 경전 번역은 제일 잘해 놓았는기라. 경전을 보려면 일본어를 알아야 한데이.”
“스님, 육조 대사가 일본어를 했습니까? 달마 대사가 일본어를 했습니까? 저는 일본어를 안 배우겠습니다.”
(중략)
“나는 이런 공부가 하기 싫단 말이야. 이제 책은 그만 보고 빨리 참선을 하고 싶어.”
(중략)
관음사에서 비어야 자유롭다는 경험을 한 후로 그것에 분명 무엇인가 있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참선 말고 다른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초발심자경문』과『육조단경』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게 옳았다 싶어 더더욱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마음 찾는 공부를 해야지 여기서 일본어나 공부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나.”
계를 받기 닷새 전 새벽 나는 보따리를 싸서 백련암을 나왔다.43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선사는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磨塼作鏡]’는 일화를 통해 좌선만으로 성불하겠다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러나 고래로 부처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꾸준히 ‘좌선하는 것’이라는 것은 모든 현자들이 인정한 것이다. 그럼 좌선만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회양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인간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좌선을 하면 부처가 된다. 그것은 틀리지 않지만, 그러나 좌선을 하면 부처가 된다는 것만 믿는 인간은 마땅히 좌선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좌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좌선이 인간을 구속해 버리는 것이다. 남악은 그것을 마조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음에 틀림없다.44
앉지 않고 하는 선
일본의 학자 히로 사치야45는 ‘앉지 않고 하는 선’을 제창하였다. 선이란 어떤 구속이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면 그것으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절대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의 첫걸음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우리들의 마음은 저절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46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선어록 읽기”로, 앉지 않고 하는 선이란 간단히 말하면 ‘선어록을 읽자’는 것이다. 선어록을 읽는 것은 과거의 선승들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실생활의 행동패턴과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패턴 또한 배우는 것이다. 선승들의 에피소드를 읽고 또 읽다보면 선사상을 이해하게 되고 그 사고방식이 저절로 몸에 밸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덧붙인다면 지식에 대한 목마름은 거의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어록은 그 목마름까지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인류의 지식을 선대에서 후대로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마 현대는 좌선보다는 선어록 읽기가 좀 더 쉬운 접근 방법일 것이다. 선어록을 읽자!
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참선을 공부하다가 거기에서 생긴 의문들을 풀기위해 선어록을 읽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고, 반대로 선어록을 읽다가 의문이 풀리지 않아 좌선을 하고 간화에 길로 접어 든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마음을 얽어매는 구속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의미에서는 마음이 가는 대로 의문이 모두 풀릴 때까지 계속 정진해야 하고, 그것이 좌선이건 선어록이건 그 방법이야 중요하지 않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둘이 수레의 두 바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원에는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이 함께 있지 않은가!
다만 그 자체에 빠져 얽매이게 되면 좌선이나 선어록이나 모두 장애의 요인이 될 수는 있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좌선은 물론 선어록 읽기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좌선하는 방법도 일정한 방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초보자는 어렵겠지만 무엇을 하던 좌선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된다.
방법은 따질 것 없이 앉아서 하면 좌선이고, 걸어 다니면서 하면 행선이고, 들어 누워서 하면 와선이고, 일체처가 공부입니다. 바른 자세, 바른 호흡, 바른 생각이라야 하는 것은 구차한 소리입니다. 호흡법이 어떻고 언제 호흡법 따집니까?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하십시오.47
다시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로 돌아가자. 여기서 ‘나’란 존재를 빨리 깨닫기 위해 좌선의 중요성을 논하거나 선어록의 필요성을 말하려 함은 아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를 믿고 마음가는대로 무조건 돌진하는 스님의 모습을 높이 사고 싶을 뿐이다. 그만큼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절실했기 때문에 지금 그때의 그 무모함을 거리낌 없이 토로할 수 있었고, 어찌되었건 지금 그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다. 열정과 노력이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소위 깨달음이라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나’란 존재를 빨리 깨닫고 싶은 것도 바로 ‘나’이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참 나를 찾으려는 이도 바로 ‘나’이다. 인도가 낳은 가장 명쾌한 강연자 유 지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행은 끝이 납니다.”48 표현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깨달음이란, 찾으려는 마음이 다했을 때에야 비로소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음에 대한 의문이 사라졌을 때로 그 갈망을 쉬게 되는 시점과도 같다. 우리는 다만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그것도 끊임없이 할 뿐이다.
V. 감상感想
해 뜨면 일어나,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밥 먹고 밖에 나가 정원 손질을 한다.
찾는 이 있어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마주 앉아 떠들면서 차를 마신다.
산길을 걸어
미륵불을 만나고
조롱박에 뜬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넣어 마신다.
봄은
슬며시
해를 따라 팔베개를 하고
볕은 눈을 찡그리며
나무를 오른다.
VI. 참고한 책과 글
1) 한글 맞춤법 제28항에는 “끝소리가 ‘ㄹ’인 말과 딴 말이 어울릴 적에 ‘ㄹ’ 소리가 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 나는 대로 적는다,”고 되어 있다. 다달이(달-달-이), 따님(딸-님), 마소(말-소), 소나무(솔-나무), 싸전(쌀-전), 여닫이(열-닫이), 화살(활-살) 등이 그 예인데, 不是心佛도 ‘불시심불’이 아닌 ‘부시심불’로 읽어야 한다. 대체로 ‘ㄹ’은 ‘ㄴ’, ‘ㄷ’, ‘ㅅ’, ‘ㅈ’ 앞에서는 탈락한다.
2)「不是心 ․ 不是佛 ․ 不是物」은 스승 마조의 유명한「卽心是佛」의 말이 있으므로 그것을 전제로 하여 그 부정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不是物」의「物」은 “衆生”이라고 하는 柴山全慶 노사의 명해설이 있다.「華嚴經」에는「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心과 佛 및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의 말이 있고『寶鏡三昧』에는「爲物作則」(물건으로써 측이 되다)이라 했다.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선어록 읽는 방법』 pp. 170~171).『보경삼매寶鏡三昧』는 동산양개洞山良价의 저작으로, 그중 ‘한밤중(평등)이 곧 대낮(차별)이요[夜半正明], 밝음(차별)이 곧 어두움(평등)이라[天曉不露]. 이러한 원리로 중생을 위한 법칙으로 삼아[爲物作則], 모든 괴로움을 제거한다[用拔諸苦]’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爲物作則’의 ‘物’은 중생을 의미하고 있는데, ‘不是物’의 ‘物’ 역시 중생을 지칭한다.
3) 낭당郞當 : ① 헐렁헐렁하다 ② 초췌하다 ③ 피로하다 (중국어 사전). 누두漏逗와 마찬가지로 멍청하다, 치부를 드러내다, 늙어 볼품이 없다는 뜻.
4) 정녕[丁寧/叮嚀] : ① 거짓이 없이 진실하게 ②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다 (국어사전). ‘정녕叮嚀’은 원래 “戰時에 쳐서 울리게 하여 백성을 경계하는 징”인데 바꾸어 “再三告示하여 반복하여 알림”의 뜻이 되었고, 다시 바꾸어 “정중하게 하다. 정성을 쏟다. 공손, 친절”의 뜻이 된다. 여기서는 “반복하여 알리다”의 뜻.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선어록 읽는 방법』 p. 172).
5) ‘임종任從~’은 ‘任是~’, ‘任地~’라고도 쓰며 “가령~”이라는 의미의 양보의 접속사. ‘창해변滄海變’은 “창해가 변하여 桑田이 되다”는 뜻으로 ‘창상변滄桑變’이라고도 한다. “세상이 격렬히 변천하는 것” 등의 뜻으로 쓰기도 하고 “있을 법 하지도 않은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다.”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6)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는 당대唐代 남악하南岳下 선승으로 성은 왕王씨이다. 정주鄭州(하남성) 신정新鄭사람이다. 지덕至德 2년(757) 대괴산大槐山 대혜大慧에게 출가하였고, 대력大曆 12년(777, 30세) 숭악嵩岳에 가서 수구受具하였다. 처음에 성상性相, 삼론三論 등 교학을 공부하다가, 현기玄機는 경론經論 밖에 있다는 의지意旨로 마조문하에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정원貞元 11년(795) 지양池陽(안휘성)의 남전산南泉山에 선원을 짓고 스스로 ‘왕노사王老師’라 칭하며, 30년간 하산하지 않고 논밭을 일구며 住하니, 학인이 항상 성황을 이루었다. 태화太和 초년에 전태수前太守 육긍陸亘의 귀의를 받았고, 조주종심趙州從諗, 장사경잠長沙景岑, 자호이종子湖利蹤 등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으며, 태화 8년 12월, 87세로 시적示寂하였다. (『송고승전』11,『조당집』16,『전등록』8,『회요』4,『회원』3).
7)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p. 226~227.
8)『무문관無門關』「제30칙 즉심즉불卽心卽佛」과「제33칙 비심비불非心非佛」참조.
9)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2』「159. 즉심卽心」 pp. 215~216. 馬祖因僧問和尙: “爲什麽說卽心卽佛.” 帥云: “爲止小兒啼.” 僧云: “啼止時如何.” 帥云: “非心非佛.” 僧云: “除此二種人來. 如何指示.” 帥云: “向伊道不是物.” 僧云: “忽遇其中人來時如何.” 帥云: “且敎伊體會大道.”
10)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2』「159. 즉심卽心」 pp. 215~216.
11) 果位(과위) : 인위(因位). 과지(果地)와 같음. 인행(因行)이 성취되어 증득하는 불과(佛果)의 자리. 깨달은 지위. ⇒과지(果地) (운허. 용하 共著,『불교사전』 동국역경원). 에를 들어 사성문四聲聞의 과위果位로는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등이 있다.
12) 異類中行(이류중행) : 두 가지 뜻이 있음. (1) 이류(異類)에 중행(中行)한다 하면, 이(異)는 별(別), 유(類)는 동(同)으로, 평등과 차별. 중(中)은 중용(中庸), 이(異)에 즉(卽)하지도 않고, 유(類)에 등지지도 아니하는 것. 행은 왕래(往來), 자유의 활기(活機). 중행(中行)의 작략(作略)을 종문(宗門)에서 중적불범(中的不犯)이라 말하니, 이류중행은 회호완전(回互宛轉)하는 자유의 왕래를 말함. (2) 이류 중에 행한다 하면, 동류(同類)에 대한 이류(異類)로, 동류를 사람이라 하면 이류는 귀축(鬼畜)이니 여태(驢胎)ㆍ마복(馬腹)에 들어가 설법하는 것. 사장(師匠)이 자유로운 기략(機略)이 있어서 하화중생(下化衆生) 또는 위인도생(爲人度生)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상(相)을 나타내는 것(운허. 용하 共著,『불교사전』).
13) 남전(南泉)이 강사(講師)에게 물었다. “무슨 경을 강론하는가?” 강사가 대답하였다. “『열반경』입니다.” 남전이 다시 물었다. “『열반경』에서는 무엇으로 극칙(極則)을 삼았는가?” 강사가 대답하였다. “여여(如如)로써 극칙을 삼았습니다.” 남전이 말하였다. “여여라 한다면 벌써 변했느니라.” [南泉問講師: “講什麽經.” 云: “涅槃經.” 師云: “涅槃經中, 以何爲極則.” 云: “以如如爲極則.” 師云: “喚作如如早是變也.”](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18. 열반(涅槃)」). 이 문답을 두고 한 말이다.
14)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19. 이류(異類)」 pp. 66~67. 南泉示衆云: “喚作如如, 早是變也. 今時人須向異類中行.” 趙州在堂前, 逢見師便問: “異則不問, 如何是類.” 師以兩手托地, 趙州以脚一踏, 師倒地. 趙州走入延壽堂叫: “悔悔.” 師令侍者問: “悔箇什麽.” 州云: “悔不更 與兩踏.” (『禪門拈頌·拈頌說話』) 師問南泉: “異卽不問, 如何是類.” 泉以兩手托地, 師便踏倒. 卻歸涅槃堂內叫 “悔悔!” 南泉乃令人去問 悔箇什麽 師云: “悔不剩與兩踏.”(『조주록趙州錄』)
15)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師又云: “老僧九十年前 見馬祖大師下八十餘員善知識 箇箇俱是作家 不似如今知識枝蔓上生枝蔓 大都是去聖遙遠 一代不如一代 只如南泉尋常道 須向異類中行 且作麽生會 如今黃口小兒 向十字街頭 說葛藤博飯噇 覓禮拜 聚三五百衆云 我是善知識 你是學人.”
16)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에서 인용.
17)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p. 177. 擧. 南泉參百丈涅槃和尙. 丈問, 從上諸聖, 還有不爲人說底法. 泉云, 有. 丈云, 作生是不爲人說底法. 泉云,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丈云, 說了也. 泉云, 某甲只恁, 和尙作生. 丈云, 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泉云, 某甲不會. 丈云, 我太爲說了也.
18) 고사까 슈우헤이, 방분필 옮김 변영우 그림,『함께 가보는 철학사여행, From Thales To Marx』 p. 320.
19)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p. 178.
20)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p. 181.
21) 祖佛從來不為人(各自守疆界。有條攀條。記得箇元字腳在心。入地獄如箭)。衲僧今古競頭走(踏破草鞋。拗折拄杖。高掛缽囊)。明鏡當臺列像殊(墮也。破也。打破鏡來與爾相見)。一一面南看北斗(還見老僧騎佛殿出山門麼。新羅國裏曾上堂。大唐國裏未打鼓)。斗柄垂(落處也不知。在什麼處)。無處討(瞎。可惜許。碗子落地。楪子成七八片)。拈得鼻孔失卻口(那裏得這消息來。果然恁麼。便打)
22) 소수산주紹修山主는 나한계침(羅漢桂琛, 867~928) 문하로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와 동문인 용제소수龍濟紹修 선사를 말한다.
23) 선림고경총서 35, 백련선서간행회 편,『벽암록碧巖錄 上』 p. 250. 釋迦老子出世。四十九年。未曾說一字。始從光耀土。終至跋提河。於是二中間。未嘗說一字。恁麼道。且道是說是不說。如今滿龍宮盈海藏。且作麼生是不說。豈不見修山主道。諸佛不出世。四十九年說。達磨不西來。少林有妙訣。又道諸佛不曾出世。亦無一法與人。但能觀眾生心。隨機應病。與藥施方。遂有三乘十二分教。其實祖佛。自古至今。不曾為人說。只這不為人。正好參詳。
24) 정민 지음,『스승의 옥편』 p. 69.
25) 無門慧開, 鄭性本 譯註,『무문관無門關』 pp. 225~226.
26) 선림고경총서 8, 백련선서간행회 편,『임간록林間錄 下』 p. 145.
27) 무염 [無染, 801(애장왕 2)~888(진성여왕 2)]통일신라 승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이다. 속성은 김씨. 호는 무량(無量)·무주(無住). 아버지는 범청(範淸)이고 어머니는 화씨(華氏)이다.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다.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고, 12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서 〈화엄경〉을 배웠다. 821년(헌덕왕 13) 정조사(正朝使) 김양(金陽)을 따라 당나라에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서 선법(禪法)을 물었다. 그뒤 마곡산(麻谷山)의 보철(寶徹)에게서 법인(法印)을 받은 뒤 20여 년 동안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그를 동방대보살이라 불렀다. 845년(문성왕 7) 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뒤, 공주 성주사에 머물면서 이 절을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했다. 헌안왕 즉위 후 상주 심묘사(深妙寺)의 주지를 지내다 입적(入寂)했다. 제자가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원장(圓臧)·승량(僧亮)·영원(靈源)·현영(玄影)·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이어받았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비(碑)가 충청남도 보령군 성주사지에 남아 있다. 시호는 대낭혜(大朗慧)이며 탑호는 백월보광(白月保光)이다.
28)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69칙 남전화상과 일원상(一圓相)」 p. 432. 擧. 南泉歸宗麻谷, 同去禮拜忠國師. 至中路, 南泉於地上, 一圓相云, 道得卽去. 歸宗於圓相中坐, 麻谷便作女人拜. 泉云, 恁麽則不去也. 歸宗云, 是什麽心行.
29) 원상에는 96가지 의미가 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6종류로 정리된다. 첫째로 절대의 진실인 불법 그 자체를 상징하여 나타낸 것. 둘째는 수많은 선정의 삼매를 모두 이 일원상에 포함시킨 것. 셋째는 주객의 차별적인 대립이 나누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을 표시한 것. 넷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대의를 나타내는 문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다섯째는 일원상이 불법의 종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 여섯째는 원상이 그대로 언어 문자를 초월한 경지에서 종지에 계합된 사실 등이다. 즉 일원상(一圓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신심명』에 “둥글기가 허공과 같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읊고 있는 것처럼, 지도(至道), 진여(眞如), 불성(佛性), 불심(佛心)은 법계와 하나 된(萬法一如) 것이며, 일체 제법이 본래 空한 모습을 그림(圖示)으로 제시한 법문이다. 하나의 원상은 무한의 시간과 공간을 중복시켜 일체 법계를 상징한 動的인 도식화라고 할 수 있다.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33칙 자복화상의 일원상(一圓相)」 pp. 208~209).
30) 우리나라에도 여러 선사들이 법거량으로 일원상을 애용하였다고 이미「제25칙 삼좌설법三座說法」등에서 소개하였다. 전강 선사와 만공 선사 사이에 있었던 선문답도 유명한데 다음과 같다: 그 길로 조실 방에 들어가 보월 스님 앞에 원상을 그려 놓고 묻기를 “마조원상 법문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入也打 不入也打]>고 하였으니 조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 하니 보월 스님은 곧 원상을 뭉개셨다. 나는 보월 스님께 말하되 “납승을 갈등 구덩이(葛藤窠臼) 속에 죽이신 것입니다. 마조방하馬祖棒下에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월 스님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고 만공 스님 처소에 와서 다시 묻되, “마조원상 법문을 보월 스님께 물었더니 원상을 뭉개었습니다. 이렇게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만공 스님은 도로 나에게 묻되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하시었다. 내가 답하되, “큰스님께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더니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초안이에게 주시면서 “자네가 묻게!” 하시니 초안이 스님이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 해서, 내가 초안이를 보고 여지없이 일렀다. 그러나 학자를 위해서 설파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점검하시되, “누가 밤 사람 행한 것을 알 수가 있겠느냐[誰知更有夜行人]” 하셨다. 참고로 갈등과구葛藤窠臼의 窠臼는 상투적인 격식. 틀에 박힌 절차나 행동이다. ‘窠’는 본래는 새나 짐승 또는 곤충이 사는 보금자리를 말하는데, 그래서 穴(구멍 혈)자가 들어 있다. 臼는 ‘절구’를 뜻한다. 窠와 臼는 둘 다 안이 움푹 패여 있다. 그런데 옛날 식 가옥의 문에는 문둔테 즉 문의 축을 끼는 구멍이 뚫린 나무가 있는데, 그 구멍을 窠臼라고도 불렀다. 왜냐하면 움푹 들어간 모양이 마치 새나 짐승 또는 곤충이 사는 보금자리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짝은 이 窠臼(문둔테)를 축으로 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문의 움직임은 이 문둔테에 의해 고정된다. 다시 말해 문짝의 움직임은 문둔테의 구속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窠臼는 ‘제한하는 것’ 또는 ‘고정된 틀’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窠臼의 이런 의미는 예술이나 문장에도 적용되어 ‘틀에 박힌 기존의 형식’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이 단어는 본래는 문어文語이지만 현재에도 문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단어다.
31)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69칙 남전화상과 일원상(一圓相)」 pp. 434~435. <근일 선사 공부담>을 보면 혜암선사는 “절을 세 번하고 나오겠다.”고 하여 이를 참고하고 있다.
32) 또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는 말하였다. ‘답을 하면 함께 가겠소’”라고 한 것은 이것을 빌려서 그가 대답하는 것을 살피려는 것이니, “귀종은 동그라미 안에 앉았다.”함은 혜거삼매(慧炬三昧)[능히 어리석고 어두움을 깨뜨림]에 좌정하는 뜻이요, “마곡은 여자가 하는 절을 했다”함은 장엄왕삼매(莊嚴王三昧)[모든 묘행(妙行)을 총괄해서 거둠]라는 뜻이며, “그렇다면 가지 않겠소”라 함은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이다. 또 이렇게 풀이 할 수도 있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는 말하였다 ‘답을 하면 함께 가겠소’”라고 함은 범성(凡聖)이 같은 근원인 일원상(一圓相)은 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요, “동그라미 안에 앉았다”라 함은 좌정하는 것이니, 동그라미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며 “여자가 하는 절을 했다”고 함은 원상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그렇다면 가지 않겠소”라 함은 모두가 남전의 뜻에 계합 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 무슨 마음씨인고?”하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이렇게 안다 해도 옳지 못하니, 귀종과 마곡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08. 원상(圓相)」 pp. 19~20). 삼매왕삼매는 삼매에서 가장 뛰어난 삼매로 선종禪宗에서는 좌선坐禪,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염불念佛을 꼽는다.
33)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편,『마조록馬祖錄·백장록百丈錄』 p. 45. 祖。令僧馳書。與徑山欽和尚。書中畫一圓相。徑山纔開見。索筆。於中著一點。後有僧。舉似忠國師。國師云。欽師。猶被馬師惑。
34)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08. 원상(圓相)」 p. 15.
35) 師刈茆次, 有僧問: “南泉路向甚麽處去?” 師豎起鎌云: “我這鎌子是三十文買。” 僧云: “我不問這箇, 南泉路向甚麽處去。” 師云: “我用得最快。” (『池州南泉普願禪師語要』) 師在山作務次。僧問。南泉路向甚處去。師拈起鎌子云。我者鎌子三十錢買得。僧曰。不問茅鎌子。南泉路向甚處去。師曰。我使得正快。(『五家正宗贊』)
36)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40. 예모(刈茅)」 pp. 122~123.
37)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40. 예모(刈茅)」 pp. 123~124.
38) 선림고경총서 9, 백련선서간행회 편,『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上』 pp. 46~47. 師住菴時。一僧到。師向道。我上山作務。待齋時。作飯自喫了。送一分上來。少時。其僧自作喫了。一時打破家生。就師床臥。師待不來。歸。見僧床上臥。師亦就邊臥。僧便起去師後曰。我往前住菴時。有箇伶俐道者。至今不見消息。(『五家正宗贊』) 師住庵時, 有一僧來師云: “某甲上山作務, 齋時上座做飯喫了, 卻送一分來。” 其僧齋時做飯喫了, 將家具一時打破, 就床而臥。師伺不來遂歸。見僧偃臥。師亦去身邊臥。僧便起去。師云: “得恁麽靈利。” 師住後云: “我往前住庵時, 有箇靈利道者, 直至如今不見。” (『池州南泉普願禪師語要』)
39)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염송설화拈頌說話 3』「238. 양아(養鵝)」 pp. 115~116. 南泉因陸亘大夫問云: “古人甁中養一鵝, 鵝漸長大出甁不得. 如今不得毁甁不得損鵝, 作麽生出得.” 師召日: “大夫!” 大夫應諾. 師曰: “出也!”
40) 북송대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대사가 지은『종경록宗鏡錄』에는 사람의 마음을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廬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 등 네 가지 마음으로 분류하였다. 육단심이란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이란 보고 듣는데서 분별하여 내는 마음이고, 집기심이란 제 7 말나식末那識과 제 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인데, 이는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이다. 견실심이란 순수한 마음의 진실본성眞實本性으로써 부처님의 성품과 같은 불성을 말한다.
41) 이승二乘은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입장을 두 가지로 구분한 것. 승乘은 탈것이라는 뜻.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혹은 성문聲聞과 보살菩薩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을 말하기도 하는데, 성문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4제의 도리에 의해 깨닫는 사람들, 또는 그렇게 수행하는 입장. 연각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12인연의 도리를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들, 또는 그렇게 수행하는 입장. 회심멸지灰心滅智는 마음이 불 꺼진 재처럼 식고 지식은 없어진다는 뜻이다.
42) 장휘옥, 감사업 제창, 간화선 수행의 교과서, 무문관『무문관 참구』 pp. 236~237.
43)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스님은 사춘기』 pp. 42~44.
44) 히로 사치야 지음 / 김혜경 옮김,『케이크와 부처』「54. 자신의 마음이야말로」 p. 183.
45) 히로 사치야는 1936년 오사카 출생. 본명은 마쓰하라 요시히코(增原良彦). 도쿄 대학 문학부 인도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의 불교 평론가로서, 특유의 평이하고 유려한 문체와 불교에 대한 참신한 접근 방식으로 일본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지혜롭고 반듯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해 왔다. 필명인 ‘히로 사치야’는 그리스 어로 히로(사랑하다)와 산스크리트 어의 샀띠야(진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리를 사랑하다’라는 의미이다. 저서에는 ‘반야심경 실천법’, ‘불교설화대계’, ‘불교의 역사’, ‘석존과 생활한 여성들’, ‘비상식의 권유’, ‘석존과 열 명의 제자들’, ‘불교의 언어 사유방식’, ‘불교와 그리스도교’, ‘불교의 세계관 지옥과 극락’ 등이며, 그의 저서 다수가 이미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있다. (출판사 저자소개)
46) 히로 사치야 지음 / 김혜경 옮김,『케이크와 부처』「52. 앉지 않고 하는 선」 pp. 175~176.
47) <근일 선사 공부담>에서 인용.
48) 유 지 크리슈나무르티/홍성규 옮김,『깨달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