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과 친지들이 살았던 마을자료입니다.
1. 복흥 : 밀양손씨가 뿌리를 내린 마을. 여기서 큰 집(당숙집) 식구들과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사셨으
며, 마을 입구에 '밀양손씨' 글자가 쓰인 비석과 문중 합동납골묘가 있음.
2. 해룡 : 원기당숙네 석동,석양 형님이 사셨던 곳(지금은 광주에서 거주)
3. 담안 : 둘째 고모가 살고 계심(태고명 : 노동댁)
4. 서재동(토동) :
부모님이 신혼살림을 시작한 마을이자 제가 태어난 곳이며, 셋째 고모도 사셨음(지금은 서울거주)
5. 채석 : 큰 고모가 사신 마을(지금은 서울 거주)
6. 성봉(사계비) : 외갓집이 있던 마을(지금은 부산거주 외숙의 별장이 있음)
7. 중흥 : 큰 조부님댁 당숙모님이 살고 계심
서재동, 채석, 성봉 (강산3리)
1. 서재동(토동) : 내가 태어난 마을
제암산 중심자락에 위치한 산간 오지마을로, 마을 전체가 숨어 있는 관계로 난세(임진왜란,동학운동, 갑오경장, 3.1운동 등)때는 항상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선비들이 은거하면서 서당을 차려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살았다고 해서 서재동(書齋洞) 또는 사동(士洞)이라 했으나, 일제시대 왜인들이 ‘선비사(士)’자 아래 획을 일부러 길게 그어 ‘흙토(土)’자를 만들어 표기한 이래 토동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여순사건 당시에는 공비 또는 반란군의 은거지라 해서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른 부락으로 이주시키는 이른 바 소개(蔬開)마을이 되기도 했다.
2. 채석(採石)
1914년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위해 마을을 조성했다. 마을 조성시 돌이 어떻게 많은 지 돌을 캐는 장소 즉, 채석장과 같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채석이라 했다. 일본인들이 마을터로 택한 것은 웅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3. 성봉(晟丰:사계비)
웅치에서 마을 역사가 제일 짧은 마을이다. 성봉이라는 말은 월남 피난민들이 정착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밝고 잘사는 마을’을 이룩하자는 뜻에서 밝을 성(晟) 예쁠 봉(丰)자를 써 성봉이라 했다. 일반적으로 일대가 거북이 4마리의 모양이라 해서 ‘사거북(사계비)’라 부른다.
4. 중흥(中興)
웅치의 행정,교육,상업의 중심지로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이름을 중흥이라 한 것은 풍수지리설에 ‘萬人群笑之地’의 명당이라 해서 마을이 번성하고 크게 떨치고 일어날 것이라 붙여진 이름.
동촌,화촌,중촌(궁계촌,궁계똠),서촌(미륵동,미륵번데기)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풍치림으로 대나무 숲을 조성해 마을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해룡, 복흥, 담안(대산1리)
제암산의 가장 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제암산의 중심마을. 담안, 해룡,복흥,신전,임수 다섯마을이 큰 산밑에 있다해서 대산리(大山里)라 한다.
제암산 입산의 관문 마을 해룡동
바다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마을의 형국이라해서 해룡(海龍)이라 했다.
1960년대 교통이 불편하고 버스가 다니지 않을 때는 해룡마을을 비롯 이 인근 일대마을의 생활근거지는 장흥읍권에 속할 정도였다. 그것은 웅치의 3대 고갯길, 즉 게젯재와 한치재 그리고 곰재재 등이 외부로 가는 유일한 교통로였고 장흥읍 장을 가야하는 주민들은 해룡 부락 앞길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마을동산 등 3곳에 고인돌 15기가 있어 해룡마을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흥(卜興) : 밀양손씨 집성촌
웅치의 최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복흥마을.
제암산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산간오지마을이면서 주변에 마을이 없는 독립마을 형태다. 대밭으로 둘러 싸여 있는 마을은 수원이 좋아 마을 옆에 저수지가 있다.
복흥마을은 1900년경 김해 김씨와 밀양 손씨가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마을의 지명은 제암산 등성이가 줄곧 내려온 ‘복(卜)’자형 지세라 해서 흥라는 ‘흥(興)’자를 붙여 복흥이라 했다.
* 복흥저수지 : 일제때인 1914년 주민들의 노력으로 축조
(저수지 옆 산에 조부모님 산소가 있음)
* 석간수 : 마을 서북쪽 600m 지점 바위사이에서 솟아 나오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른 적이 없고, 주민들이 약수로 사용하고 있음
* 당재고개 : 복흥마을에서 강산리(서재동, 남산 등)으로 가는 고개(282m)에 당(堂)집이 있었다.
어릴적(초등학교 5~6학년, 방학기간 나는 광주에서 보성 웅치 태자리 서재동 및 친척집에서 지냈다) 서재동 고모댁에서 복흥마을로 갔다올때 고종사촌형제랑 같이 당재고개를 넘었던 기억이 난다.
* 땅골 : 당재 밑 골짜기에 있는 마을. 영광 정씨가 살았음.
담안(담내)
처음 마을의 지세가 배(船)의 형태와 같다고 해서 선형동(船形洞)이라 하면서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마을 주위에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에 돌담이 많은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며 지금의 들독거리는 배의 닻을 완전 고정시키는 고정틀에 해당된다.
출처 : 熊峙面誌(웅치면지), 웅치향토사편찬위원회(2000.12.10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