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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구간 (실상사 그리고 뱀사골)
덕두산(德頭山)
2구간의 옥계능선에서부터 3구간 장항 마을까지는 덕두산 자락을 거치는 구간이다.
그만큼 덕두산의 품이 넓다는 이야기가 된다.
옥계능선, 태극능선, 덕두봉동능이 덕두산에서 가지를 쳤고, 그 사이의 골들은 수정처럼 맑은 물길을 만들면서 람천에 합류한다.
그리고 용계, 구인월, 월평, 중군 마을 등이 덕두산 품에 자리를 잡았다.
해발표고 1150m의 덕두산은 남원시 운봉읍과 인월면의 면계를 이룬다.
북쪽의 황산과 서쪽의 투구봉과 삼봉산은 람천을 사이에 두고, 남동의 삼정산은 만수천을 사이에 두고 각각 마주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바래봉이 세걸산, (큰)고리봉으로 이어주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이룬다.
노고단에서 성삼재, (작은)고리봉, 만복대, 정령치를 거쳐 (큰)고리봉, 세걸산,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마지막 봉우리가 덕두산이다.
한편으로 덕두산은 지리산 태극종주의 들머리이자 지리산괴(山塊)의 관문이 되기도 한다.
태극종주란 덕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서북능선과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을 거치고 지리산 동부능선인 중봉, 하봉, 밤머리재, 웅석봉까지의 도상 72km의 지리산능을 종주하는 구간을 일컫는 것이다.
이렇듯 덕두산은 지리산의 중요한 봉우리 중의 하나이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게 오히려 생소한 봉우리로 대접받을 정도로 자신을 묻어두었다.
물론 바특하게 이웃하는 바래봉의 명성에 가린 점이 없지 않지만 덕두산은 오히려 은자(隱者)의 자적함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듯 고고하다.
그래서 그런지 덕두산은 아직도 처녀지 그대로의 울창한 숲과 깨끗한 계류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덕두산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한 선비의 풍모를 가진 산이다.
그러나 자신을 요란스럽게 과장하거나 드러내기를 거부할 뿐이지 갑갑하게 닫혀만 있는 은서지는 아니다.
덕두산의 정상에 서면 횡대로 늘어선 지리산의 주능선과 종대로 줄 선 서북능선을 호쾌하게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덕두산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정상에서 시야를 열어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시야를 열어주는 덕성스러운 품성을 가진 산이다.
그래서 덕두산(德頭山)인가.
실상사의 철제여래좌상
장항마을 지나고 장항교를 건너면 60번 지방도를 만나게 되는데, 이 도로는 산내면 소재지를 지나 실상사를 거치고 곧바로 3구간의 종착지 금계마을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길을 가로 질러서 등구재로 가기 때문에 실상사를 들르지 못한다. 이쯤해서 실상사 이야기를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매동마을 지나면서 만나는 삼거리에서 마천방면 60번 지방도를 따라 좌회전을 하여 조금만 가다보면 우측으로 약간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데 그 들판의 중심에 실상사(實相寺)가 자리 잡고 있다.
실상사는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장(智藏)의 문하에서 선법을 깨우친 뒤 귀국하여 창건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최초의 가람이었다. 828년 신라 흥덕왕 3년, 실상사는 우리나라 선풍(禪風)의 발상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실상산문(實相山門)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던 교종(敎宗)을 누르고 선종(禪宗)이 자리 잡게 한 것이다.
처음 실상사는 지금의 백장암 터에서 자리하였으나, 대중들이 점차 많아지자 2대 조사인 수철화상(秀澈和尙)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말까지 실상사는 상당히 융성하면서 이 땅에 선풍을 드날렸다.
정유재란(1597년)때에는 가람이 모두 불타게 되어 스님들이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으로 옮기면서 약100여 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1700년(숙종 26)에 이르러 36동의 건물을 세우는 중창을 하게 된다.
1882년(고종 19) 또다시 가람이 불타는 수난을 겪게 되나, 여러 스님들의 불심으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실상사가 1950년대 전후(前後)의 빨치산과 토벌군의 전투로 수난을 겪게 되었지만 가람의 피해는 크게 없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실상사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의 부침(浮沈)을 겪었으나, 우리 불교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실상사에는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 보물 41호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이 철불을 두고 약사여래불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최근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통상 약사여래불은 손에 약 항아리를 들고 있는데, 이 철불은 전형적인 아미타정인의 하품중생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으므로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 같다.
즉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하고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닿게 하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잡고 있는 모양의 수인은 아미타정인의 하품중생이고 따라서 아미타불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부처님을 약사전에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극락전에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부분은 내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전문가들의 명쾌한 결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내가 이 부처님을 볼 때마다 느꼈던 감정은 막막(寞寞)한 슬픔이었다. 엄숙한 경배의 대상인 부처님 면전에서 이런 불손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주제넘다고 탓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 혼자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의 소회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해해 달라.
가늘게 뜬 실눈과 침묵으로 오므린 입술, 거무튀튀한 얼굴에서 나는 평생을 고생하신 우리들의 아버지・할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 굵은 손마디, 그리고 이마의 깊은 주름이 오버랩 되는 것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외롭고 답답한 슬픔이라는 감상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 철불은 1200년 가까운 세월의 실상사 영욕을 함께한 부처님이시다.
실상사가 융성했던 초기에는 이 부처님의 위엄도 대단했으리라.
그러나 정유재란 때 일본에 의해 실상사가 소실되면서 이 부처님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사지 들판에서 100여년의 긴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다.
비⋅바람, 눈⋅서리를 맞으며 외롭게 실상사를 지켰던 세월이었다.
낮에는 토벌군, 밤에는 빨치산이 번갈아 점령당하는 동족간의 슬픈 싸움을 지켜보면서 침묵하였던 적도 있었다.
실상사의 숱한 부침을 침묵으로 버티어 온 이 부처님의 오므린 입술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막막함이었고 슬픔이었다.
더욱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 부처님의 두 손이 절단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다듬어 끼워 놓은 것이다.
손목이 절단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그것보다 의수(義手)로 연상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모습, 이 모든 상념의 끝자락은 아릿한 슬픔이었다.
통상 높은 좌대나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님과는 달리 이 부처님은 맨바닥에 앉아 계신다.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 이유인즉 우리 땅의 기운이 천왕봉 너머 일직선으로 이어진 일본 후지산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를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리하여 보광전에 있는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37호)의 제작 당시(조선 숙종 20년:1694년)에는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부분을 얼마나 많이 두들겨 쳤는지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철제여래좌상의 수인에 관련하여 희소식이 있다.
최근(2013. 3. 7) 철제여래좌상의 복장유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절단된 철재 수인을 발견하여 이를 대중에게 공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슬픈 의수가 아닌 원래의 당당한 수인으로 이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된 수인은 현재 나무로 끼워 놓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서 아미타정인의 하품중생이라고 한다.
뱀사골, 달궁 이야기
산내면 소재지에서 60번 지방도를 버리고 직진하게 되면 지리산의 심곡(深谷)인 뱀사골, 달궁을 만나게 되고, 심원을 거쳐 성삼재를 넘으면서 구례에 닿게 된다.
뱀사골은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반선부락에서 지리산 주능선의 화개재까지의 계곡을 말하며, 예부터 경상도 화개장과 전라도 인월⋅운봉장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다니던 길이었다.
지리산의 가장 아름다운 계곡 중에 하나로 꼽힌다.
온통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곳곳에 아름다운 폭포와 소(沼)가 즐비하다.
이곳 지명인 반선과 뱀사골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1천 3백여년전 반선 고을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실상사보다 100년이 앞선 대찰이었다.
이 절에서는 매년 7월 백중날 스님 한 분을 뽑아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하고 그러면 그 스님은 곧 신선이 되어 승천했다.
그러던 어느 해 과연 하루 저녁 기도로 신선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스님(혹자는 이 스님이 서산대사라고 하였으나 확실하지는 않다)이 뽑힌 스님에게 독약이 묻은 옷을 입혀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했다.
밤이 깊이 자정이 넘었을 때 신선대 밑 용소에서 거대한 이무기가 뽑힌 승려를 덮쳤고, 다음날 아침 신선대에는 승려와 이무기가 함께 죽어 있었다.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은 후, 사람들은 이 골짜기 이름을 뱀이 죽었다고 해서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골짜기 입구의 마을을 반선(半仙)이라 칭하는 것도 신선이 되겠다는 승려가 이무기의 밥이 되어 반쪽 신선밖에 되지 못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이 골짜기에 배암사라는 절이 있어 뱀사골이라 불려 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선에서 달궁계곡을 따라 덕동을 지나서 성삼재 고갯길의 초입에 이르면 달궁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도 지명에 얽힌 전설이 있다.
삼한시대(마한, 변한, 진한)에 백제군에 쫓기던 마한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는데 그때 임시 도성이 있던 자리를 달궁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심원달궁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 천혜의 요새였다.
마한왕은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 10리밖의 영에 정장군을, 동쪽 20리밖의 영마루에 황장군을, 남쪽 20리밖의 산령에는 성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북쪽 30리 밖의 높은 산령에는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해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고 하여 각각 정령재⋅황령재⋅성삼재⋅팔랑재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나, 지금 달궁에는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 옛날의 궁성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서산대사의 황령기에는 마한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왔다고 하였으나, 마한의 근거지가 경기, 충청, 전라도이고, 진한은 대구, 경주이므로 위치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또한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배치한 영들은 전라도방향에서 침공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삼한시대 말기, 삼국시대 초기에 마한이 백제에 근거지를 빼앗기고 쫓기면서 자리 잡았다고 해야 옳은 설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뱀사골과 달궁은 지리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골짜기이다.
아름다운 만큼 우리의 아픈 현대사 또한 어려 있는 곳이 이곳이다.
김지회와 조경순
뱀사골과 달궁을 이야기하면서 김지회와 조경순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이 여순 반란사건의 지도자와 그의 애인이 사살되고 생포된 곳이며,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아련한 사랑이 끝날 수밖에 없었던 곳 또한 바로 이곳이다.
여순 반란사건의 지휘자 김지회와 그의 애인 조경순에 대하여 아는바가 별로 없다. 다만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사건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가 1949년 4월 13일 사살된 김지회의 시체를 발견될 때까지의 반년간의 행적이 전부이다.
조경순은 제주도 출신으로 그녀가 간호사로 일했던 광주의 한 병원에 입원했었던 육군 중위 김지회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애인이 되었고 김지회가 죽을 때까지 김지회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여인이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도 반군 토벌을 위해 여수에서 승선을 준비하던 14연대 소속 지창수 상사가 지휘하는 좌익 병사 40여명들이 간부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여순 반란사건이다.
김지회 중위(육사 3기)가 반란군의 총 지휘자가 되면서 여수를 접수하게 되고 이어 육사동기인 홍순석 중위가 합류하면서 순천까지 접수하게 된다.
그러나 곧이어 정부의 토벌군에 밀리게 되면서 반란군들은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지리산 토착 공비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리산에서 그해 겨울을 났다. 조경순은 여자의 몸으로 춥고 배고픈 그해 겨울을 김지회의 옆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나는 조경순이 그 혹한의 지리산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공산 이데올로기적 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애인 김지회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던 간에 극한의 환경에서 함께하였다는 그 근저가 사랑이었다면 그 사랑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힘든 겨울이 나고 봄이 오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끝이 날 수밖에 없는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김지회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1949년 4월 9일 김지회, 홍순석은 평소 이들에게 우호적 이었던 뱀사골의 반선마을의 주막에서 밥과 술을 마시고 잠을 자게 된다.
조경순도 함께 한 것은 물론이다.
토벌군에게 사전 섭외되었던 주막 주모의 신고로 이들은 30여명 중 홍순석을 포함한 17명이 죽고 7명이 생포되게 된다.
생포된 자들은 김지회와 그의 애인 조경순이 자신들과 같이 있었다고 했으나 두 사람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4월 13일 달궁에서 여자 한 명이 낀 수명의 공비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토벌군에게 입수되었다.
그 즉시 토벌군은 출동하여 그 일당을 사로잡았고, 그 중의 여자가 조경순이었던 것이다.
토벌군이 김지회의 행방에 관하여 조경순을 심문했지만 조경순도 반선리에서 기습을 받은 뒤 김지회와 헤어져 그를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토벌군은 부근을 수색하다가 반선마을 주막에서 약 600미터 떨어진 연정골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훼손이 심해서 신원확인이 불가능하였으나, 이 시체를 조경순에게 보여주니 조경순만이 그를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김지회의 등에는 화개장터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상처가 있었는데 이를 조경순만이 알아본 것이었다.
김지회는 반선마을 기습에서 총상을 입고 사력을 다해 연정골까지 도망하다가 까마귀의 밥이 되었던 것이었다.
조경순 역시 그해 가을 사형을 언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녀의 나이 꽃다운 20세였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죽음이 있었으니 반선마을 주막의 주모였다.
토벌군에게 신고하였다는 이유로 남은 공비 잔당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내 시는 눈 내리는 지리산에 바쳐진다
아흔 아홉 골짜기 눈 내리는
해방특구 그 민주마을
통비마을
그 불타버린 마을들에
바쳐진다
네가 버리고 떠난 마을
그 산자락 따라 돌며
줄초상에 줄제사
한날한시에 통곡이 일어났던 밤
그 밤 열두 시에 바쳐진다
너의 창 끝에 너의 총구
혹은, 혹은,
불을 뿜던 빨치산의 마을들
그 외공리를 지나 구례 산동모스크바 지나
너희들 그 흔적 없는 범죄 위에
내 시는 쓰여진다
일찍이 삼한 적 하늘 밑
울바자 튼 집자리
노고단 너머 첫 동네
못다 핀 사랑이야기
그 달궁 마을에 눈 내린다
잔돌평의 봄을 부르는
14연대-한 나팔수가 버리고 간
그 아지트 속 나팔 주둥이에도
빨랭이 빨치산 붉은 녹물이 들어서
눈 내린다
그 무쇠솥 뚜껑 위에
산마루 태성 성成돌을 베고 누운
잠든 얼굴 위에
지리산에 눈 내린다
송수권 시인의 서사시 ‘달궁아리랑’ 중 ‘서시(序詩)’이다.
망지리(望智異) (1)
등구재에서 우측 능선(남쪽)으로 오르면 백운산이 나오고 좌측 능선(북쪽)을 오르면 삼봉산이다.
삼봉산(1187m)은 산꾼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그래서 삼봉산은 오도재에서 오도봉을 거쳐 오르거나, 팔령치에서 투구봉을 거쳐 종주하거나, 그리고 금대산, 백운산, 등구재를 거쳐 오르는 등 많은 코스를 접할 수 있다.
둘레길 3구간 중 매동, 중황, 상황마을들의 뒷길에서 등구재로 이어지는 길 역시 삼봉산 기슭을 거쳐 간다.
삼봉산은 지리산 조망처로 최고의 자리이다.
남해바다의 통영과 사천 어름에 사량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에는 지리산이라는 산이 있다. 그곳에 서면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망지리산(望智異山) 또는 지리망산(智異望山)이라 부른다.
삼봉산 역시 지리산 밖에서 지리산을 조망하는 망(望)지리의 구간이다.
이곳에서는 천왕봉에서 반야봉, 만복대까지의 지리산 주능선을 거침없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리산 주능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지능(支稜)들을 일망할 수 있는데, 노고단⋅세걸산⋅바래봉에서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지리산 서북능선), 삼각고지⋅영원령⋅삼정산으로 이어지는 삼정산 능선, 그리고 제석봉에서 창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망(望)지리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지리산의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도 것이지만 지리산의 속살의 깊디깊은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기막힌 장소가 바로 삼봉산이라는 점에서이다.
눈앞에 좌우로 바특이 서있는 삼정산과 덕두산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계곡이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계곡인 뱀사골 ∙ 달궁계곡이다.
눈 아래 원천마을에서부터 내령, 반선, 달궁, 그리고 심원마을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심곡(深谷)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인 것이다.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원시림 사이로 언뜻언뜻 내보이는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시선을 조금씩 올리다 보면서 느끼는 눈맛은 가히 일품이다.
반선에서 갈라지는 뱀사골은 수줍은 듯 은밀한 속살을 숨겼다가 화개재까지의 상류만 이곳의 간객(看客)들에게 눈대중으로 가늠할 정도의 시선을 허락하는 듯한, 그래서 그곳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현기증 같은 아련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곳에서 조망의 백미는 달궁계곡과 심원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제일 깊숙한 골짜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리산의 북쪽 끝인 노고단에서 발원한 물이 반야봉과 만복대 사이로 청담옥류를 만들면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이 심원계곡과 달궁계곡이다.
지리산의 제일 깊은, 그래서 이름마저 심원(深遠)인 그곳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조망처가 바로 삼봉산이며, 이곳에서 보는 내밀(內密)의 지리산은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사실 비록 삼봉산이 아니더라도 둘레길 중황마을에서 삼봉산으로 오르는 길 또는 등구재에서 삼봉산으로 오르는 길 중간 조망처 어디든 이 기막힌 풍경, 지리산의 속살을 원 없이 훔쳐볼 수 있는 아련하고도 황홀한 아름다움의 망지리처(望智異處)가 된다.
다랑이
언제부터인지 다랑이하면 많은 사람들은 남해 가천을 떠올리게 된다.
경사진 비탈에 켜켜이 쌓아진 논배미들이 확 트인 남해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가졌다 해서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었고 그리하여 다랑이의 대표적인 명소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보통명사인 다랑이가 그곳에서는 가천마을 대신 다랭이마을이라는 고유명사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랑이의 진미를 보려면 지리산을 찾으라고 권하고 싶고, 그 중에서도 둘레길 제3구간, 상황마을과 등구재 그리고 창원마을로 이어지는 구간에서 만나는 다랑이를 최고로 치고 싶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계단식 논이 살아있는 한 피아골은 살아있고, 그것이 살아 있을 때 피아골은 살아있다.”라며 피아골의 다랑이를 찬양하고 있지만(문화유산 답사기 3권. 59면), 나는 이곳의 다랑이야말로 다랑이의 본질적 아름다음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해본다.
다랑이란 산골짜기의 경사진 비탈에 있는 층층으로 된 좁고 긴 논배미를 일컫는 말이다.
경사진 산비탈을 평탄하게 일구어 적당한 높이로 막돌을 쌓고 논두렁을 만든 후 고랑의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만든 계단식 논들을 다랑이라고 한다.
강원도 방언으로는 다랑논, 북한에서는 다락논이라고도 하며, 다랑이라는 말은 산비탈의 논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간혹 쓰이는 ‘다랑이 논’이라는 표현은 ‘역전 앞’이라는 것과 같은 중복적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아무튼 다랑이는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지어야 하는 특성상 논바닥이 평평해야 하기 때문에 비탈에 따라 논두렁들이 구부렁할 수밖에 없고, 그 휘어진 논두렁의 층층이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랑이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등고선을 그리듯 구불구불한 논두렁의 연속적 선형의 꾸밈없는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자연에 거역하지 않은 최소한의 인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오랜 세월 자연에 순화되고 인위적 요소가 퇴색되어 오히려 천연적인 모습으로 진화하였다는 점이다.
중군마을에서 만나는 다랑이는 논배미가 그리 많지 않아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이지만, 중황마을을 지나 등구재로 이어지는 길에서 만나는 굴곡진 논배미들과 아래쪽 건너편 입석리의 아스라한 다랑이가 겹쳐지면서 만들어 내는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다랑이는 그것을 보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서 각기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게 되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논두렁의 층층의 모양은 정직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옆에서 보는 다랑이는 친숙한 아름다움, 위에서 볼 때의 다랑이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제각각의 다른 모양으로 널려진 논배미들이지만 그 논두렁이들은 다 같이 유연한 곡선으로 집적(集積)되어진 이곳 다랑이의 자연미에 우리는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등구재를 넘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를 만나게 되는데 좌측의 오름길이 지리산 둘레길이나 다랑이를 보려면 오른쪽 내림 길로 가야한다.
이곳에서는 다랑이를 끼고 내려가다가 가로지르는 길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위에서, 옆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보는 다랑이의 자연미, 친숙미, 정직미 모두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유순한 곡선의 논두렁이가 위에서 볼 때와 옆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볼 때의 각각 달라지는 풍경의 변화를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랑이는 계절에 따라 색감이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데, 여름날의 다랑이는 짙푸른 볏잎의 힘찬 기운을 담고 있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그리고 가을의 다랑이는 황금빛 벼 이삭이 눈부실 정도로 원숙한 아름다움의 풍경을 만든다.
겨울의 다랑이는 벼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그려 내고, 봄의 다랑이는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워내는 몽롱한 아름다움을 지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늦은 봄, 모내기를 하기 위하여 논배미 마다 물을 가득 담았을 때의 모습이 다랑이의 사계 중 가장 아름답다.
논배미에 물이 가득가득한 모습이 층층진 호수들이 온산 가득 널려져 있는 듯하고, 반짝이는 물빛이 유순한 곡선의 논두렁이와 어울려 마치 별천지같은 풍광을 자아낼 때의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정도이다.
벽소령 이야기
지리산 둘레길과 접하지 않은 곳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리산 둘레길의 외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 둘레길은 이 길의 접⋅비접의 논리로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리산이라는 당연한 화두를 깔고 나선 길이기 때문이므로, 비접이라고 배재하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비접이지만 3구간이 지나면 이야기 할 기회를 놓칠 것 같은 벽소령을 이야기해 보련다.
벽소령에서 함양 마천쪽 임도를 따라 내려오면 음정, 양정, 하정부락을 차례로 만나게 되는데, 이 부락들을 통칭하여 삼정이라고 한다.
그 반대편 하동 화개쪽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빗점골에 또 다른 삼정이 있다. 벽소령을 사이에 두고 삼정이 맞맞이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찾을 수 가 없어 우연한 일치로 결론을 지어본다.
아무튼 마천쪽 삼정의 하정부락에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 이른바 인걸과 아미선녀의 전설이 있다.
이곳에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걸은 사냥 다니는 길목에서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는 것을 이상히 여겨, 무지개의 끝을 따라가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산자수명한 이곳 방장산에서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 들고 무지개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옥황상제의 시녀들이었다.
어느 날 밥을 짓던 선녀들이 소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하늘로 날아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하늘에 올라가면 옥황상제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날개옷을 훔치게 되었다.
훔친 옷을 들고 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만 날개옷이 찢어지게 된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아미선녀는 인걸이 갖다 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 후 하늘의 옥황상제는 아미선녀가 하늘로 올라올 수 없음을 알고 어쩔 수 없으니 땅에서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이 쌀바위는 벽소령 군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한다)
쌀 바위에서는 매일 필요한 양 만큼의 쌀이 나와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하여 인걸과 아미는 1남 2녀의 자식을 낳아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벽소령에는 부자(父子)바위가 솟아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는 지명으로서 부자바위골(삼장의 광대골에서 형제봉까지의 계곡), 이설(異說)은 있지만 광대골에서 구벽소령까지의 계곡인 비린내골(날비(飛), 헤어질 리(離): 선녀가 나무꾼과 헤어져 하늘로 날라 올라 갔다는 의미) 등이 있고, 근래에 마을사람들이 마을 앞 솔숲 계곡에 선유정(仙遊亭)을 지어 이 전설과 연관 짓고 있다.
사실 부자바위는 벽소령에서 조금 떨어진 형제봉 근처에 있다.
벽소령(碧宵嶺)을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푸른(碧) 밤(宵)이란 뜻이다.
그래서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로 벽소명월(碧宵明月) 또는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 부르고 있다.
벽소령의 옛 이름이 뱁새고개라는 주장이 있다.
인근 사람들은 이 고개를 아직도 뱁실령(뱁실재)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뱁새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벽소령(碧宵嶺)은 뱁실령의 음을 딴 한자어라는 것이다.
실재로 벽소령 아래의 샘 이름이 뱁실샘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생육신 중의 한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라는 산행기에서 의신암(義神庵)의 어떤 스님이 의신조사(義神祖師)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대목이 있다.
그 전설에서 이곳 벽소령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의신조사가 의신암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도가 반쯤 닦여지자, 이 산의 천왕(天王)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을 권하였다. 스스로 초료새(鷦鷯:뱁새)가 되어 길을 인도하였고 선사가 따라갔다. 큰 고개에 이르자 초료새가 독수리(鵰:조)로 변하였는데, 그래서 그 고개를 ‘초료조(鷦鷯鵰:뱁새⋅독수리)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벽소령을 일컫는 말이다.
또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본다.
수리새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 터에 이르니,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리새가 말하기를 ‘3.7일(21일)이면 되리라’라고 하였다.
선사는 너무 더디다고 여기고, 다시 중무주(中無住)의 터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리새가 말하기를 ‘7일이면 되리라’라고 하였다.
선사는 그것도 더디다고 여겼다. 수리새는 또다시 상무주(上無住) 터로 인도하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수리새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하루면 도를 이를 수 있으나, 여인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사는 그곳으로 들어가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성을 다하면서 개명하여 무주조사(無住祖師)라고 하였다.
추강이 허황한 이야기라면서 소개한 글이지만 의신조사가 득도하기 위하여 걸었던 하동 의신에서 벽소령을 넘어 상무주암에 이르기까지의 구도(求道)길은 지금도 산꾼들에겐 유효한 길이다.
상무주암에서 문수암을 거쳐 실상사로 내려가는 길은 산꾼들은 물론 불자들에게 칠암자(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순례길로도 많이 애용되고 있다.
그리고 의신 삼정에서 벽소령을 넘어 마천 삼정까지 이르는 임도도 산꾼들에겐 널리 알려진 길이다.
후기 (구간전체 20.6km) 2017. 7. 8 / 8. 5
(인월 ⇨ 중군마을 : 2.3km)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 것인가.
88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길을 막는다.
뒤따라오던 일행의 차에서 오늘 둘레길 순례는 불가능할 것 같으니 인월에서 돌려가자는 전화가 왔다.
운전하기도 힘든 이 상황에서 둘레길 걷기를 강행하기에 무리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난감하였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인월에 진입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빗줄기는 가늘어 지고 있었다.
시가지에서 합류한 우리는 다시 폭우가 시작되면 철수하기로 하는 조건 하에 둘레길 2구간을 강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슈퍼에서 장을 보면서 1회용 우의를 추가로 구입하고 출발하였다.
구인월교에서 시작한 3구간은 중군마을까지 람천을 옆에 낀 둑방길이다.
비록 흙탕물의 람천과 그치지 않은 비 때문에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발걸음만큼은 가볍다.
구인월 앞들이 끝날 즈음 그늘집 정자가 우리를 맞는다.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이곳을 접수하고 새참을 먹기로 하였다.
일행이 가지고 온 족발을 안주로 하여 술이 한 배 돌자 누군가가 술맛은 오늘 같은 날이 제격이란다.
모두들 공감하는 듯 연거푸 몇 잔씩 더 마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줄기가 가늘어 지더니 중군마을에 이르자 비는 신기하게도 그쳤다.
모두들 비옷을 벗고 가뿐한 걸음으로 마을을 지나치는데,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물먹은 꽃 그림이 선명하게 피어나는 듯하다.
중군마을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 우리의 군대(당시의 전투군단은 전군(前軍), 중군(中軍), 후군(後軍), 선봉부대로 편성되었다), 중군이 주둔하였던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중군마을 ⇨ 수성대 : 2.7km)
마을을 벗어나면 다랑이의 농로이다.
그리고 곧이어 고즈넉한 숲길이 계속 이어진다.
황매암 입구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경사가 완만한 임도를 버리고 황매암으로 향하는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경사가 있는 된비알이지만 물먹은 숲의 청신함이 육신과 정신을 깨끗하게 여과시키는 듯하다.
힐링의 길이다.
황매암을 지나고 산등성이를 넘어 한참을 오르고 내리다 보면 수성대 입구의 임도를 만나게 된다.
황매암 입구에서 헤어졌던 그 길이다.
둘레길은 이 길을 조금 오르다 왼쪽의 숲길로 꺾어 든다.
그리고 수성대이다.
조금 전 내렸던 폭우를 증명이나 하듯이 수성대 계곡은 황톳물의 급류가 소용돌이치며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3년 전 이곳을 거쳐 갈 때 막걸리를 마셨던 무인주막의 평상은 그대로 있었다.
다만 계곡 건너편에 있었던 평상이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 외에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넉살좋게 평상을 접수하였다. 마치 주인인 양.
그리고는 탁류이지만 계곡물을 떠다가 청소를 하고 오찬을 준비하였다.
솔잎 돼지고기 수육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술도둑이 되었고, 마무리의 라면은 안족의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지극히 행복한 오찬이었다.
(수성대 ⇨ 장항마을 장항교 : 1.9km)
수성대에서 배넘이재까지는 짧지만 호젓한 산길이다.
배넘이재는 운봉이 호수일 때 배가 넘나들어 붙여진 이름으로 운봉의 배마을(舟村里), 배를 묶어두었다는 고리봉과 함께 지리산의 전설속의 배와 관련된 지명이다.
배넘이재를 넘어서 내리막 숲길을 거치고 장항 마을 후면의 내림길 농로를 따르다 보면 당당한 풍채의 거대한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 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넘은 장항마을의 당산 소나무라 하는데, 마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멀리 천왕봉의 그 위엄스런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건너편 매동마을 뒤로 이어지는 둘레길과 중황⋅상황마을, 그리고 둥구재를 볼 수 있다.
시멘트 포장의 내림길을 따라 내려서면 장항마을이다.
이곳 산세의 지형이 노루가 목을 길게 내민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노루목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노루 ‘장(獐)’, 목 ‘항(項)’를 써서 장항마을로 부르고 있다.
장항마을을 지나 장항교를 건너면 오늘 구간의 날머리이다.
20km가 넘는 장거리의 제3구간을 하루에 마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 3구간을 반으로 나누어 매동마을 입구에서 오늘의 둘레길을 마무리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신 마을 앞 람천변의 퇴수정과 세진대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퇴수정(退修亭)은 1870년에 가선대부로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梅天) 박치기(朴致箕)가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오전에 내린 폭우 때문에 황톳물이 된 람천이지만 퇴수정과 너럭바위의 세진대가 어우러진 풍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의 나머지 구간을 채우기 위해 8월 첫 주 토요일 우리는 매동마을 지리산휴게소 삼거리에서 신발끈을 묶었다.
8월의 태양은 메마른 대지를 태울 듯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모두 두렵지 않다는 분위기이다.
길은 삼봉산을 쳐다보면서 곧바로 치고 오르는 시멘트 농로이다.
약간은 힘들고 지루할 것 같은 길이다.
그러나 길 오른편에 늘어선 숲은 직사의 햇볕을 그늘로 가려 주고, 왼편에 조성된 사과밭의 탐스럽게 열린 사과가 싱그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힘듦과 지루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사과밭 위에는 한 마리의 독수리가 휘휘 돌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새를 쫓기 위해 은박지로 만든 연이었는데, 또 하나의 깜찍한 그림이 되었다.
시멘트 농로가 끝나는 서진암 갈림길에서 우리는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서진암 갈림길 ⇨ 등구재 : 4.5km)
여기서부터는 호젓한 숲길이다.
이 길은 솔향이 어우러진 오솔길과 수정처럼 맑은 실개울을 거치는 길이다.
그리고 숲길이 끝나면 삼정산 너머 병풍처럼 펼쳐진 지리산 주능선의 파노라마에 마냥 취할 수 있는 길이다.
다만 중황마을과 상황마을 후면의 시멘트 농로길에서 오름과 내림의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게 되지만 정면의 백운산 자락에 켜켜이 굴곡진 다랑이의 아름다운 풍경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등구재를 오르는 농로의 끝 지점에 자리한 주막을 지나치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물이라도 한 바가지 먹고 쉬었다 가라며 붙잡는다.
아주머니의 표정과 행동이 장삿속의 호객행위는 아닌 것 같은 진실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물 대신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등구재까지의 된비알의 숲길을 단숨에 올랐다.
등구재는 지금까지 함께해온 전라북도 남원시와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경상남도 함양 땅을 만나게 한다.
등구재는 거북이가 기어 올라간 지형이라 하여 등구(登龜)재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데, 또 다른 유래로는 아홉 구비를 오르는 고개라는 의미의 등구치(登九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등구재 ⇨ 창원마을 ⇨ 금계마을 : 6.6km)
경사가 있는 내림길이지만 아늑한 숲길이 계속 이이 진다.
숲길이 끝나고 시멘트 임도를 만나면서 우리는 우측으로 꺾어 오르는 둘레길을 버리고 창원마을을 향하는 내림길을 택하였다.
우측 임도의 둘레길은 바특이 다가선 천왕봉을 마주하는 조망길이지만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어 더위가 부담스런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둘레길의 정코스를 버리고 변칙이지만 내림길의 편함을 택한 것이었다.
변칙이 통용되는 세상을 비판하던 우리들이 변칙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선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내림길 중간의 농막 평상에 자리를 잡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삼겹살에 소주도 곁들이면서 한참을 휴식하였다.
창원마을을 거치면서 원래의 둘레길과 합류하여 다랑이 논길과 잡목 숲 오솔길을 지나서 내림길에 들어섰다.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 금계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