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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잘 써주라우야" |
[연휴에 찾은 금강산]세상만사 잊게하는 금강산(2007년 09월 25일 (화) 10:24:57, 김종규) |
내게 금강산은 정비석의 ‘산정무한’에서 시작된다. 고등학교 때 ‘이민영’이라는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그는 부산지방에서 시작(詩作)활동을 하는 분으로 시인들의 얘기며 작가들의 근황을 아주 맛깔스럽게 소개해 이 과목을 좋아하게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 선생님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아마 필자가 글로써 먹고사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이 분의 가르침이 일정부분 작용했다.
상팔담이 보이는 곳에서 내려다 본 금강산 전경, 좌우 모두 절경을 이루고 발아래는 상팔담이 진주 목걸이처럼 연이어져 있다. |
그 때 당시는 있을 법한 상상은 아니었지만 어째든 막연한 동경은 있었다. ‘금강산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이니 하는 노랫말도 역시 내 몸속에 후천적 인자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막연했던 꿈이 의지에 따라 실현될 수 있는 여건이었는데도 이제서야 그곳에 간 건 좀 더 동경의 세계 속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탓이리라. 맛있는 먹거리는 아주 조금씩 아껴서 먹는 것처럼...
22일 새벽 6시 30분. 대전 서구 둔산동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 편. 붉은 색 산수관광 대전 75바 3722 리무진 버스는 진주언 기사가 시동을 켜고 있었다. 대전에서 가는 금강산 여행객은 4가족. 이 중에 공교롭게도 가톨릭 피부과 김윤성 원장 부부가 있었다. 김원장과는 대학 동창으로 사회에 나와서 알게 돼 지기(知己)가 되었다. 우린 아내와 아들 효섭, 딸 효진 이렇게 네 식구였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부가 오붓한 시간을 가지는데 오히려 아는 사람을 만나 불편하지나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2박3일 동안 함께 할 안내원은 김양미 조장이었다. 차량 이동 중에 사진은 찍지 말고 북측 군인들의 행동은 절대 흉내 내면 안 된다는 등의 주의 사항은 최악의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 잔뜩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국가 이념을 배우면서 자라온 필자에겐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다. 부담은 곧 긴장이었다. 동행한 아들과 딸은 그냥 ‘에피소드’로 흘러버리는 것 같았다. 세대차이였다.
잔목들이 해안선을 끼고 쭈~욱 펼쳐져 평원을 만들고 있는 남방 한계선을 넘어 비무장지대에서 마지막 남측 군인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긴장 끝에 나온 행동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남성적인 힘을 자랑하는 구룡폭포. |
오후 3시 30분 48초.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월경(越境)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올해 5월 17일 분단 후 처음으로 철도를 이었다는 동해북부선은 줄 곧 동반자였다. 북으로 향하면서 훌쩍 뛰어넘은 군사분계선은 허탈과 배신감을 가져다주었다. 포도나무 지주목 정도의 말뚝하나가 그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숱한 대립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저 조그마한 말뚝이었단 말인가.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국전쟁, 1.21 사태, 울진 무장공비사건, 아웅산 테러사건, 실미도 사건 등등...이념은 역시 무서운 것이었다.
군사분계선 양쪽에 남과 북의 군인이 초소를 지키고 있는 거리는 약 300m, 소리 지르면 서로 들릴 정도였다. 오른 쪽으로 금강산 1만2천봉 중 맨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은 동해에 닿았고 바로 그 옆에 감호(鑑湖)가 있었다. 구선봉을 물에 비추게 한다는 호수였다. 벌써부터 절경이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라는 글이 코앞에 있다. 이곳이 북녘이구나. 월경수속을 위해 대기하는 데 바로 옆에 군인들이 오고간다. 팔을 앞뒤가 아닌 좌우로 흔들면서 걷는 모습이 신기롭고 우리 아이들이 보면 따라할 만도 했다. 군인들이 월경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앳띠고 순박해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과거의 우리 모습도 저러했으리라.
“추석 때 6만 명이 들어온다는 데 힘들어 죽갓시요”
우리 측 안내원에게 농담도 던진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남측 사람들과 자주 접하고 일하다보면 배울 것도 있고 따라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어 분별력은 생기지 않을까. 그게 북에서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될 일은 아닐 성 싶다.
차창 밖 북한 풍경은 이국적이었다. 똑 같은 형태의 집에 호박 넝쿨을 지붕위로 올린 모습까지 천편일률이었다. 낡은 기와와 빛바랜 페인트는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했다. 산을 끼고 자연의 곡선을 거스르지 않는 마을 풍광은 그 옛날 많이 보아왔던 익숙한 광경이었다.
온정각에 도착한 건 오후 4시. 숙소를 정하자 아들 입이 댓발이나 나왔다. 조립식 주택에다 잠만 잘 수 있는 곳이었다. 떠나기 전 나래여행사 정동채 사장이 “숙소가 이것 뿐인데 그래도 가겠느냐”고 물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각오는 했지만 정말 기대이하였다. 공동 화장실에다가 공동 샤워였다. “아무렴 장급 여관 수준은 되겠지”라고 혼자 만에 생각이 뒤통수를 맞았다. 내색도 못하고 난감했다. 그냥 이틀 잠만자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걸 먹자고 했지만 영 분위기가 돌지 않는다.
귀신형상의 돌인 귀면암, 조물주 만들면서 잘못찍은 도끼자욱이 아직도 남아있다. |
오후 일정은 간단했다. 장전항을 돌아보고 온정각에서 저녁식사였다. 남측 통일전망대에서 보면 보인다는 장전항은 작고 아담한 항구였다. 이곳에도 금강산 개발 영향권에 들어 해상 호텔이 들어서고 항구를 앞에 두고 펜션이 그림같이 들어서 있었다. 호텔과 펜션, 빌리지 급으로 나눠진 숙소 중 최하급으로 들어간 필자 일행에게 호텔은 말할 것도 없고 펜션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단칸방 같은 빌리지는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였다. ‘광개토’라는 한식집에서 일부러 아들 비위를 맞추는 식사 주문을 하고 패밀리 마트에서 맥주,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을 사들자 겨우 말문이 여는 시늉을 했다. 휴우~ 다행이었다.
둘째 날 일찌감치 눈은 떴다. 공중파 방송과 YTN을 숙소에서 볼 수 있었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CNN에서 북한 탈출 관련 특집보도를 했다는 뉴스와 함께 탈북자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내 목숨이 날카로운 칼날위에 있었다”는 코멘트를 북에서 듣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시리아 핵 제공 문제도 그랬고 이곳에서 보는 북측의 부정적인 소식은 대전에서와는 같지 않았다. 뒤척뒤척이다가 6시 쯤 밖에 나갔다. 빌리지 옆으로 흐르는 맑은 물이 밤새 청징한 소리를 냈다. 금강의 아침은 상쾌했다. 보도용 사진 몇 장을 찍고 집결 장소로 향했다. 뷔페로 아침을 먹고 구룡연으로 향했다.
구룡연으로 이르는 길목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쭉쭉 뻗은 미인송과 아름드리 나무, 잘 다듬어진 길, 그리고 군데 군데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은 분명 절경과 이색적이었다. 안내 김조장은 그 옛날 이민영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 열심히 설명했다. 정주영 회장이 묵었다는 금강산 초대소와 온천수 발원지 등을 거쳐 왼편 계곡 위에는 구렁이 바위를 끼고 올랐다. 예의 전설도 숨어 있었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신계사가 올해 말까지 완전 복원된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웅보전은 이미 우뚝 서있었고 스님이 일행을 맞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신계사 오른편 봉우리가 문필봉이었다. 행정수도가 들어서는 곳이 문필봉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문필봉은 흔했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의 공부에 대한 집념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을 만들지 않았을까.
오른 쪽에 400여평 남짓한 배 밭이 나왔다. 김일성이 이 배를 먹고서 “하나를 먹으니 아쉽고 둘은 먹으니 배가 너무 부르다”며 이 배를 인민들에게 나눠 주라고 교시했다는 배 밭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표식비가 새겨져 있고 북측에서는 신성시 하고 있다. 수령의 일거수 일투족이 경외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웃고 말았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체제가 유지되나”하는 생각은 여전했다.
금강산 등반도중 유명한 곳에는 북측안내원이 관광객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
20여분 달려 주차장에 도착하니 금강의 수려함이 앞을 가로막는다. 거기에는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어서 그런지 귀티가 난다는 나무들이 경관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특히 왕이 붕어 시 관목으로 사용돼 황장목(皇葬木)으로 불리는 미인송은 금강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눈이 많이 와서 아래 쪽 가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연스럽게 부러지다보니 미인의 다리모양으로 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룡연을 향해 약 20여분 오르니 아리따운 북측 안내원이 일행을 맞는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금강산은 형상석이 유난히 많았다. 거북, 코끼리 바위가 나란히 한 곳에 들어서 있어 이채로왔다. 강한 사투리로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말에 관광객 20여명이 눈에 불을 켜고 맞은 편 바위산을 훑듯이 뒤진다. 농담과 진지함을 곁들인 설명을 듣고 조금 더 오르니 금강 4대 폭포 중 하나인 비봉폭포가 물보라를 흩뿌리고 있다. 천상에서 물 줄기가 내리듯 고공에서 낙하하고 있었다. 조물주가 가는 실 여러 가닥을 바위에 걸쳐놓은 듯 바람 따라 물줄기가 흐느적거리면서 흐르고 있었다.
오르는 길목은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옥류동의 맑은 물과 무대바위의 널찍한 바위는 자연의 조화 앞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연신 오르면서 “좋다, 좋다”를 연발하던 아내는 구룡연에서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돈이 너무 비싸다며 금강산 여행에 다소 부정적이었던 아내의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위안을 삼았다. 아들 녀석도 겉으로는 툴툴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옥류동 맑은 물은 눈이 시릴 정도다. 금강산에서는 물에 손을 씻는 것은 오염행위로 간주, 벌금을 물리고 있다. 자연의 깨끗함은 철저한 규제에서 유지되고 있다. |
가파른 철제 계단과 위험천만의 바위 길을 따라 마지막에는 기다시피 겨우 오르니 눈 아래 절경이 펼쳐졌다. 앞쪽에는 확 트인 금강의 계곡이 위치하고 왼편은 거창한 화강암 암벽이 연봉을 만들었고 오른 쪽 발아래는 상팔담의 신비로운 골짜기가 굽어보인다.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새겨진 이곳은 억만년의 자연이 빚어낸 여덟 개의 웅덩이가 있었다. 그 웅덩이가 마치 진주 구슬을 꿰듯이 이어져 있으니 대자연의 조화 앞에 인간이 너무 작아보였다.
이곳에서 김윤성 원장 부부를 만났다. 금강산을 함께 가는 것도 그러려니와 명산 깊숙한 곳에서 조우(遭遇)는 더욱 반가웠다. 기념 사진 서로 찍어주면서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디트뉴스에 사진 내보낼 테니 꼭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피부과 박사답게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올라왔다. 그러면서 아내에게도 바르는 게 좋다면서 가지고 온 크림을 나눠주었다. 금강산에서 나눔의 정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가톨릭 피부과 김윤성원장을 산정에서 만났다. |
서둘러 하산했다. 오후 일정 때문이었다. 삼일포가 잡혀있었다. 아내의 하산이 영 불안하다. 집에서 하루에 6Km씩 런닝 머신을 뛰기 때문에 자신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하지만 런닝머신과 산행은 질적으로 다른 모양이다. 결국 커다란 바위 앞에서 일을 쳤다. 발이 엇갈리면 앞으로 쓰러졌다. 머리가 큰 바위와 10Cm 간격을 두고 멈췄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멋 쩍은 웃음을 보이고 있는 아내에게 화가 났다. 늘 남을 먼저 배려하지만 주변사람들이 미안해 할까봐 웃고 있었다. 찰과상에 그쳤다. 천만다행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4시간 정도 걸렸다.
삼일포 일정은 취소해야만 했다. 모두들 피곤해했다. 온천욕으로 계획을 바꿨다. 노천탕과 한증막, 게르마늄 탕, 황토방 등 유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로 온천이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맛이 달랐다. 금강산을 바라보면 홀라당 벗은 내 육신은 단순이 벗는 게 아니었다. 금강산의 정기를 받아들여 오염된 정신을 순화시키는 일종의 의식행위였다. 금강산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유성과는 달랐다고나 할까. 요즘 흔히 말하는 ‘감성마케팅’이 바로 금강산과 유성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금강산 관광 3대 명물이 있다. 첫 번째는 바로 금강산 자체, 그리고 북한 교예단 공연, 온천욕이다. 이제 교예단 공연을 볼 차례다. 5달러 더 주는 특석표를 서둘러 샀다. 싼 숙소에 들어 기분나빠하는 아들에게 특석이라는 ‘특’자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공연은 이름 그대로였다.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아크로바틱이었다. 교예단은 관객을 세 번 울게 한다. 한번은 ‘저렇게 까지 하기에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하는 안스러움, 두 번째는 같은 민족이라는 점. 세 번째는 박수를 많이 쳐서 손이 아파 운다는 것이다. 100% 동의하는 말이다. 공연도중 아들의 힐끗보니 몰입되어서 박수를 마구쳐 댔다. 정작 끝이 나자 짐짓 우리세대에는 맞지 않다면서 시큰둥해했다.
교예단은 관객들을 세번 울린다. 안스러움, 같은 민족, 많은 박수로 손이 아파서 등으로 공연도중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
저녁에 역시 맥주와 치킨을 사서 숙소로 왔다. 하지만 낮에 일정이 너무 고달파서 그런지 모두 손사래를 쳤다. 대신 북한 주민 얘기로 화제를 삼았다.
“온정각이 있는 온정리 주민들은 더 힘들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모를텐데 여기 있는 주민들은 매일 남쪽 사람들의 화려함을 보는 게 아니냐”
“어쩌면 그게 고문일수도 있다”
“자신들의 생활을 비교해보면 아무리 의식화되었다지만 초라해질 수가 있지 않을까”
“모두가 가난하고 배고플 때는 고통을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빈곤이 가중될 수가 있다”
그렇게 둘째 밤은 깊어갔다.
금강산 여행의 기착지인 온정각의 밤은 특유의 산 속 풍경을 보이면서 깊어만 갔다. |
거기서 만물상은 약 40여분 거리. 약5분 정도 올라가니 바로 삼선암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명의 선비가 다소곳이 글을 읽는 형상이었다. 바위가 어쩜 저렇게 생길수가 있을까하는 자연의 신비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간단하게 기념촬영을 하고 선두에서 만물상을 향했다. 중간지점에 또 귀신 얼굴 형태를 한 ‘귀면암’이 신비롭게 서 있었다. 귀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면암 아래쪽에 조물주가 귀면암을 만들면서 도끼로 찍었다는 자국이 커다랗게 나있어 진실성을 더해주었다.
만물상은 운해때문에 보지못했다. 하지만 다음에 또오라는 금강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
엉금엉금 기다시피한 만물상 정상은 실망이었다. 바로 운해(雲海)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올라올 적에는 멀쩡했던 날씨가 그랬다. 사방천지가 하얀 구름이어서 산에서의 변덕스런 날씨를 실증해주었다. 아쉬움이 많았다. 다음에 또 오라는 금강산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정상은 ‘천선대’였다. 천상에 선녀들이 내려오는 곳 정도로 해석되었다. 아쉬움은 북측 안내원과 대화에서 다소나마 달랠 수 있었다. 북핵문제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도 하고 6자 회담은 잘되고 있느냐는 질문도 했다. 필자 명찰을 보고나서 던진 질문이다. 아는 한, 저 쪽의 기분을 감안해서 대답해주었다. 가지고 간 정비석의 산정무한도 보여주었다. “아 그런 게 있었습네까”라며 신기해 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러시아, 중국, 일본이 6자회담에서의 역할은 무엇이냐 는 등등의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약 10여분간 대화였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하산하는 필자 뒤에서 “금강산 기행 잘 써주라우야”라고 인사했다.
하산은 쉬웠다. 어제처럼 잡고 갈 아내도 없고 신경 써야 할 자식도 없었다. 뒤늦게 출발했지만 맨 먼저 내려왔다. 등산로 입구에서 황주산 사과 2개를 2달러에 사고 레몬 단물을 3달러에 사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온정각으로 내려오니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혼자 숙소에 있으려니 지겨웠던 모양이다. 조금 기다리니 삼일포 버스가 들어왔다. 소세지와 떡볶이로 요기를 하고 남측 행 버스에 올랐다. 아들이 손을 꼭 잡아왔다. 표정은 풀렸고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는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게 소원(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명창 초청 공연에서 금강산 타령은 대금산조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때로는 불쑥 튀어나오고 때로는 잔잔한 모습의 소리가 우리 것에 대한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금강산이 그랬다. 만학천봉이 흐드러지게 모여 있고 산의 용모가 다채롭고 기이했다. 거기다가 남쪽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북측만의 풍광이 금강산의 깊은 맛을 더욱 우려내준다. 정비석의 동양화 폭을 거니는 듯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산과 물, 나무, 바위의 조화로움이 인간군상들로 하여금 티끌과 같은 미물(微物)에 불과하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모처럼 가족여행이었다. 대학입학 등 이런 저런 핑계로 15년만에 간 여행이었다. 장전항이 배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