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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째 날(8월 6일)
(20)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녹동항의 바다스파랜드(찜질방)에서 약간 늑장을 부린 대가를 치뤄야 했다.
아침부터 무더위에 시달렸으니까.
여름의 길나그네에게는 황금시간대인 이른 아침을 소중히 활용하지 않은 대가다.
녹동수산시장을 살펴보고 만남의 다리를 건넌 후 신항연안여객선터미널 앞 편의점에서
200ml 우유 1팩을 마셨다.
주인으로부터 해안길 정보를 얻은데 대한 답례인 셈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미 고흥땅에 있으므로 해안길을 걷고
싶은 욕심이 동했으나 아직은 내 바람을 단호히 거부하는 해안이다.
해안선이 길 수 밖에 없는 반도인데다 고흥군 당국의 여력이 미치지 못하는지 우선순위
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인지 해안선에 대해서는 방관적인 것 같다.
김천택(南坡 金天澤/이조 英祖때 歌人)은 "가다가 중지 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고
경고했지만 가능한 데까지만 가볼 요량으로 떠났다.
그나마도 갓길 없는 차로를 걸어야 하므로 잠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길이다.
맨 먼저 눈여겨 보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한 곳은 '오마 간척지'
말 형상의 다섯 섬(五馬島)을 메워 조성된 330만평의 바둑판 같은 평야(농지)다.
소록도의 2배, 여의도의 3배나 되는 땅이란다.
무인도인 도덕면 오마도를 중심으로 서쪽 봉양반도(도양읍)와 동쪽 풍양반도를 연결해
육지를 만든 대단위 간척사업의 주체는 소록도에 수용되어 있던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소록도 음성나환자들의 정착 목적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은 오마 간척지(방조제) 사업을
위해 소록도 원생들로 '오마도개척단'을 창설하였다니까.
소록도 주민 5천여명(당시)중 노동력이 있는 2천여 음성환자들로.
1962년 7월 10일 방조제 축조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자활 정착촌을 갖기 위한 일념으로
간난신고는 물론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온갖 희생을 감수했다.
그들에게 공사 장비란 현대의 첨단 중장비가 아니고 맨손과 손수례가 전부였으니까.
물막이 공사 80~90%, 전체 공정 57%가 진척된 1964년 6월, 주관부서가 보사부(당시)
에서 전남도로 이관되고 공사 주체인 소록도 주민들이 배제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완공 후 피땀의 결실은 그들 아닌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오늘날에는 내가 여생을 보낼 땅으로 열망해도 정착할 길이 없지만 그 당시의 소록도는
문둥병(癩病/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저주받은 땅이었다.
소록도가 있는 고흥군 역시 같이 취급되어 고흥군민에게도 소록도는 저주의 섬이었다.
그래서 소록도 밖의 주민들은 소록도민의 외부 출입을 한사코 막았을 뿐 아니라 간척지
까지도 소록도민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에 다름 아니지만 한센병 환자들의 근거지가 소록도 밖으로 확대
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같은 악역도 기꺼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관대한가.
내 3명의 아들 딸들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시절을 한센병 미감아들과 함께 보냈다.
완치 판정을 받은 이들의 미감 자녀들이건만 입학을 결사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자녀의
등교를 막았기 때문에 미감아동의 수용을 위해 1969년에 신설 개교한 학교다.
내 자녀를 문둥이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지 않겠다는 주장은 얼핏 자녀사랑의 발로
같으나 전적으로 무지와 편견의 노정(露呈)일 뿐이다.
성동구 내곡동 대왕국민학교(당시)에서 야기된 미감아들의 입학 문제는 "미감아들에게
사랑의 욕구 충족과 배움의 기회 제공자를 자임하고 나선 한신국민학교가 해결사였다.
미감아를 위해 정부(당시문교부)가 학교 설립을 지원함으로서 어렵잖게 해결된데 반해
오마도 간척지 사건은 정부까지 소록도를 절망에 빠뜨린 사건이다.
"땅을 빼앗긴 것이 아니고 희망을 뺏긴 것"이라는 오마도개척단원(당시)의 증언에 함축
되어 있다.
늙은 길나그네의 증오는 육지의 군민보다 총선거를 의식해 그들의 손을 들어준 교활한
군사구테타정부(공화당)에 집중되었다.
이웃 고을 장흥출신 소설가 이청준이 자기 소설 '당신들의 천국' 을 통해서 오마도 간척
사건을 고발하고(?) 있으나 왜 미진한 느낌일까.
마치 꼭 해야 할 말을 하다 말게 되었을 때의 아쉬움 같은 느낌 말이다.
희망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추모공원이 무슨 의미있는가.
악어의 눈물인가.
뭍의 사람들이 그토록 저주하던 섬에 연육교를 건설했다는 것은 소록도민의 육지로의
진출을 막기는 커녕 100% 상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지와 편견에서 깨어났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속죄가 뒤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속죄란 오마간척지를 소록도의 오마도개척단에게 돌려주거나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
하는 것인데 아직껏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벌교주먹의 참 뜻
77번 국도를 따라서 현재 건설중인 고흥(영남면) ~ 여수(화양면) 간의 연육연도교 공사
현장까지는 가려 했으나 중도 포기했다.
국가어항인 풍남항(풍양면)과 도화면 사무소를 지나 포두면 해창만 간척지 앞에서.
내 담력으로는 좁은 차로를 더 이상 걸을 수 없으며 모든 버스가 고흥읍으로 집중되어
있을 뿐 도중 환승이 불가능한 불합리한 버스노선 때문이었다.
고흥읍에서 멀어질 수록 귀로가 막연해지고(운행회수가 적어져서) 따라서 고흥읍 터미
널에서만 가능한 벌교행 버스 이용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바로 이웃 면 어딜 가려 해도 고흥읍 터미널로 삥삥 돌아가야 하다니 총체적 낭비다.
우주시대의 첨병을 자처하는 21c 고흥의 육상 대중교통 체계는 19c에 머물러 있다.
무더위 탓인지 시외버스편으로 정오경에 도착한 벌교읍버스공용터미널이 한산했다.
삼경(三景:산, 호수, 바다), 삼보향(三寶鄕:의향, 예향, 다향)으로 알려진 보성군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삼제산(三帝山)의 고을이다.
호남정맥인 존제산(尊帝), 제암산(帝岩)과 정맥에서 비켜 있는 제석산(帝釋) 등 임금을
뜻하는'帝'자 이름을 가진 산이 3개나 있으니까.
이중 2개의 산(존제산, 제석산)이 위치하고 있는 벌교읍이다.
"꼬막이 벌교를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나돌 만큼 벌교는 우리나라'꼬막'의 주산지란다.
국내 꼬막 총생산량의 70%가 이 지방에서 나온다면 그럴만도 하겠다.
그중 80%가 장도에서 생산된다는데 장도 역시 벌교읍의 한 섬이니까.
그러나 내게 벌교는 존제산의 악몽(메뉴 '백두대간과 아홉정맥' 89번글참조)이 전부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가 벌교라 해서 특히 관심가는 것도 아니니까.
길나그네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의 연원 정도.
식도락과는 워낙 먼 거리에 있는 내가 찾아간 곳은 꼬막집이 아니라 터미널 구내식당.
버스 운전기사가 주고객인 듯 꾸밈 없는 식당의 단출한 메뉴지만 먹음직한 밥상이다.
나이 들고 후한 몸집의 주인녀에게 목청을 조금 높여 '벌교의 주먹' 연유를 물었다.
식사중인 손님들중 누군가도 참견하기를 기대하고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이다.
1930년대에 일제는 "보성, 장흥, 화순, 순천 등지의 농수산물을 수탈하기 위하여 바다를
매립해 상업중심지로 개발하고 철도까지 개설했다.
게다(げた)소리 요란했던 영산포(나주시)처럼.
일제의 패망 후에도 상권이 계속 살아있기 때문에 전국의 주먹패들이 모이게 되어 벌교
주먹이 일약 유명해졌으나 지역경제의 쇠퇴와 함께 주먹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단다.
벌교의 주먹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것은 사실이나 소위 깡패(조폭)의 주먹이 아니라
의리의 주먹이었다고 강조하는 이의 주장은 역설적이었다.
벌교에서 건달 행세를 했다가는 의리의 주먹이 용서치 않을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라고.
권투선수 출신 영화배우 박노식을 중심으로 한 의리파 주먹들의 노력으로 주먹 세계가
정화되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으나 한 유식한 버스기사의 설명이 모든 설을 압도했다.
한 젊은 장사가 벌교 장터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 타살(打殺)한 1908년으로 소급된다.
이 사건 이후 벌교의 항일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교의 항일 저항정신은 광복과 더불어 의리의 주먹으로 순화되고
마침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의 주먹으로 상징되게 되었다는 것.
이런 주먹이라면 다다익선일 것이다.
벌교는 태백산맥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나기가 그리운 염천.
벌교제일고등학교를 지나 벌교포구의 양안을 연결하는 부용교 앞으로 갔다.
벌교천2길을 따라서 해안으로 가기 위해서.
시골 읍소재지에 상업학교가 생긴다는 것은 그 지역의 상업이 번창하고 있음을 뜻한다.
굴비의 고장 법성포(영광군)에 설립된 법성포상고와 맥을 같이한다.
역사가 일천함에도 주산과 타자 부문에서 지속적으로 두각을 나타냄으로서 주목 받던
학교가 제일고등하교의 전신인 벌교상업고등학교다.
(2013년 3월 1일, 교명이 상업고등학교로 환원 변경되었단다)
경전선 철도의 철다리(동북쪽)를 지나고 2번국도의 벌교대교 밑을 통과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마치 주차장처럼 모여있는 다리 밑.
워낙 덥기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춘 것일까 이것들을 타고 피서를 온 것일까.
벌교천2길은 다리 밑을 지나 2번국도에 흡수되고 간척지 둑은 웰빙 산책로가 되어 바다
한하고 이어간다.
중도방죽, 벌교생태공원(축구장), 벌교하수종말처리장을 거쳐가는 꽃길 산책로가.
한데, 지금 벌교는 소설가 조정래(趙廷來/1943~ )가 좌지우지하고 있는가.
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소설 태백산맥이 벌교의
경전처럼 보이니 말이다.
'철다리'가 그러했듯이 '중도방죽' 역시 태백산맥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가.
간척지 안의 방죽 이름 '중도'가 철다리 옆마을에 살았던 일본인 나카시마(中島)의 이름
이라는 설명을 태백산맥을 인용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가.
걷기 좋은 이 황토 산책로도 태백산맥에서 이지숙이 걸었던 길이라니....
그렇다면, 태백산맥이 출간된 1980년대 이전의 벌교를 움직인 것은 과연 꼬막과 주먹이
전부였던가.
일제의 억압(식민통치)에서는 벗어났으나 좌우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에 빠진 한반도를
그리는데 작가는 그 무대로 벌교를 택했다.
승주군(현 순천시) 선암사 태생인데도 이웃고을 벌교를 택한 것은 유소년기에 벌교에서
벌어진 참상을 많이 목도했기 때문인 듯.
6년여에 걸쳐 쓴 원고지가 16.500매라면 과연 대하소설이다.
10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고 200쇄(刷)에 700만부가 팔렸다면 경이로운 작품이지만 극우
수구파들로부터 좌경(左傾) 작품이라고 매도당하고 작가는 긴 세월에 걸쳐서 사상검증
(?)까지 받아야 했다.
등장인물이 비중있는 270여명이라면 모든 계층을 의미한다.
길지 않은 기간의 일이 방대한 양의 원고지를 필요로 했다면 자상하기가 장삼이사(張三
李四)까지 망라되었을 정도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설 태백산맥은 벌교의 가이드북(guidebook)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벌교는 태백산맥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한다.
짧은 격동의 시기에 국한된 책에 갇혀 정체되고 나아가지 못할까 저어되기 때문이다.
한반도 최초로 람사르협약에 등록된 연안습지
극심한 더위는 물이 거의 필요치 않은 늙은이로 하여금 하수종말처리장 사무실에 들러
500ml페트병에 냉수를 얻도록 했다.
장흥 이후로는 더위를 대적하는 무기가 '메로나'에서'쭈쭈바'로 바뀌었는데 해안에서는
가게 만나기가 어려울 듯 하고 유비무환하려면 물이라도 있어야겠기에.
계속되는 꽃길 산책로변에 바다를 향해 자리한 2개의 나무의자중 하나에 잠시 앉았다.
이름하여 '명상의자'는 지붕까지 갖추었으나 운치용일 뿐 햇볕과 비에 100% 무력하여
하던 명상도 달아나버리겠다.
황토산책로에서 조금 비켜서 있는 쟁동마을 2층 정자가 인력(引力)을 발산하는 듯 했다.
2층구조의 정자를 간혹 보지만 실제 사용은 단층(상층)에 불과한데 여기 정자는 상하층
모두를 사용하게 되어 있어서 효율을 배가(200%/2개의 정자 효과)하겠다.
염천에 대형 배낭을 메고 걷고있는 나를 의아해 하는 촌로들이 궁금증을 해소해야 하겠
는지 얼음보리차를 권하며 쉬어 가란다.
쉬어가라는 말속에는 궁금증을 풀어주고 가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어쩌다가 노인과 말길이 터지면 남녀 불문하고 붙들고 늘어지려
하기 때문에 뭘 묻기도 주저되었다.
말상대가 오죽이나 그리웠으면 동양영감을 붙들고 저려랴싶어 고독을 추스르지 못하는
저들에게 측은지심이 일기도 했는데 한국노인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국노인이라 해서 고독이 두렵지 않으랴 마는 저들이 자기 본위인데 반해 이들은 품위
관리에 주력한다 할까.
2번국도 벌교대교 밑에서는 아슴푸레하던 목포~광양 고속국도(10번)의 벌교대교가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장양간척지 둑으로 난 산책길이 끝나가는 지점의 진석마을을 지났다.
낙안에서 거둔 세곡(稅穀)의 도성운송 배를 만드는 곳이라 해서 선소(船所)로 불렸는데
마을 뒷산 중턱에서 차돌(참돌)이 나온다 하여 진석(眞石)으로 바뀌었다는 마을이다.
다리 밑을 지나면 '벌교갯벌어촌체험안내센터(장양어촌체험마을)가 있다.
너른 갯벌의 한데 어우러진 남녀노소가 동심으로 돌아간 듯 마냥 즐겁고 행복해보였다.
서해(서천, 부안과 고창, 영광 등)의 갯벌들에서도 그랬지만 자연과 더불어 노닐 때처럼
순수하다면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보성 벌교 갯벌은 곧 이어갈 순천만 갯벌(순천시 별양면, 도사동, 해룡면)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4번째로 람사르 조약에 등록되었으며 한반도의 연안습지로는 최초란다.
'람사르 협약'(Ramsar Convention)이란 1971년에 이란의 람사르에서 18개국이 모여
체결한 "습지의 보호와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이다.
"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the convention on wet-
lands of international importance especially as waterfowl habitat)이 공식명칭인데
1997년에 가입하여 18개소 습지가 등록된 우리나라는 160개국중 101번째 가입국이다.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면 해당 국가는 람사르 습지에 대한 보전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개발행위를 일체 할 수 없으며 수량에 영향주는 행위도 제한되는 등 관리가 등록 이전
보다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람사르 협약의 핵심은 습지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파괴를 멈추고 인간이 자연과 화해
공존하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니까.
족쇄가 채워지는 것이므로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경우는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우리에게 간척사업이야 말로 다다익선이라고 믿는 늙은이니까.
풍년을 예고하는 듯 튼실하게 자라고 있는 간척지 호산들판의 벼들이 포만감을 느끼게
하지만 해안 둑길은 잘 정돈된 초입과 달리 진입이 막혀 농로를 따라가야만 했다.
어렵사리 진입한다 해도 곧 쫓겨나 2번국도의 동막교(동막마을)를 건너야 한다는 것.
농로에서 만난 1톤트럭 주인영감의 말이었다.
대룡과 금동 두 저수지에서 바다로 흘러가며 벌교(보성)와 별량(순천) 양 읍면(시군)을
가르는 수로에 다리가 없기 때문이란다.
순천만의 해안도 거차마을(별양면 마산리)까지는 이어갈 수 없다는 것.
서글서글한 인상처럼 천성이 호의적인 영감인가 연배라는 연대의식의 발로인가.
순천시내에 거주하면서 보성땅(호산들)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그는 나를 태웠다.
2번국도상의 동막2교를 통과한 후 해안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위치에 세워달라고 부탁
했건만 그는 계속 달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입구에 차를 세웠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가 갑장임을 안 그가 무심코 달린 것이 아니라 내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로 지나쳐 온 것이다.
노(老) 휴머니스트들의 체온을 느끼는 밤
그러나, 이로 인해 나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의외의 고생을 하게 되었다.
석양인데도 입장객이 많은 자연생태공원의 볼거리들을 뒤로 하고(내일 다시 들르게 될
것이니까) 순천만 갈대군락지 해안을 따라 역방향(보성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내가 바라는 대로 했어야 하는데 나이 외에는 나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을 그의
호의가 나를 이처럼 궁지에 빠지게 했다.
그랬다 해서 그가 원망의 대상이 되겠는가.
그는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고 어떤 이유로든지 건너뛰거나 절충을 거부하는 나의 완벽
주의적 괴벽 때문인데.
순천만탐사선선착장(대대포구)을 떠난 후 단숨에 당도한 1.5km 순천만탐조대(探鳥臺)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순천시가 한 음식점을 매입해 사계절 철새관찰과 습지체험이 가능한 생태학습장, 생태
관광객의 쉼터로 리모델링했다는 이곳에서 1박할까.
낙조가 핏기를 잃어가는 시점인데 낯선 해안의 밤길을 강행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 건물을 이용하려면 초능력자 아니면 귀신 되는 것이 우선인가.
인기척이 없고 모든 문이 잠겨있을 뿐 안내 글 한 줄 없으니 말이다.
안풍습지 못미쳐와 인안교 직전에 쉼터(정자)가 있으나 식수를 구할 길 없어 포기하고
공원 직원한테서 들은 별량면 학산리의 음식점 전망대가든을 목표로 걸음을 재촉했다.
장산갯벌관찰장과 장산둑, 장산마을 정자도 지났다.
마을이므로 물을 구해 정자에서 라면을 끓이면 되는데 굳이 식당을 고집한 것은 평소와
달리 시장기가 심했기 때문이다.
한끼 점심과 물 외에는 먹은 것이 전무했던 날들이 흔하지만 여느 날들보다 심해서.
어둔 밤의 차로를 따라 완만하나 긴 오르막길을 걸어 당도하였건만 언덕배기에 자리한
전망대가든은 새 손님 사절이란다.
준비한 음식이 바닥났기 때문이라는 것.
아무렴 성업중인 음식점에서 한 사람 배채울 거리 없으랴만 무슨 잇속 있다고 홀나그네
영감 사정 들어주겠는가.
주인의 냉랭한 반응으로 보아 차라리 얼어죽어도 겻불 쬐지 않는 양반의 품위를 지키는
편이 낫다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장산리 정자로 되돌아가 라면을 끓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어느새 온 마을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물을 구할 길 마저 막막해졌다.
일부 불켜진 집 문밖에서 조심스레 외쳐보았지만 반응이 없고 철시한 길가 구멍가게의
문을 내 어떻게 열 수 있겠는가.
배고프면 잠도 오지 않는다고 말들하지만 굶는데 이골이 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6.25동란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지만 북한수중의 3개월 동안에 나는 굶기를 밥먹듯
할 수 밖에 없는 나그네에게 가장 요긴한 체질을 갖게 되었다.
반동분자가족이라 해서 삼순구식(三旬九食)도 어려웠던 이 시기에 근대국으로 1주일씩
연명하며 버티었던 생활이 마침내 체질로 변해 공복중에도 잠못이루는 일이 없으니까.
열대야현상인가 무더위가 밤에도 기승을 부려 정자에 집짓기(천막)를 그만두려 했으나
굶어서 기운 빠진 늙은이의 피도 먹을만 한지 모기떼의 거센 습격에 배낭을 풀었다.
천막을 꺼내다가 배낭 겉주머니에서 누룽지가 쏟아져 나왔다.
이 누룽지는 군학마을(보성군 회천면) 김상섭옹의 선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라면은 날로 먹기가 역겨운데 반해 누룽지는 고소하여 먹을 수록 당긴다.
그럼에도 배낭 안에 고스란히 있는 것은 이즈음의 내 치아에 마른 누룽지는 황새 앞에
놓인 접시 안의 수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라면과 누룽지를 두고도 허기를 면치 못하는 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까지 놓친 격이 된 밤,
장산리 정자의 황당한 밤이 깊어갔다.
누룽지도 차량의 편의도 그들의 호의와 달리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밤이지만 보성과
순천의 두 노(老)휴머니스트(humanist)의 체온을 느끼는 늙은나그네의 밤은 행복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