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국내 항공스포츠의 태동
1. 행글라이딩
인간은 새를 보면서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어해 왔는데,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할 때 희랍의 이카루스 신화를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150여년전 조선 헌종시대 이규경 선생이 쓴 “우주문장전”에 “비차변증설”이란 대목이 있어서 “원주에 사는 정평구 선생이 따오기 모양을 한 비차를 만들어 날개로 배를 치며 바람을 일으켜 공중에 떠올라 백척을 능히 날 수 있었으나 맞바람이 불 때는 앞으로 날아갈 수 없으며 회오리바람이 볼 때는 날지 못하고 떨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기록은 그 연대로 보아 서양에서 새를 모방한 날개치기 비행을 꿈꾸던 시대인데,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비행체를 만들어 내었고 또한 비행에도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나 보다 자세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다(이수열, 1995).
그렇지만 국내에서의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활공은 영국의 조지 케일 리가 “Flyer”라는 3엽 글라이더로 세계 최초의 유인활공에 성공한 1849년보다 120여년 후인 1975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이승재는 TV에서 외국사람이 연처럼 생긴 것을 타고 비행하는 화면을 보고 대나무로 모형을 만들어 중랑천 제방에서 성공적인 비행을 하였고, 이에 자신을 얻은 그는 알루미늄 파이프와 태피터천(판초우의)으로 만든 길이 5.5m, 날개폭 8m, 무게 11kg의 행글라이더인 “은하 1호”를 완성하여 청담동 야산에서 85회 이상의 시도 끝에 활공에 성공하였으며, 처음에는 10- 20초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점차 몸으로 조종하고 착륙하는 방법을 체득해나가면서 나중에는 3분 20초의 활공시간을 기록함으로써 국내 행글라이더의 효시가 되었는데, 이 기체는 NASA의 연구원이었던 로갈로박사가 설계한 델타윙과 흡사한 초창기 행글라이더였던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1975년 4월 12일 김석환을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한국활공협회가 출발하게 되었으며, 1977년 12월 15일 이승재는 형 이연재 그리고 최종윤과 함께 길이 7.5m, 폭 12m의 2인승 행글라이더인 “해성호”를 제작하여 교육에 사용하는 등 불모의 한국 항공스포츠를 개척해 나가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의 라이트형제”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정병우, 1995).
협회가 출범하면서 명성클럽, 조인회, 블랙이글 등 행글라이딩 동호인 모임이 탄생하였으나 초창기 20대 초반 또는 중반의 연령층이었던 동호인들이 사회 진출과 결혼 등의 개인적인 이유로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못하게 되어 행글라이딩은 80년대 이후부터 큰 발전을 보지 못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79년 5월 5일 백준흠을 비롯한 조인회 회원들이 동대문 운동장 상공에서 기구에 매달려 올라간 행글라이더를 기구에서 분리시켜 비행하는 기구분리비행을 시도하였으며, 1981년에는 일본 벳푸에서 열린 제3회 세계 행글라이딩 선수권 대회에 처음으로 선수를 파견하게 되었다.
또한 1984년 12월 31일 백준흠이 63빌딩의 옥상에서 비행에 성공하여 건물비행 세계기록을 수립하였으며, 1988년 6월 7일 최광남에 의해 가스기구에 연결한 행글라이더가 1만 2천 미터의 고공비행에 성공하게 되는 등 모험적인 노력이 계속되었다(월간항공, 제29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항공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고 있는데 항공행사가 많지 않은 국내의 현실에서 공군 참모총장배 행글라이딩 대회는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행사로 항공스포츠가 활성화되고 성장해나가는데 기반을 조성해주는 의미가 깊은 대회가 되어왔다.
공군 참모총장배 대회는 1985년 경주 토함산에서 제1회 대회를 연이래 1987년 남한산성에서 제2회 대회를 그리고 1988년 단양 소백산에서 제3회 대회를 개최하는 등 매년 10월이면 대회가 펼쳐지고 있으며, 공군사관학교는 1989년부터 행글라이딩을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행글라이딩 교육관과 기초훈련장을 건립하여 행글라이딩이라는 항공스포츠를 통하여 사관생도들에게 실질적인 비행감각을 느끼게 함으로써 장차 전투 조종사로서의 자질을 구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월간항공, 제30호).
우리나라 동호인 단체 중에서 가장 많은 활공인을 보유한 순수 아마추어 대학생 동호인 모임으로 1982년 5월 15일 한국 행글라이딩 대학생 연합회가 창립되었고, 1985년에는 한양대 김석원을 중심으로 미싱, 재단, 하네스 제작, 시험비행 등 5명이 부분별로 분담하는 체계적인 제작라인을 형성하여 1991년까지 100여대의 행글라이더를 제작함으로써 재정이 열악한 대학팀뿐만 아니라 일반 클럽의 장비 확보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어 행글라이딩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들 출신은 국내 항공스포츠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월간항공, 제25호).
2. 패러글라이딩
국내에서의 패러글라이딩은 1982년 특전사 중사 서넛이 강하용으로 사용되는 파라코멘더 낙하산으로 남한산성에서 비행을 시도하여 성공하였는데 유명한 등산장비 제조업체인 “사레와”의 독일 지사장이 이를 목격하고 촬영한 사진과 인터뷰한 내용이 후에 독일 항공잡지에 실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한편 패러글라이딩 장비의 생산과 대중화는 유럽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국내로 전해지게 되었으며, 행글라이딩을 주도하던 이수열, 송진석, 홍경기 등이 주축으로 패러글라이딩을 도입하고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후 간단한 장비와 안전성을 가진 패러글라이딩의 특성으로 인해서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항공스포츠에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기종목이 되었다(정병우, 1995).
1988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아직은 낯설기만 한 직장인 패러글라이딩 써클인 “진로도매센타 패러글라이딩 써클”을 조직하여 큰 호응을 얻었는데, 초대 회장 송재일을 비롯한 24명의 회원은 회사의 재정지원으로 월 2회의 정기비행을 하는 등 사원의 복지와 처우 개선, 건전한 취미생활을 도모하는 직장인 클럽의 탄생과 활성화가 기대되었다(월간항공, 제14호).
또한 1989년 12월 10일에는 제1회 에어맨컵 패러글라이딩 대회가 경기도 광주군 매산리 한국활공협회 훈련장에서 체공 및 정밀착륙 경기로 열렸는데 8명의 심판과 150여명의 관람객이 보는 가운데 79명의 선수가 기량을 펼쳤으며, 1990년 10월 13일과 14일에는 제1회 체육부장관배 마스터즈컵 전국 패러글라이딩 대회가 양평 유명산에서 개최되어 200여명의 동호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뜨거운 경연을 벌렸다(월간항공, 제8호, 제18호).
특히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사회체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레저에 대한 욕구가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항공스포츠 동호인이 늘어나고 동호인 클럽 결성이 증가되며 각종 항공스포츠 행사와 대회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인 대교실업은 섬유공학을 전공한 서성준이 1975년부터 군수용 낙하산 전문제작업체에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1983년 패러세일과 요트의 돛을 생산하는 업체를 설립하였는데, 1986년 유럽각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패러글라이딩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챔피언쉽에서 1위를 비롯 10위권 이내 선수중 6명이 대교의 상표인 에델을 사용함으로써 그 우수성이 입증되게 되었으며, 1991년에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에 세계 패러글라이더 시장의 10분의 1인 1500대 정도를 수출하여 4백50만달러의 물량 공급으로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대교는 최신 장비와 우수한 교관진을 투입하여 비행강습회를 실시해 패러글라이딩의 저변확대에 힘쓰는 한편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대표선수도 지원해오고 있다(월간항공, 제29호).
1990년 10월 27일부터 3일간 경기도 광주군 소재 특전교육단 종합강하 훈련장에서는 제14회 육군 참모총장배 고공경연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패러글라이딩 종목을 신설되어 스카이다이빙 선수 2백여명과 전국 20여개 패러글라이딩 동호인 클럽에서 80여명의 선수가 참가해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이 대회는 각종 항공스포츠 시범행사도 곁들여져 항공스포츠 인구의 저변확대와 동호인들 상호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기술을 교류하고 증진하는 만남의 장이 되어 항공스포츠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월간항공, 제18호).
국내의 패러글라이딩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참가한 것은 1991년 9월 7일부터 22일까지 프랑스의 오트프로방스 지역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 패러글라이딩 선수권 대회로 한국활공협회는 8월 1일부터 7일까지 경남 언양에서 선발전을 개최하였으나 일기불순으로 정식대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간 동호인들의 기량을 평가하여 송진석외 6명의 대표선수를 임의선발하여 출전시켰다(월간항공, 제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