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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자면 울릉도 관광 효과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는가
어제 새벽처럼 정리하고 식당(나 때문에 일찍 문을 연)에 깔판을 돌려준 후 도동 ~
천부의 첫 버스(6시30분)에 올랐다.
어제 마감한 소규모어항 추산항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7시 34분.
해발270m에서 솟아나는 분당8 t, 하루12.000 t의 용출수(울릉8경의 1인推山湧水)로
전기를 생산하는 추산발전소가 있는 곳이다.
어스름한 때와 달리 환해가는 아침의 송곳봉과 팬션들이 이채롭기는 하나 지질공원
이라는 자긍심에 흠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숙박업소가 기묘한 암산 허리춤을 마꾸 절단내고 들어서야만 하는가.
이런 곳에서 자면 울릉도 관광 효과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는가.
일주로는 어느 위치에서는 하나의 바위가 되기도 하는 공암, 두 바위 사이의 거리가
최고로 멀게 보이는 지점을 지나 석공의 손이 간 듯한 추산동굴을 통과한다.
오물로 지저분한 추산몽돌해변이 아침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쓰레기 투기 방지 계도표어가 절실한 곳이건만 많고많은 표어 한장도 없다.
무단투기를 법으로 금지하고 벌금 또는 과태료를 물린다고 겁주면 뭐하나.
쓰레기 수거료를 지불하고 있는 국민이 되레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인데.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서 청소노동자들이 해직될 위기라면 어떤 대응을 하겠는가.
선.후진국의 척도는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를 다루는 법에 있다.
금지법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지키라는 것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정부의 폭력이다.
오늘날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에 물먹고 양담배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사람 있는가.
부정적 대응인 형벌의 겁을 많이 주는 나라, 형벌권 남용국이 바로 후진국이다.
'옛선창마을' 표석이 천부1리, 지방어항 천부항마을의 시작을 알린다.
이조시대, 왜인들이 배를 만들고 고기를 잡고 귀목을 많이 도벌해 가져갔기 때문에
왜선창, 옛날부터 있었던 선창이라는 뜻에서 옛선창 등으로 불린다는 마을.
이조 초기(3대태종), 공도정책 단행 이후 울릉도 개척민이 최초로 도착했다는 어항.
개척 때 이주민들이 벌목 후 막을 쳤는데 나무로 사방이 막혀 아무 곳도 볼 수 없고
단지 벌목한 곳으로만 동그랗게 하늘이 보일 뿐이기 때문에 '천부(天府)'라 했단다.
훗날, 행정동명 개정 때 왜선창을 천부라 하였기 때문에 이곳은 본래의 천부라 하여
본천부(本天府)라고 하였단다.
천부1리는 북면 소재지, 울릉읍 발 일주로버스의 종점, 섬목과 나리 등 버스의 시점,
성인봉 등산로의 나리쪽 들머리 등 북면의 다운타운이다.
39.8km 중 남은 5.5km 섬목길에 나서려 할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돌풍을 함께 하여 내리는 비라 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건물 처마밑에서 대피해 있는 동안에 섬목 교통표지판이 보였다.
926번 지방도가 영광스럽게 90번 국가지원지방도로 승격되었는데 못마땅한가.
2008년의 일인데 아직껏 926번을 달고 있으니 말이다.
승격 덕에 예산이 확보되어 남은 구간(저동 내수전~천부 섬목4.4km)공사를 재개해
완전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데도 무성의가 심하지 않은가.
우중이지만 바람이 잠잠해지는 듯 하여 길 떠난 시각은 08시 30분.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의 찬 공기가 바위 틈으로 용출되어 항상 섭씨 4℃를 유지
하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천부 풍혈.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천연냉장고로 사용되었고, 주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던 곳
이라는 '천부 풍혈' 입구를 지났다.
일부 구간은 왕복 2차선도 못되는 좁은 도로의 한심하기 짝 없는 바다쪽 가드레일.
각 지역, 각종 길을 걸으며 비판하느라 기력이 쇠잔했는지 이젠 말할 기운조차 없다.
갑.을을 막론하고 이런 공사관계자들이 건재하다면 단언컨대 울릉도의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
일제 강점기의 교량과 도로가 아직도 건재한데 반해 30년은 커녕 10년도 지탱하지
못하는 건설을 하고도 안전을 기약할 수 있는가.
천부3리 죽암마을 표석의 안내를 받아 죽암천(죽암1교)을 건너 긴 죽암몽돌해변을
따르면 죽암마을이다.
해변을 중심으로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에 오죽. 장죽. 왕죽 등 대나무가 많다 하여
대바우라 부르고 죽암(竹岩)이라 표기하는.
TTP무더기의 작은 다목적 방파제의 소규모어항이 죽암항이고 투명한 진록 바다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주변 해변에 매료되는 관광객의 수가 늘어나고 있단다.
내륙으로 밀렸다가 다시 해변으로 돌아온 현포~섬목 11.5km는 90번 일주도로에서
빼어난 구간이지만 천부~ 섬목 5.5km는 울릉도 일주도로의 압권이다.
특히 비 내리고 안개 자욱한 때, 거대하고 신비로운 281m 두로봉 가장자리를 돌아
가며 초록바다에 떠있는 전설들을 감상하는 재미야 말로 미(味) 중 미라 하겠다.
그러나 심한 파랑이라도 이는 때에는 걸을 자신이 서지 않을 듯 한 해안인데다 수백
길 수직 암벽에 압도되어 주눅이 들어가는가.
인공석축 부실공사의 현장을 지날 때는 더욱 그랬다.
천부항 소공원의 오징어 상 앞에서는 점 같았던 딴바위가 그 새 거대한 바위로 자랐
으나 흔한 전설 하나도 갖지 못하고 외톨이로 떨어진 외딴 바위인가.
죽암항 삼선교를 지난 후로 딴바위는 뒤로 밀리고 삼선암이 다가왔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제각기 딴 모습인 변장의 명수들이.
삼선암과 관음도
멀리서는 2개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3개인 삼선암 바다는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며 놀다가 올라가기를 자주 하던 세 선녀가 어느 날 돌아갈
시간을 놓쳐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들은 끝내 하늘로 귀환하지 못하고 바위가 되고 말았다.
인접한 두 바위(1선암, 2선암)에서는 나무, 풀이 자라고 있으나 조금 떨어져 있으며
끝이 가위 같다 해서 이름 붙여진 가위바위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한다.
더 놀다 가자고 조른 막내가 귀환시간을 놓치게 한 주모자라 해서 막내에게 상제의
진노가 더 컸는데 이 외롭고 척박한 바위가 막내바위, 삼선암(셋째바위)이다.
세 선녀바위, 삼선암(三仙岩)의 전설이다.
이런 전설은 전국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한 구성이지만 삼선암은 공암, 관음도와
함께 울릉도 3대 해양절경 중 하나란다.
그렇다면, 울릉도 최고의 비경이 현포 ~ 섬목 10km 안에 집중되어 있다.
향목령 마루의 '태고의 신비를 담은 북면' 이라는 표석이 정녕 허언이 아니구나.
비를 맞고 있을 때는 삼선암과 그 뒤 동쪽의 관음도가 또렷했으나 세찬 바람 따라서
춤추는 농무 속에 아른거리는 그 모습들은 신령스러웠다.
석포마을, 옛 석포둘레길 들머리의 소규모어항 선창항(석포항)을 지날 때 앞으로는
관음도가, 뒤로는 삼선암이 오락가락 하는 빗속에서 요술부리는 듯 변화무쌍했다.
이른 아침의 추산동굴과 달리 창조자의 손 만이 가능할 섬목동굴(?).
움푹한 위치의 동굴에서 좌우로 삼선과 관음을 아우르는 삼각 해안, 비경 중 비경에
도취되어 있다가 관음도에 당도한 시각은 아침나절 10시쯤.
독도와 죽도에 이어 제3의 섬이라는 관음도(觀音島).
여러 번의 용암 분출로 생성된 섬이지만 원래 울릉도와 한 몸이었는데 장구한 세월
계속된 차별 침식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 섬이다.
침식이 계속될 텐데 세월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현무암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는 섬인데 높이37m,길이140m,
넓이3m의 보행 전용인 현수연도교가 놓여 다행이다.
그러나 경로는 할인 우대할 망정 유료 입도(入島)다.
매표소에 확인한 시간 외에는 지체 없이,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나는 경로우대의 뜻이 무료가 아니고 할인이라는 점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타당한
유료, 합리적인 금액이라는 판단에서 벗어나면 거부하기 때문이다.
만인 공유의 대상인 대자연은 장사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 팔아먹는 짓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자연에 일정한 비용을 투자했다 해서 수익자 부담을 주장해서도 안된다.
국민 복지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앙정부에서(국비) 115억원을 지원받아 90억원을 들여 다리를 건설했다는
지자체가 국민으로부터 다리 이용료를 받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굳이 수익을 올리려면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며 스스로 지갑을 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특별하고 기발하며 감동적인 아이디어(상품)를 개발하는 것이 정도다.
관음도를 유료화 한 울릉군 당국이 저동~도동 해안산책로는 무료 개방하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다.
관음도를 거부한 더 중요한,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나는 오직 걷기 위해, 일체의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려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걸으려고 울릉도에 왔을 뿐 관광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분야다.
죽으려 해도 죽을 시간이 없을 만큼 무작정 걷고 싶을 뿐이다.
내가 표현하고 있는 소위 시각적 황홀감은 표피적 느낌일 뿐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며
울릉도에 대한 내 기본적 자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선 내게 매표소 안의 앳된 여직원이 달려 왔다.
"할아버지, 무거운 배낭은 매표소에 맡기시고 돌아보고 오세요"
내가 궁색한 노인으로 보였는가.
내 뜻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그녀의 호의를 선선히 따르기도 다 주저되며 도리어
난처해진 늙은이의 출구는 어느 쪽?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한(?) 늙은이는 자기의 뜻은 접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나올 때 지불하리라 마음 정하고.
승강기를 이용해 7층(25m)에 오르면 방부목 계단이 현수교 까지 연결해 준다.
바닷물과 매치된 파란 현수교 저쪽(관음도)도 계단이 상당한 높이까지 안내한다.
표고106m, 현무암으로 된 71.338평방m 면적의 섬에는 동백나무, 억새풀, 부지깽이
등 자생하는 각종 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 끝에는 옛날 해적들의 소굴이었다는 2개의 굴이 있다는데 내려갈 수 없다.
높이14m인 굴 안에 배를 숨기고 있다가 지나가는 선박들을 약탈했다는데.
이 굴들이 해식동굴로 울릉도 3대비경의 하나인 관음도의 대표 관음쌍굴이란다.
3대 비경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배 타고 가는 길 외에는 접근마저도 할 수 없으며 해적의 소굴이었다던 곳이 울릉도
최고의 비경으로 선정되었으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관음도의 다른 이름이 깍새섬이라는데 사연이 있다.
개척 당시 경주에서 입도한 이주민의 이야기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태풍을 만나 이 섬으로 피난해 추위를 이기려고 밤에 불을
피웠는데 떼로 몰려온 깍새들을 잡아서 먹음으로서 추위와 굶주림을 함께 이겨냈다.
월성김씨라는 그는 깍새가 많았던 섬이라 해서 깍새섬으로 불렀다는 것.
800여m탐방로 대부분에 목책으로 탐방자의 안전(이탈로인한사고예방)을 도모하고
시야가 확보된 사방에 데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바람막이가 전무한 바람섬이라 펜스(fence)가 필요하겠다.
관음도 처럼 울릉섬 가장자리가 해식작용으로 각기 분리되었다는 삼선암과 반대편
죽도를 수시로 덮어버리는 불안한 날씨에는 어느 쪽 전망대도 용도가 없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우거진 나무 밑에서 피했으나 계속되는 강한 빗줄기에는
칙칙한 숲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를 대비해 배낭의 우산을 꺼내어 들고 오다가 거센 바람에는 무용지물일 것 같아
다리 건너 섬 숲에 두고 왔는데, 오! 한 치 앞도 못보는 한계여.
석포와 안용복기념관 유감
관음도의 서쪽 5부쯤 되는 위치에 삼선암을 향해 있는 바위를 '독수리 부리'라 이름
지어 매표소 여직원에게 전했다.
입도료를 지불하려 해도 받기를 한사코 거절하고,공개돼도 신분에 지장 없겠느냐는
물음에는 미소로 답하는 여직원을 뒤로 하고 관선터널로 들어갔다.
공사관계자 외에는 출입을 금지하고 있음을 알기는 돌아나온 후였다.
저동~관음도, 5각형 울릉섬을 남~서~북~동의 시계방향으로 40여km(섬목까지)를
걸어왔으나 반시계방향으로는 저동~울릉도의 북동쪽 끝 섬목이 5km 미만이다.
석포 동쪽 끝, 바다로 뻗어나온 산 중간이 끊어져 관음도가 되었단다.
끊어진 사이로 배가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 사이가 섬의 목과 같다 해서 섬목(島項),
배를 정박하기 좋은 항구라 하여 선창포라 하였다나.
섬목으로 가려 했는데 수시로 쏟아붓듯 하는 소나기에 전진을 못하고 한 참을 터널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비는 그쳤지만 갈 수 없는 섬목~저동 간의 일주도로 공사 현장이다.
파헤쳐진 바닷가를 빗속에서 강행할 수도 없거니와 시야가 전혀 없기 때문에 위험
천만인 공사장이다.
섬목에서 선착장, 와달리를 거쳐 내수전 입구로 가는, 잰걸음이면 1시간남짓 거리인
5km 미만의 구간을 포기하고 산길을 택해야 했다.
석포 선창에서 시작하는 울릉둘레길 트레킹(trekking) 코스다.
풍랑으로 저동~북면 사이를 왕래하는 배가 묶일 때 이용한 육상 주요 교통로였는데
(육상 대체로) 이 산길이 바로 지금의 둘레길이란다.
한데, 둘레길에 들어서기 전, 석포둘레길입구 3.64km에서 기진맥진 해버리면 정작
둘레길은 어떻게 걷는다?
초입의 시멘트 포장길은 지그재그 해야 오를 수 있을 만큼 된비알이다.
문제는 단조롭게 오를 때보다 길이 흩어져 있는 정상부에 오른 후가 심각했다.
시야가 없기 때문에 자칫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려들기 십상인
장소와 기상이기 때문이었다.
태풍에 버금가는 바람이 따른 비라 우산은 무용지물이지만 이베리아반도에서 연일
거르지 않는 소나기에서 나를 보호해준 판초가 울릉도 비를 막아주지 못하겠는가.
우중 강행으로 고원 석포마을에 올라섰다.
내가 반c를 살고 있는 서울 우이동을 예전에는 울고 왔다 울고 가는 마을이라 했다.
마지 못해 서울이라 하기 주저되는 험한 산골, 후진 마을로 유배당하듯 울면서 이사
했으나 정이 담뿍 들 수 밖에 없도록 살기 좋은 곳이라 떠날 때 또 울게 된다는 것.
한데, 여기 석포를 '정들깨, 정들포' 라 하는 사연이 비슷하다.
개척당시, 울면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동안에 정이 들었기에 딴데로 이사갈 때
울면서 갈 정도라 해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니까.
피붙이가 없는 외로운 노파의 유일한 소원은 딸 하나 갖는 것이었다.
노파는 소원을 이뤘으나 혼기에 이른 딸이 어느 날 사라졌다.
노파의 꿈에 나타난 딸은 "천상 여인인데 인간세계가 궁금해서 내려와 인자한 분을
만나 고맙고 기뻤다"는 사례의 말을 했다.
천상인이 인간의 마을에 정을 두고 갔다 해서 정들포라 했다는 전설도 있단다.
훗날 마을 이름을 지을 때 돌이 많다고 해서 석포(石圃)라고 했다는 천부4리.
바닷가인데도 뒷자 '포'가 물가浦 아닌 채마밭圃인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석포 외에도 학포, 현포 등 하나같이 그러한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작지가 극히 적은 척박한 섬이기 때문에 채마밭이 있는 곳 또는 그런 밭을 원하는
뜻을 담은 글자 선택이었을까.
일제가 지명 한자화 때 고의로?
러일전쟁 이전부터 일본의 망루 역할을 했으며 전후에도 러시아 군함을 관측하려고
일본이 전략적인 망루로 사용했다는 석포 일출일몰전망대는 포기했다.
도동 망향봉망루, 태하리 향목망루 등 일본이 세운 3개의 망루 중 남아있는 유일한
망루라는데 전망대 자체가 분간되지 않을 정도의 날씨에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비가 잠시 그쳤을 때 '미래를 창조하는 슬기로운 한국인' 이라는 슬로건(slogan)이
아직 남아있는 석포분교장(?)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왔다.
광복과 더불어 석포의 일인병사(兵舍)를 개축해 죽암교국를 이전, 석포국교로 개칭
했으나 1979년에 천부국교 석포분교로 강등되고 1998년에 폐교된 교사(校舍)란다.
마을 자체가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를 판인데 폐교가 문제 되는가.
피크(peak)인 1974년에 190명 부족한 30.000 인구였으나 2002, 3년에는 9.000명대,
1/3로 격감되었다가 겨우 1만명대를 턱걸이하고 있는데 학령기 아동이 늘겠는가.
리모델링해서 고원 휴양지 또는 어떤 용도로 전용될 법도 한데 워낙 사람이 귀하기
때문인지 잡초만 무성해 가고 있다.
곧 안용복기념관에 당도했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안용복의 위대한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고, 그 얼을 숭고한 국토사랑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안용복기념관은 조성되었다"
구조가 애매한 80자 긴 통문장이 150억짜리 기념관 조성에 대한 글이다.
주어와 목적어가 쉬이 와닿을 수 있도록 다듬을 수는 없었던가.
거룩한 목적을 설명하는 글의 품위가 '글쎄'다.
도동약수공원에서 만났으며 그에 대해 이미 언급했기에 부언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안용복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신분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는가.
'장군'칭호를 쓰는 일각과 달리 경상북도지사의 말 “...안용복 선생의 진취적인 정신
...." 을 비롯해 언론 등 다수가 '선생'이라 칭하고 있으니 말이다.
담판으로 또는 관명을 사칭해서 서계를 받는데 성공했다 해서 적과 싸운 적이 없는,
군력(軍歷)이란 옛 능로군 병사였을 뿐인 그에게 장군 칭호는 무리 아닌가.
애국지사는 될 망정.
능로군(能櫓軍)이란 천인(賤人)에게도 군역(軍役)을 부과함으로써 생겨난 양인(良
人)과 천인의 혼성부대인데 임진왜란 이후 군력 확보책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맡은 분야는 해리(海利)에 관한 것 뿐, 입번(入番)도 시재(試才)도 없고 매년
한 번 수조(水操)에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북동쪽 한적한 바닷가 꼭데기에 건립한 이유가 단지 이 지역이 그의 울릉도 첫
입도와 관련있는 곳(그가 처음 당도했다는)이기 때문인가.
건립 목적의 구현을 위해서는 대중이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여야 하지 않는가.
사당은 잠겨있고 완공된지 1년도 되지 않는 건물이 웬만한 비도 이겨내지 못해 새는
물을 받느라 건물 내부 도처에 볼썽사나운 물통이라니.
2010년에 착공하였고 2013년에 준공되었는데도 주인공과 건물에 대한 책자는 커녕
리플렛(leaflet) 한장 없는 기념관도 내 생전 처음 보았다.
울릉둘레길 : 석포 ~ 내수전
천부 ~ 석포 버스가 여기까지 오나보다.
석포 ~ 내수전 둘레길 시종점 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차로)를 오르내리며 몇 굽이
돌아야 하는데 궁금증을 자극하는 시설 곁을 지나야 한다.
접근 금지, 울타리를 통해 연락 또는 대화 엄금, 시설 촬영 또는 묘사도 엄금한다는
경고판이 문 마다 부착된 층층 옹벽 위의 광대한 정상부.
최대 3년 징역을 살거나 최고 1천만원의 벌금을 내더라도 궁금증을 풀까?
연락하거나 대화할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데 무슨?
섬목가는옛길, 석포버스정류장길, 죽암길을 버리고 내수전화살표를 따르면 얼마 후
내수전둘레길 들.날머리에 당도한다.
"폭풍우로 출항이 불가능할 때 저동으로 통하는 옛길"이라는 설명이 있다.
"산림청 녹색사업단의 복권기금(녹색자금)의 지원으로 조성되었다" 는 '울릉둘레길
조성사업'표석도 있다.
안용복기념관에서 "기상이 나쁜데 어르신 혼자는 위험하므로 버스를 이용하시라" 는
권고가 있었는데 "나홀로 탐방은 위험하다"는 경고판도 붙어있다.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 하고, 때로는 농무로 변하고, 운애가 자욱한 산속이지만 나는
역시 산(山)체질임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숲속에 들어선 것은 물을 만난 물고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
방부목 데크계단과 목교들의 과보호가 못마땅하기는 해도 원시림속 같은 숲길이다.
시야가 없기 때문에 데크전망대는 의미 없고 통과 위치도 확인할 수 없지만(이런 때
바람은 고마운 바람인데) 신바람 산길은 곧 북면과 울릉읍, 읍면계를 통과했다.
석포1.400m,저동2.000m 이정포를 확인하고 내려섰는데 다음 이정표는 석표둘레길
입구1.23km, 내수전둘레길입구2.17km라니.
옥의 티로 접고 산속 정자를 지나 바로 아래의 '정매화골 쉼터'에 도착했다.
토착민 '정명학이' 살았던 외딴 집이 있는 골짜기라 해서 정미야골이라 했다는 곳.
1962년에 자녀3남매를 대동하고 이 곳에 정착한 이효영 부부가 1981년 이곳을 떠날
때까지 19년 동안 300여명의 조난자를 구조한 정매화골.
"이씨 부부의 이웃 사랑의 정이 깃든 이 곳을 쉼터로 만들어 추억에 젖어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울릉군의 안내판이 서있다.
지도에 의하면 저 아래 바닷가에 와달리, 용굴, 염소폭포가 있으렸다.
개척 초기, 이곳에 은거하던 한 한학자가 "혼자 누워 살아도 도가 하늘에 달한다"고
하여 와달리(臥達里)라 불려지고 있다는 내수전 북쪽 외딴 해안 마을.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해서 용굴.
집 나간 염소를 잡으려고 움막을 쳤다 해서 염막골,염소들이 많이 있는 곳의 폭포라
염소폭포, 가톨릭 신부가 지나가다 아름다운 폭포에 감탄해 한솔폭포.
마을에는 인적이 끊겼고 지금은 배를 타고 가야만 볼 수 있다는 용굴과 염소폭포도
도로공사가 끝나면 자유로이 걸어가서 볼 수 있겠다.
초근목피의 빈곤시기에도 자녀들의 교육은 부모의 제일 과제였다.
당시는 지금 같은 과열시대가 아니었다 해도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걸려 고민 많이
하고 이로 인해 부부간의 갈등도 적잖았을 것이다.
자녀가 이미 성인이 되었다 해도 그들이 도시로 진출해서 보다 더 잘 되기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닌가.
그런데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그 때가 빈곤시기였다 해도 1970년대는 울릉도 역사상 피크인 인구 3
만명 시기(1974년)로 급성장하는 때였는데 군민의 체력이 그렇게도 형편없었나?
성인봉을 넘나드는 것도 아니고, 전문 등반기술을 요하는 난 코스도 아니며 지극히
평이한 10리 안팎의 산자락길이다.
길 잃고 헤맬 염려마저도 없는 이 외길에서 연평균 16명의 조난자가 발생하다니?
지금처럼 잘 정비되지는 않았던 때라 해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있는 길인데.
폭설과 폭우로 인한 허기 때문이었다니 더욱 어이없는 조난이다.
나와 등산을 한 적 있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단 하나의 애로를 토로한다.
먹지 않고 쉬지도 않고 전진한다는 것.
그렇다, 나는 하루 정도는 그렇게 하는데 지장 없는 체질(?)이라고 자타가 인정한다.
이같은 특이체질이기 때문에 내가 허기로 인한 조난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나는 허기를 통해 허기를 이겨냈을 뿐 체질이 아니다.
먹거리가 없어서 1주일을 꼬박 물만 마시며 버틴 참담했던 때를 어찌 잊겠는가.
나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비하지 않는, 무비유환(無備有患)을 질책하는 것이다.
조금 전, 읍면계의 이정표와 정 반대 거리(내수전입구1.26km,석포입구2.14km)지점
이후의 산길은 더욱 아기자기해서 배낭의 무게마저 잊고 있었다.
대간과 9정맥 이후 완전무장한 무거운 배낭메고 걷는 산길은 처음인데.
산길 걷는 묘미를 위해서는 약간의 긴장구간이 필요하건만 계단공사가 진행중이다.
내수전전망대 : 울릉도는 후진국의 섬?
비가 완전히 그쳤고 바람도 잠잠해졌고 하늘도 많이 맑아졌다.
둘레길 트레킹과 무관한 사람과 차량으로 붐비는 둘레길내수전 입.출구의 고갯마루.
지체 없이 해발440m 내수전일출전망대 길에 들어섰다.
동백나무숲 터널이 일품이고 소나무와 마가목 등이 숲을 이룬 감칠맛 나는 길이다.
정상의 4각형 목제 데크가 오른 고생을 풀어주고 북의 관음도와 섬목, 북동쪽 죽도,
남서의 북저바위, 촛대암, 저동항과 마을, 뒤로 행남(도동)등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동해안산책로의 나선 수직계단이 마치 수력발전소의 수로 같고 남쪽 멀리 망향봉
까지 시야에 포함되는 전망대다.
오징어철에 이 전망대에서 보는 저동어화는 장관 중 장관 야경이라는데 그 때까지
기다릴까.
오르다가 길가 숲에 매낭을 내려놓았는데 가벼운 몸으로 올랐기 망정이지 50cm가
넘는 계단간의 높이에 무지 고생할 뻔했다.
통나무계단의 설치 관계자는 참으로 무지스럽기 짝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람 관절의 건강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사람들은 왜 순한 양처럼 다소곳하기만 할까.
계단 높이로 선.후진국을 판정한다면 울릉도는 분명 후진국의 섬이다.
아무리 회칠, 분칠해도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다.
선진국의 계단은 오르내리는데 무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인체공학에 기초한 설계와 시공, 디자인이 그 까닭인데, 우리나라의 관계자들은 그
이유(불편하게 하는)를 예산의 부족으로 돌린다.
그래서 더 후진국이라는 것이다.
전망대 고갯마루~내수전 길은 지루한 내리막이다.
내수전(內水田)은 홀로 화전을 일구며 마을을 개척했다는 김내수(金內水)의 이름을
땄다는 저동3리 마을이다.
자생 닥나무가 많아서 자전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는데 닥나무밭이라면 저전(楮田)
인데 왜 자전포라고 고집하는 이들이 있는가?
옛 울릉도 수토기에는 저동을 저전(苧田), 저포(苧浦)라고도 했으며 닥나무밭(楮田)
이라는 기록도 있다.
경상도에서는 저(楮)를 자로 읽는 경우가 흔하다.
모시밭 전과 닥나무밭 전을 구분하기 위한 변음이었을까.
탄산철천 약수터가 있고 몽돌해수욕장도 있고 울릉읍 지역의 전력을 생산하는 내연
발전소(화력)도 있는 내수전마을을 지나 전전날 입도했던 저동항으로 돌아왔다.
입도 50여시간에 저동, 도동 해안산책로, 90번일주도로와 석포~내수전 트레킹코스
등으로 울릉섬 일주를 마친 것.
도동으로 귀환, 단 한 끼에 단골이 된 식당에서 울릉도 2번째 식사를 한 후 맡겨놓은
내 물건 찾아오듯 깔판을 받아들었다.
약수공원 내 보금자리에 다시 집을 지음으로서 3번째 밤 보낼 준비를 완료했다.
익숙해진 2번째 밤보다 더욱 적응이 되었는가.
낮 시간 4분의 3을 빗속에서 보냈고 종일 많은 곳을 뒤지듯 돌아다녔는데 이렇게도
평온할 수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