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동안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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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無 李東燮
친구와 삼청동 안길에서 점심 한 끼 하고 나오는데 마침 우산을 들고 지나가는 권양을 만났다. 둘은 차한잔 하려고 찻집을 찾아 삼청동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눈발이 떨어진다. 권양은 첫눈이 내리는 삼청동길 몫에서 “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팥죽집“이라는 간판이 보이자 그집에 가자고 한다. 오늘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긴 했어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안했는데 삼청동 길에서 권양과 함게 걷다가 첫눈을 맞게 되니 문득 50년전 경자생갇이 난다.
눈발이 갑자기 함박눈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고 가지만 권양은 우산을 펴지않고 눈을 맞으면서 걸었다. “서울서 두번째 잘하는집”엔 들어설 자리가 없는지 문밖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나는 다른 조용한 집으로 가서 대추차를 마시고 싶은데 권양은 고집스럽게 줄을 선다. 고집스러움이 그때 그녀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집"이란 간판이 재미 있다.
. 1956년 대학 입학시험을 치려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 하숙한곳이 삼청동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바로 팟죽집 근처가 아닌가 싶다. 2학년때 군에 입대하여 1961년10월달에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에 복교했는데 나는 직장이 효자동에 있어서 일과를 마치면 삼청동길을 걸어서 명륜동 성균관 대학교 까지 걸어다녔다.
군에서는 그림좀 그린 재주덕에 차트병으로 일했다. 당시 나는 군사령부 G2차트사였는데 내 하는 일은 정보장교들의 부리핑 상황판을 만들어 주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전용 차트실이 읶었고 그 방에서 틈나는 대로 대학시절 못이룬 고시준비를 할수가 있었다.
옆자리 타자수 신하사는 121후송병원에 근무하는 그녀의 동생 신경자 중위를 내게 소개하였다.
그녀는 사령관 지정간호사로 발탁되여 주간에는 사령관실에서 일하다가 일과후에는 원대복귀했다. 그녀는 이따금 복귀하는 길에 내 차트실로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1961년10월 제대하여 원주를 떠나면서 2년여 그녀와 소식이 단절되었다. 제대후 나는 최우선 과제가 취직이었다. 그다음은 대학에 복교하는 문제였고, 그러느라고 사실 경자를 생각할 겨를이 없엇다. 그러다가 경찰학교에 합격되고 교무과에서 차트사 일을 맡았다. 그해 9월에 대학에도 복교하여 퇴근하면 명륜동에 있는 대학에 갔다. 대학에 다니면서 늘 곁에서 만나는 여학생과 친해졌다. 그녀는 영화사에서 일하면서 야간에는 대학에 다녔다. 나는 그녀와 가까워 지면서 그녀 어머니께 인사도 드리고 그집 식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제대후 2년쯤 되었을 무렵이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하게도 타자수 였던 신하사를 옥인동 골목에서 만났다. 신중위 언니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리가 잡히니 경자 소식이 궁굼하던 중이었다. 언니 신하사는 군에서 제대하여 지금은 수산청에 근무한다고 했다. 사는 집도 가까운 옥인동이었다.그녀는 내가 묻기도 전에 동생 신경자이야기 부터 꺼냈다. 신중위는 내가 원주를 떠난후에 양수리 후송병원으로 전속되었고 전역신청을했다고 했다.
우린 인근 찻집에 들어갔다.
“‘경자는 어릴 때 고집이 대단해서 아버지가 아무리 야단을 처도 눈물한방울 안 흘리는 애라구요 . 그 애 고집은 못 걲었어요 ..“
경자는 6살 때 엄마를 일었다. 자매는 계모슬하에서 자랐는데 경자는 고집이 너무 세어 어릴 때부터 아빠를 무척 힘들게 한 모양이다.
“미스타리 경자를 잡으려면 빨리 서두세요. 그 애 곧 전역하면 시집갈거애요. 요즘 아빠가 신랑감을 구해놓고 결혼하라구해서 고민이 많다 구요. 작전 상황실에 근무하는 통역장교 있잔 아요. 그 사람도 결혼 하 자구 연락이 오나봐요. 그래도 경자는 미스타리만 마음에 둔 것 같아요. 어쩔 거예요. 그 애 는 성질 이 외길이라서 겁나요, ” 금주 토요일 에 나한테 온 다구요. 오후 7시에 서울역으로 나가면 그 애 만날 거예요. ‘’
나는 토요일 그녀를 만나려고 서울역 풀렛홈에서 기다리다가 그녀를 맞났다. 그날이후 토요일 오후는 그를 풀렛홈에서 맞이하고 우린걷는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중앙청 을 지나고 경복궁 담 길로 해서 삼청동 공원까지 갔다가 또 다시 걸어 옥인동 언니 집까지 온다. 눈이 펑펑 쏟이지던날도 눈보라가 치던 날도 그랬다. 그러길 2년여가 지날 무렵이다.그녀 신상에 변화가 왔다 .전역도 해야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나는 아니엇다. 대학졸업도 못하고 있고 장가들 준비도 전혀 안된상태였다. 미쓰리도 곁에서 날 기다리지만 그녀는 일찍 날 포기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렸다. 눈이 무척 내리는 토요일 저녁 나는 신중위와 진명여고 근처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신경자씨 이젠 오누이로 살자"" 어차피 우리사이는 결혼은 안될것 같고". 하고 말했다.그녀도 다소곳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낸후 나는 사무실로 들어와 붓을 들고 정성 드려 작별의 편지 한장을 써 보냈다. 그녀가 결혼하는데 내가 걸림돌이 안 되도록 용단을 내린 것인데 그것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줄은 몰랐다.
같은 양수리 후송병원에서 복무했던 내 고시 친구 이병운군이 뒷날 전해준 말에 의하면 함박 눈이 내리는날이다. 그날 자신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여군 막사에서 연기가 올라 확인차 가보니까 바로 신 중위가 휴지를소각하고 있더라는것이다. 별일 아니라 판단 오후에 외출했는데 야중에 생각하니 그날 자살하려고 주변을 정리한것같다고 했다. 일요일 오후 모두 외출간 빈 영내에서 그녀는 사진첩과 일기장등 그녀의 유품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내가 보낸 마지막 편지 한 장만 자신의 베게청에 넣어 그 베개를 베고 세상을 떠났다.왜 그 편질 남겼을가?
보안대 조사관이 소지품을 조사하다 베개속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유해는 군 의장규범에 의하여 화장하여서 야산에 뿌렸다. 나는 그녀 언니와 상의해서 신설동 보문사로 찾아가 대학 동창들 을 불러 함께 진혼제를 올려주었다. 동대 총장을 지낸 큰 시님이 주창자를 쿵쿵 바닥에 치며 말했다. 망자의 혼령이 지금 이자리에서 제주를 보고있으니 하고푼 말을 하란다. 경자야. 편해져라. 이말만 되풀이했다. 50년동안 주창자의 울림이 온다..
그날은 온종일 함박눈이 절마당에 쌓였다. .
삼청동 눈 쌓인 길가 찻집에서 나는 잠시 50년의 명상에 흘러간다. 내앞에 느낌은 권양이건 신경자건 같은 나이또래. 같은 여인, 같은 목소리. 숨소리. 그날에 솓아내린 그 눈꽃들. 무슨 차인가 , 미망. 단상. 환영 과 착각들이 눈꽃처러 나부끼는데 . 결국은 허무한 꿈..
보문사 주지의 주창자 소리가 창공에 흩어진지도 50년, 지금도 선연하다. 안국역에서 불광동사는 권양은 나를 따라 역방향 지하철에 오른다. 옛날 내가 그녀 에게 그랬던 것처럼.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