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소의 얼음위를 취재진이 조심스레 걷고 있다. 절골의 물은 하도 맑아 얼음장 믿으로도 푸른 기운이 서린다.
주왕산(720.6m)은 낙동정맥 중간쯤에 위치한 산으로 197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 5개읍 면과 맞닿아 있다. 주왕산 능선길은 말굽형처럼 생겼고, 그 안에 내원동이라는 작은 산마을이 있다.
주왕산 곳곳의 봉우리와 골짜기에는 주왕과 연관된 전설들이 깃들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 덕종 12년에 주도(주왕)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무리를 이끌고 강원도를 거쳐 주왕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신라의 왕이 마일성장군 형제에게 토벌을 명했다.
주왕의 무리와 마일성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주왕은 크게 패해 주왕굴에 숨어 있다가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청송의 향토 사학자인 김규봉씨(44세)는 그의 저서「주왕산」에서 중국에서 왔다는 주왕의 전설을 부인한다.
그는 전설상에 나오는 주왕은 신라 헌덕왕 때의 김헌창이라고 주장한다.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신장군의 토벌군에게 크게 패해 주왕굴에서 생포돼 죽임을 당한다.
그의 아들 김범문은 달아나 승려 행세를 하면서 죽은 그의 아버지 김헌창을 주왕이라 칭했으며, 김헌창과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탑이나 석상을 격전지에 만들어 이들을 추모했다.
920년 김범문의 제자인 낭공대사가 이 반란 사건을「주왕사적」에 비기 형식을 빌어 기록했다고 한다.
자연미 일품인 주왕산의 보물창고 절골
김규봉씨에 의하면 주왕산은 조선시대에 청송 심씨 문중 소유의 산이었다고 한다.
세종대왕때부터 번성했던 청송 심씨는 조선말에 이르러 세력이 약화되면서 주왕산에 부과되는 많은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송 심씨 문중에서는 주왕산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이후 주왕산은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부동산등기법에 의해 몰수되었다가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대문다리 바로가기 전의 암반지대. 청송자연휴양림.
이번에 발굴 산행한 절골매표소에서 왕거암, 내원동에서 주방천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14.5킬로미터 코스는 주왕산의 핵심 절경을 두루 볼 수 있는 곳이다.
관광객이 주로 들르는 대전사에서 내원동까지의 코스가 인위적 색채가 짙은 편인 반면, 절골에서 왕거암까지의 코스는 자연적 냄새가 물씬 나는 '원상 그대로의 자유'와 골짜기의 서정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곳이다. 이 코스는 청송 산꾼들이 은밀하게 숨겨둔 보물창고 같은 곳으로 이 골짜기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길이 매우 순탄하여 가족 산행지로도 제격이다.
1월 6일 오전 7시 30분, 청송의 거암스포츠(대표 김영숙)에서 함께 산행할 청송 아이리스 산악회(회장 권여숙) 여성 회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이것저것 산행에 필요한 것들을 확인하고 절골로 향한다.
절골로 들어가기 전 청송읍에서 유명한 주산지에 들러 물에 잠긴 나무들을 잠시 감상한 뒤, 절골매표소에 도착한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매표소에는 우리밖에 없다.
매표소를 출발한 시간은 오전 8시 30분, 날씨는 흐리다.
주왕산 기암 전경. 기암은 대전사 뒤편에 있으며, 이 봉우리에 깃발을 꽂아 놓았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매표소를 들어서자마자 길 양옆으로 80∼100미터에 이르는 절벽지대가 취재진을 압도할 만큼 멋들어지게 펼쳐지고, 우리는 그 계곡의 숨막히는 절경의 흔적을 따라 바람 한 점 없는 길을 걷는다.
비경은 끝간 데 없이 가슴속으로 밀려오고 첫 번째 콘크리트 다리를 건넌다.
우측 절벽에는 군락을 이룬 바위손들이 손을 오그린 채 겨울을 나고 있다.
두 번째 쇠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 절벽 오버행에 20여미터의 빙폭이 허리가 잘린 채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다린다.
쇠다리를 지나면서 위압적인 절벽들이 차츰 사라져 이 비경지대도 여기쯤에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절골은 잔잔한 계곡의 흐름을 보이다가도 절골 입구보다 규모는 작지만 작은 절벽지대를 보이다가 다시 조금 걸어가면 또 다른 절벽이 나타난다.
또한 골짜기 물은 얼마나 맑은 지 10여 센티미터 얼음 밑으로 푸른 물이 속살을 드러낸다.
얼음장 아래에는 버들치가 떼를 지어 한가로이 노닐고….
"어머, 저 물고기를 봐!"
김영심씨(39세)의 말에 모두 물 속을 들여다보던 아이리스산악회 회원 모두의 표정엔 소녀때 꿈꾸었던 표정이 묻어난다.
물살의 푸른빛이 눈동자에 감돌고 우리는 물고기가 스쳐간 얼음 위를 사뿐히 걷는다.
기자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권여숙씨가 이 골짜기 절벽에 꽃잎 같은 단풍잎이 들면 그 빛깔과 물빛에 흘러가는 붉은 물살이 더없이 곱다며,
이 계곡은 가을에 찾아오면 그만 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대전사에서 바라본 기암. 대전사는 주왕산의 대표적 사찰로 <주왕사적>에 의하면 892년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내원동으로 내려오는 중에 만난 억새밭. 앞에 있는 이는 아이리스산악회 권여숙회장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계곡 좌우측으로 단풍나무들이 봄을 기다리듯 어지럽게 서있고, 기자는 주왕산에 수달래 피고, 연두빛 신록이 번져오는 아련한 봄날에 이곳에 오면 어질머리 나는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보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길은 순하다.
우리는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는 수석공원의 풍광에 취해 한동안 얼을 잠시 빼놓았다가 다시 추슬러 길을 떠난다.
절골과 신술골이 나뉘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신술골.
마른 잡초만 우거진 화전민터
우리는 삼거리 이정표에 써있는 왼쪽의 '가메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등산로는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꼬불거리며 이어지고 몇 굽이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시야가 트이면서 작은 분지를 이룬 절터가 보인다.
본래 이 터에 있던 절은 운수암으로 김범문이 840년에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 당국에 의해 강제 철거당해, 지금은 메마른 잡풀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길을 옮기면서 예전에 몇 가구 살았을 만한 화전민 터가 나온다.
이곳 역시 사람의 체취가 사라진 지 오래 되어 썰렁하기 그지없고, 이름 모를 잡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산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산, 그 골짜기를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이 좀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이깔나무 숲에 짧은 바람이 감돌고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 하늘이 시리다.
순한 등산로에 수북히 쌓인 갈비를 부드럽게 밟으며 모퉁이를 돌고 돌아 넓은 암반이 펼쳐진 대문다리에 이른다.
대문다리는 예전에 대문처럼 생긴 다리가 있어 붙여진 지명. 길은 또 한 번 나뉘어진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데로 석름봉(882.7m)의 왕거암으로 가는 왼쪽 길을 따르는데, 초입은 비교적 좁은 편이다. 골짜기 풍경은 평범해지기 시작한다.
낙엽송 사잇길이 보이더니 오른쪽 골짜기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이정표에는 왕거암이 1.5킬로미터 남았음을 알려준다.
청송읍에서 가장 맛있다는 족발을 윤복희씨(39세)가 배낭에서 꺼내 놓는다.
다들 출출하던 차에 손길이 족발로 향하는데 권여숙씨가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그녀가 꺼낸 것은 지난 해 3월에 담근 머루주.
모두 한 모금씩 머루주를 마시는데 그 빛깔이나 맛이 매우 뛰어나 칭찬을 잊지 않는다.
그녀는 머루에다 오디와 산딸기를 넣어 만들었다고 하는데, 연붉은 보랏빛이 감돈다.
한 잔 머루주에 아이리스산악회 여성 회원들의 볼이 그만 발그레 밝아온다.
이제 계곡 산행이 끝나고 오르막의 시작. 일행은 왕거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오른다.
숨이 목까지 깔딱깔딱 차 오르는 고바위길에 무덤 한 기가 보인다. 조금 더 오르자 또 하나의 무덤이 보이고, 이곳까지 상여를 메고 왔을 옛날 사람들의 고생스런 땀방울이 땅바닥에 보일 것만 같다.
절골과 신술골이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이종서씨가 지도를 꺼내 확인하고 있다. 석릉봉을 향해 가파른 길을 올라가고 있는 취재진. 이 등산로에는 무덤 2기가 있다.
등산로는 거의 흐트러짐 없이 곧장 석름봉 정상으로 이어지다가 정상 부근에 이르러 약간 우측으로 돌아간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서자 바로 내원동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우리는 왼쪽에 있는 석름봉으로 오른다. 오후 12시 15분, 석름봉에 도착하자 '왕거암'이라 쓴 큰 표지석이 보인다.
왕거암 동쪽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까운 거리에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이어지고 산은 숲을 이루고있어 조망하는 맛이 괜찮다 싶었다.
우리는 지척에 있는 석름봉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에는 1979년 한 산악인이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쌓았다는 '통일기원탑'이 서 있다.
우리는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 내려와 내원동으로 가는 능선 길을 탄다.
아주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 능선이 끝나는 합수 지점에 도착해 도시락을 먹고 오후 2시 25분 내원동으로 향한다.
길이 평탄해질 즈음 아담한 분지가 나타나고 예전에는 큰 밭이었을 평지에는 억새만 무성하고, 가을이면 순백으로 타올랐을 억새밭에서 우리는 잠시 서정에 잠겨 본다.
억새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한가로운 시간을 뒤로 하니 민가 한 채가 있다.
내원동이다.
조금 내려가자 지금은 여섯 가구만 산다는, 지금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내원동이 보이고 작년만 해도 간이음식점이 두 곳만 있었는데 그 사이 두 개의 음식점이 늘었다.
학소대에서 제1폭포가기 바로 전에 있는 시루봉. 마치 시루처럼 생긴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1980년에 폐교한 내원분교를 개축한 아담한 내원다원을 지나자마자 이 마을의 역사와 행복을 지켜보았을 '당돌'이 내원동을 지키고 있다.
다리 두 개를 건너 내려서는 곳에 2단으로 된 제3폭포가 완만한 얼음 사면을 만들고 우리는 호젓한 비포장길을 따라 지금은 폐쇄된 빈 건물에 도착한다.
제2폭포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제1폭포로 들어서자 여느 산에서 볼 수 없는 좁은 바위 협곡이 펼쳐지고 그 사이에 나지막한 제1폭포가 있다.
협곡을 벗어나자 곧 시루봉이 나타나고 다리 건너 직벽과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학소대와 급수대가 우리 일행을 압도한다.
사실, 주왕산은 교통의 불편함만 없다면 고창 선운산보다 더 좋은 암벽 대상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주왕산의 암벽은 접근이 쉬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암벽의 각도가 80∼140도에 달하고 등반길이도 40∼80여 미터에 이른다.
또한 홀드가 잘 발달해 있고, 포켓홀드가 많은 편으로 주 등산로의 암벽 말고도 곳곳에 개척할 여지가 많은, 클라이머의 손길을 기다리는 산이다.
오후 4시 30분 대전사에 닿는다.
대전사 뒤편으로 기암이 두둥실 떠 있고 아름다운 산, 주왕산을 뒤로 한 채 다음에 언젠가 다시 오마 마음속에 새겨놓고 산을 떠난다.
내원동은 주왕산 중앙에 위치한 분지에 터를 잡은 마을이다. 70년대 번창했다가 지금은 6가구만 있다. 석릉봉 정상 근처에서 청송 아이리스산악회 회원들이 낙동정맥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