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앨범 이야기를 하려 한다.
1992년, 리어카 불법 테잎(일명 '짝퉁')으로 처음 구입한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을 떠올려본다.
이건 진퉁 테잎
그 당시 아주 잘나갔던 MC 임백천, 그가 진행했던 'MBC 특종 TV 연예!'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메이
저 데뷔무대를 갖게 되었다. 곡은 이름하여 '난 알아요'
임백천은 가수 출신, "마음에 쓰는 편지" 강추!
그때가 아마도 1992년 3월, 그리고 그 싸늘했던 평가... 다행히 내가 좋아했던 전영록씨만큼은 댄스
가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호평을 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도 있다. 어찌 되었건 씁쓸한
표정의 세 남자, 서태지와 아이들은 기대보다 실망이 큰 데뷔전을 치루면서 TV를 통해 얼굴을 알리
게 되었다.
그들의 데뷔전, MBC 특종 TV 연예
그 후로 한달이나 지났을까? 아니 몇 주 밖에 안되었던 것 같은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강
풍의 강도는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마치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 회오리춤의 그 박력만큼이나 그들의 브
랜드는 사람들 가슴에 넓고 깊은 파워를 주입시켜 나갔다.
정말 머리가 잘 어울린다! 서태지 시나위 시절
모두가 홀려가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0세 이하의 아이들
과 10대의 청소년들, 20대의 젊은 층들까지 대부분 '서태지와 아이들'에 집중했고 그들의 귀추를 주
목했다. 이건 정말 귀신에 홀린 것일까? 시대유감의 가사의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
질 것 같네'의 현재완료형, '벌어졌었다'를 써야만 적절한 것이다.
1996년, 공윤 심의를 재통과하여 시대유감 앨범 별도 발매!
록과 테크노 비트의 적절한 교류 거기다가 시니컬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래핑에 이르기까지... 맞다
차가운 현실과 자아의 냉정함을 노래한 그 가사 또한 대단스러웠지... 바로 그 곡, "환상속의 그대!"
1996년, 공윤 심의를 재통과하여 시대유감 앨범 별도 발매!
'환상속의 그대', 이 곡을 NATE 동영상벨 서비스를 통해 장착하고 벨이 울릴 때마다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다면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
NATE 폰꾸미기 라이브벨 동영상벨 검색(or 가수별 찾기)
AC/DC의 비트를 감각적으로 차용해 구축한 곡, 로큰롤댄스... 둔탁한 슬로우템포 비트 속의 슬픔
을 흥건히 담아낸 '이 밤이 깊어가지만'... 후에 리믹스버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레코드 판을
양 손에 쥐포 판 댄스를 추기도 했다! 춤은 못추지만 이 춤만큼은 너무 배우고 싶었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그 움직임...
지금까지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렇게도 명반이라고 말들 하는 2집 이야기를 뛰어 넘고 3집 이야기로 바로 갈까 한다. 2집은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도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 중 명반으로 줄 곧 뽑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모든
트랙이 상당히 잘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1집보단 2집이 확연히 세련되고 단단하다. 사운드랄지
가사와 곡의 융합성이랄지 아니면 특화된 이미지의 곡들을 갯수랄지... 모든 면에서 우세했다.
3집은 내가 생각하는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명반이다.
'내맘이야'란 곡은 완벽한 Punk Rock(펑크 록)인데, 펑크 자체가 가사가 제멋대로 아닌가? 내맘이
야의 가사는 정말 제대로 제멋대로다. 그 재미있는 마지막 가사... 난 아직도 반복한다! '라해로 꾸꺼
은말이...'
'교실이데아'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중고교 교육제도에 바위를 던진 셈이고, '발해를 꿈꾸며' 같
은 경우는 서태지가 직접 치마를 입고 나오면서 성에 대한 정체성을 파괴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완벽한 마니아로서의 서태지 아이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DMZ 인근 지역~ 발해를 꿈꾸며 뮤비 촬영지!
더욱 재밌는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발매일이 1994년 8월 15일, 광복절이다. 생각해보면 서
태지는 꽤 머리가 좋은 전략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의 음악은 상당히 좋은 평
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뮤지션으로서 일단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전략가라는 이미지는 그가 서태
지와 아이들의 해산을 공식 선언한 그 이후부터 논의되었다. 서울대에서 '서태지의 경제학' 개념이
정식으로 도입된 것만 보아도, 그러한 이미지와 분위기는 결국 이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마지막 퀘
스천 박스임에 틀림 없다.
일본 열도에도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한국어 앨범이어서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논할 앨범, 4집은 사이프러스힐의 래핑 스타일을 잡아낸 '컴백홈'과 여자에게 버림 받은
고통을 이야기한 '필승', 황금만능주의가 하늘에 우뚝 섰을 때에 그 천태만상을 이야기한 '1996, 그들
이 지구를 지배했을때', 가사가 공윤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연주곡으로만 실렸던 '시대유감' 그리고
보드패션을 제대로 유행(특히 뮤직비디오 측면)시키는데 한 몫을 한 'Freestyle'에 이르기까지...
컴백홈 패션~ 거의 스노우보드 패션이라고 보면 된다!
그들의 마지막 앨범도 결국 200만장을 넘겨버렸으니... 신화로 남기에 충분한 이력서가 아닌가 싶다.
그들의 공식 마지막 앨범~ 자켓은 소뼈에 꽃 한 송이.. 그 의미는?
1996년 새해가 밝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를 해버렸다. 지금에 와서 다시 논해 보자면, 은퇴보
다는 해체가 더 맞는 것 같은데... 용어선택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1990년대 한국
의 대중문화를 제대로 색칠해버린 세 남자임이 확실하다. 그 이후의 그들의 인기를 H.O.T가 계승했
고 더욱 넓고 큰 아이돌문화를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 문화의 시초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고, 그래
서 우린 1등의 그들은 기억하고 추억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 모두 많이 말라 보인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한 가장 큰 이유는 양현석의 힙합음악과 서태지의 록음악 사이의 괴리감이
었다. 사실 이 부분은 직접 양군이 인터뷰를 통해 발언한 부분이기도 한데... 안타깝지만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모두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이고, 이제는 해체 이유 또한 우리가 잘 알 수 있으니 얼마나 다
행인가 싶기도 하다.
양현석은 자기가 하고 싶은 랩뮤직을 계속 실현해 나갔다.
우리는 시대의 사회적 특징이나 시대의 역사를 말할 때, 문화 이슈를 꺼내들곤 한다. 아마도 덜 지루
해질 수 있고 더 환호할 수 있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바로 1990년대를 말함에 있어 우리는 '서
태지'라는 화두를 꺼낼 수 있다. 미국이 1980년대를 말함에 있어 '마이클 잭슨'을 꺼낼 수 있듯이....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의 주역, 마이클~ 월트 디즈니 케릭터들 이후로 최고였다!
바로 현재(2008년)에는 태지나 잭슨이나 자주 도마위에서 칼질을 당하곤 한다. 조그마한 틈만 생겨
도 마구자비로 공격을 해댄다. '비판'이라는 미명 아래, '느낌(feel)'이라는 합리성 아래...
옛날 이야기는 고루하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시대를 증명하고 입증할 수 있는 유쾌하고
굵직한 중대 자료임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 일기장에 '서태지와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중고 교과서에도 이제 모습을 드러낸
그 3명의 친구들, 서태지와 아이들을 말이다.
첫댓글 정말 서태지 최고였었죠 아니 지금도 최고에요 ㅎㅎ
지금도 최고인 서태지 전 기다립니다^^ㅎ
내친구 서태지 펜클럽회장했었는뎁..ㅋㅋㅋ;;;
헉, 앨범들 보기만해도 움찔 움찔 ㅎㅎ
서태지와 아이들.. 지금도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