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보름달
최 기 종
퇴근길이었다. 십오야 꽉 찬 달이 동편 하늘가에서 함지박만하게 떠 있다. 혼자 보기 아까워서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쉬고 싶다며 거절했으나 재삼재사 권유하니까 따라 나섰다.
산책 코스를 원산동 고갯길로 잡았다. 우리 아파트 후문에서 창조교회 앞길로 지나서 일신아파트 뒷길로 가면 한적한 고갯길이 나온다. 아내가 시골스럽다며 좋아했던 길이다. 둘이서 가는 산책로는 대개 이 길이었다. 고갯길을 넘어서 원산동 첫들목에 있는 시골밥집에서 저녁 식사도 해 볼 참이었다.
달은 동편 하늘 중반 정도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크기는 조금 작아 졌지만 더 밝아져서 우리의 길을 비추며 앞서간다. 우리가 총총 걸음이면 저도 총총 걸음이고 우리가 멈추면 저도 멈추고 오동나무에 걸리기도 하고 건물 뒷편에 숨기도 하면서 앞장서서 우리를 인도했다.
이렇게 달을 올려다 보면서 걷다 보니까 추위가 가셨다. 움추리며 걷던 아내도 달맞이에 적극 나섰다.
"저렇게 밝은 달에도 음영이 있구만..."
"그렇지. 계수나무도 토끼도 보이는데..."
"달에 무슨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어. 아직도 달나라 살아? 달을 정복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그래도 달나라는 존재하지. 난소공에서 난쟁이도 달나라를 보았잖아?"
"그건 은유된 표현이지. 저기 보이는 달은 그냥 지구의 위성일 뿐이야."
"그래도 각박한 세상인데 달을 달로 보지 말고 꿈으로 보면 좋지 않을까?"
"그건 그래. 갑자기 세상이 우향우해서 친위대들만 넘치고 있으니.."
"달과 함께 가는데 세상 이야기는 빼더라고 잉?"
"자기가 먼저 하고는 뭘 그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에 놀던 달아....... 그 담이 뭐지?"
"저기 저기 저 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
이렇게 달 노래까지 부르면서 걷다보니까 어느새 원산동 고갯길에 들어선다. 예전에는 산정동과 원산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새 도로가 뚤리면서 인적이 뜸한 오솔길이 된 것이다. 왼편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고 오른편으로는 배나무, 감나무, 무화과 밭이 이어져 있었다. 길 양쪽으로 탱자나무가 무성히 자랐다. 우리 내외는 이 쇄락한 길이 좋았다. 꿩이나 비둘기가 날아 오르는 것도 좋았고 나뭇가지에서 새떼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좋았다.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달을 보았다. 이제 달은 어깨동무하듯 오른편에서 따라온다. 옆걸음으로 언덕길 오르기가 힘들다고 아양 부리기도 하고 탱자 울타리에 걸려 징징거리기도 하면서 잘도 따라온다. 아내도 달을 닮았는지 뒤로 쳐진다. 요새 아내 발걸음이 많이도 무디어졌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다리 아프다고 걸음을 멈춘다. 뒤로 처지는 것만 보면 아내나 달이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갯마루에 다다르니 겨울바람이 시원하다. 둘이서 나무토막에 걸터 앉아 숨을 몰아 쉬면서 나도 한물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정도 고갯길을 올랐다고 헐떡이는 걸 보면 다 산 것은 아닌지 뒤돌아 보게 한다. 헐떡이며 발품 팔면서 올라온 고갯길이 가르마처럼 선명하다. 집집이 지붕이며 담장이며 보해양조 공장이 달빛에 쌓여 고요하다.
"이제 내려 갈까?"
아내가 먼저 일어섰다. 내리막길에서 원산동 야경이 휘황찬란하다.
"고은 시인이 그랬지. 오를 때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내려 갈 때는 잘 보인다고.."
"눈 팔지마. 그러다가 발목 삔다구. 밑쪽을 잘 살피라구."
내가 인생이란 뭐라고 고상한 척 하려니까 아내가 된통 쪼았다.
"내 참, 문자 좀 쓰려니까 이렇게 무색을 주어서야."
"나하고 당신하고 뭐 문자 쓸 일 있어. 인생은 미완성이야."
"그렇지! 쓰다가 만 편지지 뭐?"
"웃겨. 당했다고 꼭 복수하는 거야?"
"나사 보통이지. 그냥 달이나 보자고."
달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도 수난이다. 빽빽한 과수 나뭇가지에 가려서 제대로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달이 우리와 숨바꼭질하는 것 같아. 나무 뒤에 숨었다가 얼굴을 디미는 모습이 말이야."
아내가 과수원 나무 사이에서 빛을 뿌리는 달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렁게. 저러면서 세상 끝까지 따라 올 모양이지?"
"맞아. 달이 이제는 뒤에서 따라오네. 우리 저 달을 밥집에까지 데리고 갈까?"
"어떻게 집에까지 데리고 갈 수 있어?"
"그건 간단하지. 밥집에 들어가서 달이 잘 드는 창가에 앉으면 되지."
"그거 말이 되는구만."
반 시간 정도 걸려서 '순두부 시골밥집'에 다달았다. 몇 달전부터 개축하는 것을 보면서 눈여겨 두었는데 오늘에야 첫마수를 하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황토 벽돌과 원목 탁자가 분위기를 살린다. 원목으로 뼈대를 두르고 있어서 아늑하게 느껴진다.
"히야. 따땃해서 그만이다."
아내가 달빛 드리는 길목에 앉으며 좋아한다. 먼저 동동주를 주문하고 두부해물탕을 시켰다.
"우리 건배할까? 자, 건배!"
아내가 기분이 좋아서 겁도 없이 동동주를 마신다.
"그것 많이 마시면 골팬다. 찬찬히 마셔!"
"뭐, 기분 낼 때 내야지. 오늘 달도 좋고 술도 좋고..."
"그러다가 주태백이 된다 잉?"
"달아 달아 주태백이 놀던 달아....그런디 저 달이 이 술잔에 떠야 허는디..."
첫댓글 지난 금요일이 보름이었지요.....지난 금요일 저녁 차안에서 잠시 가족들을 기다리면서 봤었는데요...... 보름달은 커다래서 좋은데 앞산에서 부터 나오는 달님을 밤을 새워 볼 수 있어서 또한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달님처럼 다정하게 웃는모습으로 행복한 저녁시간을 가지셨었나 봅니다. ..... 고맙습니다. ~*__^*
네, 글을 쓰다가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미완성으로 두어서 죄송합니다. 그 때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요.
한편의 산문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으로 보았습니다. 20대에는 모두 한편이라도 시를 쓰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쓰지 못하는 것은 감성이 무디어 지기 때문이지요. 이글을 쓰는 심정은 시인 그대로인 것 같네요.
글을 읽으면 그대로 그림이 연상되는군요...읽고나니 따뜻하네요...
예쁘게 사시는것 같아 저도 행복해 지네요
감사합니다. 아직 미완성 작품이라.. 꼭 발가벗은 몸을 보이는 것 같군요. 어제 자정을 넘겨서 새벽 2시에 귀가하는데 아 글쎄 그 커다란 달이 이즈러져서 반달이 되어서 나를 측은하게 바라 보더라구요.
오늘에야 완성했습니다. 글쎄 오늘은 힘든 하루였어요.
잘 보고갑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