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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제06강 구원사를 연 요셉 : 창세기(5)
- (3) 악을 선으로 바꾸는 길 창세기 45:1-5
오늘은 교재를 읽고 시작합니다. 54페이지 생각을 여는 주제 읽어보겠습니다. 읽으면서 속으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일생에~” 시작!
“나의 일생에 시련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까? 야곱의 시련과 요셉의 시련은 어떻게 다릅니까? 요셉의 일생과 예수님의 일생 가운데서 서로 연결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나의 삶 속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체험하십니까?”
자,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연이서 일어나는 시련들, 간신히 버텨내고 견뎌냈다 싶으면 또다시 터지는 사건들, 다른 외부의 문제들을 막아내느라 신경쓰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을 잘 알아주려니 했던 사람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이번 일들만 잘 해결되고 나면 그때는 정말 잘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에게서, 특별히 배우자와 자녀들에게서 문제가 터져 나오고, 떨어져 잘 계시던 부모님에게도 문제가 일어나고 하면, 여러분,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그리고 그러한 순간을 주신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때도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시냐는 것입니다. 저, 욥의 아내처럼, 견디지 말고, 버티지 말고, “하나님을 콱 욕하고 죽으라”는 말이 들리는 듯 하고, 내 마음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런 상황에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성경을 펴도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아무런 답도 주지 않으시는 것만 같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한 나의 삶속에,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오히려 내가 베푼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만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신지요? 나는 정말 있는 것 없는 것 쪼개서, 내 쓸 것 미루고 먼저 돕고 섬기고 나누어주었건만, 철썩 같이 약속해놓고, 상황이 달라졌다고 입을 싹 씻어버리는 사람들, 감사도 없고 오히려 도와주고 희생한 나를 헐뜯고 비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돌아 들려오는 상황들이 더 많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한 피해는 하나도 어김없이 내가 다 치르고 감당해야하고, 아니 여지껏 그때의 일 때문에 나는 친구들 다 잃어버리고 여전히 사람들을 피해다니고 숨어지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또한 저 악한 사람의 거짓말과 해꼬지로 말미암아 나는 내 인생의 커리어를 잃어버리고, 내 명예와 자리를 다 잃어버리고 오늘도 이리 저리 밑바닥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와 잘못이 선하게 되돌아온 경우, 혹은 상대방이 나에게 악하게 행한 일들이 내게 유익이 되는 일로 돌아온 경우, 아무리 기억해보려고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오늘 읽으신 이 생각을 여는 주제는, 날도 더운데 우리의 화를 돋구려고 쓴 주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야곱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과 저 열일곱 살 소년의 눈을 비교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와 저 열일곱살 소년의 처지를 그려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잊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오늘 저들의 구원을 위해 특별히 선택하시고 보내셨고 섭리하셨음을 고백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과정 중에 계십니다. 그래서 아직 시련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내가 베푼 선이 잊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성실함이 정직함이 빛바랜 일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내가 꿈꾸던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내가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멈추시면 안됩니다. 지금 콱 욕하고 포기하시면 안됩니다. 조금 기다리시면, 오늘 요셉처럼 조금 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시면, 조금 더 성실함으로 진실함으로 정직함으로 서시면,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으며 준비하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해야할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다 마쳐놓고 이제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보면 두 부류의 군인이 나누어집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하루의 일과를 다하면, 오늘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다 했다고 피곤하다고 자고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면 그때부터 자기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동을 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지면, 부대장이 도와줍니다. 그 자기꿈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더 잘 할 수 있게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군인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체 인간상의 축소판인 것이지요? 1년 6개월 군대 다녀와서 부쩍 성장하여 이전과 다른 삶을 달려가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년 6개월 다녀와서 오히려 더 퇴보한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자기가 해야되는 주어진 일과를 다하고 나면 그냥 뻗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일과를 마치고 오늘 자기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니, 그 시간도 하루를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보내었기에 얼마 안되지만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시간을 자기의 성장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런 두 부류의 사람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랑 살고 싶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누구랑 친구를 하고 싶으시겠습니까? 바꿔 질문해볼까요? 오늘 우리는 누군가가 친구를 하고 싶은 사람입니까? 함께 살고 싶은 사람입니까? 누군가가 나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걸어볼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참 게으르다, 참 자기 할 일도 못한다. 늘 매사에 핑계와 이유만 늘어놓는다. 불평이 불만이 오늘도 가득 차 있다.”
친구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친구하자고 다가오면 몸서리치며 뒤로 몸을 빼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설교에서 이런 말씀 많이 들으셨지요? 보디발의 집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인정작군의 모든 주특기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왕의 친위대의 모든 살림을 배우는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오는 왕의 죄수들을 돌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만의 지식과 노하우와 실수와 장점들 모두를 다 듣고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채색옷을 입고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그 시간을 하나님은 요셉에게 충분히 주셨던 것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요셉의 성실함이 요셉의 선함이 잊혀져가는 소모되고 낭비되는 시간처럼 보였지만, 아뇨, 요셉은 그곳에서 실력을 쌓고, 강골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한탄만하며 남탓만 하며 세월을 보내는 죄수들, 결국 복직하지 못하고 목이 달아나는 것을, 오늘도 다시금 왕의 옆에 설 시간을 그리며, 몸가짐에서부터 모든 것을 준비하고 관리해나가고 자기에게 부족했던 것을 부던히 고치고 준비했던 죄수들, 결국 다시금 왕 앞에 그의 진실함을 인정받고 복직하게 되고 자리를 얻게 되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좋은 것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맹모처럼 세 번이나 이사시켜주실 능력있는 엄마를 가지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훈련의 기회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에게서 부지런히 배우셔야 합니다. 티모르가 저에게 와서 하는 말이 기특한 것이 목사님께 기타 배우고 싶어요. 목사님께 수학 배우고 싶어요.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기회가 아닙니까? 기회를 붙드시고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마침내 바로왕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입이 머뭇거리며 할 말이 없는 우리가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면 오늘 꿈을 해몽하고, 문제를 예견하고, 현실적이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는 오늘도 더욱 요셉이 되시길 바랍니다.
링 아래에서 내가 아무리 챔피언이라고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한 번 올라간 링 위에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는 더욱 챙피한 사람, 망신당하는 사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링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다시 얻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아니더라도 오늘도 그곳에 서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하고 소원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를 보내신 곳, 그곳이 감옥이든, 가정부의 자리든, 그 곳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내게 맡겨진 일과만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있어 다른 사람이 두 번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더욱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요셉의 삶은 나중에 요셉이 깨달은 것처럼, 선구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어느 분이 일전에 저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을 총 동원하시고 이용하셔서 요셉을 세워내신 것이지요. 교재는 이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7쪽 중간 단락 아래에서 다섯 번째 줄, “요셉이 죽임을 당할 뻔~” 시작!
“요셉이 죽임을 당할 뻔 하다가 구덩이에 던져지고, 결국 애굽으로 팔려간 것은 단지 형들의 미움과 증오의 부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요셉을 먼저 보낸 것입니다. 야곱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히브리 민족 전체의 구원 사건인 출애굽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의 세밀한 보내심 속에 있습니다. 놀라운 계획을 위한 선구자로 세워져 가시는 중입니다. 일련의 모든 시련들이 악한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악한 사람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바라옵기는 여러분이 오늘 당하는 어렵고 힘들고 아픈 그 고난이 그저 고난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고난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저 요셉처럼 그래서 마침내 저 예수님처럼 모두를 용서하실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인도하심을 신뢰하시며, 오늘도 모든 자리에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서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59쪽 성찰과 나눔도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편협하고~” 시작!
“나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나의 잘못은 없지만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고난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으로써의 고난과 시련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시련 가운데 보여준 요셉의 인내는 성도가 본받을 만합니다. 신앙의 눈을 끄면 나의 삶의 주변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가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고난이 혼재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고난, 오늘 요셉도 이 두 가지가 혼재된 모습이었지요? 요셉을 기억하시면서, 오늘도 우리의 자리를 잘 지키시고, 위치보다 관계임을 기억하시며 성실함으로 채워내시길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손길을 가득하게 느끼고 증언하는,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는 이 시대 요셉 같은 사람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게 되는, 오늘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악한 일들을 없던 일로 해주게 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45:1-2)
요셉이 용서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섭리라고 여겼기 때문에만은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겠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형들과의 만남 두 번에 걸쳐서 오늘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저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동생을 팔아넘기고 죽이려고 했던 형인데, 이제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죽겠다고 이야기하는 형이 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서 오늘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형 앞에서 오늘 요셉은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며 자신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17살에 동생을 팔아넘겨, 30살(창41:46)에 총리대신이 되고 풍년 7년, 흉년 2년차 올해 39살이 된 요셉 앞에 22년 전의 일을 뉘우쳤던 것이지요.
자, 그곳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형들과의 만남에서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지요? 그러자 그 때 동생의 이야기를 하는 형들에게 동생을 데려올 것을 요구하지요? 왜 그때 동생 베냐민은 함께 오질 않았지요? 아버지가 재난이 미칠까 두려워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은 죽었다고 생각했고, 이제 하나 남은 그것마저 잃어버릴까 야곱이 끼고 내보내질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일로 요셉은 형들을 삼일을 가두었고, 처음에는 한 사람만 가서 동생을 데려오라고 했다가, 사흘 뒤 이제 시므온만 남겨두고 나머지 9명이 올라가서 동생 베냐민을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탐으로 알고 시므온을 종 삼고 죽여버리겠다 뭐 그랬던 것입니다. 그때, 바로 그때, 형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통역을 세워둔 상태에서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 히브리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42:21-22)
뭐 르우벤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생략합니다. 오늘 저렇게 동생에게 행한 일, 아직도 22년이나 지났지만, 저 형들에게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철없던 동생, 철없던 자기들의 모습을 뉘우쳤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했다구요. 요셉이?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창42:24)
형들이 입으로 범죄하였도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괴로움을 당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요셉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울고 오는 것입니다. 형들이 그래도 나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구나. 그치요?
여러분,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행한 일에 대하여, 미안해 하고 있음을 잘 표현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하나도 잘못한게 없어! 다 니가 그때 그렇게 행동했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그렇게만 이야기하지 마시고, 그렇게밖에 이야기 하지 못하는 내가 되지 마시고, 더 늦기 전에 “내가 그때 일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고 미안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이 말을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아니면 직접이라도 꼭 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용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구약성경 여러분 잘 아시는 역대하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오늘 야곱의 가정에게 딱 맞는 말씀이지요? 7장 13-14절입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3-14)
오늘 그들이 회개하였을 때, 요셉이 듣고 어떤 이야기까지 해요?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창42:34-35)
정탐이 아닌 것만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애굽과 교역하고 소통하고 무역하는 권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애굽과의 관계를 활짝 열어주겠다고 애굽에서 저들을 받아주고 인정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회개의 능력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로 미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시길 원합니다. 언제? 오늘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고, 메뚜기가 토지소산을 먹고, 전염병이 돌고 있는 시련에 시련이 가득한 오늘입니다. 무엇을? 아무도 모르는 22년 묵은 죄까지 다 쏟아내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애굽과 무역할 수 있게 되는 사업의 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번 확인하고 넘어갈까요? 요한일서 신약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119”라 불리우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자, 그랬던 그들이 가나안땅으로 돌아갑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요, 각자 자루에 준비했던 돈이 다시 다 들어있던 것을 보면서 올라갔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정탐이 아님을 증언하고 또다시 양식을 구해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움직이질 않지요? 뭐라고 해요?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창42:36,38)
그때 그 야곱의 완강함을 설득해냈던 것이 바로 유다입니다. 그 유다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43:8-9)
그랬더니 야곱이 베냐민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이야기를 합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3-14)
어떻게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게 되는 것일까요? 굶어 죽게 생겼으니 보내는 것일까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요? 아닙니다. 야곱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유다의 고백, 그냥 그것만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하나 비교해 보겠습니다. 유다가 이야기하기 전에 장자인 르우벤도 베냐민을 데리고 가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야곱이 콧방귀도 끼지 않지요? 무슨 차이가 있는 지 함께 읽으시며 찾아보시겠습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창42:37-38)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유다는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고 합니다. 베냐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그 피값을 자기가 감당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뭐라고 해요?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잃은 것도 속상한데 손주를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손주에게서 피값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야곱이시라면 누구에게 베냐민을 맡기시겠습니까?
진정한 회개는, 단순한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포기”(self-denial)입니다. 내 잘못에 대해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처분에 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오늘 지난날 동생에게 잘못한 모든 일, 그리고 오늘 저 베냐민에게 찾아온 시련, 이 모든 것을 위해 유다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버지 앞에서 한 이 약속은 요셉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지요?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창43:29-30)
베냐민과 함께 다시 애굽으로 내려온 형들을 확인한 요셉은, 오늘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나이순으로 형들을 앉히고 베냐민에게는 먹을 것을 다섯 배를 줍니다. 그리곤 다시금 형들을 시험대에 올리지요? 오늘 그가 쓰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두고 그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곤 이내 사환을 보내 그들을 따라 잡았던 것이지요.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창44:5-6) 그랬더니 뭐라고 하지요?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창44:7-9)
그렇게 애굽으로 다시 되돌아온 유다와 요셉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창44:16-17)
그때 유다가 고백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야곱에게 약조했던 내용이지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창44:30-34)
여러분 여기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요셉으로 하여금 더 이상 형들을 이방인으로 남겨둘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바로의 궁중 모든 사람에게 들리도록 요셉이 울었던 것입니다. 아마 22년 만에 그렇게 울기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증언이 무엇입니까? 깨어진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서 참회는 바로 이 자기부정, 그리고 대속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기부정, 대속으로 나타나는 참회로부터 화해의 길이 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유다의 참회는, 유다의 대속적인 희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종(유다)으로 그 아이(베냐민)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44:33)
그러나 보십시오. 이 놀라운 화해는 ‘참회’와 ‘대속’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참회’와 ‘대속’이 화해의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트너의 용납과 용서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참회와 대속에 상대방의 용서의 도장이 찍혀야 화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참회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대속했다고 값을 지불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참회와 대속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참회와 대속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상대방이 인정할 때까지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 참회하고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아내가 인정하는 만큼, 남편이 인정하는 만큼, 상대방이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을 만큼, 그 때까지 참회하고 대속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간적인 ‘정’과 ‘그리움’ 때문에 화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요셉은 정과 그리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도 화해하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형들의 입장에 계시면 참회하시길 바랍니다. 값을 지불하는 속죄를 기꺼이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두 아들을 죽이소서가 아닙니다. 내게서 피값을 찾으소서입니다. 한군데 읽어볼까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입니다. 양의 피, 두 아들의 피도 아닙니다. 이제는 내 피로 사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정한 참회로 나아가 저 요셉의 용서를 선언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동생의 입장에 계시면, 오늘 저 형들의 참회와 대속의 결단을 믿어주시고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동안 울지 못했던 울음도 울으시고,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관계도 아름답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형들을 받아주니 동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들을 받아주니, 오늘 아버지를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를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을 멋지게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화해의 사람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한 번 더 요셉이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행해야할 진정한 복수가 어떤 것인지 한 번 더 살펴보고 요셉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정과 그리움을 넘어선 요셉이 용서하는 이유, 특별히 요셉의 입에서 고백되고 있는 특별한 시각을, 예습하시면서 다시 한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오랜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아마 그 답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 더 바라옵기는 용서하시되, 화해하시되, 여러분의 용서가, 저 형들이 했던 것과 같은 의심스러운 용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형들 때문에 한번 더 웁니다. 그때의 본문을 함께 읽어보시지요? 50장 15-17절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50:15-17)
여러분, 우리의 용서가 정말로 용서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용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용서했다고 해놓고 자꾸만 옛날 일을 끄집어 내시면 안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마 다시 복수할거야, 지금은 아버지 때문에 용서한 것처럼 연기하는 것일거야.” 이런 믿음직하지 못한 용서는 용서가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바뀌고 번복되는 용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용서처럼, 상황이 달라져도 바뀌지 않고 번복되지 않는 용서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용서받은 사람들이 용서받았음에도 늘 불안해하고 믿지 못하는 용서가 되지 않도록, 용서 이후 여러분의 태도와 상대방을 대하는 모습이 더욱 분명하시고 변함없으시길 또한 축복합니다.
또한 용서받은 우리도 또 다시 용서한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저들로 하여금 “괜히 용서해줬어” 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용서받은 자답게 바르고 정직하게 동시에 용서 받은만큼 용서하며 사실 수 있는 우리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으나 일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해 용서가 번복되어 옥에 갇혔던 사람(마18장)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용서하기도 잘~ 하시고, 용서받기도 잘~ 하시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시간 예습
성경 45장~50장
교재 57-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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