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최 영 장군 사당(漢陽 崔 瑩 將軍 祠堂)
이태조가 즉위한지 3 년(1394) 10 월에 한양으로 천도하고 5 년에
최 영 장군에게 시호(諡號)를 무민공(武愍公)이라고 하사하였다.
그리고 도형입사(圖形立祠 : 사당을 짓고 초상화를 그려 모시는것)
하라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에 한양에 있는 관동(館洞 : 관골)에다
사당을 짓고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모셨다.(1)
현재는 관동의 사당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알려진 바로는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명륜 3 가(구관동) 성균관이 있는 부근의 마을
이라 하는데 자세히는 관동노비촌(館洞奴婢村)이나 그 인근이라
사료된다.
관동은 관골, 관사람이라고 하는데 성균관(成均館)이 있다하여
관동으로 불렀다. 관사람말은 성균관의 각종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
들이 주로 산다 해서 얻은 별칭이다.
그 관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려 충열왕때 명신이며 유학자인 회헌
안유 후 안향(晦軒 安諭 後 安珦 : 1243-1306)이 노비(奴婢) 100 사람
을 바치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한양에 천도하자 이곳에 성균관을 지었다.
(태조 6 년, 1397) 고려시대의 유맥(儒脈)을 이었던 안유의 후손도
한양으로 이사 했고 성균관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전하자 순흥안씨
안유의 노비 100 명의 후손들도 한양 성균관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이들은 옛날 그대로 성균관의 제사일을 돌보며 살게 하였다. 그 후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한때 1 천여명에 이르렀으며 관동은 대대로
물리는 순흥안씨 노비문서 없이는 들어가 살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들은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성현을 모시는 지엄한 일을 한다하여
긍지도 대단하였다. 이 관동 노비들은 구심(求心)시키는 행사가 바로
그들 조상의 상전인 안유의 제사이다. 9 월 20 일 상전 제삿날이면
각기 돈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서도 돈과 베를 보조하여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 이날 영남 호남의 선비들 까지도 멀리서 참여했으니
대단한 대동제(大同祭)였음을 알 수 있다. 영남 호남 선비나 관원들이
한양에 올라오면 모두 이들 집에서 묵었다 한다.
조선왕조는 제사(祭祀)정치를 하였다. 그 제사의 제수장만이며 진행
이며 모든 치닥꺼리를 제례(祭禮)에 투철한 관동 노비들에게 담당
시켰다. 제사때 마다 신명에게 올리는 희생물인 소, 돼지 잡는 일도
국법으로 이들에게 주어졌다. 선농탕(先農湯 : 설농탕)을 팔기 시작한
것도 우리나라 설농탕의 원조이다.(2)
1910 년 대한매일신보에 단제 신채호(丹齊 申采浩 1880-1936)선생께
서 쓴 글을 연재한 "동국제일영걸최도통전(東國第一英傑崔都統傳)" 에 보
면<내가 연전에 관골근처에 지나다가 동네 가운데에 보였다 안보였다
(隱現)하는 단청(丹靑)한 적은 사당집이 보이거늘 그 동리사람에게
물으니 대답 하되 최장군대감이라 하기로 내가 그 사당문을 열고 그
화상(畵像)께 절을 하고 보니 그 광채 있는 두 눈이 오히려 요동(遼東)
을 향하여 흘겨 보는 듯 하더라.
내가 숨을 쉬며 탄식(歎息)하며 말하되 아깝도다 공(公)이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가 무슨 연고로 공이 여기에 있느뇨 당년(當年 : 그해)에
필마단창(匹馬單槍 : 한필의 말과 한자루의 창)으로 동정서벌(東征西伐 :
이리저리로 여러나라를 정벌함)하던 기개(氣槪)는 어데로 가고 이제
와서는 한둘의 요망한 무당(巫女)이 병 낫기를 빌고 복을 빌게하니
공의 신령(神靈)이 있으면 어떠한 감정이 날까 ?
그러나 우리 국민이 미신(迷神)으로 공을 숭배치 말고 정대(正大)한
마음으로 공을 숭배하며 사복(私福)으로 공에게 빌지 말고 공복(公福)
으로 공께 빌면 가히 우리 국민의 고통을 면하고 행복을 얻을 것이다.
어둠컴컴한 젖은 티와 먼지에 공의 사적(事蹟)이 오래 묻친 것이
내가 통한(痛恨)이 여기는 바다 그러므로 조야(朝野)에 감추어진 사기
(史記)를 뒤지며 여러 백성들에게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를(閭巷)
거두어 공의 심사(心事)를 그려내고자 하오니 무릇 우리 동국에 제일
영걸최도통전을 읽는 혈기 있는 국민들이여 ! > 라고 하였다.(3)
이 글로 미루어 볼 때 이태조의 명에 의하여 사당을 지은 것과 관동
의 동리 안에 사당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관동의 최영장군의 사당이
이조 500년간 보존되었다고 입증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사당이 없는
데 이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 강점기때 없어진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1) 국승(國乘), 족보(族譜)
(2) 한국땅이름 큰 사전 P 464 (1991. 12. 3 발행 한글학회)
(3) 대한매일신보(1910. 3. 8 - 9 일자) 동국제일영걸 최도통전.
조선일보(1991. 5. 4일자) 600 년 서울 성균관곁 관동노비촌
2008. 9. 5
동주최씨 대종회 청주지회 최 재 형(崔 在 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