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감상문
문과대학 사회학과 2020130557 홍단비
존 로크는 인간의 자아에 있어서 몸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정신적인 경험이 개별 인격의 동일성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 <더 파더>는 인지저하증을 앓고 있는 앤소니의 시점에서 기억의 파편화와 그로 인한 고립감, 불안감, 나아가 자아의 불안정성을 생생히 그려내며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
영화는 이와 같은 기억의 파편화를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체험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로는 플롯의 해체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앤소니의 기억을 조각 내어 흩뿌린다. 일관된 시간의 흐름 속에 극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계속해서 넘나들며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둘째로는 공간의 제한이다. 영화는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만 주로 진행된다. 앤소니는 집 안에서 방과 방 사이를 이동하며, 그가 이동할 때 기억도 함께 뒤섞인다. 계속해서 방에 놓인 가구와 방의 구조, 배치가 미묘하게 바뀌며 그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공간 전반에 있어 내리꽂는 듯한 직선을 주로 배치함으로써 감독은 방을 마치 수많은 창살에 둘러싸인 감옥과 같이 나타내보인다. 그렇게 방이라는 제한된 공간은 관객들에게 인지저하증이 어떻게 개인의 세계에 대한 통제를 잃게 하고, 불안정성을 증폭하며, 그 범위를 제한하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셋째로는 음악을 통한 은유이다. “What power art thou?”, “Casta Diva”, “Je crois entendre encore”와 같은 다양한 아리아를 사용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그리움, 혼란,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더불어, 음악이 갑작스레 중단되거나 혹은 이전에 사용된 음악을 반복하여 나타나게 함으로써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비선형적인 플롯을 더욱 강화한다. 이처럼 시간적, 공간적 재구성 및 청각적 표현을 통하여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인지저하증을 공감각적으로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인지저하증을 다루는 영화는 인지저하증 환자의 주변을 다루기 마련이다. 그렇게 인지저하증이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파괴적인 질병인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인지저하증이 환자 본인에게도 얼마나 파괴적인 질병일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영화 <더 파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앤소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홀로 아리아를 감상할 만큼 교양 있고 예술을 즐기던 그도 후에는 엄마를 찾으며 아이처럼 울게 되는 병임을 보여줌으로써, 인지저하증이 얼마나 파괴적인 질병인지 느끼게 한다. 영화의 후반부 나타나는 깨진 얼굴 조각상처럼 앤소니는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삶과 자아가 파편화되어 혼란과 고통에 잠식된다. 그렇기에 인지저하증은 주변인들의 삶 또한 외롭게 만드는 병이지만 동시에 환자 자신에게 또한, 자아가 파괴됨으로써 세상에 홀로 떨어진듯한 극심한 외로움을 안겨주는 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의 마지막이 외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실일 것이다. 그러한 마지막이 두려워지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하고 그 삶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되려 그렇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의미가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눈 깜빡할 새에 우리에게 그러한 마지막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세상에 머무는 것이 잠시일 뿐이라도, 영화에서 말하듯 화창한 날은 길지 않으니 그 날을 온전히 소중하게 만끽할 수 있는 마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