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초기 미술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 성 피에트로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카타콤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 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2) 채색사본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를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 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장으로 한정된 화면 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3) 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잔틴미술<Byzantine art>
5∼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
단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敎義)·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보통 이것을 3기로 나누며,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건축】 비잔틴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千一柱]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司祭)를 위한 제실(祭室) 및 내진(內陣)과, 신도(信徒)를 위한 신랑(身廊)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縱長式: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半圓狀)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원 모양의 지붕을 씌운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天界)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洗禮堂), 묘당(廟堂),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主廊)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前室:세례 지원자용)과 앞뜰(일반인용)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6세기 수도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당건축의 상징성은 십자가를 본뜬 평면 설계에서도 보인다. 바실리카에서는 제실 앞쪽의 한 구획이 좌우로 뻗어 익랑(翼廊)을 형성하고, 라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보이며(단지 이것은 유럽에서 특히 현저하다), 집중식에서는 사방에 같은 길이의 가지를 뻗게 하여 그리스 십자가를 본뜬 것이 통례이다. 바실리카식이 비잔틴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한 데 비하여 집중식은 그리스 십자형의 설계를 고집하면서 여러 유형을 발달시켜 나갔다.
【장식미술】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聖像)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 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예술에 가깝다.
4) 모자이크
최초 황금시대의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노플보다는 오히려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변방이었던 라벤나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을 성 비탈레 성당의 제단 양쪽 벽면에 있는 한 쌍의 모자이크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547년경, 이탈리아의 라벤나, 성비탈레 성당) 에서 융성한 비잔틴 제국의 배경에 이루어진 화려한 유림 모자이크의 현란함을 맛볼 수 있다. 신하와 성직자 및 시녀들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비 테오도라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은 새로운 인간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726년에 이르러서 황제의 성상금지령이 발단이 되어 약 1세기동안 비잔틴 회화와 모자이크의 발달은 중단되었다. 제 2황금시대(850-1200)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모자이크에 나타난 정신화 된 인간미의 이상과 휼륭하게 조화된 고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책형(11C, 다프니 수도원)은 1기 황금시대의 모자이크에서 강조된 영원성과 신성에 고전미술의 인간성과 육체적 우아함이 덧붙여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전주의의 심오한 일면은 인간적 감정의 고귀함에 있으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이스 미술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억제되고 고귀한 인간적 고통의 표현이다. 이콘icon 즉 패널에 그려진 성화상은 제2황금 시대에 수많이 제작되고 숭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성상파괴 논쟁 이전으로 소급된다.
성모자에서 보이는 미의 이념은 이전의 고전시대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데, 밀랍화 수법과 명암에 의한 모델링은 로마 초상화와의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모습의 묘사에서 천상적인 미의 이상과 조소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또한 기하학적 화면구성에서 연유하는 강한 인상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콘은 에술의 창의성보다는 장인적 기능에 더 의존하는 것이었다. 옥좌의 서모자와 같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후면의 광휘에서 우리는 당시의 작품이 강조했던 바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