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오키프는 미국 위스콘신주 선프레리(Sun Prairie)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1904년 시카고 미술학교, 1907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고, 잠시 동안 상업미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어쩌면 이때까지 그녀의 인생은 미술을 공부한 대개의 평범한 여성들이 밟아가는 그런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1916년 사진작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미국의 사진작가, 1864~1946)를 만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불과 30세 무렵이었고, 스티글리츠는 52세였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예술을 모방할게 아니라 당당히 예술을 파먹고 살아야한다' 며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와 사진분리파 운동을 주장하며 당대 사진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905년부터 뉴욕에 '291갤러리'를 열고 유럽의 선진적인 거장들 -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느 등 - 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1916년의 어느날 조지아 오키프의 친구였던 아니타 폴리처(Anita Pollitzer)가 그녀 몰래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을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오키프의 작품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티글리츠가 이름도 낯선 이 여인의 작품들을 '291화랑'의 가장 좋은 장소에 전시한 것은 어쩌면 모험이었지만 이 모험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오키프는 당장 그에게 달려가 자신의 그림들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스티글리츠는 연약한 몸매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며 항의하는 그녀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꼈고 오히려 그녀를 설득하여 그림을 계속하여 전시하도록 한다.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녀의 그림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기에 이른다. 결국 스티글리츠에 의해 평단에 소개된 그녀는 이후 생애의 전환점을 이루어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업무적 만남과 업무를 가장한 만남, 공식적인 밀회를 거치며 23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1924년 결혼하기에 이른다. 스티글리츠는 전처와 이혼하고 오키프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스티글리츠는 사진집인 <조지아 오키프 : 포트리트(Georgia O'Keeffe:A Portrait)>를 촬영하기에 이른다. 스티글리츠는 천여 점에 이르는 조지아 오키프의 포트리트 사진과 누드 사진을 남겼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부인이자 미국의 대표적 표현주의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를 1920년대부터 사진에 담았다. 그는 오키프를 집이나 스튜디오 그리고 그녀가 머물고 있던 뉴멕시코 등지에서 누드를 비롯 초상사진으로 그녀의 일상적인 삶을 기록하였다. 사진은 이전에 유행하던 초상화만 몰아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던 누드화와 성애(性愛)화의 몰락을 가져왔다. 사진의 탄생이래 20세기 초기 인간의 몸을 탐구한 많은 사진들은 이미 19세기에 유행했던 스타일에 열중하였다. 사진은 여성의 이중적인 역할 즉 남성의 독점적인 시선과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으로 묘사했다. 훔쳐보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앵글에 담는 경향이 지속되었다.
스티글리츠가 보여준 오키프의 사진들은“비록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시대에 스티글리츠가 여성의 표현 양식을 연구한 것이지만 오키프의 사진화된 이미지는 인간의 형태(Human Form)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뚜렷이 구별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예술혼을 불태우는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고,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때때로 작품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가 특히, <꽃>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함, 예리함과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했다. 사진비평가 자네트 말콤은 오키프의 포트레이트 작품들에 대해서 '엄숙하고 섬뜩하며 수수께끼 같은, 젊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과 이상하고 음침하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라고 말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예술가로서의 조지아 오키프와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예술성에 대해 때로는 남편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진작가로서 기록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리아 칼라스와 메네기니 부부나,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부부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조지아 오키프의 관계는 화가로서의 명성과 존경,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의 상호존중과 사랑 속에서 서로 대등하게 지속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단단한 결속을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90세가 넘어선 조지아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포트리트 작업들을 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프레드가 날 찍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물 세살 정도였을 때부터였다. 내 사진을 그의 사진전에 처음으로 전시한 것은 앤더슨 갤러리에서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고 나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그가 날 찍은 것처럼 자신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를 찍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하도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알프레드가 그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들 사진을 날 찍듯이 찍으려면 얼마나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실들을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그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1938년경
1946년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였던 스티글리츠가 죽자 조지아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떠나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은 그녀가 1917년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그녀는 이 곳의 풍경에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후 1929년부터 여름을 뉴멕시코에서 나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하여 1986년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조지아 오키프가 거주하던 뉴멕시코의 집
조지아 오키프는 이 곳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많은 물건들을 자기 작품에 즐겨 묘사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뉴 멕시코의 특이한 바위들과 햇빛에 말끔히 육탈(肉脫)된 동물의 뼈·해골·뿔 등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애비큐와 고스트 랜치 목장의 저택을 이런 ‘예술품’들로 장식했고, 계속해서 이들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이런 수집품들은 오키프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키프는 무엇이건 간에 버리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는데, 오키프는 이들은 각기 모양과 색깔 등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했다고 한다.
소의 머리뼈와 조지아 오키프, 1931년
그녀의 작품 세계는 꿈의 땅으로 상징되던 미국이란 신세계를 등지고, 사막과 하늘이 맞닿은 오지와 평원과 하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전화는 물론 전기와 수도 시설조차 없는 문명의 변경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조지아 오키프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몸짓이나 페미니즘적인 행동을 두드러지게 한 적은 없다. 또한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스티글리츠와의 관계에 묻혀 뒷전이 되거나 그녀의 그림에 대한 성적인 선입견들로 인해 왜곡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조지아 오키프는 화가로서보다는 여성으로 더 많은 관심을 끌었고, 간혹 그녀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가십처럼 이야기되고는 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도 사인을 하느냐고 반문하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서도(1986년) 다시 한 번 세간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작업한 모든 작품들과 재산을 자신의 조수이자 친구였던 후앙 해밀턴(Juan Hamilton)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후일 해밀턴의 부인인 안나 마리는 그녀의 수집품과 책, 옷 등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한다.
아비키우의 조지아 오키프 작업실, 1960년
조지아 오키프는 살아 생전에 이미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화가로서 평가받았고, 포드와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유와 예술 훈장을 받았으며 수많은 명문 대학에서 그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남성이 말하는 모든 여성성에는 이미 성적인 편견이 녹아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혐의가 드리워진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도 남성이므로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표현하려는 여성이 입을 열어 자신의 삶과 경험을 말하는 것, 말 해버리는 것, 표현해버리는 것은 그러한 말하기에 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통념과 거부감과 부자연스러움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일이고, 일종의 반역에 비견되는 일이기조차 하다. 안니 르끌렉은 여성이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자기 고유의 말을 하려는 모든 여자는 우선 여성을 창조해야 하는 이 엄청난 긴급성을 피할 수 없다. 억압적이지 않은 말을 창조하는 것. 말을 끊이지 않고 말문을 트이게 하는 그런 말을 만들어 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여성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것은 성을 도덕적 판단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전통에서나, 그 이후 과학의 대상으로 설정했던 경우에 공통적으로 여성에 대한 논의가 도덕적·윤리적 강령의 차원에 머물렀던 경우에 그 판단의 근거를 제시한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들은 남성들이고, 이들은 철저히 남성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여성들을 객체화하고 이를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선포했고, 공정해야 할 과학도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종속된 존재로 표현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뉴멕시코의 고스트 랜치에서, 1937년
오키프가 화가로서 입문하고 명성을 얻는 과정에서 291화랑의 작품들을 거두어 주길 바랬던 까닭은 어쩌면 이렇게 여성으로서 자기의 말을 갖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 이전의 많은 여성 화가들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던 점을 고려해볼 때 조지아 오키프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에 대한 반항은 아니었을까? 오키프는 꽃을 즐겨 그렸는데 많은 비평가들이 이들 사이에서 여성과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찾으려고 했다. 오키프 자신은 그러한 연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강조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러면서 이 여성화가는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사람들은 왜 풍경화에서 사물들을 실제보다 작게 그리느냐고 묻지는 않으면서, 나에게는 꽃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가? Were I to paint the same flower so small, no one would look at them... So I thought I'll make them big like the huge buildings going up. People will be startled; they'll have to look at them and they did." 사람들은 여성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사물에 의문을 품는지도 모른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른다.
90세의 조지아 오키프, 1977년
그녀의 그림들은 주로 짐승의 두개골,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 조개 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그린 것과 도시에 거대하게 솟아오른 마천루 빌딩들을 그린 것들이 있다. 꽃과 식물의 기관, 산과 같이 자연을 묘사한 작품들은 율동적인 윤곽선과 탐미적인 시선들이 느껴지고 색채도 화려한 반면에 짐승의 두개골, 뼈, 도시의 빌딩을 묘사하는 그림들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일반적인 해석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도심의 하늘을 찢고 높이 솟아오른 빌딩이 거대한 남근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녀의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알아보기 어렵고 추상적인 작품들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일상에 늘 마주치는 사물들이지만 가까이 접근하여 표현함으로써 생물학적인 형태에 추상미를 선사하고 때로는 신비스럽고 몽환적이고 상징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오키프는 자연의 원만한 선과 윤곽, 화려한 색채를 통해 자연으로 치환되는 여성성을, 황량한 뼈와 도심의 마천루들을 통해 황폐한 남성성의 사회를 표현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조지아 오키프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뒤에도 남편의 성(性)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결혼전 성을 그대로 사용했고,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후기 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그렸고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검은 붓꽃 Black Iris》(1926),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Cow's Skull, Red, White and Blue》 (1931) 등이 있다. 자서전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가 1976년 발간되었다.‘조지아 오키프 미술관’도 한 독지가 부부의 주도로 1997년 7월 문을 열었다.
90세의 조지아 오키프, 뉴멕시코 고스트 렌치에서, 1977년
출처 http://www.picturebook-illust.com/artist/010_okeeffe.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