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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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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집에 갑니다. 무엇에 쫓겨선 지 마음에 넉넉함을 두지 못해, 년중 명절 때 2-3번 정도 가보는 고향. 그래도 언제나 어릴 적의 내 삶이 있는 '고향'은 늘 설레임과 따뜻함, 그리고 가슴 싸한 추억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이제는 상당히 '눈에 띠네'가 된 아내(저희 집사람은 결혼 12년 만에 가진 생명을 안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신비입니다.)와 함께 이것저것(생협 물품들- 천연 액상스프 3병, 새우육젓, 생일을 맞은 두 여동생의 선물과 어머님, 제수씨의 선물, 그리고 아버님 드실 것들)을 챙깁니다. 애틋한 그리움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수원역까지, 수원역에서 익산 역까지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아내는 참으로 오랜만에 '둘이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입니다. 연신 들뜬 목소리와 웃음 띤 얼굴로 제게 말을 건넵니다. 그래 늘 그렇게 아내에게 빚지고 사는 마음입니다.
익산에 도착하여 아버님 선물(가을용 티- 아버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좋은 것을 사야 한다는 애틋한 아내의 마음을 따라, 이곳저곳 5-6곳을 거쳐. 저는 주로 아내 옆에서 짐을 들고)을 사고 삼례 행 시내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버스에 고모님(저에게 고모님이 5분, 작은 아버님이 2분이 계십니다. 그중 저희 아버님은 장남으로 위로 누나 2분, 밑으로 동생 다섯이 있습니다. 큰 고모님은 의정부에, 둘째 고모님은 미국에-둘째 고모님은 서독 간호사생활 후 미국으로 가셔서, 제가 조금 큰 뒤 사진으로 본 모습만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이제 모두 70에 들어선 나이이십니다. 나머지 고모 3분과 작은 아버님들은 모두 고향에 사십니다. 오늘 버스에서 만난 고모님은 넷째 고모님이십니다.)과 제 사촌 여동생 치원이(치원이는 둘째 작은 아버님의 딸입니다.-저는 3살 박이 치원이의 오빠가 되는 셈이고요. 작은 아버님이 좀 늦게 결혼을 하신 까닭입니다.)를 만납니다. 우연한 만남입니다. 사람의 만남이란 이렇습니다. 항상 우리의 삶과, 마음가짐, 몸가짐을 바로 가져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이 앉아 가며 가족들의 안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궁암수술을 받은 막내고모의 안타까운 이야기도 나누고, 고모부님과 아이들에(대학생 남자아이 둘) 대한 소식도 듣고요. 고모님은 한 정거장 전에 내리시고 저는 종점인 삼례 정류장에 도착하여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을 걸어갑니다.(버스 한 정거장정도의 2차선 포장도로로 양옆엔 논들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벼들이 물결치는 푸르른 길을 아내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비포장도로였던 옛날의 이 길에 대해, 이 길옆의 논이 할아버지의 논이었던 이야기(당시 저희 집에서는 '텃논'으로 불렀습니다.), 추수철이 다되면 학교 갔다 와 이 논에 '새'를 쫓으러 왔다던 이야기 등을 나누기도하고, 잡초와 벼 이야기도 나눕니다. (벼보다 한 뼘쯤 길게 머리를 내민 잡초, 그 키는 크나 쓸모 없는 풀입니다. 세상도 그렇습니다. 요란하게 더 높이 자신을 키우고 소리를 높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부러워하는 사회가 되었고요. 사람이나, 종교나, 물건들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서는 실실한 알곡이 없습니다. 다 똑같은 키로 함께 부딪기며, 비슷비슷한 키와 모양새로 넘어지거나 튀지 않고 자라는 벼, 그 가운데서 알곡이 있는 법입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13:29,30-)
집에 도착하니(장산아파트 509호-9층 5호입니다. 이 동네는 동수와 호수 매김이 다른 아파트와 다릅니다. 대개는 509호이면 5층 9호이지만, 꼭 같을 필요는 없죠. 묘한 즐거움을 주는 호수 매김입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반갑게 맞습니다. 고향집이 있고 그 곳에 늘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 그것만도, 참으로 든든하고 힘이 되는 일이요. 커다란 위로와 축복입니다. 아버님, 어머님께 큰절을 올리고 앉아 그동안의 소식과 마음을 부지런히 나눕니다. 아내는 어머님과 그동안 전화로만 나누었던 마음과 소식을 확인하며 고부간의 정을 나눕니다. 함께 그렇게 앉아 웃음 짓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져옵니다. 아버님은 다른 때보다 더한 따뜻한 눈길로 저희를 보시는 것 같습니다. 큰며느리가 생명을 가졌다는 기쁨 때문이시기도 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생신 때마다 큰 아들식구가 빠진 채로 보내시다가 저희가 때에 맞춰 찾아뵌 것도 한 이유가 되는 것 같구요. 이래저래 자식은 부모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진자입니다.
저녁시간이 되어 아버님의 생신과 여동생들의 생일축하를 위해 얼마 전 이사한(그동안 용인에서 살다가 전주로 이사한 둘째 여동생은 남편의 직장 따라 여러 번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쉽게-본인의 고충은 모르고 하는 소리인줄 알지만- 잘 적응하고, 사람들을 사귀며 잘 살아가는 모습이 위로가 됩니다.) 둘째 여동생 집에 모입니다. 마음과 함께 선물도 나누고, 아버님, 어머님, 저와 아내, 둘째 여동생(남편은 서울에서 회사근무 중이라 불참), 남동생, 채린, 채은, 준하(둘째 여동생의 아이들)까지. 그런데 오늘 주인공중의 한 사람인 큰 여동생이 오질 않습니다. '부부싸움'으로 인한 결석입니다. 큰 여동생 네 걱정에 내내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부부싸움, 어느 부부에게나 있는 일이지 뭐"라고 애써 위로하고 분위기를 살리며(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말입니다.) 저녁식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삼례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기(교회이야기하며, 고향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다 "피곤들 할 텐데 들어가 자거라"는 아버님 말씀에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합니다. 두 사람의 몸인 아내는 피곤했던지 곧 잠이 들고 저는 책장에 꽂힌 이 책 저 책을 들추다 잠이 듭니다.
그렇게 고향 길의 첫날이자 마지막 밤은 평화롭게 쌔근거리는 아내의 숨소리와 함께 깊어만 갑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아침을 먹고 기차표를 예매합니다. 전주 역. 오후 4시 37분 차. "점심은 치권이 네와 콩나물국밥 어떠냐?"시는 아버님의 말씀에 남동생과 큰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 만나기로 합니다.(어제 저녁 함께 하지 못한 여동생이 영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입니다. 자식을 향한 늘 그런 부모님의 마음이 진하게 다가옵니다.) 아버님, 어머님, 저와 아내, 큰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준영이와 하영이(큰 여동생의 아이로 초등학교 3학년, 4살입니다.) 함께 점심식사를 나눈 뒤 기차시간까지 남은 시간 오랜만에(6개월만에) 여동생 집으로 갑니다. 준영이는 삼촌과 외숙모가 저희 집에 간다는 말에 신이 났습니다. 여동생 집에 도착하여 동생이 갈아 만든 팥빙수를 먹으며 함께 합니다. 사실 저는 두 여동생들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지난 웃음 속의 이야기입니다만. 큰아들인 저에 대한 '사랑'이 많으셨던 어머님의 마음과 관심이 여동생들을 서운하게 하곤했습니다. 어리석게 저는 그를 당연히 받을 것으로 알았었고요. "명절 때나 되어 엄마가 배를 깎잖아. 오빠가 배를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더구나 없던 시절에 배,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어. 그런데 배를 깎으면 가에를 조금 썰어 우리에게 주고 나머지 살이 많이 붙은 가운데를 꼭 오빠에게 주는 거야. 그래 '엄마는 맨날 살이 많이 붙은 가운데는 오빠만 준다'고 했더니 엄마가 그 다음에 배를 깎아서는 씨 있는 데까지 바짝 썰더니 오빠를 주고 살이 거의 없는 가운데를 우리에게 주시는 거야. 이것은 남녀차별에다 편애라고 편애!" 그때마다 "내가 언제 그랬냐. 애."하시며 웃으시는 어머님. 웃으면서 그때를 말하는 여동생의 이야기는 우리가족사에 전설이 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지난 일로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당시 어린 동생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은연중 그를 당연한 듯이 은근히 즐기며 받아들였던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를 생각하면 커다란 미안함과 부끄러움입니다. '배' 한 쪽의 마음이 이랬으니 이 일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일이 여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지, 또한 오빠랍시고 때론 동생들을 괴롭히던 어릴 적 기억도 있고요.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남매라는 고운 정으로 남아 저를 위해 기도하며 마음을 쓰는 것을 보면(처음 교회를 시작하여 근 5년간 여동생들은 선교헌금을 꾸준히 했었고, 십일조를 꾸준히 보내며 목회하는 오빠부부에 대한 생각이 살갑습니다.) 참으로 큰 사랑입니다. 특히 큰 여동생은 저와 2년 터울인 관계로 많이 괴롭히고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당시 필경을 좀 하던 저(당시에는 인쇄, 컴퓨터, 복사기시대가 아니였습니다. 그래 고향 교회주보를 철판 위에 용지를 놓고 철필로 일일이 글씨를 써 그것을 등사기로 밀어 만들었었습니다. 저는 교회 '전속 필경사'였습니다. 목사인 아버님을 도와드린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이 필경이 조금 가자 나의 은근한 자만으로 잘못 커졌고, 결국 저의 많은 짜증과 버티기로 아버님께서 많이 마음 상해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기도제목이었던 저는 좋은 자식이 못되는 셈입니다.)에게 학교 합창대회 때 쓸 악보를 부탁했었는데, 저의 심통으로 거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 친구들에게 자신 있게 '우리오빠가 잘 하니까 내가 맡을 께!'라며 신나 했었을 여동생의 마음이 심하게 구겨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찌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던 지요.
전에 설에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며 제 마음을 전하니 큰 여동생은 그 일을 잊고 기억조차 못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작은 여동생이 "오빠 나야 나!"하고 나서는 겁니다. "이크 이런 죄를 작은 여동생에게도 똑같이 만행(?)을 저질렀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큰 동생인가, 작은 동생인가?' 아무튼 여동생들에게 결코 크게 좋은 오빠가 못되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다 다 큰 후에는 학교, 군대, 학교, 그리고 공단마을의 목회생활까지. 늘 고향과 부모님, 여동생들의 곁을 떠나 있었습니다. 더구나 공단목회생활 후 저의 삶이 가족들에게는 늘 안스러움과 짐이 되었고, 고향에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이 사시는 데에도 자주 가 뵙지 못하는 것까지도 그 이유로 정당화하고 있으니 큰 불효입니다. 그 커다란 틈새를 두 여동생의 식구들이 늘 메워오며 부모님께 마음을 드려왔던 동생들에게 늘 커다란 미안함이 있습니다.
"준영이 아빠하고 싸웠니? 서로 노력해야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더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두 사람의 사랑이 있고, 또 현명하게 잘 이겨내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다 되어 직장에 갔던 남동생이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남동생은 큰 매형 준영이아빠의 컴퓨터회사에 다닙니다. 그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와 딸아이와는 주말가족입니다.) 꼬박꼬박 가족들을 챙기는 남동생의 모습 또한 제 마음을 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래 그 차를 타고 전주역까지. "이제 그만 들어들 가라"는 제 말에도 역 안에까지 들어와 기차시간이 다 될 때까지 마음을 나눕니다. 시간이 다 되자, "자 이제 가야겠다. 잘 있어. 준영이, 하영이도 안녕!" "형, 잘 가요. 형수님도 건강하시고요!" "오빠! 잘 가." 큰 여동생이 눈물을 글썽이며 작별인사를 건넵니다.(겉은 차가운 듯 보이나 그 마음은 '따뜻함'임을 저는 압니다.) "준영이도 인사해야지?" "그래, 준영이 다음에 만나자." 준영이 녀석은 몇 분전부터 말이 없습니다.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하고요. 재미있는(?) 외삼촌과의 헤어짐이 어린 저에게도 슬픔인 모양입니다. 애틋한 정과 마음들을 뒤로하고 기차에 오릅니다. 서울행 무궁화호 1호차 55번, 56번, 좌석을 찾아 앉아 생각들을 마음에 정리합니다. 고향을 떠나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의 시계'에 매여, 자주 찾지 못했던 고향, "아버님 생신이시고,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데, 나, 몸 더 무거워지기 전에 갔다옵시다. 이젠 시골집, 시댁도 편해요. 아버님, 어머님도 뵙고 싶고요."라며 열흘 전부터 고향 길을 재촉했던 아내의 마음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농촌의 푸르른 풍경처럼 넉넉함으로 다가옵니다. 오랜만에 나선 고향 길, 내 생명의 시작과 어린 시절이 있는 고향은 제 삶의 뿌리이자, 새로운 힘이요, 그리움이 있는 희망입니다. 그래 고향은 언제나 오늘 저의 삶과 마음에 그렇게 함께 있습니다. 98. 8. 24. 바라보면 가슴 설레이는 그리움이 있는 달의 날(月曜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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