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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st Explorer-에베레스트의 전설이 된 말로리
저자: 콘래드 앵커, 데이비드 로버츠 공저
출판년도: 1999년
쪽수: 191쪽
출판사: 사이먼 앤 슈스터
<등반출발전 준비중인 말로리(왼쪽)와 어빈>
<말로리의 실종을 주제로 다큐영화로 재현한 장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있는 말로리와 어빈의 추모비>
1924년 6월 8일 오후 12시 반경, 에베레스트 북동릉 8,600미터 지점에서 조지 말로리와 샌디 어빈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면서 세기적인 미스터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길에 실종되었는가, 아니면 등정에 실패했는가? 등산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사라진 연기를 해낸 그들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나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다.
뛰어난 산악인들이 수도 없이 실종되었다. 에베레스트는 그 많은 비밀들을 숨기기에 충분히 거대하고, 빙하는 추락하는 모든 물체를 언제라도 얼음 무덤에 감출 수가 있다. 단지, 그들이 죽기 전에 등정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전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실종된 지 75년이 지난 1999년 5월 1일, 콘래드 앵커는 에베레스트 북벽 8,200미터 지점에서 얼굴을 파묻고 있는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했다. 다섯 명의 대원과 함께 수색을 하던 앵커는,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흰색 천이 눈에 띄었다. 빛을 흡수하는 대리석같은 물체에 다가서니, 발이 아래로 향하고 양말이 벗겨진 시신이었다.
옷은 아주 오래된 듯한 섬유 재질로 되어 있고 대부분 찢겨져 있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석고로 만든 미이라처럼 되었고,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가 찾던 바로 그 어빈의 시신인가?”
얼굴은 묻혀 있고 팔은 위로 들려져 있고, 손가락은 추락을 제동하려고 한 듯 바위 부스러기를 꽉 붙들고 있다. 등과 어깨를 보니 무척 힘이 세고 잘 다듬어진 건장한 체격이었다. 허리에는 면으로 짠 로프가 묶여 있는데 추락하면서 바위 모서리에 의해 끊어진 것 같다. 팔꿈치는 부러졌고 오른쪽 다리는 심하게 뒤틀려 있다. 오른쪽 엉덩이는 히말라야의 고산 짐승(영양)이 쪼아 먹은 듯 큰 구멍이 나 있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동료 대원들과 발굴 작업을 시작하는데 셔츠 칼라에 ‘G. Mallory’로 표기된 이름표가 붙어 있다.
“왜 어빈이 말로리의 셔츠를 입고 있지?”
그때까지 대원들은 이 시신이 어빈 것으로 짐작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왕 홍바오가 1975년 북벽을 등반할 때, 캠프6 부근에서 영국 사람인 듯한 시신을 봤다는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등산 역사가인 톰 홀첼이 1986년 말로리의 시신을 찾기 위한 등반대를 최초로 구성하면서, 실종 당시의 시나리오를 발표했었다. 즉, 말로리와 같이 등반을 하던 어빈이 지쳐서 포기했고, 자신의 산소를 말로리에게 건네고 혼자 하산하다 추락사했다는 것이다.
단독으로 오르던 말로리는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오다가 저체온증이나 탈진으로 롱북 빙하쪽으로 추락사했다는 가설이다. 홍바오가 봤다는 그 영국인 시신은 어빈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8,200미터 지점에서 피켈로 바위와 얼음을 파헤쳐야 하는 발굴작업은 과도한 체력소모를 요구했다. 제이크가 어빈의 이름을 바윗돌에 새기고 있는데, 팔 소매에 말로리의 이름이 바느질된 것이 발견되었고 수신인이 말로리로 된 편지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것이 말로리의 시신임을 확인한다.
오랫동안 얘기로만 전해 듣던 말로리의 시신을 보자 대원들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처참했고 시신을 드는 순간 썩은 통나무 들 때 나는 삐거덕 소리가 났다.
캠프 이동간의 상황을 적은 메모, 펜 나이프와 연필, 응고된 박하향 케이크, 바늘과 실, 스완 성냥과 튜브, 말로리의 이니셜이 새겨진 또 다른 손수건, 고도계와 구부러졌지만 안경알이 온전한 고글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시신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DNA 샘플을 채취했다. 오른쪽 팔에서 3.8㎠의 피부를 절개하는데 마치 말 안장을 자르는 것 같이 질겼다.
이 모든 수집품을 옮기는 작업에 대원들이 주저했다. 누구도 말로리의 머리 가까이에 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말로리의 성스러운 영혼을 방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위로 방호벽을 쌓아 시신을 묻고 기도문을 외웠다.
앵커는 캔디바를 올려 놓고 좀 더 머물며 불교식으로 기원을 했다. 캠프5로 돌아온 대원들은 만족감으로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앵커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말로리의 처참한 시신이 오히려 그를 편안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말로리와 비슷한 산에 대한 목표와 열정, 슬픔과 기쁨을 공감할 수 있었고, 인생 또한 비슷한 동기로 진행되는 듯 강한 연대감으로 친근해졌다. 1924년 당시의 복장과 장비로 이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말로리의 용기가 다시 그를 압도하고 만다.
1886년 6월 18일, 사제의 아들로 태어난 말로리는 1900년대 초 등산 무대에서 가장 유능하고 카리스마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불가능’이란 단어는 그를 흥분시키는 최악의 도전적인 대상이었다. 그의 당돌함과 과감성은 그의 가족들을 놀라게 했지만 수려한 외모와 강인한 의지, 운동으로 단련된 178㎝의 키와 72㎏의 체격은 어떤 사람도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다.
그는 영화와 그림에도 깊게 빠지는데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검정 셔츠에 칼라 넥타이를 즐겨 입었고 장발이었다. 캠브리지 대학시절에는 밤 10시, 야간 통행금지 시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호수에서 누드 수영에도 열심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과 외모로 많은 화가들로부터 누드 모델 요청이 줄을 잇기도 했다.
알프스에서의 등반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 냈다. 수직의 빙벽에서 자연의 조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효율적으로 등반을 진행했다. 강한 체력과 유연성, 극도로 절제된 균형 감각으로 뱀춤을 추듯이 부드럽고 리드미칼하게 리드했다. 그는 자신의 등반기를 <알파인 저널>에 기고하는 등 글 재주도 뛰어 났다. 캠브리지 대학 졸업 후 비평서를 출판하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공립학교 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14년 베니스를 여행하던 중 부인이 된 루쓰 터너를 만났고 사랑에 빠진다. 고요하고 성실한 그녀를 알게 될수록 진실된 영혼의 깊은 동질감에 더욱 매료된 그는, 만난 지 4개월만에 결혼했다.
갓 결혼한 신부와 웨일즈의 암장으로 가서 거친 클라이밍 훈련을 시켜보지만, 그녀는 말로리와 전혀 다른 기질이었다. 지극히 현명하고 검소하고 실용적인 성품이다. 그녀의 안정감과 평정심이 말로리 인생에 단단한 닻의 역할을 했다. 10년간의 결혼생활동안 서로간의 애정이 식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그녀는 말로리의 인생에 유일하게 중요한 여인이 되었다.
1921년, 영국의 제1차 에베레스트 등반은 허술한 대원 구성과 악천후로 실패했다. 1922년의 제2차 등반대는 노스콜을 통과해서 캠프5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강추위와 대원들의 탈진으로 당시 인간의 최고 도달지점인 8,220미터를 기록하고 하산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근로자들을 상대로 역사학을 가르치던 말로리는, 1924년 제3차 등반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등반대는 최강의 대원들로 구성되었고 대장이었던 찰스 브루스가 열병으로 인도로 돌아가자 테디 노톤이 등반대장으로, 말로리가 클라이밍 리더로 등반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한 달간 악천후로 캠프4까지만 전진하고, 체력과 사기가 떨어졌으며 포터들과의 불협화음도 불거졌다. 6월 2일, 여섯 명의 타이거(강인한 정예 포터)와 함께 노톤과 하워드 서머벨은 8,160미터 지점에 캠프6 설치에 성공했다. 하지만 서머벨의 기침과 설맹으로 탈진된 노톤이 8,570미터 지점까지 도달하고 하산하고 만다.
한편 말로리는 2차 등정 시도를 준비하고 파트너로 어빈을 지명했다. 원래는 노엘 오델이 파트너였지만 포터들의 말을 이해하고 산소통 조작에 능한 어빈으로 결정한 것이다. 화학과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어빈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강인함이 있었고 조용하고 전형적인 신사 타입이었다. 말로리보다 더 건장한 체격에 부지런하고 자신감이 돋보이는 어빈이, 말로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6월 8일 오후 12시 반, 오델이 말로리의 등반을 지원하기 위해 캠프6로 향하는데 북릉상에서 쫓기듯이 서둘러 전진하는 그들을 목격했다. 전날 얘기로는 오전 8시경에 그곳을 통과한다고 했는데 왜 늦어진 걸까.
오델이 캠프6에 도착해 보니 산소통을 수리했는지 텐트 안이 정신없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말로리의 건망증으로 컴파스와 플래시를 두고 떠났으며 버너는 조작 실수로 설사면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틀 후 오델이 다시 캠프6에 올라갔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들로부터 소식이 없다. 에베레스트 8000미터 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초법적인 신의 영역으로 언제라도 그의 잔혹성을 드러내고, 그 속에 묻혀 있는 비밀들을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죽음의 지대이다. 인간이 그 영역을 무례하게 침범한 것이다. 오델은 갑자기 두려움과 신들의 무관심에 한기를 느끼며 하산하기로 했다.
6월 12일, 전 대원이 베이스캠프에 모여 그들의 실종에 대해 상의해보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1999년 5월 17일, 자유등반으로 세컨드 스텝을 통과하며 말로리의 75년 전 등반을 재현한 앵커는, 말로리가 등정에 실패했다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아이젠이 개발되어 사용되었으나 등정시에는 착용하지 않았다. 캠프2에서 캠프3까지는 반드시 필요했고 캠프4까지는 권장사항으로, 그 이상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등반대 지침서에도 가죽으로 만든 등산화를 아이젠 끈으로 조이면, 혈액순환에 방해가 되어 동상에 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등반 루트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상황에서 고정 자일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시간과 체력을 많이 소모하게 했다. 고정 자일은 루트를 안내해 주는 길잡이로 눈과 바람이 심하게 부는 북동릉에서, 한 번 지나간 흔적은 곧 사라지게 된다. 세 개의 스텝을 오르 내리는데 고정 자일은 최대한의 안전을 확보해 준다. 실제로 말로리는 되돌아 오는 길을 찾느라고 많은 시간과 과도한 체력을 소모했다.
1920년대에 유럽에서는 확보용으로 피톤을 사용했는데, 영국에서는 등반의 순수성을 고집하면서 피톤의 사용을 회피했다. 말로리의 등반대도 철제 피톤이나 해머, 카라비나를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노스콜 아래에서 목제 피톤을 사용했던 기록이 보인다.
당시 산소통의 무게는 13㎏으로 지금의 것보다 두 배 이상 무겁고, 잦은 고장으로 새는 일이 빈번했다. 산소 공급량도 현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출발 전날 버너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물을 먹지 못해 심한 탈수현상을 초래했고, 어빈은 햇빛으로 인해 심한 화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캠프6에서 산소통을 다급하게 수리한 흔적이 있는 걸로 보아 산소통에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톰 홀첼은 그들이 시간 당 60여 미터를 전진했다고 하지만, 모든 장비와 등반 조건이 훨씬 월등한 우리도 시간 당 50미터밖에 전진을 못했다. 또한 말로리가 캠프6에 플래시를 두고 떠났다는 것은 그들이 해가 뜬 후 늦게 출발했다는 반증인데, 그 시간으로는 도저히 정상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다.
27미터의 세컨드 스텝 통과도 의문점이다. 북동릉을 등반하는데 푸석바위로 된 세컨드 스텝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특히 오버행 구간은 5.10의 난이도로 당시 독일에서 최고 수준의 난이도였다. 영국에서는 5.7에서 5.8의 난이도가 최고 수준이었는데 8,600미터 고도에서의 5.10은 그 어려움이 더 했을 것이다. 말로리는 30미터 길이의 로프 1동으로 등반을 했는데, 이 길이로는 27미터의 세컨드 스텝에서 이중 확보도 볼 수 없고 하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6월 8일, 두 개의 산소통을 갖고 출발한 그들은 퍼스트 스텝 부근에서 한 개를 소모하면서 순조롭게 전진했다. 세컨드 스텝에서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하산 길을 찾았지만, 눈보라가 그들의 발자욱을 덮어버려 루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말로리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 얼굴 어디에도 수포나 동상이 걸린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말로리가 6월 9일이 아닌 6월 8일에 죽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혈액순환이 정지되어 동상이 발생되지 않는다.』
영국의 리버풀에서 증기선을 타고 봄베이까지 와서 기차로 다아지링에 도착한 그들은, 티베트까지 말을 타고 가며 제3의 극점으로 불리우는 미지의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말로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연락할 무전기도 길을 안내할 고정 자일도, 구조해 줄 대원도 고소 캠프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로리의 시신 발견이 혹여나 그들의 영혼을 흔들고 신성한 영광을 깬 것은 아닌가.
첫댓글 말로리의 미스터리를 주제로 한 책이 여러권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그들이 등정하지 못하고 도중에 실종된 걸로 판단했네요... 등정했다는 또는 실패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아직 없으니 90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우리들의 관심을 붙들고 있네요^^
현대의 등반기술로 그 당시를 판단한다는것 자체가 아이러니 아닐까...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