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始原 김시원 선생님
김다원
검은 구름이다. 폭풍이다. 아니다 우레 같은 소리다. 소용돌이로 솟아 올랐다가 마지막 열정의 혈을 쏟은 하늘에 수채화를 그리다가 사뿐하게 내려앉아 대지에 입맞춤 한다. 움직이는 순수다. 영암의 가창오리 떼가 쓰는 시다.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질서와 비상이 궁금했다. 가창오리는 엉덩이가 무겁고 툭 불거져 균형이 잘 안 잡힌다고 한다. 몸집에 비해 날개가 또 크거나 길지도 않단다. 그래서 물을 활주로로 삼아 한참을 퍼덕인 다음에 오른단다. 어린것들도 늙은 것들도 있을 텐데 무슨 방법으로 그들은 그들만의 군무를 순식간에 만들어 낼까? 인터넷을 찾다가 누군가가 쓴 글을 읽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강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오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앞에는 어린 오리들이, 뒤쪽엔 젊고 튼튼한 수컷들이 자리 잡는다. 뒤쪽에서 늘어선 젊은 오리 떼가 힘차게 물을 차며 앞쪽 새들의 머리위로 지나면 앞쪽의 오리들이 따라 오른다.’
내 비상의 시작은 어느 때였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처음 글을 써서 어머니께 읽어드렸을 때 “참 잘 썼구나.”란 말 이후 어느 순간이던 쓰기를 즐겼다. 그런 어머니가 또 한분 계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어머니 ‘김시원’ 선생님이다.
1997년이었다. 내 글을 읽으신 천안의 한 시인이 ‘김시원’ 선생님과 ‘진을주’ 선생님을 꼭 뵙고 오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운현궁에서 ‘세기문학’ 창간을 가질 때 참석 했다.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서울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가 참 어렵던 때였다. 그리고 그 후 ‘지구문학’으로 지금까지 선생님과 인연을 갖고 있다.
종로 3가 선생님 사무실은 오래된 건물에 있다. 작고 수수하다. 수많은 문인들이 비상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군무를 출 수 있도록, 또 글로써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장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선생님이 계시다. 정신없이 생활하다가 엄마가 생각나면 달려가고픈 엄마의 집이다. 선생님은 지방의 이름 없는 내게 새해 인사도, 크리스마스 인사도, 또 글쓰기를 좀 게을리 할 때 쯤 되면 어김없이 먼저 인사를 해 오신다. 첫 시집 ‘다원의 아침’을 엮게 하신 것도 선생님의 독촉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조용히 말씀하셨다.
“천안의 시인으로서 천안 삼거리에 대한 시집이 없는 것은 천안에 있는 시인들이 애향심이나 역사의식이 부족해서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또 부끄러웠다. 바로 삼거리에 가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닐었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안아보고 누워서 올려다보고 두 팔다리를 잔디에 던져두고 풀 향기와 사랑을 나눴다. 서울로 과거시험 보러 간 박현수를 기다리는 능소의 까치발이 보이고, 삼거리에 돌담을 쌓으며 썼던 ‘능소’의 연서(戀書)가 읽혀지고, 소나무와 달빛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연못에 떨어지는 무수한 빗방울이 그려내는 동그라미 속에서 삼거리를 지나간 이들의 애환을 들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천안 삼거리’다.
퇴직 후에 가끔 인사동에서, 혹은 종로 뒷골목에서 식사를 할 때도 말씀이 적으셨다. 그냥 두어마디 아주 조용하게 말씀하시는데 깊기가 바다셨다. 무엇인가 하고 싶어 두리번거리면 어느 새 알아차리시고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다. 그러면 뒤꿈치가 슬그머니 들리고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소원은 단 한가지다. 지금 그대로 그냥 건강을 유지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계시니 내게는 서울이 가고 싶은 곳이 고, 종로의 골목이 따뜻하고, 인사동의 찻집이 그립다.
선생님께 정말 죄송한 일이 있다. ‘천안문화공로상’을 천안 시민회관에서 받을 때 연로하신 몸으로 직접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지하철을 타고 이리저리 낯선 곳을 찾아오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 감사를 어찌 드려야할지 모른다.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찌 내게만 그런 사랑을 베푸셨을까? 글 쓰는 한 분 한 분에 대한 사랑으로 사셔서 그런지 선생님 얼굴은 늘 평안하시다. 화장기 없는 피부가 하도 고와서 비결을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녹차 물을 얼굴에 바른다 하시며 또 미소 한 번으로 답을 하셨다.
선생님과 남편인 진을주 선생님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진을주 선생님께 글을 보여드리면 고개를 끄덕이시며 “좋군!” 하시면 그만이셨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인연에 대해선 선생님의 글에서 읽었다. 순수한 마음 하나로 맺어 오랜 세월 보내신 모습은 두 분의 걷는 모습에서도 보였다. 보이지 않게 슬그머니 필요한 부분에서 부축하고 배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게 사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진을주 선생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코끝이 찡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자주 식사를 한 것도, 만나서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 편안할 기회도 없었다. 몇 번 식사를 같이 하실 때도 말씀이 없으셨다. 돌아가셨단 말씀은 대만 여행 후 돌아와서야 알았다. 애닮아 하실 선생님이 눈에 선해서 선생님께 전화도 드릴 수 없는 죄송한 날들을 보냈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 생각났다. 마음 속 열정이 펜을 들면 글이요, 몸으로 표현하면 무용이요, 악기로 표현하면 음악이요, 붓을 들면 그림이 되느니 품은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생님의 또 다른 표현이 붓이니 그 붓으로 표현된 난 그림 또한 선생님같이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림을 보는 내내 내 마음도 차분한 평화의 세상에서 행복을 품다 그림을 접을 때서야 미소를 지으며 현세로 돌아왔다. 『한와헌제화잡서(漢瓦軒題畵雜序)』에 ‘난을 그리려면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하여 문자의 기운이 창자에 뻗치고 뱃속을 떠받치고 있어서, 열 손가락 사이로 넘쳐 나온 뒤라야 가능하다’고 했다는데 수필 뿐 아니라 난을 치는 솜씨 또한 대원군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그리운 사람이 있고, 그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절로 흐르는 분을 품고 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거기다 좋은 글을 쓰고자 애끓어 할 때, 날개를 달고 수면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 아름다운 비행을 하게 해 주시는 선생님을 곁에 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가창오리 떼의 비상을 보면서 눈물이 고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순간들과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고난과 책임감을 생각하면서 나는 잠시 바람 부는 창 밖에 눈을 두었다.
검은 구름이다. 폭풍이다. 아니다 우레 같은 소리다. 소용돌이로 솟아 올랐다가 마지막 열정의 혈을 쏟은 하늘에 수채화를 그리다가 사뿐하게 내려앉아 대지에 입맞춤 한다. 움직이는 순수다. 영암의 가창오리 떼가 쓰는 시다.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질서와 비상이 궁금했다. 가창오리는 엉덩이가 무겁고 툭 불거져 균형이 잘 안 잡힌다고 한다. 몸집에 비해 날개가 또 크거나 길지도 않단다. 그래서 물을 활주로로 삼아 한참을 퍼덕인 다음에 오른단다. 어린것들도 늙은 것들도 있을 텐데 무슨 방법으로 그들은 그들만의 군무를 순식간에 만들어 낼까? 인터넷을 찾다가 누군가가 쓴 글을 읽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강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오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앞에는 어린 오리들이, 뒤쪽엔 젊고 튼튼한 수컷들이 자리 잡는다. 뒤쪽에서 늘어선 젊은 오리 떼가 힘차게 물을 차며 앞쪽 새들의 머리위로 지나면 앞쪽의 오리들이 따라 오른다.’
내 비상의 시작은 어느 때였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처음 글을 써서 어머니께 읽어드렸을 때 “참 잘 썼구나.”란 말 이후 어느 순간이던 쓰기를 즐겼다. 그런 어머니가 또 한분 계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어머니 ‘김시원’ 선생님이다.
1997년이었다. 내 글을 읽으신 천안의 한 시인이 ‘김시원’ 선생님과 ‘진을주’ 선생님을 꼭 뵙고 오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운현궁에서 ‘세기문학’ 창간을 가질 때 참석 했다.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서울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하기가 참 어렵던 때였다. 그리고 그 후 ‘지구문학’으로 지금까지 선생님과 인연을 갖고 있다.
종로 3가 선생님 사무실은 오래된 건물에 있다. 작고 수수하다. 수많은 문인들이 비상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군무를 출 수 있도록, 또 글로써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장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선생님이 계시다. 정신없이 생활하다가 엄마가 생각나면 달려가고픈 엄마의 집이다. 선생님은 지방의 이름 없는 내게 새해 인사도, 크리스마스 인사도, 또 글쓰기를 좀 게을리 할 때 쯤 되면 어김없이 먼저 인사를 해 오신다. 첫 시집 ‘다원의 아침’을 엮게 하신 것도 선생님의 독촉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조용히 말씀하셨다.
“천안의 시인으로서 천안 삼거리에 대한 시집이 없는 것은 천안에 있는 시인들이 애향심이나 역사의식이 부족해서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또 부끄러웠다. 바로 삼거리에 가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닐었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안아보고 누워서 올려다보고 두 팔다리를 잔디에 던져두고 풀 향기와 사랑을 나눴다. 서울로 과거시험 보러 간 박현수를 기다리는 능소의 까치발이 보이고, 삼거리에 돌담을 쌓으며 썼던 ‘능소’의 연서(戀書)가 읽혀지고, 소나무와 달빛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연못에 떨어지는 무수한 빗방울이 그려내는 동그라미 속에서 삼거리를 지나간 이들의 애환을 들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천안 삼거리’다.
퇴직 후에 가끔 인사동에서, 혹은 종로 뒷골목에서 식사를 할 때도 말씀이 적으셨다. 그냥 두어마디 아주 조용하게 말씀하시는데 깊기가 바다셨다. 무엇인가 하고 싶어 두리번거리면 어느 새 알아차리시고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다. 그러면 뒤꿈치가 슬그머니 들리고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소원은 단 한가지다. 지금 그대로 그냥 건강을 유지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계시니 내게는 서울이 가고 싶은 곳이 고, 종로의 골목이 따뜻하고, 인사동의 찻집이 그립다.
선생님께 정말 죄송한 일이 있다. ‘천안문화공로상’을 천안 시민회관에서 받을 때 연로하신 몸으로 직접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지하철을 타고 이리저리 낯선 곳을 찾아오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 감사를 어찌 드려야할지 모른다.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찌 내게만 그런 사랑을 베푸셨을까? 글 쓰는 한 분 한 분에 대한 사랑으로 사셔서 그런지 선생님 얼굴은 늘 평안하시다. 화장기 없는 피부가 하도 고와서 비결을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녹차 물을 얼굴에 바른다 하시며 또 미소 한 번으로 답을 하셨다.
선생님과 남편인 진을주 선생님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진을주 선생님께 글을 보여드리면 고개를 끄덕이시며 “좋군!” 하시면 그만이셨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인연에 대해선 선생님의 글에서 읽었다. 순수한 마음 하나로 맺어 오랜 세월 보내신 모습은 두 분의 걷는 모습에서도 보였다. 보이지 않게 슬그머니 필요한 부분에서 부축하고 배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게 사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진을주 선생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코끝이 찡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자주 식사를 한 것도, 만나서 흉금을 털어놓을 만큼 편안할 기회도 없었다. 몇 번 식사를 같이 하실 때도 말씀이 없으셨다. 돌아가셨단 말씀은 대만 여행 후 돌아와서야 알았다. 애닮아 하실 선생님이 눈에 선해서 선생님께 전화도 드릴 수 없는 죄송한 날들을 보냈다.
어디선가 읽은 글이 생각났다. 마음 속 열정이 펜을 들면 글이요, 몸으로 표현하면 무용이요, 악기로 표현하면 음악이요, 붓을 들면 그림이 되느니 품은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생님의 또 다른 표현이 붓이니 그 붓으로 표현된 난 그림 또한 선생님같이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림을 보는 내내 내 마음도 차분한 평화의 세상에서 행복을 품다 그림을 접을 때서야 미소를 지으며 현세로 돌아왔다. 『한와헌제화잡서(漢瓦軒題畵雜序)』에 ‘난을 그리려면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하여 문자의 기운이 창자에 뻗치고 뱃속을 떠받치고 있어서, 열 손가락 사이로 넘쳐 나온 뒤라야 가능하다’고 했다는데 수필 뿐 아니라 난을 치는 솜씨 또한 대원군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그리운 사람이 있고, 그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절로 흐르는 분을 품고 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거기다 좋은 글을 쓰고자 애끓어 할 때, 날개를 달고 수면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 아름다운 비행을 하게 해 주시는 선생님을 곁에 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가창오리 떼의 비상을 보면서 눈물이 고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순간들과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고난과 책임감을 생각하면서 나는 잠시 바람 부는 창 밖에 눈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