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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라면 체력 관리를 아무리 잘 해왔다 해도 가벼운 산행 이상은 어려운 고령이다. 김인식(金仁植·75·서울시연맹 명예회장·대한산악연맹 자문위원) 회장은 그 나이에 들어서자 오히려 더 왕성하게 산악 활동을 펼쳐 50~60대 후배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다.
1960년대 초부터 꾸준히 등산을 해온 김 회장은 1주일에 2회씩의 정기산행 외에도 나이 50이 다가올 무렵 맛을 들인 해외 고산 트레킹에 더욱 열중하고 있다. 3년 전 일흔두 살의 노령에 해발 5,600m 높이까지 올라야 하는 마칼루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다녀오는가 하면 재작년 봄에는 해발 5,400m가 넘는 토롱라(5,416m)를 넘는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홀로 해냈고, 그 해 가을 에베레스트 가까이 위치한 고쿄피크(5,357m)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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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세 노령에도 50대 체력을 자랑하는 김인식 회장. 그는 해외 고산 트레킹을 통해 삶의 활력소를 얻는다고 말한다. / 험한 바윗길로 김인식 회장에게는 가벼운 산길이나 다름없다. 수락산.
- 지난해에도 11일 동안 걷는 몽블랑 라운드 트레킹을 해낸 데에 이어 터키의 성산(聖山) 아라라트(Mt. Ararat·5,137m)도 오르고 페루 잉카와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다녀왔다. 올해는 특별한 해였다. 1988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 단장으로 두 달간 머문 바 있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22년 만에 방문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남(南)코카서스산맥의 카즈베키산을 오르기도 했다.
해외 트레킹 꿈에 잘 나가던 공무원 생활 그만둬
9월 12일 오전, 가을장마가 끝난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수락산은 구름이 잔뜩 덮여 있었다.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에서 만난 김인식 회장은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기백이 넘쳤다. 주변에 있는 60대 등산인보다 오히려 건강미가 넘쳤다. 김 회장은 “60대로도 안 볼 것 같다”는 인사말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농담으로 받았지만 실제 그랬다. 수락산 벽운동계곡으로 들어서는 그의 걸음걸이는 일정하면서도 빠른 속도였다.
“대개 서너 시간 산행해요. 하지만 거의 쉬지 않고 걸어요. 지난 봄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갔다왔고, 얼마 전엔 그루지아공화국에 있는 카즈베키산(5,033m)을 다녀왔어요. 5,000m 조금 넘는 산인데 해발 1,800m 높이의 마을에서 3,680m 높이의 산장까지 하루에 올려치자니 일행 대부분 힘이 들 수밖에 없었죠. 무엇보다 고소증으로 고생했어요. 저요? 1983년 K2 정찰등반 이후 고소증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산장에서 맥주도 마셨는걸요. 마음 같아선….”
김인식 회장은 “만년설 덮인 정상이 유혹했지만 애초 계획이 산장이었던지라 장비도 준비하지 않았고, 일정도 넉넉하지 않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나무가 참 많아졌어요. 산에 막 다니기 시작할 적에는 수락산에 이렇게 나무가 많지 않았어요. 코스도 별로 없었고요. 그 시절에는 의정부 송산 마당바위에서 옥류폭포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바로 이 계곡으로 내려왔어요. 다른 코스는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아침에 집에서 출발해 산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어두웠어요. 교통이 좀 불편했나요.”
김 회장은 1958년 창립한 거리산악회 회원이지만 취직하기 전까지 오른 산이라곤 나무하러 다닌 게 전부였다. 그가 태어난 서울 말죽거리가 지금은 양재동 빌딩 숲으로 변해 버렸으나 어렸을 때는 그야말로 채소나 참외밭이 전부였던 곳이었다. 게다가 가정형편상 산을 재미 삼아 다닐 기회는 없었다. 서울로 ‘유학’ 와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새벽이면 신문을 돌려야 했고, 대학 시절도 청계천 변 군용물품 가게에서 산 건빵을 물에 불려 먹으며 다녀야 할 정도였다. 형편이 나아진 것은 1962년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재무부 세무공무원이 되면서부터였다.
“건빵을 물에 집어넣은 다음 고체연료로 끓이면 적당히 풀어져 먹을 만했어요. 저만 그랬나요, 그 시절엔 다 그렇게 살았어요. 상황이 그러한데 ‘등산’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를 리 있겠어요? 앞마당에서 빤히 보이는 청계산도 어렸을 땐 한남동에서도 나무하러 오는 산이었는데요. 정말 우연한 기회였어요. 함께 근무하는 선배 공무원이 거리회 회원이었어요. 그 선배 권유로 산에 다니게 된 거예요.”
김인식 회장에게 산은 모든 생활의 활력소였다. 엿새간 업무에 시달리며 지내다가도 휴일에 산에 다녀오면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솟았다. 산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소중한 존재로 자리잡아가면서 휴일이면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모두 기독교 신자인데도 그는 일요일이면 산에 가 있었다. 산악 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그 바람에 가맹단체 제1호로 가입한 서울시산악연맹에서 1972년 이사를 시작으로 1980년부터 몇 년간 부회장도 하고, 1991년부터 1999년까지 9년간 대한산악연맹 시도연맹 중 가장 규모가 큰 서울시연맹을 단체장으로서 이끌어왔다.
그 사이 김 회장에게는 신분의 큰 변화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적으로도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도 그리 좋다 할 수 없었던 1980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용산세무서 법인세과장 자리를 내놓고 허허벌판으로 나섰다.
“이사와 감사로 지내던 시절은 해외여행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어떤 산악회든지 해외원정을 나가려면 대한산악연맹에서 추천을 받아야 했어요. 정말 여러 팀에게 도장을 찍어줬어요. 그러다 보니 나는 뭔가 싶더군요. 나는 가보지도 못한 고산에 가겠다는 원정대에게 도장이나 찍어주고 있으니 말이에요. 고민 끝에 사표를 냈어요. 그렇지 않곤 해외 산을 다닐 기회가 없겠다 싶었어요.”
한 3년간은 새로 문을 연 세무사 사무소 일에 몰두하며 지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싶어지자 계획대로 해외 산으로 눈을 돌렸다. 그 첫 번째가 1983년 K2 정찰등반이었다.
“자비로 나가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정말 험했어요. 버스나 비행기로 접근하는 스카르두에서 지프로 7,8시간이면 가는 아스콜리까지 3일이나 걸렸으니까요. 지프로 하루 가고, 이틀 동안 걸은 거죠. 대단했어요. 깎아지른 절벽 길이 툭하면 무너져 내리는 게. 막판에 식량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에서 하행 캐러밴을 했어요. 요즘은 로프웨이라 하대요. 그 땐 그런 말이나 있었나요. 강을 가로질러 설치해 놓은 와이어로프에 걸린 바구니에 올라앉아 빙하수가 거칠게 흐르는 강을 건넜으니까요.”
수락산 벽운동계곡도 며칠째 쏟아진 폭우에 시원스럽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인식 회장은 맑은 물을 손으로 떠 얼굴에 흥건한 땀을 씻어내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 K2 원정은 아시안게임에 맞춘 등반이었어요. 그래서 성공해야겠다는 각오와 부담감 때문에 정찰등반을 세 차례나 나간 거예요. 당시만 해도 카라코룸 히말라야에 대해 국내에 알려진 게 거의 없었거든요. 하루는 체육부 담당자가 ‘또 왜 가냐’고 묻지 뭐예요. 그래서 에베레스트보다 높이는 낮지만 더 험한 산이라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이유를 댄 뒤 두 번째 정찰대는 ‘시등대’라는 타이틀을 달았어요.”
김인식 회장은 “그래도 8명인가 사고를 당하는 악천후 속에서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 세 명이나 오르는 쾌거를 올렸다”며 “그 때 우리 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외국의 유명 산악인도 많은데, 유명한 예지 쿠쿠츠카도 그 중 한 명”이라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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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2년 만의 악수’. '88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 단장이었던 김인식 회장은 당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과 22년 만에 찾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2 2008년 73세 나이에 홀로 나선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에서 최고점인 토롱패스에 선 김인식 회장. 3 2008년 9월 고쿄피크 정상. 김인식 회장이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등지고 서 있다.
- 50세 때 아콩카구아 등정, 스포츠신문 1면에 대서특필
“1988년 에베레스트-로체 원정에서는 에베레스트를 6명 오르고, 로체도 3명 올랐어요. 지금은 하루에 100여 명이 오르는 날도 있다지만 그때까지 우리 산악계에 에베레스트 등정자는 고상돈과 허영호 두 명밖에 없었어요. 로체는 한국 초등이었고요. 그 덕에 지프차 타고 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고 국립묘지 참배도 했어요. 우습기도 하지만 영광스런 일이기도 했어요.”
김인식 회장은 “이래봐도 한국 초등 기록이 몇 개 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1984년 아콩카구아(6,959m) 정상에 올라 고산 등정의 기쁨을 맛본 바 있는 김 회장은 1989년 구소련과 수교 전에 엘브루즈(5,642m)를 한국인 최초로 등정하고, 1991년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 한국 초등을 해냈다.
“아콩카구아는 산악회 후배인 장봉완 대장과 함께 갔어요. 그런데 먼저 정상에 오른 장 대장이 제가 못 올라오려니 하고 내려왔요. 그 바람에 장대장은 두 번이나 정상을 올랐어요. 저와 함께 또 올랐으니까요. 그땐 먼저 올라간 사람이 자기네 페넌트를 정상에 놔두면 다음 등정자가 자신의 증표를 놔두고 대신 먼저 팀의 증표를 가지고 내려왔어요. 정상에서 남미 대륙을 바라보는 기쁨도 대단했지만 내려와서 더 대단했어요. 일간스포츠 1면에 대서특필됐어요. 50에 남미 최고봉 올랐다고요. 그 땐 웃겼죠, 정말.”
김인식 회장은 엘브루즈가 유럽 최고봉이란 사실은 그 산을 오를 때서야 깨달았다. 킬리만자로는 모 신문사 기자가 올랐다고 보도한 바 있지만 현지에 가서 보니까 사실이 아니었다. “그 덕에 생각도 안 했던 한국 초등의 영광을 얻은 거예요. 몽블랑은 말도 말아요. 아콩카구아 갈 때 샀던 플라스틱 이중화를 신었는데 아 글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은 1995년 환갑을 기념해 도전했다. 일행에 비해 고산 등반 경험이 많은 김 회장이 정상 직전 마지막 산장인 구테산장(3,819m)을 오를 때 앞장섰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오르기 쉽도록 설사면에 발자국을 만드는 사이 플라스틱 이중화 등이 깨져나가고 말았다. 이중화 코를 끈으로 동여매고 어렵사리 산장에 올라 고민하자 마침 더 이상 산행을 하지 않겠다는 일행이 이중화를 빌려주는 덕분에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발 빌려 신고 정상에 올랐어요. 그런데 산장으로 내려와 신발을 바꿔 신었더니 곧 나머지 한 짝도 깨져나갔지 뭐예요. 말 말아요. 그 때 고생한 것 생각하면 지금도 발바닥이 욱씬거리는 것 같아요. 얄팍한 이너슈즈 신고 거친 바윗길과 너덜 길을 내려왔으니까요. 그래서 샤모니 도착하자마자 새 신과 아이젠을 장만했어요. 정말 좋더군요.”
바위밑샘에 이어 절터를 지나 능선에 올라섰을 때 갈림목에서 웬 사내가 아이스케이크를 팔고 있었다. 김 회장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우리도 하드 하나씩 사먹자” 했다. 새벽잠을 떨쳐내고 동네방네 뛰어다니던 신문팔이 청소년 시절이 생각나는 듯했다.
“아콩카구아는 12년 만인 1996년에 다시 찾았어요. 놀랍더군요. 예전에 있던 빙하가 완전히 사라지고, 베이스캠프 부근에 있던 웅덩이의 물도 바짝 말라붙어 있더군요.”
김인식 회장은 말로만 듣던 지구온난화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그가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그 즈음부터였다. 그래서 우이령보존회를 초대회장으로서 이끌고 한국트러스트와 생명의 숲에서 감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생명의 숲 행사 중 ‘산촌 가꾸기’와 ‘학교 숲 가꾸기’ 행사에 참가했다.
“아니, 뭔 일기예보가 이래. 오늘 점심때면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더니 비가 오잖아.”
날씨가 맑아진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쏟아지기 시작한 비를 피하기 위해 치마바위 위 숲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배낭에서 꺼낸 식사는 찹쌀떡 3개가 전부였다.
“당뇨가 집안병력이에요. 그래서 결혼 직후부터 소식을 생활화했어요. 아침은 오곡밥에 야채를 듬뿍 먹어요. 점심은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먹고요. 단지 저녁은 탄수화물은 안 먹는 걸 원칙으로 해요. 사람 만날 일이 많다 보니 술자리를 자주 해요. 그때 먹는 안주로 저녁식사는 끝내요.”
해외 트레킹 나설 때에도 일단 비행기를 타면 밥과 김치는 잊고 지낸다는 김인식 회장에게 1주일에 2회의 등산과 1주일에 4일간의 헬스는 생활이다. 일요일은 무조건 산에 가고, 토요일에는 못 가면 주중 산행으로 대체한다.
“얼마 전에 후배한테 사무실을 넘겨줬어요. 저는 도와주는 정도만 하면서 지내요. 그래서 시간이 많이 나요. 가고 싶을 때 해외 산도 갈 수 있는 거고요. 점심 먹고 한 시간쯤 쉰 다음 운동을 해요. 자전거로 몸을 풀고 트레드밀에서 경사 9등급에 시속 5.5km 속도로 30분 걸어요. 전문가가 400m 높이의 산을 오르는 거나 마찬가지라 하더군요. 웨이트트레이닝도 꼭 해요. 17가지 운동기구를 다 사용해 온몸 구석구석을 튼튼하고 유연하게 하는 운동이에요. 그래야 산길을 마음놓고 다닐 수 있어요. 순발력을 잃지 않으니까요.”
김 회장은 지난 봄 엄홍길재단의 팡보체 초등학교 준공식에 참가했다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왔다. 그간 히말라야를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는 88 에베레스트-로체 원정 이후 22년 만이었다. 거기서 엄홍길 대장과 감격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1988년 원정 당시 김인식 회장은 단장이었고, 엄홍길 대장은 거의 막내급 대원이었다. 그에게 88올림픽은 남다른 원정이다. 때문에 2008년 원정 20주년을 기념해 참가대원들의 근황과 프로필을 담은 <21인의 선택>을 낼 때도 큰돈을 쾌척했던 것이다.
“하얀 산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 같아요”
김인식 회장은 자신의 산행과 건강에도 큰 힘을 쏟으면서 주변 사람들 챙기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산악인으로 이름나 있다. 서울시산악연맹 임원을 거친 사람들의 모임인 ‘산사모’ 창립멤버이기도 한 김인식 회장은 오는 10월 10일에는 서울산악동우회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서울산악동우회(cafe.daum.net/sanakdong)는 서울시산악연맹 역대 임원 출신들의 모임이다. 모두 모일 경우 줄잡아 100명이 넘는다.
“잘 나갈 때야 무슨 상관 있겠어요. 하지만 일도 그만두고 나이 먹으면 만나자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외로울 때 서로 만나서 사는 얘기도 나누고 산도 함께 다니면서 건강을 챙기자는 뜻에서 만든 모임이에요. 이렇게 사람 많이 만날 수 있는 것도 무엇보다 건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면에서 적기에 직장을 그만둔 것 같아요. 다니고 싶은 산 다 다니고, 스트레스 받지 않아 건강하게 지내잖아요. 거기다 지금처럼 젊은 사람들과 해외 고산을 다닐 수 있고요.”
바쁜 생활 속에서도 김인식 회장은 트레킹 나설 때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고산 트레킹을 통해 노년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보다 한참 나이 어린 사람들과 어울려 고산을 오르고 나면 자신감이 생겨요. 어떤 일을 만나든 위축되지 않고요. 힘들지 않을 리 있겠어요. 지난해 몽블랑 라운드 트레킹할 때에는 힘들더라고요. 열하루 줄곧 걸었으니까요. 김남조 시인의 ‘그대 있음에’라는 시 알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예요. 그 시에서 나오는 말처럼 히말라야 하얀 산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산이 불러주니까 가게 되고, 그 산이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회만 닿으면 하얀 고산에 가려고 해요. 앞으로도 내가 오를 수 있는 높이까지는 오를 생각이에요. 그래야 하얀 산이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테니까요.”
/ 글 한필석 부장
사진 이경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