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지켜지는 곳”
심판의 오심 세계적 선수 실축보다 적어
월드컵, 세상사에 규칙 따르는 드문 현장
월드컵이 한창이다. 한국이 그리스를 2대0으로 이기면서 열기는 더 뜨겁다. 그리운드에서 모든 선수들이 조국의 이름을 앞세우고 뛰는 경기니 만큼 열정이 넘칠 수 밖에 없다. 파울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판은 언제나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결정적인 파울이나 오프사이드 선언마다 희비가 교차할 수 밖에 없다. 스포츠 관중은 잔인하고 단순하다. 언제든 야유를 퍼부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 대상 1순위는 물론 심판이다. 우리 편에 유리한 판정을 내린다 치면 아무 말 않다가도 단 한번이라도 불리한 판정을 내리면 심판을 적으로 돌려 세운다. 상대 팀은 12명이 뛰었다고 열변을 토한다.
오프사이드나 페널티킥은 골과 직결된다. 한국이 2006년 독일 월드컵 스위스와의 경기서 선심의 오프사이드 깃발에도 불구하고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아 실점한 일이 있었다. 물론 이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FIFA는 월드컵 경기서 심판의 판단 이외에 비디오 판독 등 어떠한 기술적 지원도 배제시키고 있다. 심판도 게임을 펼치는 일원이라는 인식과 축구가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역사성 때문이다.
월초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의 퍼펙트 게임이 심판의 판정 실수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야구의 나라 미국에서는 이게 여전히 화제다. 모르는 이들을 위해 당시 상황을 소개한다. 6월2일 한국인 선수 추신수가 맹활약하고 있는 클리블런드 인디언스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원정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의 타이거스 선발 투수는 아만도 갈라라가.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3년차다. 추신수를 비롯해 아무도 그의 볼을 공략하지 못했다. 9회초 인디언스의 마지막 공격, 2아웃 상황에서 제이슨 도날드가 타석에 섰다. 그가 친 타구는 1루와 2루 사이로 흘렀고 1루수 미구엘 카브레라가 이를 잡아 1루 커버에 들어간 갈라라가에게 던졌다. 평범한 땅볼 아웃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사상 21번째 퍼펙트 게임의 주인공이 탄생하려는 순간 1루심 짐 조이스가 세이프를 선언했다.
타이거스 선수들과 코칭스탭의 거센 항의와 관중석의 야유가 뒤따랐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3대0으로 경기는 끝났고 갈라라가는 완봉승에 만족해야 했다. 심판 조이스는 이 순간을 비디오로 다시 봤다. 완벽한 아웃이었다. 타자가 적어도 한 스텝은 늦게 베이스를 밟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투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기록을 심판이 날려 버린 것이다.
조이스는 자신의 판정 실수를 인정하고 갈라라가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판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버드 셀릭도 번복은 없다고 못박았다. 심판의 판정도 경기의 일부라는 이유에서 였다. 메이저리그는 홈런판정에 한해서 리플레이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번 판정 해프닝 이후 모호한 파울볼과 세이프, 아웃 등에도 리플레이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 오심 사건 직후 ESPN의 야구매거진이 메이저리거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리플레이제 도입 여부와 심판 인기조사 등이 질문에 포함됐다. 조이스의 오심 번복 여부도 물론 물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집계결과가 나왔다. 선수들이 뽑은 최고의 심판에 조이스가 53%의 득표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의 오심 번복 여부에 대해서는 무려 86%가 반대했다. 리플레이제 도입 문제도 77%가 반대입장을 밝혔다.
이 정도면 선수들이 얼마나 심판의 판정을 존중하는지를 알 수 있다. 판정도 경기의 일부고 심판도 선수와 함께 경기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조이스는 올해 54세다. 메이저리그 심판 경력 22년차다. 메이저리그의 모든 경기에는 풀타임 심판 68명이 투입된다. 이 자리에 오르려면 마이너리그에서 10년내지 12년의 경력을 쌓아야 한다. 이후 메이저리그 심판의 휴가 기간 중 대체 심판으로 수백게임 또는 1천게임에 투입되어 경험을 쌓아야 정식 심판이 된다.
대우는 162게임 기준으로 1년차가 연봉 12만달러 가량이고 최고 35만달러까지 받고 있다. 이동시 1등석 항공권과 최고급 숙식이 제공된다. 이 자리를 노리고 있는 마이너리그 심판은 모두 225명에 달한다. 이들은 월봉 2천~3천달러에 싸구려 숙식 대우를 받는다. 메이저와 마이너 심판의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다.
심판은 수준 높은 경기 일수록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메이저 리그가 그렇고 월드컵 축구도 두 말이 필요치 않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경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심판이 투입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도 판정에 실수는 나온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 경기 중 선수들이 항의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항의해 봤자 자칫 경고를 받고 퇴장까지 당할 수 있다. 번복이란 있을 수 없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규칙이 정해져 있고 규칙을 적용하는 사람들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 배정됐다. 본선 참가 32개국이 모두 동의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있다지만 세계적 축구선수가 완벽한 찬스를 앞에 두고 실축하는 비율보다는 횟수가 훨씬 적다.
월드컵을 보며 왜 인류가, 특히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그토록 축구경기에 열광하는가를 생각해 봤다. 집단의 동질성 속에서 안정을 찾는 심리가 작용한다고도 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하나의 약속(규칙)이 지켜지는, 세상사에서는 드문 현장이기 때문이 아닐까. 심판은 그 지켜지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권위를 세울 수 있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무대가 월드컵이고 약속과 심판의 판정이 존중되는 곳은 어디든 아름답다.
(2010.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