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자 노동신문은 지난 7월 27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열병식 사진과 함께 김정은 동지를 중심으로 뭉치자는 기사를 게재했다.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가 만든 용어 중에 ‘overcoding(과대코드화 혹은 상위약호화라고 한다)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원래 존재하고 있던 약호로부터 보다 분석적인 부차 약호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어떤 최소의 의미를 부여하는 약호가 주어지면 보다 거시적인 일련의 표현들을 추가해 추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몇 개 안되는 팩트(fact)나 개념(concept)들을 가지고, 내용을 덧붙이고 부족한 부분을 상상적으로 추론해 또 다른 작가적 담론 즉 새롭게 창조된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overcoding은 담론을 풍성하게 만들고 기존의 언어들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의미들을 생산해내는 창조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담론행위들은 풍요해지고 하나의 코드에서 새로운 메시지들이 지속적으로 창출된다고 에코는 주장한다. 문학적으로 본다면,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코드들은 작가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이 교섭되면서 창조적으로 풍성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에코는 ‘교섭적 독해(negotiated reading)’라고 말한다. 즉, 다양한 기호들이 작가의 추론적 전제들과 교차되면서 독자들도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들을 또 다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같은 overcoding의 대표적인 사례는 소설과 드라마 같은 fiction물들이다. 하지만 완전한 허구의 소설이나 드라마보다는 기본적인 사실적 코드나 약호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큐 드라마’나 ‘사극’이 가장 전형적인 overcoding 형태의 픽션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극은 실제 역사적으로 존재했거나 기록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 언제나 인기를 끌었던 사극들은 살펴보면, 이 같은 overcoding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극전성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드라마는 ‘태조 왕건’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 등장하는 궁예에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역사서에 한 두줄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것도 우리 역사서가 아니라 중국역사서에나 겨우 기록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초반 궁예 관련 스토리는 ‘태조 왕건’의 인기를 견인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2007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주몽’ 역시 역사적 기록은 아주 미미하고, 등장인물 대부분은 거의 허구의 인물들이었다. 심지어 최근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이라는 인물의 실존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작년에 인기를 끌었던 ‘뿌리깊은 나무’는 스토리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달라, 과연 사실에 근거한 사극에서 상상력의 한계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근 이른바 ‘퓨전사극’이라 불리워지는 드라마들은 시대만 옛날이지 등장인물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현대인물에 가깝게 묘사되어 논란이 되기도 한다. 한류 돌풍을 일으킨 ‘대장금’이나 ‘허준’ ‘동이’도 그렇고 최근 시청돌풍을 일으켰던 ‘해를 품은 달’은 그야말로 overcoding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 모 종편채널에서 방송되었던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인조의 자식이 가짜라는 상황을 설정해, 방송말미에 이는 작가가 허구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자막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보면, 진정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overcoding이 최대한 절제된 사극은 ‘불멸의 이순신’ 정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드라마 역시 작가적 상상력이 적지 않게 반영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극들은 결국 몇 안 되는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을 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반영해서 보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대중문화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극은 ‘과거를 현재의 우리에게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게 만드는 역사적 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용의 눈물’이나 ‘왕과 비’와 같은 그나마 정통사극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극에서 보는 역사적 사실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사극이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극을 제작하는 제작자들의 책임의식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극은 사극일 뿐 시청자들이 역사적 사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이 21세기에서는 볼 수 없는 사극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한반도 북쪽에 위치한 지구상에 별로 남아있지 않은 ‘실질적으로 군림하는 세습왕조국가’에서 말이다. 솔직히 최근 북한의 장성택 처형 같은 사건은 근세이전 왕조국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일이다. 더군다나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어 내부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우리를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알려진 몇 안 되는 제한된 팩트들만 가지고 나머지는 추론을 섞어서 보도된 내용만 보고 각자 주관적으로 사건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overcoding이 엄청나게 강한 사극을 보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 장성택 처형과 관련되어 나오고 있는 ‘기관총으로 무참하게 사살했다’든지, ‘이설주와 염문설’ 등을 보면 이건 정말 사극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작가적 추론이 많이 가미된 사극 아닌 사극이 정말 재미있는 것은 많다. 어쩌면 언론사들 입장에서는 재미를 바탕으로 시청률을 올려보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정말 시대에 걸맞지 않는 ‘북한왕조의 임금놀이(?)’를 사극처럼 즐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사극에서나 나올 수 있는 상상속의 일들이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그냥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극 정도라고 즉자적 자세로 즐기기에는 지금 북한의 ‘임금놀이(?)’는 너무나 위태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