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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2강-4 (2013. 10. 21.)
陳少卿 季任(一)
↓ 63쪽
昔에 朱世英이 嘗以書로 問雲庵眞淨和尙云호대
佛法이 至妙하니 日用에 如何用心하며 如何體究리닛고
望慈悲指示하소서
眞淨이 曰 佛法이 至妙無二하니
但未至於妙則互有長短이어니와 苟至於妙則悟心之人이라
如實知自心이 究竟하야 本來成佛이며 如實自在며 如實安樂이며
如實解脫이며 如實淸淨하야 而日用에 唯用自心이니 自心變化를
把得便用이언정 莫問是之與非라 擬心思量하면 早不是也니
不擬心하면 一一天眞이며 一一明妙며 一一如蓮花不着水하야
心淸淨超於彼니라 所以迷自心故로 作衆生이요
悟自心故로 成佛이니 而衆生이 卽佛이요 佛卽衆生이어늘
由迷悟故로 有彼此也니라
如今學道人이 多不信自心하며 不悟自心하고
不得自心의 明妙受用하며 不得自心의 安樂解脫하고
心外에 妄有禪道라하야 妄立奇特하며 妄生取捨하나니
縱修行이라도 落外道二乘의 禪寂斷見境界라→ 라하시니
↑진정화상 曰
所謂修行에 恐落斷常坑이니 其斷見者는
斷滅卻自心의 本妙明性하고 一向에 心外着空하야 滯禪寂이요
常見者는 不悟一切法空하고 執着世間諸有爲法하야 以爲究竟也라
昔(석)에 朱世英(주세영)이, 昔에 주세영이라는 사람이
嘗以書(상이서)로, 서로 일찍이 편지로써
問雲庵眞淨和尙云(문운암진정화상운)호대,
운암진정화상에게 물어 말하되,
佛法(불법)이 至妙(지묘)하니, 불법이 지극히 미묘하니
日用(일용)에 如何用心(여하용심)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用心하며,
如何體究(여하체구)리닛고? 어떻게 궁구해야 합니까?
여기 體究라고하는 말은 궁구하다ㆍ참구하다. 이런 뜻입니다.
어떻게 참구해야 합니까?
望慈悲指示(망자비지시)하소서.
바라건대 자비로서 지시해 주십시오.
眞淨이 曰(왈), 진정 화상이 말하기를
佛法이 至妙無二(불법지묘무이)하니,
불법이 지극히 미묘해서 둘이 없으니,
但未至於妙則(단미지어묘즉), 다만 그 미묘한데 이르지 못했다면
互有長短(호유장단)이어니와, 서로 長短이 있거니와,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고, 옳은 것ㆍ그른 것, 그런 것이 있지만,
苟至於妙則(구지어묘즉), 진실로 그 미묘한 자리에 이른다면
悟心之人(오심지인)이라.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불법은 사실 아주 미묘한 것이고, 또 아주 지극한 경지고요.
그런데 그것은 한 마디로 “마음을 깨닫는 자리다.ㆍ마음의 경지를 두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깊은 산속도 아니고, 높은 봉우리도 아니고요.
바로 “마음자리야 말로 가장 높은 봉우리이고, 가장 깊은 심연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悟心之人이라.
如實知自心(여실지자심)이 究竟(구경)하야,
여실하게 자기 마음의 究竟. 究竟이라고 하는 말은 “궁극이다.ㆍ최고의 경지ㆍ마지막 경지.” 최고의 자리다. 하는 것을 알아서
本來成佛(본래성불)이며, 본래부터 성불입니다.
“본래부처다.” 이 말이지요. 본불. 우리가 깨달음도 “본각ㆍ시각”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본래부터 깨달아 있는 자리. 비로소 그것을 확인하는 일. 그것을 “시각”그러지요. 本來成佛이며
如實自在(여실자재)며,
여실히ㆍ사실과 같이ㆍ진실과 같이 자재하며,
如實히 安樂(여실안락)이며 如實히 解脫(여실해탈)이며,
“아주 그대로ㆍ사실대로” 이 말입니다.
如實히 淸淨(여실청정)하야 而日用(이일용)에
唯用自心(유용자심)이니, 오직 자기 마음을 쓰는 것이다.
말하는 것도 그놈이 들어서하고, 걸음을 옮기는 것도ㆍ차담을 먹는 것도, 무슨 일어나고 걷고 하는 것도 전부 그놈이 들어서하는 것이다. 바로 그 것이다. “그놈이 들어서” 하면, 또 거리가 약간 생깁니다.
“바로 그 것이다.ㆍ바로 그것이 하는 것이다.” 唯用自心입니다.
오직 自心을 쓰는 겁니다. 자기 마음 써서 이뤄지는 일이지, 마음 써서 이뤄지지 아니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自心의 變化(자심변화)를
把得便用(파득변용)이언정, 잡아서 곧 쓸지언정,
바로 이렇게 쓰는데, 바로 이것. 사실은 잡을 것도 없지요.
그렇지만 편의상 “잡아서 곧 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잡아서 곧 사용할지언정,
莫問是之與非(막문시지여비)라. 是非를 묻지를 말아라.
어느 것이 옳으냐? 뭐 화엄경이 옳으냐? 금강경이 옳으냐? 법화경이 옳으냐? 그런 것 물을 것 없습니다. 선불교에 있어서는 그런 것하고 아무 관계없이 바로, 뭘 똥을 잡든지 된장을 잡든지, 잡는 바로 그 놈인데요 뭘...
대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똥이든, 된장이든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잡는 그 놈입니다. 뭘 잡아도 잡는 그 놈입니다. 사용하는 그 놈ㆍ작용하는 그 놈이 진짜 주인공이지요. 莫問是之與非라.가 그 말입니다.
是와 非를 묻지를 말아라.
擬心思量(의심사량)하면,
마음을 헤아려서 사량하면 = 생각 하면,
早不是也(조불시야)니, 벌써 옳지 않다. = 벌써 틀린 것이다.
不擬心(불의심)하면,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것 같으면,
一一天眞(일일천진)이며, 낱낱이 천진면목 그대로이고,
一一明妙(일일명묘)며, 낱낱이 明妙 = 밝고 미묘한 것이며,
一一如蓮花不着水(일일여련화불착수)하야,
연꽃이 물에 묻지 아니한 바로 그 소식이다. 연꽃이 흙탕물에서 생기지만, 그 연꽃은 흙탕물에 하나도 젖지 않고 그대로 있잖아요. 그 우리마음은
心淸淨超於彼(심청정초어피)니라. 그러지요.
마음이 청정해서 저것을 초월한다. 저것은 뭡니까?
대상ㆍ경계. 우리가 보고 듣고 하면서 끊임없이 끄달리는 그것.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그것이 나중에는, 나중이 아니지요. 지금 모두가 우리는 습관화 돼가지고 벌써 경계가 주인이고, 진짜주인인 나는 어디 가버리고 없어요. 잊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주인 잊어 버린지 오래고, 지금 객이, 주인노릇 합니다. 경계가 내가 돼있다 이 겁니다. 경계가 내가 돼있습니다. 아~ 이것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빨리 주인 찾아야 됩니다. 경계가, 손[客(객)]이 남의 집에 와서 주인노릇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주인노릇 하고 있다니까요. 그 나그네 쫓아내려고 할 건 없고, 나그네는, 내가 주인행세하면 나그네는 저절로 물러가게 돼있습니다.
내가 이집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 인식만하면 끝입니다. “내가 주인이다.” 하고, 그 동안, “인감도장 다 내놔라.” 그런 복잡한 과정 필요 없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확실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확신을 갖는 것. 그러면 당당하게 주인노릇하고, 당당하게 주인노릇 하다보면 나그네는 저절로 물러가게 돼있습니다.
그 나그네라고 하는 것, 뭐지요? 경계ㆍ대상. 거기에 끄달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이지요. 이렇게 이야기해 놓고 보면 상당히 쉽지요?
一一이 如蓮花不着水하야 心淸淨超於彼니라.
所以로 迷自心故(소이미자심고)로,
그런 까닭에, 自心을 迷위한 까닭에 한 까닭에
作衆生(작중생)이요, 자기 마음을 미혹함 때문에 중생을 짓고,
悟自心故(오자심고)로, 자기마음을 깨달은 까닭에 成佛(성불)이니,
而衆生(이중생)이 卽佛(즉불)이요, 중생이 곧 佛이요,
佛卽衆生(불즉중생)이어늘, 佛이 곧 중생이거늘
由迷悟故(유미오고)로, 迷ㆍ悟를 말미암은 까닭으로
有彼此也(유피차야)니라. 彼此가 있다. = 너와 내가 있다.
사실 그 자리는 보는 나도 그 놈이고, 보이는 대상도 그 놈입니다.
사실은 彼此가 없지요. 우리가 모르니까 피차가 있는 것이지요.
너다 나다 하는 것이 있는 것이지요.
본래 그것이 하나입니다.
그것이 전부 하나가 들어서 분별하는 겁니다. 동서남북도 전부 다 객관적으로 사실은 있습니다. 우리 입장으로는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인식하기 이 전부터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내가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인정합니다. 그 순간부터... 예를 들어서 아버지도 나보다 30년ㆍ40년 먼저 이 세상에 오셨지만, 내가 아버지를 인정할 때부터 나에게는 아버지입니다. 그전에는 나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있었든지 없었든지 그것은 나하고는 아무도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금정산이 수 억만 년이 된 금정산이지만, 내가 인식한 것이 언제지요? 예를 들어서 50년 전ㆍ60년 전 하면 바로 그 때부터 금정산이 인정 되는 겁니다.
그 때부터 금정산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것은요? 발 뺄 수 없는 도리입니다.
도저히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간혹 우리가 그런 것을 가지고 토론을 참 많이 하거든요. 강원에서 토론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 제 3자의 입장에서 한 번 봅시다. 그러면 제 3자의 입장은 누구로부터 인정받는 겁니까? 제 3자의 입장도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그 때야 제 3자가 있게 됩니다. 대개 그것을 모르고, 그런 이치를 모르고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 수 만 년 된 금정산은 이미 인정받고 있었지 않느냐? 이것이지요.
둘이 다투는 사람 빼고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이것이지요.
그런데 그 제 3자의 입장도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른다고요. 깜빡 잊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인식할 때, 그 때 비로소 제3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인정하는 금정산도 그 때부터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좀 말장난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 하는 것 같은데요. 그것이 사실입니다.
迷ㆍ悟를 말미암은 고로 彼此가 있음이니라.
如今學道人(여금학도인)이, 요즘 學道人 = 도를 배우는 사람이
多不信自心(다불신자심)하며,
흔히 자기 自心을, 마음을 믿지를 못하며,
不悟(불오)自心하고, 自心을 깨닫지 못하고,
不得(부득)自心의 明妙受用(명묘수용)하며,
자기 마음의 明妙한 受用을 얻지를 못하며,
明妙 = 밝고 미묘한 그런 受用. 우리 마음자리 참~~ 기기묘묘하잖아요. 정말 여의주도 보통 여의주가 아닌 겁니다. 그 여의주에 대한 인식ㆍ확신이 서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경치도 그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것 가지고 놀면 그만, 그만인 겁니다.
自心의 明妙受用이 바로 그 겁니다. 自心의 明妙受用을 얻지를 못하며,
不得(부득)自心의 安樂解脫(안락해탈)하고,
自心의 安樂解脫도 얻지를 못하고,
心外(심외)에 妄有禪道(망유선도)라하야,
망령되게 마음 밖에 禪道가 있다. 마음 밖에 따로 참선이 있다. 이렇게 여기는것이지요. 참~~ 이 선법문은요? 가만히 깊이 사유해 들어가 보면 정말 정곡을 찌르는 것입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心外 妄有禪道라. 마음 밖에 따로 참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무리 고준한 어떤 법문ㆍ고준한 소견. 하늘을 찌르고 저~~ 33천 높이까지 있는 어떤 그런 도리라 하더라도, 그것 또한 내 마음 안에 있는 겁니다. 그것 또한 내 마음이 인정함으로부터, 내가 인식함으로부터 존재하는 겁니다. 그 전에는 없습니다. 그 전에는 전혀 없는 겁니다.
33천이 아니라, 又(우) 33천이라 하더라도 전부 내 마음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心外 妄有禪道라하야
妄立奇特(망입기특)하며, 망령되게 기특함을 세우며,
“아~~ 참선 대단한 거야ㆍ위빠사나 대단한 거야.” 이러는 것이지요.
그 주인공ㆍ마음자리는 그만 망각 한 채...
妄生取捨(망생취사)하나니, 망령되이 取捨를 내나니
縱修行(종수행)이라도, 그렇게 해가지고는 비록 수행한다하더라도
落外道二乘(낙외도이승)의 禪寂斷見境界(선적단견경계)라.
禪寂ㆍ斷見境界. 斷見.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하는, 외도 이승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항상 하다든지, 아니면 없다든지 딱 그런 치우친 소견. 특히 이승들은, 이승은 성문ㆍ연각 아닙니까? 소승들은 斷見境界하는 空도리에 떨어져 있다 이 말입니다. 禪寂斷見境界하는 空에 떨어져 있다.
간단하게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禪寂斷見境界라 하시니, ←이것이 누구의 법문이지요?
저~ 기 진정 화상의 佛法이 至妙하니, 眞淨이 曰 佛法이 至妙無二하니, ←이 법문이 여기까지 옵니다. 본문에 토가 조금 잘못 달렸습니다.
토를 禪寂斷見境界라하시니, 그 다음에 所謂修行에 ←이 말은 대혜스님 글입니다. 대혜스님은 이렇게 과거 조사스님들, 아니면 경전의 말씀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인용을 잘하십니다. 그래 논리가 아주 뛰어난 사람들은 온갖 그런 참고 사항들을 제대로 적재적소에 인용을 잘해서 증거를 삼을 줄 알아야, 그것이 논리의 고단수라고 할 수가 있지요.
所謂修行(소위수행)에 恐落斷常坑(공락단상갱)이니,
斷坑ㆍ常坑. 斷 = 없다고 생각하는 것. 常 = 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다 구덩이에 떨어졌다 이 말입니다. 구덩이에 떨어진 것을 두려워함이라. 수행하는데 中道라야지, “없다.” 라고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되고,
“있다.” 라고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斷이나 常의 구덩이에 떨어진 것을 두려워한다. 수행하는데 제일 두려운 것이 그것이다.
일반ㆍ일상생활도 그렇습니다. 수행뿐 만이 아니고, 우리가 보통생활에서도 사실은 치우친 소견은 금물입니다. 그 어떤 것도 꼭 “이것이다.” 라고 그렇게 고집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 경우 따라서ㆍ상황 따라서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지요.
其斷見者(기단견자)는,
斷見 = 끊어진 견해. 아예 없다고 하는 견해ㆍ소견은
斷滅卻自心(단멸각자심)의 本妙明性(본묘명성)하고,
이 마음의 本妙明性 = 본래 미묘하고 밝은 성품. 뭡니까?
본래 미묘하고 밝은 성품. 우리한 한마음은 = 자심은, 말하자면 뭐라고 끄집어 낼 수도 없고 이름 지을 수도 없고,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 작용이 아주 기기묘묘하게 천만가지로 작용합니다. 이것이 本妙明性입니다. 미묘한 성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또 “있다.” 고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고요.
一向(일향)에 心外着空(심외착공)하야,
또 한결같이 마음밖에 공에 집착해서
滯禪寂(체선적)이요, 禪寂에 체재되는 것이고,
禪寂에 막혀버리는 것. 이것이 斷見者입니다. 그 다음에
常見者(상견자)는, 여기서 斷見ㆍ常見. 표현을 했습니다.
하도 斷見ㆍ常見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여기서 대혜스님께서 진소경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常見者는 不悟一切法空(불오일체법공)하고,
일체법이 공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執着世間諸有爲法(집착세간제유위법)하야,
세간의 모든 유위법에 집착해서,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을 전부 집착해서
以爲究竟也(이위구경야)라. 그것이 최고라고 여긴다.
究竟 = 마지막ㆍ최상. 이것을 究竟이라고 표현하지요. 최상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常見이라고 하는 견해고요.
邪師輩가 敎士大夫로 攝心靜坐하야 事事莫管하고
休去歇去라하나니 豈不是將心休心하며 將心歇心이며
將心用心이리요
若如此修行인댄 如何不落外道二乘의 禪寂斷見境界며
如何顯得自心의 明妙受用과 究竟安樂과
如實淸淨解脫變化之妙리요 須是當人이 自見得하며 自悟得하면
自然不被古人言句轉하고 而能轉得古人言句하리니
如淸淨摩尼寶珠를 置泥潦之中하야 經百千歲라도 亦不能染汚니
以本體自淨故라 此心도 亦然하야 正迷時에 爲塵勞所惑이나
而此心體는 本不曾惑이니 所謂如蓮花不着水也라
邪師輩(사사배)가 敎士大夫(교사대부)로,
삿된 스승무리들이 사대부들로 하여금,
攝心靜坐(섭심정좌)하야,
마음을 거둬들여서 조용히 앉아서, 그 말입니다.
마음을 거둬들여서 조용히 앉아서, 뭐 “호흡을 관찰한다.” 이런 표현은 없지만, 이것이 요즘 위빠사나하고 조금 닮은 데가 있습니다.
제가 화엄경강의 하다가 奉行佛敎常攝心(봉행불교상섭심). 그 말을
“참~~ 명언이다.” 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같은 攝心이지만 거기에는 여기의 경우하고 좀 다르지요. 거기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뭐냐?
奉行佛敎. 불교를 우리가 받든다고 하는 것. 불교를 공부한다. 불교를 수행한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뭐냐? “마음 단속하는 것이다.” 이럴 때 攝자는 단속이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거기서, 화엄경에서는 그 뜻입니다. “마음 단속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도 내가 그 상황에 이끌려가서 거기서 “옳다ㆍ그르다. 좋다ㆍ나쁘다. 그렇게 하면 되느니ㆍ안 되느니,” 하는 것. 그것 뭡니까? 내가 마음이 벌써 거기에 끄달려가서 그렇게 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거기에 마음이 끌려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겁니다.
불교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저도 하도 많은 것에 끄달리다 보니까, ‘아~ 끄달리지 말고 마음 단속 잘해야지,’ 내가 마음을 딱~ 이렇게 지키고 있으면 경계가 어떻든 간에, 예를 들어서 옛날에 사찰에서 뭘 행사를 하는데요. 사회를 보는데도, 그 사회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낱낱이 걸려가지고 기분이 상하고요.
또 도량을 장엄을 해놨는데, 그 때 무슨 선 법문을 한다고, 여러해 전에요. 전국에다 아주 광고를 해서 신도들도 많이 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禪” 하면, 첫 째 선 정신이 뭡니까? 簡潔ㆍ素朴입니다.
簡素라고요. 간소. 간결ㆍ소박한 것이 禪의 정신 가운데 1조입니다.
禪의 8대 정신 가운데 1조가 簡潔ㆍ素朴이라고요. 모든 것이 간결하고ㆍ소박해야 됩니다.
그래 선방에 가면 신발도 댓돌위에 가지런하잖아요.
방석을 정리해놔도 딱~~ 날이 서도록, 날이 서도록 방석정리 해야 됩니다. 그리고 가사를 걸든지 장삼을 걸든지 간에 아주 간결하고 다~~~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 이것이 禪의 정신의 제 1조입니다. 그런데 선 법문하는데 그 뒤에다가 막 울긋불긋한 탱화를 갖다 걸고, 곳곳에다 그냥 애드벌룬을 띄워서 막 온갖 깃발을 나부끼게 하고 그렇게 하더라고요.
‘야~ 저것 도대체 선을 아는가? 모르는가? 선을 알고 저렇게 선 법문 판을 벌렸는가?’ 그런 것들도 마음에 참~ 안 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야 뭐 선을, 법문을 하든지 무당 짓을 하든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내가 잘못입니다. 분위기를 완전히 무당 짓 하듯이 해놓고, 전국에 선사들 다 이끌어놓고 선 법문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그 어떤 분위기에, 무슨 법문을 한다하면 그 법문의 성격에 맞도록 장엄을 하는 것이 사실은 옳지요. 그런데 설사 그렇더라도 내가 마음이 끄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마음 단속 잘하는 攝心이 중요한 것이라고요. 그 무당 판에 내가 왜 마음을 씁니까? 무당 아니라 무당할아버지가 와서 푸닥거리를 하더라도 첫 째 내가 마음이 안 끄달려야지요. 내가 攝心이 안 된 겁니다. 마음 단속이 안 돼 있는 것이지요.
마음을 풀어놓으니까 여기 가서 찝쩍ㆍ저기 가서 찝쩍, 보는 대로 듣는 대로 가서 전부 찝쩍거리니까 내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불교는 攝心이다. 마음 단속 하는 것이다.
야~ 저는 화엄경에 그 구절 보고는 참 탄복했습니다.
奉行佛敎常攝心. 불교를 奉行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 단속 하는 일이다. 그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내 문제 일단 다 해결입니다. 그것이 비록 소승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그런 사고방식이지만, 내 문제는 끝나는 겁니다. 攝心ㆍ常攝心 = 항상 마음 단속 하는 것. 그렇잖아요.
우리가 그런 경우 참~ 많이 겪지요? ‘아이고, 내가 마음 안 끄달리면 되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후회하고ㆍ돌아와서 후회하고, 그래도 보면 또 끄달리고ㆍ보면 또 끄달리고... 불교는 攝心에 있다.
여기는 그 경우하고 다른 겁니다.
마음을 거둬들여서 靜坐 = 고요히 앉아서,事事莫管(사사막관)하고, 일마다 관섭하지 말고
休去歇去(휴거흘거)라하나니, 쉬어가고 쉬어가라.
이것도 제가 이야기한 것하고 뭔가 같은 맥락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豈不是將心休心(기불시장심휴심)하며,
이것은 어찌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냐? 또
將心歇心(장심흘심)이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냐?
休하고 歇하고 차이가 있습니다. 休는 처음부터 쉬는 것이라면,
歇은 마음이 피곤할 때 쉬는 것. 아예 처음부터 쉬는 것은 休라고 그래요.
피곤할 때 쉬는 것은 歇心 그래요. 저~ 기 야경을 보다가 쉬는 곳은 歇脚室(흘각실)입니다. 다리를 쉬는 곳. 휴각실이라고 안합니다. 밤새도록 도량을 돌다가 다리가 아프니까 그 아픈 다리를 쉴 때를 歇이라고 그래요. 쉴 歇자.
將心歇心이며 將心用心(장심용심)이리요.
마음을 가져서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豈不是하는 不자를 거기다 쓰면 됩니다. 豈不是. 전부 그 한마음인데, 그 마음 그대로인데 왜 그걸 가지고 다시 또 마음을 쉬려고 하며, 또 그 마음을 가지고 다시 또 그 마음을 사용하려고 하느냐? 물을 가지고 물을 씻는 것과 같이 그것이 안 맞는 일이잖아요.
若如此修行(약여차수행)인댄,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할 진댄,
如何不落(여하불락), 떨어지지 않겠는가? 어디에?
外道二乘의 禪寂斷究竟安見境界(외도이승선적단견경계)며,
외도이승들의 禪寂斷究竟安見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如何顯得(여하현득), 어떻게 드러내겠는가?
自心의 明妙受用(자심명묘수용)과, 自心의 아주 밝고 미묘한 수용과
究竟安樂(구경안락)과, 끝 까지 안락한 것ㆍ철저히 안락한 자리. 그 다음에
如實淸淨解脫變化之妙(여실청정해탈변화지묘)리요?
여실히 청정하고 해탈하고 변화하는 그런 미묘한 자리를 드러내겠는가? = 顯得. 낼 수 있겠는가?
須是當人(수시당인)이, 모름지기 當人이 = 당사자가
自見得(자견득)하며, 스스로 보아 얻으며,
自悟得(자오득)하면, 스스로 깨달아 얻으면,
自然히 不被古人言句轉(자연불피고인언구전)하고,
자연히 고인들의 言句에 굴려 감을 입지 아니하고ㆍ끄달려감을 입지 아니하고, 스스로 깨달을 것 같으면 화엄경 아니라 우 화엄경이라도 거기에 안 끄달린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而能 轉得古人言句(이능전득고인언구)하리니,
능히 古人의 言句를, 옛 사람들의 유명한 말씀ㆍ유명한 글귀들을 스스로 굴려요. 자기가 굴려가요. 조주스님은 딴 사람은 시간의 굴림을 받지만, 나는 시간을 굴린다. 그래서 “120을 살았다.” 이런 표현도 있듯이, 轉得古人言句라. 내가 능히 古人의 言句를 굴린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돼서 내가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이 말입니다.
如淸淨摩尼寶珠(여청정마니보주)를,
예컨대, 淸淨摩尼寶珠. 다이아몬드라고 합시다.
置泥潦之中(치니료지중)하야,
‘다이아몬드를 진흙 속에다 집어던졌다.’ 하자. 그래서 진흙 속에 들어가서
經百千歲(경백천세)라도, 100년ㆍ1000년을 지난다 하더라도
亦不能染汚(역불능염오)니, 또한 능히 염오되지 않으니,
진흙 속이 아니라 똥통 속에 들어가서 천 년ㆍ만년 지난다 하더라도 다이아몬드는 물들지 않잖아요. 더럽혀지지 않아요. 똥통 속에 빠졌던 다이아몬드라고해서 값이 떨어지지도 않아요. 씻어버리면 깨끗한데요.
아무 이상 없는데요. 그런데 똥통 속에 들어갔던 다이아몬드라고 누가 뭐, 값이 떨어지거나 그럴 까닭이 없는 겁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그와 같은 것이다. 결론은 그것입니다.
진흙 속에 들어가서 百千歲를 지난다 하더라도 물들지 아니함이니,
왜 그러냐? 以本體自淨故(이본체자정고)라.
本體가 저절로 청정하기 때문에요. 本體스스로 청정하니까요.
본래 다이아몬드니까요. 다이아몬드는 처음부터 빛나는 것이니까요.
此心도 亦然(차심역연)하야, 이 우리들의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正迷時(정미시)에, 바로 미혹했을 때는
爲塵勞所惑(위진노소혹)이나,
번뇌 망상 온갖 경계에 미혹한 바가 되지만,
而此心體(이차심체)는, 그러나 이 心體는
本不曾惑(본부증혹)이니, 본래 일찍이 미혹하지 아니함이니,
우리마음 본체는 결코 미혹하지 아니해요. 온갖 경계를 만나서, 경계에 끄달리고 경계와 치다꺼리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마음자리는 결코 미혹하지 아니한다.
所謂如蓮花不着水也(소위여연화불착수야)라.
예컨대, 이른바 연꽃이 물에서 피지만 물에 젖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忽若悟得自心이 本來成佛이라 究竟自在하야 如實安樂하면
種種妙用이 亦不從外來리니 爲本自具足故라
黃面老子曰無有定法이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라하시니 若確定本體하야
↑2강-4
↓2강-5
實有恁麽事인댄 又却不是也리라
忽若(홀약), 홀연히 만약에
悟得自心(오득자심)이 本來成佛이라.
자기마음이 本來成佛이라.
究竟自在(구경자재)하야, 끝 까지 자유자재해서
如實安樂(여실안락)하면,
여실 안락함을 깨달으면, 여실 안락함을 깨달을 것 같으면
種種妙用(종종묘용)이 亦不從外來(역부종외래)리니,
온갖 미묘한 작용이 또한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리니,
爲 本自具足故(위본자구족고)라. 본래스스로 구족했기 때문이니라.
본래 구족해서 그래요.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다 있습니다.
어떤 무슨 지혜와 자비와, 어떤 능력도 전부 내 속에 다 있는 것의 발현됐을 뿐이다. 하는 것입니다.
黃面老子曰 無有定法(황면노자왈무유정법)이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라하시니,
공부하다 보니 금강경 아는 구절도 나오네요.
若確定本體(약확정본체)하야, 만약에 本體를 確定해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뭐 여래가 설한 설법이니 하는 것도 꼭히 무슨 성문화 되고, 언어화 되고 그렇게 법문으로 정해져 있는 것만 아니지요.
바람소리ㆍ물소리가 다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인데...
無有定法如來可說입니다.
첫댓글 _()()()_
把得便用이언정 莫問是之與非라
날마다 뻐꾹왈츠!!!
날이면 날마다 無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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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用自心~~
내 자신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
自心의 明妙受用~~
悟得自心이 本來成佛이라~~
釋대원성 님!! 고맙습니다.._()()()_
나그네= 경계ㆍ대상에 끄달리지 않으면,
경계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일 때
우주가 곧 나고 내가 곧 우주라는 사실
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一一如蓮花不着水하야 心淸淨超於彼니라...
내 자신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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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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