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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은 노회한 사기꾼 **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청년이 저승엘 갔다. 하나님이 사자의 명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름이 없었다. “이 게 어떻게 된 거야.”하고 소리를 지르자 저승차사는 “옆집 노인을 데려온다는 게 뭔가 잘못 된 것 같습니다.”라고 고했다. “자넨 실수로 온 거야. 다시 내려가게.” 하나님은 미안한 마음이 앞서 “소원 한 가지만 말해보게.”라고 말했다.
천당의 오류로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게 된 청년은 “큰 소원은 없습니다만 해질녘에 석양 주나 한두 잔씩 마시고 한 주에 두어 번 골프나 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야, 이놈.”하고 벼락이 떨어졌다. “그런 팔자로 살 수 있다면 내가 그 자리로 가지, 뭐 할 짓 없어 여기 죽치고 앉아 천당 갈 놈 지옥 갈 놈이나 가리고 있겠어.”
원나라 때 문인 초려 오징의가 쓴 ‘철경록’이란 글을 읽다가 항간에 떠돌고 있는 유머가 생각나 적어 본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독에 술이 비지 않고 부엌에 연기가 끊이지 않고 띳집의 비가 새지 않는 것이다. 포의(布衣)를 입고 숲에 가서 나무를 하고 강에 나가 고기를 낚을 수 있다면 영화도 욕심도 없이 그 낙이 도도할 것이다.”
술과 밥이 푸짐하고 넉넉한 땔감과 고기반찬까지 곁들였는데 더 무엇을 바라랴. 이는 논어 7편 술이 편에 나오는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또한 즐거움이 있으니...(飯疏食飮水 曲耾而枕之 樂亦在其中)”란 공자의 안분지족 사상과 사뭇 닮아있다. 분수를 알고 만족한 삶을 사는 이에겐 하나님도 천수를 누리게 하지만 가득 채워져 흘러 넘쳐도 항상 모자람 속에 사는 욕심쟁이에겐 이미 주었던 수명마저 빼앗아 버리기도 한다.
동서양의 문인 묵객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술은 과연 어떤 물건인가. 귀거래사를 지었던 도연명도 ‘동이에 가득한 술’을 반겼고, 손님 둘을 초청하여 강에 배를 띄워 적벽부를 읊었던 소동파도, 꽃밭에 앉아 잔 들어 달을 청해 술을 마셨던 이백도 술을 하늘 같이 모신 주선(酒仙)들이다.
분자구조가 C2H5OH(에틸알코올)인 같잖은 물질인 술에 코가 꿰어 평생 종으로 살다 간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술은 투명 보다 더 맑은 빛으로 내 몸 곳곳에 스며들면 어둠 속에 잠겨버린 이 세상마저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허망한 찬사를 무턱대고 따랐기 때문인가. 술은 삶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자 동시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술을 완벽하게 설명한 정답은 아니다.
술은 사랑보다 더 독한 매력이 있고 수렁에 빠질 줄 알면서도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술잔에는 눈금으로 나타나지 않는 대취(大醉)와 미취(微醉)의 분수령 같은 게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분수령 주변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패가망신하기도 했다.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 한 잔을 마시면 대취로 넘어가고 그 한 잔을 마시지 않으면 무사 귀환할 수 있는 길목의 잔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취한 눈은 안목이 없어 숨바꼭질하는 길목의 잔을 가려내지 못한다. 그 잔은 다음날 아침 “그 한 잔만 안 마셨어도...”하는 후회를 낳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술 마시는 법도를 이렇게 정해 두었다. “봄 술은 정원에서, 여름에는 들에 나가서, 가을 술은 조각배 위에서 마시는 게 좋다. 엄격한 자리에선 천천히 유장하게 마시고, 속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로맨틱하게 마시되 슬픔의 술은 취하기 위해 마셔라. 그리고 꽃과 조화를 이루려면 햇볕 아래서 꽃과 함께 취해야 하며, 상념을 씻으려면 밤의 눈(雪) 속에서 취해야 하고, 뱃놀이 하면서 마시는 술은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취하라. 이런 법칙을 모르고 술을 마시면 음주의 낙은 잃게 될 것이다.”
이런 법도를 정해 두었으면 응당 따라야 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이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유독 다산만은 두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글공부는 아비를 따르지 않고 주량만 아비를 넘어서는 거냐. 술 맛이란 입술에 적시는데 있는 것이다. 과음하지 말거라.”고 타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희망대로 술을 줄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술수의 명인이자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조조도 “인생은 아침 이슬 같은 것, 술 마시고 노래하세, 근심을 잊게 하는 건 오직 술 뿐 일세.”라고 읊었다. 사실 술은 무식한 신사 같지만 노회한 사기꾼이다. 사람의 몸 어딘가에 붙어 있는 마음을 자유자재로 떼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술은 은근하고 여유롭게 변화무쌍한 술수를 부리는 재주꾼이다.
술은 쓸 만한 인재를 취객으로 만들어 산중에 가두기도 하고 재주 있는 환쟁이를 겨울 거리로 내몰아 눈밭에 얼어 죽게 만들기도 한다. 양나라 도홍경이란 선비도 술이 좋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속에 숨어 살았다. 임금이 그를 불러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요. 고개 위에 흰 구름 많지요. 혼자 즐길 수는 있어도 임금님께 갖다 드릴 순 없지요.”라고 말했다. 다음 임금도 벼슬자리를 주려 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노회한 사기꾼인 술이 저지른 일은 수 없이 많지만 술이 풍류에 이바지한 공은 정말 만만치 않다. 사기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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