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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그거 먹는거예요?
덕현스님
배고플 땐 밥 생각뿐이다. 때맞추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큰 기쁨이요, 더없는 삶의 위안이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러울 만큼 많은 밥을 먹었다. 그 중 내가 손수 해 먹은 밥은 한 10분의 1도 못될 것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른 분들이 지어준 공양이었다.
먹지 못하면 죽었을 게 뻔하니, 그만큼 내 삶은 다른 분들의 사랑과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의미일 텐데, 나를 태중에 품어 사람이 되게 하고 젖을 먹어 기른 이가 이 땅의 한 여인이었듯이, 지금껏 내가 먹어치운 것들이 대부분 여인들이 손길을 거친 것들이었다면, 나는 지상의 보잘것없는 한 남자로서 이 땅의 여인들에게 크게 경배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긴 한데, 젖을 떼고 나서 내가 처음 먹게 된 우리 음식은 첫술부터 너무 자극적이고 거칠고 맛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어른들 보기에 참 밉살맞은 데가 많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철딱서니가 없었고 매우 오만했고 주제를 몰랐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밥이 너무 질다, 국이 너무 맵다, 왜 이것과 저것을 따로 먹지 섞어 놓아서 둘 다 못 먹게 해 놓았으냐 투덜거리고, 심할 땐 밥을 숟가락으로 때리며 농성을 벌이다가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등짝이고 어디고 얻어맞는 게 일이었다. 부친은 엄격하지만 전혀 무자비한 분은 아니었고 오히려 내 행색이나 노는 꼴을 제법 곱게 봐 주시는 분이었음에도, 어디서 희한한 놈이 생겨 나와 가지고, 제가 무슨 상전이라고 밥맛 떨어지게 신성한 밥상 앞에서 끼니때마다 징징거리는 놈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 어른들은 특히 음식을 먹을 때 매우 조용하고 사뭇 경건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집안에 언제나 감돌던 유교적 분위기에다, 증조할아버지가 옛날 흉년 때 그놈의 양반 체면 때문에 얻어 드시는 대신 굶어서 돌아가셨다는 집안 내력까지 겹쳐서였던 것 같다.
사실 맛이란 주관적인 것이다. 음식 자체에 좋고 나쁜 무슨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사한 혀가 느끼는 것이다. 배고프면 식은 밥도 꿀맛이고 배때기가 부르면 수라상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천하의 진미가 다른 사람에겐 끔찍한 맛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익혀온 업에 따라 좋다 나쁘다 분별하게 된 것이며 익숙해진 것이다. 나도 점차 처지를 알고, 태어나서 자란 6-70년대 한국 시골의 식단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은 한 동네에 사는 고모 집에 가서 밥을 먹게 되었는데, 딸들이 많은, 퍽 가난한 집이었다. 점심으로, 방 가운데 옴박지(옹자배기의 방언) 하나만을 놓고 거기 시래깃국에 보리밥을 말아 예닐곱의 아이들이 수대로 빙 둘러앉아 너도나도 떠먹는 데 끼게 되었다. 국밥이 줄어들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놋수저가 질그릇 긁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투덜대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하나같이 착하고 예쁜 이 고모네 누이들과 함께한 성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차츰 소박하고 조촐한 우리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밥투정도 덜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어릴 때 고기를 먹으면 미련해진다는 미신을 가지고 계신 바람에, 한참 성장한 후에도 가끔이라도 고기는 먹으면 구토증이 났지만, 잔칫날 같은 때 먹게 되는 전어구이의 감칠맛이나, 홍어를 두엄더미에 삭혀서 만드는 미나리홍어회의 아르르한 맛 같은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살면서 누가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부분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 무슨 음악을 좋아하느냐, 무슨 색깔을 좋아하느냐, 사철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뭐냐, 엄마 아빠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물으면 도대체 어떻게 딱 찍어낸듯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부당한 편가르기 같았다. 모든것엔 장단의 양면이 있고 낱낱이 다 미세한 차이들이 있는데 과연 무슨 용단으로 한 장르를 다 좋아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장르들을 깡그리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늦게야 나를 이 곤혹스런 선택의 기로에서 구원해준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내사랑 담지였다.
"스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니?" 하고 누가 물었는데, 이 어린 조카가, "덕현 스님은 뭐든지 제대로 된 걸 좋아하세요." 하고 대답해 준 것이다.
아, 바로 그것이었다.
쓴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봄산에서 갓 뜯어온 곰취에 밥을 싸 먹을 때 입안에 차고 넘치는 그 쌉쌀한 향취에야 누군들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깨를 갈아 머윗대를 넣고 끓인 국을 다들 좋아하겠지만 야생 머위를 물에 불려 독기를 빼지 않고 요리해서 먹고 배탈이 난다면 누가 맛있었다고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무엇이 제대로 된 음식인가?
많은 얘기를 단순한 한자 몇으로 압축하자면, 생生ㆍ청淸 ㆍ화和 ㆍ향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 생(生)
먼저 음식은 생기가 넘치고 신선해야 한다.
우리는 육신을 부지하고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음식을 먹는다.
경전에 의하면, 겁초劫初에 광음천의 신들이 우리 세계에 와 살기 시작했을 때는 물질로 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몸은 가벼워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녔고 서로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상대의 마음을 알았다. 그 신들이, 땅에서 나는 샘물을 탐하여 마시게 되면서 몸이 빛을 잃어버리고 과일이나 곡물 같은 음식을 먹게 되면서 몸이 무거워져, 땅위를 걷는 인간이 되었다. 중생은 점차 더 업이 탁해지고 근기가 용렬해져, 서로의 몸을 탐하여 성욕이 생기면서 남녀가 갈라지고, 자기 것을 집착하여 더 모으고 서로 빼앗게 되면서 싸움이 생기고, 그것을 중재하느라 세상에 계급과 같은 온갖 불평등과 정치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겁劫이라고 하는 우주의 시간대 위에서 중생은 타락과 진화를 반복하는데, 결국 그 시작은 음식이고 뿌리는 욕망이며 최초의 원인은 자아에 관한 무지와 집착인 셈이다. 형체를 가진 자아로서 살아가는 중생들은 대부분 무엇인가를 먹음으로써 유지존속해가다 죽고, 그 생사 속에서 맴도는 것이다. 신들은 음식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견식見食을 하고, 아귀나 중음의 귀신들은 음식에 닿고 만지는 것으로 기운을 취하는 촉식觸食을 하며, 인간이나 축생들은 섭식攝食을 한다. 색계나 무색계의 천신들은 선열위식禪悅爲食, 곧 선정의 즐거움을 음식으로 삼아 살아가는데, 수행자 또한 선정에 들었을 때는 음식 없이도 몸을 지탱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기쁨을 먹이로 하여 생명을 이어간다. 삶에 낙이 없고 저마다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세상을 살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먹는 음식이 아무 맛도 없고, 주위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알고 기억된 것에도 아무런 재미가 없고, 사람들이 다 싫고, 누군가 자기를 아껴주고 좋아하는 것도 싫고, 아늑한 휴식도 위안도 없다면, 그 누가 이 지옥에 살아있을까?
우리는 다 지나간 한 생에서 죽어 중음의 공포와 불안정함과 상실감에 쫓기다, 생의 안락을 찾아 모태에 깃든 영혼들이다. 애초에 좋고 싫은 것이 없었다면 이 고난에 찬 생사의 업류業流에 끌려들 이유조차 없었으리라. 결국 우린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통하여 만족을 얻고, 거기에 묶이는 가없은 중생들이다.
오로지 이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업해에 뛰어든 불보살이 아닌 다음에는, 우린 모두 생래의 쾌락주의자들이다. 욕망이 즐거움을 찾는 일이고, 그것이 지나치거나 빗나갔을 때 모두를 괴로움에 빠뜨리고 마는 악이 되어버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쾌락주의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곧 나면서부터 원죄原罪를 짊어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 세상 사는 것이 죄업을 씻는 수행의 길이 되려면 그 삶의 길이 욕망을 덜고 비우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모범이 되고 길잡이가 될 만한 스승은 당연히 욕망과 자아를 비운 자여야 한다.
아라한을 마땅히 공양 받을 만한 자, 응공應供이라고 한다. 무아를 깨달아 더 이상 오욕락五慾樂을 탐하지 않게 된 자를 말한다. 아라한과阿羅漢果 이상의 불보살佛菩薩 같은 성인이라야 비로소, 자기 욕심이 아니라 다른 중생을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건지려는 순수하고 이타적인 지고의 목적만으로, 이 세상에 있고 없고를 자유로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블의 창세신화에 나온 대로 신이 이 세상을 지은 자라면 그는 과연 이 탐욕과 자아라고 하는 원죄를 벗어난 존재인가? 이것저것 마음대로 만들어내고 보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하는 신이란 결국 저 좋자고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닌가? 모든 행위는 원인이 되어 필연적으로 결과와 책임이 따른다. 창조자는 마침내 제멋대로 구는 인간을 만들어 내고는 그 노는 꼴에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게 되고, 마침내는 버럭 버럭 역정을 내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최후의 역작을 무자비하게 구겨버린다.
기록된 바를 냉정히 따져보면 종말의 신의 심판이라는 것도 구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처단이나, 저주, 혹은 대량살상이나 파괴의 일종으로 보인다.
우리는 누군가가 높은 지위에 있다 해서, 우리를 만들거나 낳았다고 해서 무작정 숭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치한 마음이다. 하는 짓 봐가면서, 그 됨됨이가 진실로 존경스러워야 비로소 참으로 경배할 마음이 나는 것 아닌가? 왜 신 앞에서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무작정 창조자의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가? 그런 신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고 알고 살아온 세월이 인류를, 나 자신을 영혼의 감옥에 가두고 끼쳐온 악영향과 무지의 독성을 이제 반성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가 신을 심판할 수는 없는가? 인간은 자기 존속의 욕망 때문에 내면에 고통과 소멸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두려움 때문에, 절대자로 상정한 '신'이라는 개념 앞에서 그만 오그라들어 나약한 '경외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경외심의 이면에는 자아의 욕망이 있을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힘 앞의 굴종, 그저 비겁함이나 순수하지 않은 타협일 뿐이다. 현대의 인류가 눈부신 학문의 성과나 첨단의 과학기술에 만족할 수 없어, 생명들이 누릴 수 있는 진실한 행복의 길을 종교에서 찾으려면, 더 이상 종교를 우스꽝스럽고 비이성적인 신화의 세계에 가두려 들어서는 안 된다.
설령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 해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가 신을 맹종하고 신만을 사랑하며 살고, 신의 뜻대로만 살고, 더구나 신을 위하여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일이 아니고 자타의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이기적인 이유나 자존심 때문에 화를 버럭 버럭 내며 보복과 응징을 일삼는 신, 질투심과 독선으로 중무장한 신은 결코 성스럽지 않다. 아상我相과 오욕락五慾樂을 깨끗이 떨친 아라한과 이상의 성인의 지위는 결코 넘볼 수 없는 천박한 중생일 뿐이다. 아무리 오래된 고대문서에서부터 등장해온 신이라 해도, 이제 인류는 고대의 인간이 만든 유치한 신화 속의 신, 도덕적이지 않고 별로 공경스럽지 않은 신과 그만 결별해야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책엔, 학과의 '창조'라는 과목 시간에 여러 번 인류와 문명을 창조했다가 맘에 안 들면 마치 컴퓨터 시스템을 초기화하듯이 깨끗이 쓸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면 이 이야기들은 몇 세기 지나지 않아 사이버공간에서라도 인류에게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탐험과 과정엔 엄청난 도덕성 논란이 있겠지만 …….
예전에 잠시 망상이 일어 한 SF영화의 시나리오를 구상해본 적이 있다.
어떤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연구하는 천재 과학자가, 몸의 크기는 미생물만 하고 수명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지만 지능은 상당히 높은 인간을, 자신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곧, 실험실 안의 작은 유리상자 안에서 펼쳐지는 새 인류 역사의 시뮬레이션처럼 되어버린다. 과학자는,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며 온갖 혼돈을 거치는 마이크로 인간들의 고통에 찬 생사 속에서 급격히 팽창하는 문명을 컴퓨터 모니터를 통하여 손에 땀을 쥐고 관찰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문명 초기에 마이크로 인간들과의 소통경로를 잃어버린 끝이라 아무것도 더 할 수 있는 것 없이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마이크로 인간들은 실제의 인간과 조금의 차이도 없이 하나같이 욕심 사납고 이기적이고 걸핏하면 싸우고 전쟁을 일으켜 대량 살상극을 벌이는데, 놀랍게도 어느 때부터인가 많은 마이크로 인간들이 그 유리상자 밖에 세계를 만든 자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과학자를 창조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하며, 자신들의 고통과 유한성을 오로지 이 신만이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실험실 안에 부처님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물론 유리상자 안의 마이크로 인간이었다가 깨달음을 통하여 존재계의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얻은 신족통神足通으로 상자 밖으로 나온 것이다. 과학자는 처음엔 뜻밖의 상황에 두려움에 떨었으나, 역시 부처님은 지고의 자비심과 위없는 지혜를 갖춘 분이었다. 진심어린 설법으로 세상 그 어떤 것도 중생이 본래 가진 마음에서 비롯되어 인연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우쳐주고, 다시 그 몇 분짜리 숱한 마이크로 인생들에게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기 위하여 유리상자 안으로 되돌아간다.
이야기의 본질은, 창조나 파괴의 능력이나 힘을 가지는 것으로 당연히 우리가 도덕적으로 되거나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피조물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게 되거나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몇 년 전에 황우석박사 일행이 진행한 줄기세포 연구논문을 둘러싼 논란을 알고 있다. 처음에는 과학 잡지에 실린 논문의 진위여부와 체세포복제의 도덕성이 도마에 올랐는데, 서울대 교수들로 이루어진 자체조사팀은 전혀 사건전모를 규명하지 못한 채, 만들어졌다는 줄기세포는 체세포 이식 없이 난자가 스스로 수정이 되어 생겨난 처녀생식이었다고, 아예 소설을 썼다. 영문을 모르는 황우석박사가 들끓는 여론의 공격에 거의 재기 불가능할 만큼 타격을 입은 후에야, 검찰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배반포 단계를 지나 배양과정에 있던 줄기세포를 수하의 한 연구원이 빼돌려 엉터리와 바꿔치기했다는 것이었다. 기성 언론은 거의 사건의 전말을 더듬거리지도 못하고 사이언스지에 개제된 논문이 가짜였다는 표피적 사실을 확인하여 황우석 죽이기에 앞장섰을 뿐이었다.
점차 드러난 실체적 진실은 오히려, 당시엔 거의 걸음마단계에 불과했던 네티즌의 사이버언론이 이미 초기부터 일관되게 밝혀온 거의 그대로였다. 줄기세포를 바꿔치기 한 그 연구원은 미국 측에서 접근한 검은 세력에 매수된 것이었다. 그 회오리바람이 지나 사람들의 관심이 식어갈 즈음부터, 간간이 해외에서 줄기세포로 이루어진 연구 성과가 발표되는 것을 보면, 황우석이 만들지 못했다는 줄기세포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어의가 없을 뿐이다. 네티즌들의 주장에 의하면 생명공학 분야에서 줄기세포연구는 미래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이윤창출효과를 낳는 것이고, 이것을 나쁜 놈들이 도적질해간 것이라는 것이다. 더 어의없는 것은 이 과정에서 복제나 줄기세포연구 등이 걸핏하면 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 운운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에 의하여 도덕성을 비판받는다는 사실이다.
본래 과학의 발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며, 선악의 양면성이 있다. 아인쉬타인이 E=mc2 을 밝혀낸 것은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나 체르노빌 사태, 혹은 지진과 해일로 인한 일본의 원전참사를 예상하고 한 일은 아니다. 아마도 세기적 지성 아인쉬타인은 어느 쪽인가 하면, 이 상대성이론이 방사선치료나 원자력발전 등과 같은, 보다 긍정적인 일에 쓰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규명해내는 인과율은, 그것을 원용하고 다루고 쓰는 사람들에게 더욱 섬세하게 다뤄야 할 예리한 칼이 주어진 것과 같아서, 그들이 충분히 지혜롭고 도덕적일 때, 세상 전체에 이로운 여러 가지 순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이 도덕성에 의하여 방향 지워질 때 비로소 아름답게 드러나 세상에 기여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인격이 도덕적으로 진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갖게 된 지력이나 능력은 모두 결국은 자타에 파괴적일 따름이다.
지난 세기는 과학기술의 분야에서는 상대성이론의 발견이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그 이전의 시대와는 거의 수평적으로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인류가 근대 이전의 인간들에 비해 현격하게 차이 날 만큼 도덕적으로 완전해진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에 현대문명의 딜레마가 있다. 바로 이것, 즉 현대의 지성들이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고 견인할 만한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진정 현대 문명의 존폐를 가르는 관건이다.
부처님은 이미 25세기 전에, 인과율에 입각한 불교적 진리가 자타의 궁극적 행복인 열반에 이르는 길이며, 누구든 와서 보라고 명쾌하게 논증하고 구체적으로 실험 가능한 길임을 들어, 신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믿음이나 숙명론, 혹은 회의론이나 불가지론 등과 달리, 이 세상에 도덕성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준거가 됨을 들어, 불법을 홍포하고 온갖 외도外道의 사견邪見을 혁파하였다. 오늘날 문명의 개척자들 사이에 학문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미 세계적으로 그런 흐름은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인류의 미래를 생각할 때, 세기적 지성들이 불교를 주목하고, 분야마다 불교에서 미래를 향해 열린 대안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화급한 일이다.
사실, 우주 안의 인과율을 규명해온 과학은 이미 엄청난 사이비 도덕성 논란을 헤치고 진보해왔다. 왜 사이비 도덕성이라고 하는가? 불교와 그에 근접한 동양사상을 제외한 현실의 종교 역사는 사실 인간 무지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수천 년의 세월이 단지, 어쩌면 그냥 재미로 누군가가 갖다 붙이듯이 서술해낸 신화를 맹목적으로 신앙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나 그 엉터리 해석자들, 광기의 일종인 샤머니즘의 나부랭이들, 본래 자유로워 환각이든 거짓이든 뭐든 날조할 수 있는 인간의 깊은 의식세계를 우연한 기회에 혼미한 정신으로 힐끗 넘겨다본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대단히 신비로운 기적이나 계시, 초월적인 종교체험인 것처럼 선전하며, 무지한 인간들 위해 도덕적이지 않은 사이비 종교인들이, 별반 도덕적이지 않은 신의 이야기나 종교체험을 팔면서, 오히려 가장 도덕적인 체, 사람들의 헌신과 숭배를 강요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해 왔는데, 그 가장 심각한 측면은 바로 도덕성의 기준을 인간의 내면과 이성적 판단에 두지 않고 자기들이 독점적으로 소통한다는 신의 명령이나 의중에 둔다는 점이다. 절대자인 신은 무조건 도덕적 존재라고 믿어야 하며, 감히 그 신의 도덕성을 거론하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지, 피조물인 인간의 영역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영과 존재에 가해지는 가장 무자비한 폭력이다.
"우리 아버진 제일 착해."
"정말? 누가 그래?"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진 절대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거든."
"거짓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우리 아버진 착한 사람이래도? 착한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
"……?"
철없는 애들의 대화 같은 이 순환론의 오류는 지금껏 인류사에 나타난 엉터리 종교에 그대로 적용된다. 착하다는 것과 진실하다는 것, 대화에 나타난 이 두 주장은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전혀 혼자 서 있지 못하며, 이성의 변별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씨가 먹히지 않는 소리이다. 위의 상황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전혀 착하지 않은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고, 조금 착한 구석이 있다 해도 자기는 전혀 거짓말 안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가 착하다고 거짓말 하는 것 말고 다른 거짓말은 안 하지만 전혀 착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아이가 거짓말 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실제로는 아이에게 아버지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사이비 종교에서, 가짜 진리성의 기만구조와 사람들을 속여 착취하는 엉터리 도덕성의 기만구조는, 철저히 서로 의지하고 상호 순환한다.
사실은 특정종교단체나 종교인들의 속된 이익을 위하여 종교는 최소한 몇 천 년 동안 건재하게 존속해왔으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의 민중들이 다행히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속내가 무력하고 용기나 이성적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동서고금의 인류정치사가 폭압과 불평등, 부조리로 인류를 유린해온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인간 내면의 권리의식이 문예부흥시대의 인본주의로 드러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같은 미신적인 합리화의 논리를 깨뜨리고 어둠의 정치사를 변환시켜 조금씩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어왔듯이, 이제는 인간 내면의 빛이 기만의 종교역사에 새 장을 열어야 할 때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이나 조지 워싱턴과 같은 건국의 주역들이 중세기독교의 비합리성과 억압구조를 상당부분 배격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의 미국헌법은 다분히 인간의 자유로운 지성과 존엄성에 근거하였고, 그 덕분에 빠른 과학기술의 발전과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짧은 역사 속에서 현대문명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은 역설적이게도 프로테스탄티즘이 지배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을 수출하는 국가, 5프로 남짓의 과학자들이 줄기차게 창조론을 주장하는 유일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 청출어람의 유일무이한 아류 기독교 국가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성경에 오른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는 것은 건국초기부터 이어져온 관행이라 잘못 알기 쉽지만, 이것은 사실 1950년대부터 갑자기 시작된 일이라고 한다. 현대 미국의 프로테스탄티즘 자체가, 엄밀히 이야기하면 미국의 건국정신이나 미국이 현대국가로서 성공해온 토대라기보다는, 미국이 좋은 건국정신에 힘입어 성공하고 세계질서 속에서 장악한 기득권에 힘입어, 소수의 우치하고 탐욕스런 사람들이, 유치한 우중의 뇌리에 잠복한 패권주의를 선동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가려고 하는, 밑동이 잘린 중세 미신주의의 새 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비록 오늘날 현대의 미국을 뒤에서 조종하며 세계를 온통 교란하고 있다 해도, 사상사적으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할 한때의 풍파에 불과할 것이라고 나는 본다.
신중심적이고 교조적인 종교가, 인간의 지적 탐구심이 지속적으로 넓혀온 지성과 과학의 지평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범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발목 잡고 종교재판을 하고 겁주고 경고해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결국 밤은 새벽의 여명을 맞게 마련이고, 겨울은 몇 번의 꽃샘추위를 거칠지라도 끝내는 봄을 향해 진행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야기의 본류으로 돌아와서, 천상천하에 존경과 공양을 받을 자는, 불보살과 아라한 같은 성인들, 혹은 미래에 그리 되기 위하여 불도를 닦는 참 수행자들뿐이다. 원력수생願力受生!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신 그분들이 이 추루한 곳에 육화肉化하여 머무는 것은 오로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육신은 부득불 음식에 의지하여 지탱되는 것이니, 우리가 그런 분들께 공양 올리는 것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실 수 있도록 돕는 일이므로, 거기에 필연적으로 무량복덕이 따른다.
좋은 음식의 첫째 조건은 그 생기이다. 사실 모든 음식에는 생기가 있고, 생기 없는 것을 우린 먹을 수 없다. 음식물이 분해되어 우리 몸에 흡수되고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 과정에서는 그것이 무기원소가 될지라도, 우리는 채식이든 육식이든 오직 살아 있던 유기물을 먹어 그 생기를 취하여야 하며, 인간의 정상적인 섭생에서 그 예외는 고작 인류가 겁초부터 마시기 시작한 물H2O와 소금 NaCl 정도밖에 없다.
생기를 따지자면 육식보다는 채식이 좋다. 식물도 동물도 살아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의 식물은 자의식自意識이 없는 무정물無精物이다. 그러나 유정有精인 동물의 몸에는,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조차 그 업식이 늘 생존의지로 작용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고, 동물의 고기를 먹으려면 반드시 그것을 분리시키는 살해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살해당하는 의식이 어찌 그 몸에 살기를 남기지 않겠는가? 살기가 남아있는 고기가 우리 몸에 들어와 전혀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나 생각이 없는 것이고 아주 순진한 가정이다. 동물성의 음식물 가운데 살기가 없는 것은 포유동물의 젖과 유제품뿐이다. 조금 양보하면 조류의 무정란이 포함될 수 있다.
1대겁 동안에 인간은 그 수명이 10세에서 8만 4천 세 사이를 몇 십 번 오르내리는데, 사람이 무병장수할 때는 그 마음 안에 살기가 다 사라졌을 때이다. 그 때는 세상 어디에도 살생이 없고, 육식은 온전히 사라진다. 성경에도 태초에 인간이 천 살 가까이를 살다가 점차 수명이 짧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것은 노아의 방주 이후부터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근거로 어떤 기독교 종파에서는 채식을 기본으로 하기도 한다.
근자의 한국은 암 발생률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 원인은 대체로 서구화된 식습관 때문이라고 하며 결국은 육식이 늘어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 급속히 높아지고 위생이나 의료여건도 현저히 개선되어가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수명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암에 국민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걸려 죽는 원인은, 결코 보신탕을 안 먹어서가 아니라 지나친 육식 때문일 것이다.
신선한 음식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이에나라 해도 만일 힘만 있고 사냥할 수만 있다면 닥치는 대로 산 것을 잡아먹지, 먹다 남긴 고기나 죽은 것을 찾아 어슬렁거릴 턱이 없다. 과일을 먹더라도 당장 서리해서 먹거나 면전에서 누가 깎아주는 것이 더 좋지, 어디 안 보이는 데서 누가 깎아 내온 과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회 같은 것을 좋아하고, 기이할 정도로 신선한 음식을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은, 살아있어 눈물 뚝뚝 흘리는 원숭이 머리 뚜껑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골을 젓가락으로 파먹거나, 곰 뱃속에다 빨대를 박아가지고 쓸개를 빨아먹으며, 사슴 뿔을 잘라 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러나 어찌 남의 눈물이 언젠가 내 피눈물이 된다는 것을 모를까? 채식 가운데도 신선한 생기 넘치는 음식은 얼마든지 있는데, 한국의 상추나 열무 혹은 얼갈이배추 혹은 로메인의 쌈이나 겉절이, 한겨울 제철에 막 바다에서 건져온 물미역 초고추장 무침은 얼마나 입을 크게 벌리고 정신없이 먹어야 하는 음식들인가, 어떤 음식이든 신선한 재료들이 막 요리된 상태에서 식기 전에 먹는 사람은, 특별하게 잘못되지만 않았으면 크게 흠잡아서는 안 된다.
식인종 부부가 있었는데 부인이 첫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에게 공손히 말하였다.
"식기 전에 드세요."
음식의 생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음식물의 저온보관은 매우 획기적인 기술이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냉장고가 잡아두는 신선함은 대개 가짜이다. 기운이나 향기는 다 훔쳐 가버리고 형태만 비슷하게 남겨놓기 때문이다. 그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밀폐하는 것이 최선이나, 그도 적당히 의지해야 한다.
밭에서 바로 뜯어온 식재료가 가장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야산이나 들에서 자생한 것을 채집해 오는 것. 한국의 산천은 얼마나 생기가 넘치는지.
산삼과 재배한 인삼을 영양학적으로 분석하면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생명력이나 영기가 어찌 같다고 할 수 있으리?
물리학이 엔트로피Entropy에 관한 이론이 있다.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는 엔트로피는 시간 속에서 언제나 증가하는 쪽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의 이치와 통하는 이 이론은 사실은 물리의 법칙이기 때문에, 인간이나 다른 생체의 내면적 의지에까지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어떤 집을 치우거나 따로 관리하지 않고 어지르지도 않고 가만 내버려 둔다 해도 몇 년을 방치하면 거의 사람이 쓸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되다가 결국 힘없이 주저앉고 만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사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문제가 다르다.
사람은 가끔 집안을 깨끗이 대청소할 수도 있고, 무너져가는 곳을 수리할 수도 있고, 어느 날 아주 새 집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기운이 집을 건재하게 지켜가는 것을 또, 우리는 경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
음식에 연결시켜보면, 모든 재료는 시간이 가면서 그 질이 떨어지게 되어 있지만, 사람이 먹는 것은 물과 소금 빼고는 다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연 속에서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고급 식재료를 새로 구할 수 있다는 뜻이고, 가급적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바로 해서 바로 먹어야 한다.
음식물 보존의 역사는 대단히 길다. 그러나 그 주류는, 냉장이나 절임보다는 건조와 발효기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몽고가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육포 만드는 비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말리고 다진 소 한 마리 분량의 고기를 병졸 하나가 전혀 짐이 되지 않게 말에 싣고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호랑이였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곶감이었다니, 말린 음식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한국음식을 말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질은 다름 아니라, 고도의 발효기법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이용해왔다는 점이다. 음식물을 말려서 보존하는 것은 부패과정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수분을 단기간에 증발시켜버리는 간단한 방법인데 반해, 발효는 유기물을 분해하고 변화시키는 균이나 미생물을 이용하여, 시간을 들여 음식물을 훨씬 깊고 미묘한 풍미가 있고 인체에 더욱 유익하도록 재창조하는 일이다.
미화해서 표현하면, 발효는 영혼의 조리법이다. 발효에는 인생의 깊은 맛이 담긴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맛이다. 아이들의 영혼이 비록 순수하지만 그 순수성은 사춘기의 진통이나 인생의 풍파를 거치면서 깨어지기 마련이고, 진정한 영혼의 순수성은 그런 단련을 거쳐 점차 불괴불멸不壞不滅의 것으로 익어간다. 그러니까 발효식품을 어린 아이들은 당황해하고 안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미각이 아주 섬세하나, 발효음식의 깊은 아름다움을 즐기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좀 더 살아봐야 안다. 세월과 인생고에 닳아빠져야 한다.
권주가勸酒歌 - 이백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酒中趣 勿爲醒者傳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하늘에 술별이 없었으리라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땅엔 술샘이 없었으리라
하늘과 땅이 다 같이 술을 사랑하니
애주는 과히 하늘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청주는 성인에 비하고
탁주는 현인과 같다네
성인과 현인을 이미 마셨거늘
어찌 굳이 신선 되기를 바랄까 보냐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일이네
오직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서로 통할 수 있나니
취흥을 모르는 애송이에겐 아예 전하지 말라
어느 해, 스님들 몇 분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던 중, 일행은 조금 길을 잘못 들어 트레커들이 좀처럼 안 가는 마을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그때가 정초의 축제기간 같은 때였는지, 마을 아이들이 온통 다 나와, 긴 대나무 장대 네 개를 에펠탑 모양으로 세워 만든 틀 위에서 그네를 지치고 있었다.
우리는 갑자기 만난 때 묻지 않은 그 오지의 아이들이 반가웠고(얼굴엔 때가 많이 묻어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근처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물가로 데리고 가서 차례대로 얼굴을 씻어주었는데, 깔끔해지자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아리안족의 얼굴상이 마치 마법으로 만든 조각처럼 하나하나 드러났다.), 그 아이들은 낯선 이방의 나그네들을 정말 환한 낯빛으로 반겨했다.
오지의 산길에서 만난 가난한 아이들에게 주려고 우리는 미리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갔었는데, 그 보따리들을 거의 다 그 마을 동남동녀들에게 흔쾌히 풀었다. 혼란을 막으려고 어른까지 한 명 나와서 아이들을 줄 세워, 연필, 볼펜, 치약, 칫솔, 장난감, 초콜렛, 캔디 등을 차례차례 나눠주고 서 있는 우리 주위를 뱅뱅 돌게 했다.
마침내 우린 더 줄 것이 없게 되어버렸는데, 아이들은 아직 감동이 식지 않아 아무도 줄에서 흩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배낭에서 무슨 알약 같은 것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꺼내더니 두어 개씩 또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받은 것을 입에 털어 넣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는데 하나같이 얼굴을 몹시 찌푸리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뭐예요, 스님?"
바쁜 스님이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청국장이에요."
아이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복용한 것은, 아무데서나 먹기 편하도록 청국장을 환을 지어 말린 것이었다.
몹시 겸손하다고도 할 수 있고, 손님을 너무 어려워하거나, 진짜 약간 사대事大의 근성이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몇 십 년 전만 해도 외국 사람들에게 밥 한끼라도 대접할 양이면, 혹시 된장냄새나 김치냄새를 싫어할까봐 오히려 전전긍긍하고 미안해하면서, 식탁에다 수저젓가락 대신 흉측하게 생긴 포크 갖다 놓기에 바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흘렀으니, 이젠 말해야 한다.
"청국장 못 먹겠다고? 애들은 가라!"
그리하여, 발효는 세월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진실한 우정처럼 시간을 초월한다.
발효를 통하여 음식물의 엔트로피는 정지하고 심지어는 오히려 감소한다.
지리산 자락에 은둔해 볼까 하고 산골의 빈 민가를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어느 집에 혼자 살던 주인이 갑자기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아 몇 년째 비어있다 해서 청소를 시작했는데 온통 거미줄, 먼지투성이에다 어둑어둑한 창고에서 두 번이나 깜짝 놀라게 되었다.
한 구석에 설탕 포대가 쌓여 있어서 힘주어 들어 옮기려다 갑자기 번쩍 들리는 바람에 일단 한 번 놀랐다. 어이없게도 비어 있었다. 맙소사. 대여섯 개가 다 텅텅. 튼튼한 실로 봉인된 포대는 푼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증발? 나프탈렌도 아니고 분명 설탕포댄데. 귀신이 대낮에 곡할 노릇이었다. 한참 추론에 추론을 거듭한 끝에야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것은 개미였다. 모든 포대에는 바닥에 겨우 개미 한 마리 들락거릴 수 있는 구멍만 하나씩 나 있었다.
손쉬운 대로, 만일 땅에서 가까운 아래쪽 포대부터 털기 시작했다면 틀림없이 차곡차곡 쌓인 위쪽 설탕의 무게로 아래쪽 비어가던 포대가 납작해졌을 테고, 그랬다면 적지 않은 개미떼가 뭉그러지는 설탕과 함께 압사당하는 참사가 발생했을 텐데, 전혀 희생도 없이, 지문이나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알만 쏙 빼간 이놈들의 간계에 생각할수록 혀가 내둘러졌다. 그것도 혼자 한 도둑질도 아닌데, 그 많은 개미들의 의견을 누가 모으고 누가 작업을 지휘했을까?
두 번째 써프라이즈는 큰 독 속에 있었다. 밀봉한 뚜껑을 열어젖히자 정말 심오한 향기가 났다. 매실주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 향기를 탐닉하였다. 그때는 술을 입에 대지 않던 때라, 옆집 아저씨한테 항아리째 넘겨주었는데, 주긴 주지만 몹시 속이 쓰렸었다.
술뿐만이 아니다. 모든 발효음식엔 중독성이 있다. 나는 단언컨대 장차 한국의 발효음식이 싸이의 말춤처럼 세계를 취하여 흔들리게 하리라고 믿는다.
저번에 파리에 갔을 때, 요즘은 한국 음식이 대세라는 말을 들었다. 예전에는 중국음식과 일본음식이 대세였다가, 베트남 음식, 태국 음식을 거쳐 지금은 바야흐로 한국 음식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선, 중국 식당이었던 데를 내부 데커레이션도 바꾸지 않고, 한국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한국 발효음식의 중독을 생각하면 이건 겨우 서곡이 울린 것에 불과하다.
발효음식을 먹는 한국 사람들도 조심해야 한다. 언제 그대를 중독시킬지 모르므로.
화교 출신의 어떤 스님이 가끔 속가의 부친을 만나러 가면 볼 때마다 말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조심해라.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놈들이야."
야사에 의하면 사실 고추를 한국 사람들에게 먹이기 시작한 것은 되놈들이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중국인들이 주변의 민족들을 다 오랑캐라고 깔보았는데, 이상하게도 동이東夷족들을 대하고 보면 그 진중한 위엄에 압도당하고, 일대일로 담판이라도 하고 보면 돈욕심 많고 장사에 능한 중국인들이 꼭 손해를 보았다.
동이를 분열시키고 중국이 입맛대로 요리할 방법을 찾아 골몰하던 중, 어떤 의원醫員이 저들에게 고추를 많이 먹게 하면 성정이 급하고 거칠어져 자충자멸自充自滅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 이방인들은, 대개 다 너무 맵다(hot, spicy)고 한다. 사람 마음이 먹는 음식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고 보면,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빨리 빨리'를 좋아하고, 감정이 앞서 그르치는 일이 많으며, 대의大義 앞에서 서로 결속하지 못하는 근성이 다 고추 때문인지도 모른다. 애국자들부터라도 조금씩 고추를 덜 먹어보면 어떨지.
발효음식을 만드는 한국 여인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독한 술처럼 그대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지 모르니까.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원주에서 사는 젊은 아낙네가 코코아를 발효시켜 '황후초콜렛'이라는 걸 만들고 커피콩을 발효시켜 '황후커피'를 만들어, 세계여성발명왕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고 들었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가 아니라, 직접 먹어보면 진짜 그 그윽하고 부드러운 맛에 누구나 취하게 되고 취중에 찬탄이 절로 나올 것이다. 커피 중에 제일 비싸고 좋다는 게 사향고양이 똥에서 가려낸 커피콩으로 만든 르왁이라는 것인데, 이 황후커피는 커피콩이 짐승 뱃속에서 발효되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서도, 짐승 똥을 긁어모아다가 황후마마께 드시라고 하는 것도 아니어서, 누구나 비굴하지 않게 아주 흡족해하며 흠향할 수 있다.
옛날 사람인 나는 우리 한국 여자들이 저 인도여자들이나 서양여자들에 비해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하면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산중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보니까 우리 젊은 새악시(색시의 방언)들이 얼마나 어여쁘고 다들 잘났는지, 농담 조금 보태면, 가끔 그냥 보낸 청춘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든다. 옛날엔 학교의 우등생들이 거의 남학생들이고 난 여자들이 본래 좀 머리가 나쁜가 보다 속단했었는데, 요새는 여학생들이 성적이 더 좋고 예쁜 여자애들이 공부를 더 잘한다고 한다. 시대가 어려울 땐 완력이나 좌뇌가 발달한 남자들이 쓸모가 있고 난세의 영웅이 나지만, 시절이 좋아지면 감성과 우뇌가 잘 작동하는 여자들이 기를 펴고 성세의 가인이 득세하는 모양이다.
우리 절의 무운舞雲 선화禪華는 절에 오기 전에 막 운전을 배워 아빠 차를 몰고 나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툰 조작으로 차도 위에서 우물쭈물 했더니, 뒤차 운전자가 비켜가며 짜증을 내는 것 같아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차창까지 내리더니 젊은 여자인 걸 알고 소리쳤다.
"야, 집에 가서 밥이나 해!"
그러자 무운은 지지 않고 한 마디 쏘아댔다.
"밥 하고 나왔거든요!"
내일은 우리 절에서 된장 담그는 날이다. 설 지나고 첫 번째 말(午)날 담가야 좋다는데 그날을 놓쳤기 때문에 두 번째 말날 대사가 벌어질 모양이다.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독이 필요하다 해서 어디 가서 항아리 몇 개를 실어왔고, 장독대를 만들거나 힘 쓰는 일이 필요하면 좀 거들 뿐이다. 나머지는 다 여자들이 할 것이다.
한국 여인들의 핏줄에는 농도의 차이가 있지만 얼마간 샤머니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의 사고는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이다. 이것이 합리적이지 않고 불가해해 보인다 해서 내가 어릴 때 그랬듯이, 완전히 부정하거나 우스꽝스럽고 미신적인 것이라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이들이 한국의 남자들을 낳고 기르고 지켜왔지 않은가? 좋게 보면 이미 이들이, 분수를 알고 자기를 낮춰 무심합도無心合道하는 길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동양적인 영성은 이런 자세로부터 열린다. 이와 겨루고 대립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바른 방향과 완전한 목적지를 제시하여 이끄는 마에스트로의 일이다. 불교가 이것을 완벽하게 해줄 수 있다.
서양악의 관현악단을 구성하는 악기들 가운데는 피아노와 하프보다는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더 주된 역할을 한다. 현악기는 줄을 타며 소리를 인위적으로 끌고 가는 이런 줄당김 악기와, 한번 줄을 뜯고 나면 소리가 자연스럽게 소멸해가도록 두는 줄튕김악기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국악의 관현악에서 주가 되는 악기는 아쟁이나 해금보다는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줄튕김악기라는 점에도, 동양의 인간관과 자연관이 깃들어 있다.
동양화 풍경 속의 아주 작게 그려진 사람처럼, 사람도 자연 속에 있기에, 사람이 하는 일은 자연의 원대한 일 가운데 그 작은 일부일 뿐이며, 결국 자연으로 귀결하는 것이다.
사실 음악의 영역에선 발효의 예술이 이런 모티브와 지향을 가지고 있다. 부정 타지 않도록 날을 잡고 온갖 주술적인 염원을 담아 간장 된장을 띄우기는 띄우지만, 그 맛은 결국 나중에 봐야 한다. 한국의 음식에 깃든 무한한 잠재력은 바로 이 속에 있다.
사람의 육신은 결국 이렇게 자연속에서 먹고 싸고 놀다가 가는 것이다.
사람 안의 지고의 참 본성이 그 꿈속의 우주를 이렇게 지었다 해도…….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소식지 法華법화 2013 / 3
첫댓글 에고고.. 스님~
긍께,, 봉화 음성 삼각지에서 공양 준비하시는 울 보살님들
텃밭 뛰어다니시며 올매나 수고가 많으실지는 안봐도 비됴입니다 ㅋ~ =3=3==33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현스님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