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선생숭모기념비(圃隱先生崇慕紀念碑)
오늘날 우리의 역량이 여러 모로 세계에서 빛을 보는 데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조상들의 노고가 밑거름이 되었다. 여기 우리가 자리한 이곳은 우리 조상 가운데 매우 걸출한 분을 배출한 터전이다. 그 분은 바로 호를 포은(圃隱)이라 한 정몽주(鄭夢周)선생이다. 선생의 자는 달가(達可)이고, 몽란(夢蘭) 몽룡(夢龍)이라는 아명도 있다. 관향이 영일(迎日)이고, 고려 인종조 정습명(鄭襲明)의 후예인 그는 부친 운관(云瓘)과 모친 영천 이씨(永川 李氏) 사이에서, 고려 충숙왕복위6년 12월에 이 영천군 우항리(愚巷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일생은 관료로 일관한 생애이다. 21세에 감시에 합격한 그는 삼년 뒤 문과에서 장원을 하고, 26세에 예문관 검열로 관료생활을 출발한다. 성균박사, 대사성, 판도판서 등을 거쳐, 54세에는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라, 망국에 직면한 고려의 다난한 국사를 공정 명쾌하게 처리한다. 55세에 안사공신(安社功臣) 호를 받으며, 고려조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던 그는 역성혁명을 꾀하던 이방원(李芳遠) 측의 암살 음모로 56세(恭讓王4년)를 일기로 선죽교에서 순절했다.
선생이 이룬 업적은 다방면으로 눈부시다. 개성 오부에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 향교를 세우게 해, 교육과 학문의 진흥을 꾀했다. 그는 성균박사 때부터 새로 도입된 성리학(性理學)을 남보다 먼저 익혀, 가르치고 보급하는데 힘썼다. 그의 성리학 강의는 홀로 해득 했음에도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이 밝혀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극찬을 해,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원조로 삼게 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실제로 선생을 시조로 숭상하는 우리 성리학의 학통이 이루어져 왔다.
선생은 그 시대 불교의 의식들을 버리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성리학 예절인 '가례(家禮)'로 바꾸어 행하는데 앞장섰다. 부모가 서거했을 때, 삼년상에 여막생활까지 몸소 한 그의 극진한 효행(孝行)이 그 좋은 실례이다. 그는 우리 역사를 불교시대에서 성리학시대로 변환하는데 크게 이바지 한 분이다.
정책 시행에서 이룬 공헌도 매우 훌륭하다. 선생은 사전(私田)의 폐지를 주장해, 권신과 토호들의 농간으로 도탄에 빠진 양민(良民)을 구하고, 국가 재정의 고갈을 막기에 부심했다. 지방관들을 엄히 감찰하고 엄선하면서, 중간기관까지 두어 민폐 근절에 전념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 구제에 열성을 다 했다. 서민의 편에서 민본 위민 정책 구현의 모범을 보인 분이 선생이다. 기강의 해이로 법질서가 무너졌음을 바로 잡기 위해, 그는 손수 법령집인 '신율(新律)'을 정해 시행토록 했다.
한 때 유배를 당하면서까지 선생은 친명정책을 역설했다. 그 굳은 신념으로 인해 명나라에의 사신 길은 거의 혼자 담당하다시피, 다섯 차례나 다녀오면서 양국의 친선을 두터이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에 건너가 납치된 우리나라 사람들 수 백 명을 데려온 외교 수완도 발휘했다.
국란을 당하면, 언제나 전장에 나아가 적의 퇴치에 혼신을 다 한 분이다. 영흥(永興)에 침입한 여진(女眞)의 정벌에, 철령(鐵嶺)의 여진 격파에, 길주(吉州)의 여진 퇴치에, 운봉(雲峰)의 왜구(倭寇) 격퇴에 참여한 것들이 다 그런 사례이다. 이는 선생의 문무겸전의 능력과 아울러 투철한 애국 애족의 정신을 확인케 하는 사실이다.
유려한 문장과 호방한 기품을 띤 시(詩)의 저작으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선생이지만, 그는 무엇보다 쓰러져가는 고려조를 홀로 바로 세우려다 끝내 목숨을 던진 기개와 절의로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것은 두 나라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의 가치, 이른바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실천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자기 직분에 대한 자발적 충실이라는 공인(公人)의식에 깃든 확고한 책임감과 불변의 지조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 남긴 선생의 불멸의 공적과 그 특출한 인물됨을 영구히 기리는 뜻에서, 이 고장의 선비들은 일찍이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창건했다. 그 동안 서원이 훼철 복원 중창을 거쳐 오던 중, 근래 포은선생숭모사업회(圃隱先生崇慕事業會)의 결성을 계기로, 그 회원들이 이 서원에 새로 송탑비와 선죽교를 설치하고, 아울러 정성 어린 숭모기념비를 세운다.
단기 4344년 12월 일
후학 파평인(坡平人) 윤사순(尹絲淳)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