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서 境界<경계>를 보다
글/박철영
오늘은 마침 어머님 16주기를 맞이해 미리 짬을 내 하루 전에
서울에 올라와 봉천동에서
형과 누나와 함께 하룻밤을 정담으로 지샌 뒤 거실에다 잠자리를
마련하여 두툼한 이불을
깔고 누워서 밤새도록 옛 이야기로 어찌 밤을 보냈는지도 모르게
아침을 맞았다.
누구나 유년의 추억을 듬뿍 안겨준 내 고향 남원 동로골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언제나
들어도 지겹지 않고 끝 없이 향수심을 자극하여 웃음과 때로는 슬픔의 경계까지를
넘나들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빛 바랜 흑백사진들을 가슴 한 켠에서 한 장 한 장씩 들여다보는
기분은 아! 이런 형제 누이가 있어 난 넘
행복하다.
<큰 형집에서>
모친 기일이 평일이라 형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잠자리를 비우고 일어났지만, 나는 아예
휴가처리를 하여 올라왔기에 누구보다도 더 여유롭다. 형수가
차려준 아침밥을 한 그릇
비우고는 형이 즐겨 입던 등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한산을 가기
위해 2호선 봉천역으로
향한다. 큰 형이 적어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6호선 불광역에
도착하여 앞서가는
등산복 차림의 부부에게 다가가서 북한산을 물어보니 우리가 가는
길이 등산로란다.
오랫동안 가고 싶어했던 산을 오르는 기분이 뭐랄까?
“흥분”, “설레임” 이라는 단어를
쓰면 어떨까
싶다.
매표소에는 아저씨가 돈을 꺼내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입장료를 안받는다며
손사래를
친다. 내미는 손이 무안한데 빙긋이 웃는 등산객들의 모습에
건너뛰어 내 눈길은 족두리봉을
향하고 있다. 족두리봉을 오르는데 안내 표지판에 그 동안
추락사한 사람의 숫자가 5~6명으로
등산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어제까지는 황사가 심해 눈을
뜨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는데 오늘은 봄날치고는 상당히 좋은 날에
속한다.
북한산을 오르면서 내가 올라가 본 산들은 거의 다가 남도에 있는 산들로써 지리산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니 제외하고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산이라면
영암
월출산과 장흥 천관산인데 바위산이 주는 기암의 형태가 내 눈을 상당히 놀라게 했던
기억이 있다. 허나 북한산을 오르니 남도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바위산의 장관을 지금까지의
산에 대한 일률적인 생각을 일시에 바꾸어버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바위산의 거대함과
특이함은 산의 형세로서 위엄을 나타내다가 능선에 능선으로 맞서고 다시 이어가다
순간에
치달리고 삐쳐 나가 방패처럼 서울의 북쪽을 막아서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역시 북한산을 조선 건국 후 한양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군사적인 식견이 문외한인
내
눈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봉쯤에 이르러서는 봉우리가 아찔하여 오르지는 못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데 “북한산
순수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조품으로
대신한
통일신라의
기반을 튼튼히 다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후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저 높은 비봉까지 어떤 방법으로 무거운 비문을 끌어올렸을까를
생각해본다. 만약에 사람의
힘으로 끌어올렸다면, 참으로 끔찍했으리라. 아니면
그 위에 놓여있을 바위를 쪼아서 만들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비봉 정상의 진흥왕 순수비>
비봉을 오르는데 향로봉이 또 한번 북한산의 위용을 드러내며 가로막아 남도의 순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한다. 밧줄을 타고 오르는 일단의
무리들을 그저 감탄으로만 바라보며 일찌감치
아래쪽으로 비잉 돌아가며
혼잣말로
중얼중얼… 내 몸 건사가 최선이지 하는 자위를
하면서
발을 내딛는데 전날 마신 술기운이
서서히 걷히는지 목이
탄다.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을 마시는데 술보다는 물이 좋다는 생각이 이 산에서 불현듯 드는 것은 무얼까?
허걱 나이
사십 넘어
대오각성, 큰 깨달음^^…
<산 정상까지 날아온 비둘기들>
누구를 사모하여 저리 오래토록 그 곳을 떠나지 못하는가? 사모를 하는 사람과 사모를 하고
있을 사람들이여 북한산엘 올라가보자. 내
가슴에도 저토록 지극한 사랑이 굳어져 바위하나
서 있을지 몰라 내 몸을 만져본다. 오늘도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로 사모바위를
담고 있다. 사람들이여! 뜨거운 가슴으로 천 만 년 지나도록
사모함을 이루어 부디 행복들 하시라.
<사모바위>
인수봉을 오르면서 얼마 전에 등반 사고 예방을 위해서 거의 수직벽에 가까운 바위에다
안
전 핸드레일을 박아놓았다. 그래도 그런
바위를 올라가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예전
에 북한산에서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구조용 헬기가 뜨면 인수봉하고
족두리봉이었다고한다.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비봉에서도 그러했고 향로봉에서도 마찬가지로 밧줄을 타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이런 본말에도
그러하는데 만약에 한 겨울이라면 눈이나 얼음으로
뒤덮인 바위산을 그들은 또 찾을 것이기에…
<인수봉으로 가는 가파른 등산로>
사실 인수봉까지 오르면서 그저 산으로만 다가왔었다. 허나 인수봉을 돌아서 비껴가는데 산
성처럼 보이는 바윗돌이 일부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높은 곳에 그랬었구나!
분명이 여기도 사람이 살기 위해 아니 권력을 지키기위해 지켜내야만했던 굳건한 성벽이
있
었다니… 그들이 지켜온 경계가 아직도 이렇게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다니 순간 오싹함이
등
골을 타고 내린다.
<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
성벽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조그만 사찰이 들어온다. 누군가가 저곳이 이승만 대통령이 아들
을 보기 위해 무수히 기도를 올렸다는 “문수사”란다. 영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각자의 몫이
기에 아직도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발길은 끊이지 않는단다.
<문수사>
산성을 따라 대정문이 나오는데 이 문을 통해 성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문안” 을 오간다
고 했다니 세월이 무색하다. 문 안과
밖이 허물어져버린 몇 개의 문을 거쳐서 “보국문”으로
빠져나와 돌 계단을 하나씩 밟고
내려오는데 정릉 숲길이
가까와지면서 봄기운을 잔뜩 받은
양지꽃을 내밀며 북한산은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네.
첫댓글 북한산 마치 따라 갔다 온것 처럼 자세 합니다, 박철영님 사진 글 수고 많으셨어요, 워낙 등산을 싫어해서 인지 그리 쉽고 만만히 오를 산은 아닌것 같네요, 수락산 딱 한번 가보고 등산 포기 한 사람 들러 갑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수락산을 가본적이 있습니다. 이름만큼 빼어나게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와야 할 수락산의 계곡이 참담하게 파괴된 현장을 본적이 있습니다. 계곡 자체가 온통 시멘트로 도배질이 되어있고 생나무를 잘라내 그 위에다 수은등을 달아놓은 요식업집도 보았고... 그렇지만 북한산만큼은 전체를 둘러보지 못했지만 잘 보존이 된것처럼 보였습니다. 산을 가되 내 발걸음으로 파괴될 흘 한톨도 소중히 생각되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산을 무척 좋아합니다. 내년에는 기회를 만들어 도봉산엘 찾아가려고 합니다.
집에 조선의 선비들의 등정기라는 책이 있는데, 북한산을 오르면서 개인의 가족사에서 산악국가에 어울리는 남쪽의 산세와 수도권의 바위산에 관한 글이 단순한 음풍농월이 아님니다.
철영님 서울을 오셨었군요, 그런데 저도 안보고 가셨네요, ^^ 그건 그렇고 참 좋은글 쓰셨네요, 아주 기분 좋게 읽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봄 그림도 좋고 산등성이도 보기만 해도 후련하네요,
멋진 등정기로 저도 북한산에 올랐다 내려왔습니다...감사드립니다~~
조라가망님 그 책 이름이 뭣인가요?
기행문집 / 허문섭外 /해누리출판사 조선의 선비들이 백두산/묘향산/금강산/두류산[지리산]/ 제주풍토기 같은 다양한 내용이 있으니, 한 번 일독을 권합니다.
동해에서 서울의 북한산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공기에 흠뻑 취하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