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감호(金現感虎)
【출전】고려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던 설화. 현재는 {대동운부군옥} 권15와 {삼국유사}권5 '김현감호'
신라 풍속에 음력 2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청춘 남녀가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원성왕 때 김현(金現)이란 청년이 밤늦게 탑을 돌다가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김현이 그 처녀의 뒤를 다라가 보니, 처녀는 뜻밖에 범의 변신이었다. 이 처녀에게는 성질이 사나운 세 오빠가 있었으므로, 마침 하늘이 징계차 한 마리를 죽이려던 차였다. 이에 처녀는 오라비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김현에게 "내가 내일 시장거리에 나타나 많은 사람을 해칠 터이니, 낭군은 나를 잡아 그 공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김현이 그의 청을 거절하니 "천명이니 차라리 낭군 옆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하였다. 이튿날 과연 범이 시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자 나라에서는 큰 상을 걸고 범을 잡게 하였다ㅏ. 김현에 이에 어제 저녁에 들은 대로 숲에 이르니, 과연 처녀가 나와 기꺼이 맞아주며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죽는데, 몸둥이가 곧 범으로 화했다. 이에 김현이 그 공에 의하여 높은 벼슬을 하게 되매, 호원사란 절을 지어 범의 명복을 빌게 되었다.
도미의 처
【출전】{삼국사기} 권 48 열전 제 8 '도미(都彌)'
백제의 개루왕(蓋婁王) 때, 도ㅗ미라는 사람의 아내가 아름답고 품행이 얌전하여 사람들이 칭송을 받았다. 하루는 개루왕잉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비록 부인의 덕은 정결이 첫째라지만 만일 남이 모르는 곳에서 좋은 말로꾀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적을 것이다." 하였다. 도미는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려우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다고 해도 딴 마음은 먹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왕은 시험해 보고자 도미를 궁에 머무르게 하고 하인을 거느리고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가서 하인으로 하여금 왕이 왔다는 것을 알리게 하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내가 그대를 얻게 되었으니 내일부터는 궁궐에 들어와 궁인이 되라. 이제부터는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하였다. 개루왕이 도미의 처를 탐내어 난행하려고 하자, 도미의 처를 계집종을 잘 꾸며 대신 들여 보냈다. 이에 속은 줄 안 갸루앙은 도미에게 일부러 죄를 내려 그의 눈을 빼어 버리고 작은 배에 태워 강 위에 띄웠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탐ㅎ려 하자 도미의 처는 왕을 속이고 궁궐을 빠져 나와 남편을 찾아가 함께 고구려 산산(蒜山) 아래에 당도하여 구차한 생활을 하며 나그네로 생을 마쳤다.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는 이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문전신(門前神) 본풀이
이 이야기는 재생설화(再生說話)의 일종으로 죽은 어머니를 환생꽃을 구해다가 살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서사무가(敍事巫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남선비가 식구는 많고 흉년은 들어 오동국으로 쌀을 사러 갔는데 삼년을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부인이 남편을 찾아 오동국으로 간다. 그리하여 남편은 만났으나 노일저대귀의 딸을 첩을 삼아 살며 눈이 어두워 세상을 분별치 못하고 지내는 것을 안다. 그러나 노일저대귀는 남선비의 본부인이 온 것을 알고 샘터에 밀어 넣어 죽이고 본부인의 옷을 입고 남선비의 본집으로 간다. 한편, 남선비의 아들 칠형재는 어머니가 자기의 친어머니가 아닌 것을 알고 이상히 생각한다. 노일저대귀는 아들 칠형제를 죽이려고 거짓으로 병들 체하고 남편 보고 점을 쳐 보라고 하여 아들 칠형제의 간으 먹어야 자기 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알게 한다. 남선비가 아들들을 죽이려고 칼을 가니 막내 아들이 꾀를 내어 자기가 형님들의 간을 꺼내 오겠다 하고 산돼지 여섯 마리를 잡아 그 간 여섯 개를 내어다 주니 노일저대귀는 먹는 척하고 자리 밑에 넣어 버린다. 이것을 안 아들이 노일저대귀를 죽이겠다고 칼을 가니 노일저대귀는 겁이 나서 도망가다가 죽고 남선비도 겁이 나서 도망가다 역시 죽는다. 일곱 형제는 오동국에 들어가 자기 모친의 시신을 찾고 울고 있으려니 곽새가 날아와서 말하기를 쇠고지 포육을 열두 개를 떠 가지고 자기 들에 타고 있으면 서천 꽃밭에 가서 환생(還生)꽃을 구하여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작은 동생이 포육을 떠 가지고 곽새 들을 타고 서천 꽃밭에 가서 환생꽃을 구해다가 죽은 모친을 살린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출전】{삼국사기} 권 45 열전 제 5 '온달(溫達)'에 수록된 실제 인물의 설화적 전승.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때에 이름을 온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는 괴상했으나 속마음은 밝아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의 평강왕의 딸로서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시집갈 나이 28세가가 되어 부왕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에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ㄴ라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쫒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자기가 궁궐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왕실의 병약한 말을 사오게 하여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온달이 실력을 발휘하여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다음 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서 장사를 지냈다.
역사적 인물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신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를 소재로 최인훈이 [온달]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은 소설과 희곡을 겸용한 특이한 형태이다.
박타는 처녀
몽고설화. 일설에 의하면, 원대(元代)에 몽고에 귀화한 고려 여성들을 통해 유입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느 처녀가 바느질을 하다가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살던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불져 날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실로 다리를 동여매 주었다. 이에 그 제비가 살아났다. 이듬해 그 제비는 강남에서 박씨 하나를 가져다가 뜰에 떨어뜨렸다. 그 처녀는 박씨를 심었더니 가을이 되어 커다란 박이 하나 열렸다. 그 박을 타 보니 온갖 보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하여 그 처녀는 매우 큰 부자가 되었다. 이웃집에 사는 심술궂은 처녀가 이 말을 들었다. 그 처녀는 자기 집에 가서 제비를 잡아다가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려 실로 동여매 주었다. 그 제비는 이듬해 박씨를 갖ㄷ가 주었다. 그 처녀는 좋아라고 박씨를 심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 큰 박이 하나 열렸다. 따서 타 보니 수많은 독사(毒蛇)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였다.
방이설화
【출전】 당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 권 1과 {태평어람} 권 481
일명 '금추설화(金錐說話)'라고도 한다. "내 코가 석자" 라는 속담도 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방이형제가 살았는데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하여 구걸을 하며 살았고, 동생은 부자였다. 어느 해인가 방이가 동생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했는데 심술이 사납고 포악한 아우는 누에알과 종자를 삶아서 주었다. 이를 모르는 형은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알 중에서 누에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황소만큼 커졌다. 질투가 난 동생이 와서 누에를 죽였지만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 들어 실을 켜 주어서 형은 누에 왕이 되었다. 또한 종자에서도 이삭이 하나만 나와 한 자가 넘게 자랐는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달아나자 방이는 새를 쫒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밤을 맞은 방이는 난데 없는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를 꺼내어 돌을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헤어진 후 놓고 간 방망이를 주워서 돌아와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심술이 난 아우도 형처럼 행동하여 새를 쫒아가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금방망이를 훔쳐간 도둑으로 몰려 연못을 파는 벌을 받고 코끼리처럼 코를 뽑힌 후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을 태우다가 죽고 말았다.(다른 책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방이가 이소식을 듣고 달려와 병 구완을 하여 병이 나았다.) 그리고 방망이는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어느 후손이 "이리 똥 내놓아라."고 희롱했더니 갑자기 벼락이 치며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신라 사람 방이에 대한 설화. 형과 동생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보여 주고 있다.
뱀신랑
어떤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뱀이었다. 그 아들은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김정승의 달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승의 딸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자 첫째와 둘째딸은 뱀이라서 싫다고 했다. 그러나 셋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뱀신랑과 결혼을 했다. 혼인하던 날 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 생긴 선비가 되었다. 어느날 남편이 길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허물을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하였다. 만약 없애면 다시는 마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을 단단히 일렀다. 이 비밀을 알아챈 두 언니는 몰래 그 허물을 훔쳐다 태워 버려서 남편은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이미 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문제를 내어 통과하는 사람을 진짜 아내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찾아간 아내(김정승의 딸)가 시험에 통과하였다.(오영진 {시집가는 날}과 관련)
선도산 성모(仙桃山 聖母) 이야기
【출전】{삼국유사} 권 5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隋喜佛事)'
진평왕 시절에 한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지혜(智惠)라 하였으며 어진 행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안흥사(安興寺) 불전(佛殿)을 새로 수리하려고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 때 꿈에 모양이 예쁘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성모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을 기뻐해서 금 10근을 주어 그 일을 돕고자 한다.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불삼상(主佛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불(觀樂王樂上二菩薩經에 나타나는 53분의 부처)과 6류성중(六類聖衆) 및 여러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을 ,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ㅁ아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풂으로서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고 말했다. 지혜는 졸라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선사(仙祠)의 자리 밑으로 가서황금 160량을 파내어 불전 수리를 이루었는데, 모두 성모가 한 말에 따랐던 것이다.
설씨녀 가실
【출전】{삼국사기} 열전
경주에 사는 설씨(薛氏)는 늙은 홀아비로 오직 딸 하나만 데리고 살았다. 설씨의 딸은 재색을 겸비하였다. 그런데 진평왕 때에 이 늙은 홀아비도 병역의 의무는 치르게 되었다. 국방 경비를 위한 소집 영장이 나왔다, 늙고 병든 아비를 보내느니 차라리 자기가 나가고 싶지만 여자의 몸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량부(沙梁部)에 설씨의 딸을 좋아하느 가실(嘉實)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가실은 설씨의 집에 딱한 사정을 알고 뛰어 와서, 자기가 대신 군대에 나가겠다고 제의했다. 설씨 부녀는 이 기적같은 원조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무척 반가웠다. 설씨는 가실에게 "나를 대신하여 군대에 나가겠다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그대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니 만약 그대가 내 어린 딸이 어리석다고 생각지 않으면 아내로 맞아주면 어떨지 ?"라고 운을 떠 보았다. 이것은 가실이 원하던 바였다. 딸은 거울 하나를 꺼내어 반을 갈라 한 조각은 가실에게, 마머지 한 조각은 자기의 품에 넣고 뒷날 혼인할 때의 신표(信票)로 삼았다.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 필을 주며 "이것은 천상(天上)의 좋은 말이니 내가 없는 동안 맡아서 기르시오." 하고 의젓이 전쟁터로 나갔다. 3년이면 돌아오게 되어 있는 가실은 기한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나이는 아흔에 가깝고 딸의 나이도 혼기(婚期)를 넘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다른 신랑감을 찾아서 가기를 강요한다. 그럴 때마다 딸은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言約)을 어기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 모르게 이웃 청년과 혼약을 맺었다. 딸은 항상 가실이 두고 간 말을 쓰다듬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 말과 함께 집을 떠나 버리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실이 돌아왔다. 그러나 몰골은 해골처럼 마르고 옷은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은 그가 가실인 줄을 몰랐다. 배고픔과 싸움에 지친 가실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가실은 거울을 내던졌다. 딸이 그것을 주워 자기의 것과 맞추어 보니 꼭맞았다. 가실이 분명했다. 기뻐하며 그들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손순매아(孫順埋兒)
【출전】{삼국유사} 권5, '손순매아'
손순(孫順)은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는 이름을 운오(運烏)라 했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어,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은 이를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의논하기를,"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소. 이제 아이가 저렇게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차라리 이 아이를 땅에 묻어버려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소."했다.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니, 거기에서 갑자기 기이한 석종(石鐘)이 나왔다. 그들 내외는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그 종을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고왔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것 같으니 도로 데리고 갑시다."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그 종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더없이 맑고 멀리 들리니 속히 조사해 보라."했다.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옛날 곽거(郭巨- 손순과 같이 하다가 금솥을 얻는 중국사람)가 아들을 파 묻을 때 하늘이 금솥을 내렸다더니,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똑같은 본보기로다."하고, 집 한 채와 해마다 곡식 50 석을 주어 그 지극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전에 살던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사나운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는데, 그 종을 얻은 곳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하나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수삽석남(首揷石枏)
【출전】설화집 {수이전}에 수록되었던 것인데, {수이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이 설화는 {대동운부군옥} 제 8권에 전하여짐.
신라 최항(崔伉)은 자를 석남(石枏)이라 했다. 그가 사랑하는 첩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더니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8일 후에 최항의 혼이 첩의 집에 갔는데, 첩은 최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항이 머리에 꽂은 석남가지를 나누어 첩에게 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살도록 허락하여 왔다."고 하기에 첩은 항을 따라 그의 집까지 갔다. 그런데 은 담을 넘어 들어간 뒤로 새벽이 되어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그 집 사람이 그녀가 온 까닭을 물으매 그녀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 항이 죽은지 이미 8일이 지났으며 오늘이 장사날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 석남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았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 하였다. 이에 관을 열고 보니 정말 항의 머리에 석남가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첩이 죽으려 하자, 항이 다시 살아나서 백년해로하였다.
아기 장수 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평민이 살았는데, 산의 정기를 받아서 겨드랑이에 날개(혹은 비늘)가 있고 태어나자 이내 날아다니고 힘도 센 장수 아들을 기적적으로 낳았다. 그런데 부모는 이 아이 장수가 크면 장차 역적이 되어서 집안을 망칠 것이라 해서 아기 장수를 돌로 눌러 죽였다. 아기 장수가 죽을 때에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하였다. 얼마 후 관군(官軍)이 와서 아기 장수를 내놓으라고 하여, 이미 부모가 죽였다고 하니 그들은 무덤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아기 장수의 무덤에 가 보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아기 장수가 막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군은 아기 장수를 다시 죽였다. 그런 후 아기 장수를 태울 용마(龍馬)가 근처의 용소(龍沼)에서 나와서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
야래자(夜來者) 전설
처녀(유부녀일 수도 있다.)가 밤마다 찾아오는 정체 불명의 남자와 함께 동침을 한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사랑의 감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처녀는 임신을 한다. 그 아버지가 이유를 캐 묻자 딸은 사실대로 고백한다. 아버지는 딸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그의 옷에 찔러 두라고 이른다. 이튿날 그 실이 간 곳을 찾아가서 바늘이 꽂힌 주인공을 찾는다. 그것은 대체로 지렁이나 뱀(용이나 수달피도 있다.) 등이다. 처녀는 애기를 낳는다.그 아이는 견훤과 같이 비상한 능력을 가진다.
연권녀 혹은 효녀 지은
【출전】{삼국사기} 열전
'설씨녀' 바로 앞에 있는 설화. 주인공 지은이 연권(連權)의 딸리기 때문에 '연권녀' 설화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5에는 '빈녀양모(貧女養母)'라 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효녀 지은(知恩)은 연권의 딸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느라고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는 품팔이 뿐만 아니라 걸인 노릇도 하면서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다, 그러나 어는 해 큰 흉년이 들어 동냥도 할 수 없게 되자 지은이 양곡 30석에 남의 집 종이 되었다. 종일 일하고는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게 된 후로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밥맛을 잃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따지자 지은은 종이 된 사실을 고백하고 모녀는 붙들고 울었다. 마침 화랑 효종랑(孝宗郞)이 집 앞을 지나다가 듣고는 들어가 사정을 묻고 조[粟] 100석과 의복을 보냈다. 후에 진성왕(眞聖王)이 알고 다시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군사를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 동리를 표창하여 효양리(孝養里)라고 하게 하였다.
이 설화는 [심청전]의 근원설화가 된다.
연오랑 세오녀
【출전】{삼국유사} 권1, '기이(奇異)' 편
해와 달의 생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설화는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 측의 자료를 보면 이 설화가 일본의 건국신화와 관계 있음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영일(迎日)이란 지명도 이 이야기와 관계 있다.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온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그 바위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땅을 떠나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구러자 그 신하는 "해와 달의 정(精)이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람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연오랑 부부을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요."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주를 국보로 모시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오봉산(五峰山)의 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남편이 문둥병에 걸려 헤어지게 되었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 약이란 약은 다 써보아도 효험이 없자 매일 남편의 병이 낫기만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말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 오봉산에 불을 놓고 남편을 찾아가면 낫는다고 하여 백 날 동안 오봉산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남편 옆에 가서 죽으려고 남편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서산으로 지는 해를 보고 제발 남편을 찾아갈 때까지 넘어가지 말라고 손을 휘젓다가 보니 자기 손이 오봉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섯 손가락에 불을 켜서 붙이고 남편을 찾아갔는데, 남편은 이미 병이 다 나아서 둘은 동리로 내려와서 행복하게 살았다.
욱면설화(郁面說話)
【출전】{삼국유사}권5, '욱면비념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계집종인 욱면이 염불을 하다가 서쪽으로 하늘에 올라감)'
경덕왕 때 강주의 남자 신도 몇 10명이 뜻을 극락세계에 두고 고을 경계에 미타사를 세우고 1만일을 기한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이라는 한 계집종이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 뜰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 종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항상 미워해서 곡식 두 섬을 내주면서 이것을 하루 저녁에 다 찧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곡식을 초저녁에 다 찧어놓고 절에 와서 염불하기(속담에 '내일 바빠 주인집 방아 바삐 찧는다'는 여기서 나온 말인 듯.)를 밤 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계집종은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에 매서 합장하고 좌우로 흔들면서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그 때 공중에서 소리가 나기를,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하니, 절 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권하여 함께 법당에 들어가 염불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종은 몸을 솟구쳐 대들보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서쪽으로 가다가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부처로 변하여 연의대(蓮衣臺)에 앉아서 큰 빛을 내뿜으면서 천천히 사라져가니, 이때 음악소리는 공중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그 법당에 구멍이 뚫어진 곳이 지금도 있다.
일월산 황씨 부인당 설화(日月山黃氏夫人堂說話)
오랜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성을 가진 처녀는 동네 총각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워낙 아름다운 규수라 두 젊은이가 서로 탐내어 다투었었는데, 그 중 한 총각이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혼 첫날밤이었다. 원앙금침에 들기 전, 뒷간에 갔다가 신방(新房) 문 앞에 선 신랑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신방 문 창호지에 칼날 그림자가 얼씬거린 것이다. 그 그림자가 분명 연적(戀敵- 다른 총각)의 것이라 여긴 신랑은 그 길로 아무 말없이 달아나버렸다. 칼날 그림자란 실은 문 앞에 있던 대마무잎의 그림자에 대한 착각이었지만, 신랑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 길로 영영 달아나버린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는 조바심을 내며 신랑을 기다리다가 몇 날, 몇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침식을 전폐하고 오직 기다림에 몸을 바치던 신부는 마침내 한을 품고 구천(九天)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러난 그의 시신은 삭을 줄을 몰랐다. 살아 생전 꽂꽂했던 몸가짐도, 앉음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돌부처인 양 시신은 언제나 신방을 지키는 듯 보였다. 한편, 도망간 신랑은 외지에서 다른 색시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아이까지 낳았으나 아이는 낳는 대로 이내 죽곤 하는 것이었다. 점장이에게 알아보았더니 바로 황씨 규수의 원한 맺힌 원혼(寃魂)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괴로움에 빠진 신랑은 그를 일월 산정에 묻어주고, 그리고 그를 섬기도록 하여 보라는 어떤 승려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신랑은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의 부인당 자리에 시신을 옮기고 작으나마 사당(祠堂)을 지어바쳤다. 그 때야 시신은 홀연히 삭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일월산은 조지훈의 고향 근처에 있는 산이다. 따라서 이 설화와 그의 [석문(石門)]이라는 시와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석문}은 1993년 11월 제2차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었다.한편 서정주의 [신부]라는 시도 이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
장자못 전설
옛날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 지금의 미제지(米堤池)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욕심이 많고, 포악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중이와서 시주를 권하자 그는 심술궂게 시주 대신 소의 똥을 잔뜩 자루에 담아주었다. 때마침 그 광경을 보던 부인이 몰래 중을 불러 쌀을 주면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중은 그 부인에게 부처님의 심부름으로 남편을 벌주기 위해서 왔다 하고 내일 아침 그 집을 피해 뒷산으로 달아나되 무슨 소리가 나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튿날 부인은 어린아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중,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므로 금기(禁忌)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조금 전까지 있던 집은 간 곳이 없고 그곳에 물이 괴어 있었다. 여인은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어린아이와 함께 돌로 화하고 말았다 한다. 이후로부터 큰 부자집은 큰 못이 되어버렸다.
조신(調信)의 꿈
【출전】{삼국유사} 권 3 '조신조(調信條)'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주제로 한다. 그리고 아것은 조신이 나중에 깨달은 바 있어 정토사란 절을 세웠다고 하는 사원연기설화(寺院緣起說話)이기도 하다. 조신은 지금의 강릉 지방에 있는 세규사(世逵寺)의 중이었다. 그는 명주 날리군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좋아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낙산대비(洛山大悲)라는 관음보살 부처님에게 그 소원을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조신은 절망 끝에, 어느 날 대비(大悲)의 앞에 가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원망하며 슬피 울다가 너무 지쳐서 얼풋 잠이 들었다. 홀연히 꿈에도 잊지 못하던 김소저가 나타나서 웃으며 "저는 마음 속으로 그대를 몹시 사랑했으나 부모님의 영으로 부득이 출가했다가 이제는 함께 살려고 왔습니다. 나를 용납하여 주시겠습니까? " 하였다. 조신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40년을 함께 살았다.,그러나, 너무도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십여 년을 문전 걸식을 하다가 15세 되는 큰 아들은 굶어서 죽었고, 조신과 그 아내는 늙고 병들어 누워 있고 열 살짜리 딸이 구걸하다가 개에게 물려서 쓰러졌다. 두 부부는 목이 메었다. 이 때에 그 아내는 의연히 단좌하여 남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처을 당신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나이도 젊었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두터워서 헝겊 하나로, 또는 밥 한 그릇으로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 왔으나, 이제 50년을 살다 보니 몸은 늙어서 병들었고 아이들은 굶고 추워서 죽기도 하고, 마냥 구걸을 하려고 해도 집집이 문을 굳게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느 여가에 부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홍안의 미소[紅顔微笑]는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의 약속[約束芝蘭- 친구 사이의 약속]은 광풍 앞에 버들꽃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니 헤어지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도 다 운수가 아니겠습니까 ?" 이 말을 들은 조신도 옳게 여기고, 부부는 두 아이를 하나씩 맡아가지고 헤어지기로 했다. 서로 손을 잡고 이별하려고 할 때에 잠이 깨었다. 한바탕 꿈이었다. 대비 앞의 등불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밤은 고요히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튿날 깨어보니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조신은 열다섯 살 아들이 굶어 죽어간 언덕에 찾아가서 그 시체를 파묻은 곳을 파 보았다. 거기서 돌미륵이 나왔다고 한다. 조신은 인간의 일생이 물거품같이 허무함을 느끼고 다시는 인세(人世)에 뜻을 두지 않고 불도(佛道)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과 관련이 있다.
지귀설화(志鬼說話)
【출전】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려 있다가 지금은 {대동운부군옥}에 실려 있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제목을 [심화요탑]이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활리역에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여왕을 사모하다가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분향을 위해 행차하는 길을 막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린 지귀는 여왕의 배려로 여왕의 행차를 뒤따르게 되었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그 광경을 보고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보고서는 가슴이 타들어가 급기야 화신(火神)이 되고 만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어 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후 백성들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이 때 여왕이 지어주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귀의 마음의 불이 제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으매 마땅히 창해 밖에 추방하여 이제 다시 돌보지 않겠노라."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地下國大敵退治說話)
옛날 지하국에 사는 아귀(餓鬼)라는 도적이 지상 세계에 나타나 왕의 세 공주를 잡아갔다. 한 무사가 공주를 구출하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그러나 왕은 공주를 구하면 막내딸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몇 사람의 부하를 데리고 지하국의 입구를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꿈에 산신이 나타나서 지하국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입구에 다다른 무사는 부하들을 지상에 남겨두고 광주리를 타고 지하국에 이르렀다. 세 공주 중 하나가 물을 길러 왔다가 무사를 만난다. 무사는 수박으로 변하여 아귀의 집으로 들어갔다. 세 공주는 아귀에게 독주를 권하여 아귀를 잠들게 하고, 그의 힘의 근원이 되는 옆구리의 비늘 두 개를 제거하고 그 목을 잘라서 죽여버렸다. 무사는 세 공주를 지상으로 올려 보냈으나 부하들이 무사는 올리지 않고 그대로 궁으로 돌아갔다. 지하국에 남은 무사는 처음 나타났던 산신의 도움으로 말을 타고 무사히 지상으로 나온다. 한편, 궁궐에서는 부하들이 공주를 데리고 왕 앞에 나아가 자기들이 구한 양 거짓말을 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공주들도 자신들이 살아오게 된 기쁨에 무사에 관한 일을 잊고 있었다.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는데 무사가 나타나 자초지종을 고하자 왕은 크게 노하여 부하들을 죽이고 막내딸과 무사를 결혼시켰다.
호동왕자(好童王子)
【출전】{삼국사기}권14, '고구려본기 제2(高句麗本紀第二) 대무신왕(大武神王)'
전설이라 할 수 있다. 호동(好童)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소생이다. 왕은 그를 심히 사랑하여 호동(好童)이라 이름하였다. 대무신왕 15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沃沮)를 유람하였는데, 낙랑의 왕 최리(崔理)가 여기 나왔다가 호동을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 하며 호동을 데리고 돌아가 사위를 삼았다. 그 뒤,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樂浪)에 있는 아내 최씨녀(崔氏女)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 무구(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서 맞아들이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으리라." 하였다. 그 이유는 낙랑에는 옛날부터 신기한 고각이 있어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지라, 그로써 침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과연 최리의 딸(낙랑공주)은 몰래 무고에 들어가 예리한 칼로 그 고각을 찢어 버리고 호동이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호동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여 낙랑을 공격했다. 최리는 고각이 울리지 않으므로 안심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이르러서야 깜짝 놀라 무고에 가보니 벌써 고각은 부서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최리는 마침내 딸을 죽이고 항복하고 말았다.
홍수설화(洪水說話)
옛날 이 세상에는 큰물이 져서 세계는 전부 바다로 변하고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게 되었다. 그 때에 어떤 남매 두 사람이 겨우 살게 되어 백두산같이 높은 산의 상상봉에 표착하였다. 물이 다 걷힌 뒤에 남매는 세상에 나와 보았으나 인적이라고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남매간에 혼인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얼마 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남매가 각각 마주 서있는 두 봉우리에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암망(구멍 뚫어진 편의 맷돌)을 굴려 내리고 사나이는 수망을 굴려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 암망과 수망은 이상하게도 산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같이 합하였다. 남매는 여기서 하느님의 의사를 짐작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남매의 결혼으로 인하여 계속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인류의 조선(祖先)은 실로 옛날의 그 남매라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이 이야기는 인류의 시조, 천지개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중국과 불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서양의 경우 구약에 나온다.
염불 공덕으로 고향에 돌아오다
신라시대 경주 서라벌에는[만장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부근 우금리라는 마을에 근근히 끼니를 지탱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불심이 장한 '보게'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일찌기 과부가 되어 아들 장춘 하나만을 유일한 희망 으로 삼고, 한숨과 눈물로써 지내며 고이 키우고 있었다.
봄이면 산나물을 캐서 끼니를 때우고 또한 남의 삯바느질과 김매는 품삯으로 두 목구멍에 풀칠하는 가난한 살림을 지속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외아들 장춘이도 어느듯 장가보낼 나이가 되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서 근심걱정이 떠날 길 없던 나머지,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지독한 가난은 면 해야 하겠기에 외아들을 멀리 중국 장사(상인)의 일꾼으로 보내고는, 민장사 에 가서 일을 돌보며 항상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불렀다.
'비록 가난하기느 하였으나 우리 모자는 한번도 남의 재물을 훔친 일이 없고 무턱대고 적은 산 목숨이랃 죽인 일이 없으니, 부디 부처님께서 도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서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앞에 빌었다.
불행이도 배가 떠나던 그날 저녁부터 모진 강풍이 불며 폭우가 쏟아져 온 천지가 수라장이 되었다.
바다에 나갔던 배는 한척도 돌아오지 못 하였음은 물론이다. 모두가 죽은것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었으나 보게 아주머니만은, '죄 업는 내 아들만은 틀림 없이 살아 올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남들 처럼 죽었다고 제사지내는 대신 평상시와 같이 일하면서 기도만 하였다.
얼마를 더 지냈어도 바다에 나갔던 모든 배들은 한 척도 돌아온 것은 없었고 배를 탔던 사람 역시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춘이가 탔던 배는 파선되었으나 그는 다행이도 판자에 몸을 기대어 며칠간 표류를 계속하다가 어떤 섬에 다달아 구조 되었다.
그 곳은 당 나라 땅이었는데,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힘이 세었으므로 어느 부 잣집에 고용이 되여 밭갈이등 잡역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점심 후 곤히 잠을 자다가 문득 민장사 절의 부처님이 나타난 꿈을 꾸고는 일어나 기이하게 생각 하고 다시금 염불을 드높은 소리로 하면서 일을 계속하였다. 때마침 중국에 왔다가 고국으로 떠나가는 신라의 큰 스님이 그 곳 가까이 지나다가, 밭을 가는 농부가 고국말로 염불하기에 놀랜 나머지 그에게 물어보게 되었다.장춘이는 지난 모든 과거를 이야기 하였더니 모두가 "관세음보살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긴 공덕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함께 집주인을 찾아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주인도 가상히 여기고 적지 않은 재물과 함께 선물을 주어, 큰 스님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국에 돌아와서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다.
머슴이 죽어 원님이 되다
경남 산청군에 심원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주지에 묘심(묘심)이라는 스님 이 있었는데 절이 너무 낡아 묘심은 절을 증수코자 부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끝마치던 날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네가 내 일 아침 일찌기 일어나 동구 밖에 나가다가 제일 먼저 보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 하시었다.
묘심은 꿈으 꾸고 마음이 기뻐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께 예불하고 권선문을 들고 동구밖에 나갔다. 그런데 맨 처음으로 만 난 사람은 아랫마을 조부자집 사는 머슴이라는 꼴에 돈이 있을것 같지 않아 망서리다가 부처님 말씀을 생각하고 다가서서 사정하였더니 머슴은 반가워 하며"절을 중수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하고 물었다.
"약 백냥만 가지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권선문을 내 놓으라 하였다. 묘심은 하도 허망하여"당신에게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예, 저는 조부자집에서 사십년간 머슴을 살았는데 장가를 들기 위해서 한푼 도 쓰지 않고 모았으나 이제 나이 오십삼세가 되었으니 이제사 장가를 간들 무슨 재미를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맙습니다."하고 권선문에 백냥을 적고 조부자 집에 가서 곧 돈 백냥을 주어 절 중수를 곧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머슴보고 미쳤다고 비방하고 또 묘심이 그를 꼬여 뜯어 냈다고 헛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머슴은 시주한 뒤 몇일 안 있다가 병(重風)이 나 일도 못하고 돈도 없으니 하루는 조부자 집에서 사람을 시켜 업혀서 절로 보냈다. 그래서 묘심은 하는 수 없이 방 하나를 정해 주고 정성껏 간호를 하면서 시주 한 공덕이 헛되지 않다면 결정코 나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백일 기 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지 몇일이 되지 않아 머슴은 병이 더하여 그만 죽고 말 았다. 하도 허망한 일이라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정성껏 화장하여 장례를 잘 치루어 주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부처님이 너무나도 야속한 것 같 았다.
"그 머슴이 평생동안 번 돈을 다 절에다 바쳤는데 병을 낳게하여 주지는 않고 병이 더하여 죽고 말았으니 부처님은 영험이 없다." 하고 도끼를 가지고 법당 에 들어가 부처님을 원망하면서 부처님 이마를 도끼로 내려쳤다.
그랬더니 도끼가 이마에 밖혀 빠지지 않는 지라 묘심은 그를 빼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하 다가 민망하여 그대로 놓아두고 걸망을 싸서 짊어지고 절을 떠났다. 이산 저산 이절 저절 유랑하기 이십오년, 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항상 심원사 부처님 생각 이 나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지금쯤은 절이 완전히 폐허되었으리라.-아니 혹 누가 들어가 도끼를 빼고 시 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이렇게 여러 갈래로 생각하다가 한번 찾아가 참배 나 드리고 와야겠다 하고 절을 찾아 왔다. 그런데 그 날사 말고 산청군에 새로 박정재라는 원님이 부임하여 심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럴리가 있느냐? 내가 한번 가서 빼 보리라."하고 종자를 몇과 같이 절을 찾아 왔다.
과연 부처님 이마에 꽂힌 도끼를 보고 "이상도 하다" 하며 손으로 가 잡으니 그만 도끼가 쑥 빠지는데 "화주시주상봉"이라 한 푸른 글자가 도끼날에 쓰여 있었다.
그 때야 묘심이 원님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그 도끼의 내력을 이야기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하며 원님은 더욱 신심을 내어 절했다. 얼마 뒤 다시 부 처님을 쳐다보니 도끼가 빠진 곳에 상처가 금방 없어지고 더욱 이마에서 백호 광명이 빛났다. 원님은 묘심으 붙들고"나는 전생에 시주한 공덕으로 일자무식 이었지만 좋은 곳에 태어나 이런 벼슬을 하게 되었으니 스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저와 함께 공부하게 해주세요"하고 사정하였다.세상 사람들은참 으로 보기 드문 일이라 놀래며 부처님을 받들기 옛보다 배는 더했다.
도화와 비형
신라 제 25대 진지왕은 굉장한 호색가였다.
왕은 어느 날 사량부에 사는 여인인 도화랑이라고 불리는 딸이 너무나 예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자신의 사애로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지켜야 할 보물은 정조인데 그 보물은 어떠한 권세부터 빼앗길수 없을 뿐 아니라 더군다나 현재 자신은 남편이 있는 몸이기 때문에 왕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왕은 죽이겠다고까지 위혐을 해보았으나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왕은 이에 "그렇다면 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라고 물으니 "그때는 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한 뒤에 비로소 그녀는 왕으로부터 풀려 날 수 있었다.
그 해에 왕은 정난으로 말미암아 폐위되자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그녀의 남편도 병들어 죽었다. 남편이 죽어 백일째 되던 날 밤, 진지왕의 혼이 도화를 찾아갔다. 왕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도화의 방으로 들어가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옛날 약속한 것을 지켜라!" 하고 말했다.
도화는 이를 부모에게 알렸던 바 군왕의 명이므로 거역할수 없다는것이 부모들의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도화는 왕과 7일간 부부의 정을 맺었다. 왕이 머무는 동안 오색 구름이 지붕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하더니 7일이 지나자 왕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도화는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해산하려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을 비형이라 했다.
진평대왕이 이 아이에 대한 사연을 듣고 비형을 궁중에서 길렀다. 비형이 15살이 되자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마다 궁중에서 밖으로 나가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놀다가 새벽에 절의 종소리가 들리면 귀신들도 흩어졌으며 비형도 궁중으로 돌아오는것이었다. 왕은 이 사실을 알고 비형으로 하여금 귀신들을 이끌고 신원사 북쪽의 개천에 다리를 놓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곧 비형은 귀신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다리(이 다리는 그 후 귀교라고 불리었다. 오늘날 경주의고적으로서도 손꼽히고 있다.) 를 놓았다.
진평왕은 이에 감탄하여 귀신들의무리중에 인간으로 현신하여 조정의 정사를 도울만한 자가 있으면 추천하라 하니 비형은 길달이라는 귀신을 천거하였다. 과연 그를 임용하고 보니 그는 충성되고 곧기가 비할데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크게 기뻐하여 자식이 없는 각간의 임종에서 주어 그를 양자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령하여 홍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고 길달을 매일 밤 그 문류위에서 자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문을 길달문이라 했다. 어느날 길달은 여우로 변하여 도망하자 비형은 기신을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귀신들은 비형을 매우 무서워하여 그의 이름만 들어도 달아났다 한다. 당시 이 사실을
성제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비형랑의 집이었네.
날고 뛰는 귀신의 무리.
여기에는 머무르지 말라!.
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훗날 사람들은 이 가사만 적어 문에 붙여 두어 귀신을 물리쳤다 한다.
호국 귀의 사임
대력 14년의 일이다.
하루는 갑자기 김유신의 무덤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 속을 보니 의관을 갖춘 한 사람의 장군이 있고 그 주위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가진자가 40여명 있었다. 그들은 태종대왕의 능인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 능이 움직이고 우는 소리가 있는듯하고 무엇인가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이 평생 어려운 일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사오며, 이제 혼백이 되어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막고 어려운 일을 구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치 않았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주살을 당하였습니다. 즉, 이는 임금이나 신하가 나의 공을 생각지 않는것이오니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지 않을까 하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왕이 이에 대답하기를 "나와 공이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공은 다시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라" 하며 장군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번 모두 허락하지 않자 회오리 바람은 돌아가 버렸다.
혜공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대신 김경신을 보내 김유신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게 하고 또 공을 위해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
[삼국유사]
뱀이된 비구니
옛날 홍재상이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을 때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자그마한 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굴 옆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또 그곳에는 17,18세쯤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여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 연유를 묻자 원래 그곳에는 세 명의 여승이 있는데 지금 두 명은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갔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아무달 아무날 그대를 맞아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고 약속했다.
남자의 정을 처음으로 알게된 젊은 여승은 마냥 약속한 날만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이 지나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여승은 마음에 병이 생겨 죽고 말았다.
그가 나중에 남방 절도사가 되어 진영에 있을 때였다. 어느날 도마뱀같이 생긴 자그마한 뱀이 그의 이불 위를 지나갔다. 아전을 시켜서 내던지게 했더니 아전이 죽여 버렸다.
다음날도 조그마한 뱀이 들어오기에 또 아전을 시켜 죽이게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들어오는것을 보고 그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비로소 지난달 여승에게 한 약속을 어긴 것이 화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위엄과 무용만 믿고 뱀이 나타나는 것마다 아주 없애 버리려고 잇따라 죽이게 했더니 그 뱀은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그는 영내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모두 칼을 들고 사방을 에워싸게 하였으나 여전히 뱀은 포위를 뚫고 들어왔다. 군졸들은 들어오는대로 다투어 찍어 버리거나 사면에 장작불을 지펴 놓고 보이기만 하면 다투어 불속에 집어 던졌으나 구렁이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할수 없이 구렁이를 함 속에 넣고 방안에 두고 낮에는 함 속에 가두어 두었다가 순행을 나갈때에는 사령에게 함을 짊어지워 앞세우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점점 정신이 쇠약해지고 얼굴 빛이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용제총화]
외사촌의 한
기유라는 사람의 조부는 당대에 있어서 명재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조부가 죽고 난 다음부터 그 집에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 훌륭한 저택도 어느덧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고 말았다.
그 이상한 일이란 다음과 같았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문밖에 서 있는데 문득 그 아이 등에 어떤 무거운 물건이 붙어 떨어지지 않아 깜짝 놀라 집안으로 달려 들어가 그 집사람에게 무엇이 붙어 있는지 보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등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는 무거운 것이 등에서 떨어져 나갔으나 그 어린아이는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한다.
그 뒤로는 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밥을 지어 놓으면 어느 사이에 그 밥이 뜰에 흩어져 있고, 또 밥을 지으면 솥뚜껑은 그대로 있는데 그 곳에 밥 대신 똥이 가득 들어 있곤 하는 것이다. 무언가 변괴를 부리는 귀신의 짓이라고 경계하면 어떤 때는 화분이나 책상이 공중으로 날아 다니기도 하고 또 큰 가마솥 뚜껑이 천정에 붙어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또 어떤때는 앞뜰에 있는 채소가 시들어 있어 조사를 해보니 모두 거꾸로 심어져 있기도 했다. 또 농안에 넣어둔 옷이 모두 나와 천정이나 대들보 위에 늘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때는 불이 없는 아궁이에서 불이 갑자기 일어나 그 불을 끄면 불이 문간방에 옮겨 붙어 다 태워 버리는것이다.
이와 같이 괴이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에 그 집사람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하여 다른곳으로 옮겨 버리고 말았다.
기유가 분연히 말하기를 오랫동안 선조들이 살던 집을 빈집으로 만들어 황폐하게하는 것은 자손으로서는 할일이 아니다. 귀신 따위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굳게 마음을 먹고 그 집에 남아 살기로 했다.
그러나 괴이한 일은 계속 일어났다. 때로는 사람의 얼굴에 똥과 오물을 칠하는 일이 생겨났다. 기유가 화가 나 요괴를 꾸짖으면 공중에서 너도 언제까지 버틸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요괴를 퇴치시키려고 있었던 기유는 처음에는 힘으로 버티어 나갔지만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 변괴는 기유의 외사촌 유계량이라는 자가 난을 음모하다가 처형당하더니 그 귀신이 이 집에 붙어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 한다
[용재총화]
귀복
옛날 양주땅 어느 정씨 집에 귀신이 내려 한 계집 종에게 붙어 수년동안 떠나지 않았는데 그녀는 화복과 길흉을 알아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하였으나 누구 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 계집종에게 붙은 귀신은 목소리가 굉장히 맑아서 늙은 꾀꼬리 혀와 같은데 낮이면 공중에 떠 있고 밤이면 대들보 위에 깃들었다. 정씨 집에 대하여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이웃대대로 명문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매우 귀중한 비녀를 잃고 계집종을 의심하여 항상 그 종을 때리는 것이었다.
그 종이 괴로움에 이기지 못하여 정씨 집으로 달려와 신이 들린 아이에게 점을 쳤다. 그러자 귀신이 있는곳은 알고 있으나 너에게는 말하기 거북하니, 너의 안주인이 오면 말하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종이 안주인에게 가서 알리니, 안주인이 친히 좁쌀을 가지고 점을 쳤다. 귀신이 그 안주인에게 있는곳은 알고는 있으나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한 번 말하면 그대는 몹시 무안하리라하고 귀신이 망설이자 그녀는 노하여 꾸짖었다. 그러자 귀신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아무날 저녁에 그대가 이웃 아무개와 같이 닥나무 밭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 비녀는 그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고 귀신이 말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종이 가서 찾아오니 그녀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또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 집 종이 물건을 훔쳤는데 귀신이 물건을 춤친것은 바로 누구누구이고 어디어디에 숨겨놓았다라고 거침없이 이야기 했다. 그러자 종이 크게 꾸짖기를 어찌 감히 남의 집에와서 의지하느냐?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 종은 그대로 땅에 엎드려 한참있다가 다시 일어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붉은 수명미 난 장부가 내 머리털을 끌어당기니 눈이 아찔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귀신은 그 집 주인 정상국을 무서워하여 상국이 집에 돌아오면 달아나고 그가 나가면 다시 돌아오곤했다. 상국이 그일을 알고 귀신을 불러 말했다. 너는 숲으로 가라. 인가에 오래 모무르는것은 부당하다고 하자 귀신은 내가 여기 온 뒤로 집안에 복이 더 하도록 힘썼으며 한번도 재앙을 일으킨 일이 없다. 실은 이 집에 계속 있으면서 봉사하려고 하였는데, 물러가라 하는 대인의 명이 있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거역하리이까? 하고 마침내 통곡하고 떠났다 한다.
아버지 유언
아버지가 부인을 잃고 아들 셋과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 점점 늙어가는데 위로 두 아들은 결혼을 시켰으나 막내는 결혼을 하지 못해 늘 걱정이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아버지는 세 아들을 불러놓고,
" 내가 죽으면 목만 베어다가 웅덩이에 묻으라 ."고 유언을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두 형들은 목을 베어 웅덩이에 묻을수는 없다며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였다. 막내는 그래도 마지막 유언이니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형들은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산에다 묻는다는 것이었다. 막내는 궁리를 하다가 헛간에다 불을 질렀다. 갑자기 불이 나자 식구들이 그 불을 끄려고 헉간으로 몰려간 사이에 막내는 아버지의목을 베어 명주로 싸서 도망을 나와 웅덩이에 넣었다.
아버지의 유언은 이행을 했으나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무작정 길을 가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배도 고팠으나 인가가 보이지를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불빛이 안보여 막내는 근처의 묘등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잠을 자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큰 기와집이 있어 그곳을 들어가게 되었다. 집안에는 아름다운 처녀가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귀한 술도 따라주었다. 막내는 음식도 잘먹고 처녀에게 도취되어 처녀와 함께 밤을 보냈다. 날이 밝자 쳐녀는 막내에게 금가락지를 주면서 자기는 김정승의 딸이니 김정승 집을 찾으라고 하였다. 막내가 서운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자 집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자기는 여전히 묘등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는데 손에 정말로 금가락지와 패물이 쥐어져 있었다.
막내는 그 길로 서울로 가서 김정승 집을 찾아갔다. 김정승을 만나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정승은 마구 화를 내며,
" 내딸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느냐?"
고 도무지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막내가 증거로 가락지를 내보이자 정승은 자기 딸의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막내를 오히로 도둑으로 몰아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밤이 되자 막내가 갇힌 곳으로 처녀가 찾아왔다. 둘이는 서로 반가워하며 전날처럼 정을 나누었다. 날이 밝자 처녀는 떠나면서 저고리를 주었다.
막내는 김정승에게 저고리를 보이며 밤에 처녀가 다녀갔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승은 그 말을 믿고 막내를 귀하게 대접하며 그 집에 묵게 하였다. 처녀는 밤마다 막내를 찾아와 함께 지내다가 날이 새면 아쉽게 떠나가곤 하였다.
막내는 늘 처녀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낮잠을 자는데 꿈에 아버지가 용왕이 되어 나타났다. 아버지는,
"네가 내 말을 지켜준 덕분에 나는 용왕이 되었다. 내가 약을 세 개 줄테이니 이 약을 처녀에게 먹이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깨니 막내 옆에는 살살이, 피살이, 숨살이 약이 있었다. 밤에 처녀가 또 찾아오자 막내는 그 약을 먹게 하였다. 처녀가 살살이 약을 먹자 살이 돋고, 피살이 약을 먹자 피가 돌고, 숨살이 약을 먹자 숨이 돌아와 다시 살게 되었다.
막내는 처녀와 결혼하고 정승의 사위가 되어 잘 살았다.
지관의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사는 집에 지관이 며칠 동안을 묵게 되었다. 부부는 없는 살림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정성껏 양식을 마련하여 지관을 대접했다. 지관은 가난한 부부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새 집터를 잡아주고는 오막살이라도 좋으니 그 터에 집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 아무리 집터가 아까워도 십 년이 되면 반드시 옮겨야 한다."
고 하였다.
지관이 떠나고 부부는 새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지었다. 새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부부는 무슨 일이든지 잘 되어 부자가 되었다. 집도 커다란 기와집으로 다시 짓고 자식도 많이 낳고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새 집으로 이사온 지 십 년이 되었다. 부부는 십 년이 되면 집을 옮기라는 지관의 말이 생각났지만 그 땅을 떠나기가 너무 아까웠다.
"이제껏 별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길라구."
부부는 마음이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냥 눌러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운이 아무 없어 보이는 할머니가 이 집을 찾아왔다. 할머니는
"오갈 데가 없으니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
고하였다. 부부는 먹을 것을 주고는 뒷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부인은 밥상을 차려서 뒷방으로 갔다. 그런데 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를 않았다. 부인이 이상히 여겨 방문을 여니 할머니는 죽어 있었다. 부부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나 연락할 곳도 없어 할머니의 시체를 뒷산에 묻었다. 할머니를 묻고 집에 돌아오니 웬 장정들이 몇 명 집에 와 있었다. 장정들은 이들 부부에게
" 어제 이 집에 들어온 할머니가 어디 계시냐?"
고 물었다. 부부가 할머니가 죽어 뒷산에 묻고 오는 길이라고 하자 장정들은
" 그럼 할머니가 가지고 온 보따리는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다. 보따리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부는 어리둥절하여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장정들은 그 보따리 속에는 패물이 가득 들었다며
" 너희들이 우리 어머니를 죽이고 보따리를 감췄구나!"
하면서 집안을 마구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는 부부를 살인죄로 고소하려고 하였다. 부부는 재산을 모두 줄테니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집과 땅을 모두 내주었다.
그후 부부는 옛날처럼 다시 가난해졌다.
수로부인
성덕왕때다.
늦은 봄날, 동해를 끼고 굽이쳐 나간 길, 그 길을 순정공은 그의 부인 수로와 그리고 종자를 거느리고 가고 있었다. 그는 강릉 태수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부임해 가는 도중이었다. 바닷가의 어느곳을 잡아 그들은 길을 엄추고 점심 자리를 벌였다. 그 곁에는 바다를 임해 병풍처럼 둘러선 선벽이 있어 높이가 천길, 그위에는 활짝 철쭉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있었다. 수로부인은 그 꽃은 갖고 싶었다. 종자들을 둘러보며 물어 보았다.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은 누구일까?
종자들은 그 석벽 위는 도저히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할 곳이라 하여 모두둘 난색을 지으며 수로부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한 노옹이 암소를 끌고 그 곁을 지나다가 수로부인의 말을 엿듣고서 천길 석벽 위로 올라가 부인이 탐내던 그 철쭉꽃을 꺾어 왔다. 그리고는 시가를 지어 읊으며 부인에게 꽃을 바쳤다.
자주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이다.
이렇게 헌화가를 부르며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쳐온 그 노옹은 어떤 사람인지 알수 없었다.
아직 임지를 향해 이틀 길을 더 가서 역시 바다를 임해 있는 어느 정자에 다다라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때 홀연히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을 쳤으나 아무런 계책이 나서지 않았다.
또 한 노인이 지나다가 알려준다.
옛 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입길은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이제 바닷속의 한 축생이 어찌 뭇사람의 입길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보오.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들여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물을 치노라면 찾을수 있으리다.
순정공은 노인이 일러준는 대로 했다.
남의 부녀 뺏아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뭇사람들이 모여 해가를 외치며 막대기로 물가를 쳤더니 그제사 용은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왔다. 순정공은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들을 물어 보았다. 부인은 일곱 가지 보배로 지은 궁전이 있고, 그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요리와는 전혀 다르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부인의 옷에는 일찌기 인간 세상에서 맡아볼 수 없었던 이상한 향내가 스며 있었다. 수로부인은 자태며 용모가 절세의 미녀라서 매양 깊은 산골이나 못을 자나다 이처럼 여러 번 신물들에게 납치되곤 했다.
서동과 선화공주
백제 제30대 무왕 그의 이름은 장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녀는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못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 장을 낳았다. 무왕의 아명은<서동-맛둥>, 그의 재능이며 도량은 넓고 깊어 헤아이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다. 사람들이 거기에 착안하여 그의 이름을 서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세째 공주 선화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서울의 마을 아이들에게 그는 마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호감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 서동은 마침내 한 편의 동요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을의 그 아이들을 꾀어, 자기가 지은 동요를 무르고 다니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밀어 두고(밀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동요는 서울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 아이들의 입으로 번져나가 드디어는 대궐까지 알려졌다. 백관들은 동요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서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극력 탄핵하여 공주를 먼 시골로 유배시키도록 했다.
누명을 쓰고 공주가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가는길,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공주를 맞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공주를 모시어 호위해 가겠다고 나섰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어떤 정체의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미덥고 즐거웠다. 이리하여 서동은 공주를 수행하게 되었고, 그리고 둘은 몰래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공주는 서동이란 이름을 알고서 그 동요시가 사실로 실현되어 나타남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왔다. 선화공주가 그 모후가 주던 금을 꺼내어 놓고 생활을 계획하려 하자 서동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오?
이건 황금입니다. 평생 동안 가멸케 살아갈 수 있을거예요.
공주의 대답을 듣고 서동은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들이 흙처럼 쌓여 있소.
공주는 듣고서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세상에도 지극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금의 소재를 아신다면 그 보물을 보모님 궁전으로 실어 보내는것이 어떨까요?
서동은 그러자고 했다.
이래서 그 황금을 모아 들였다. 둔덕만큼이나 하게 황금을 쌓아 두고 서동과 공주는 용화산(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로 가서 황금 수송의 방책을 여쭈어 보았다.
지명법사는 응낙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수 있다. 금을 가져 오너라
선화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지명법사에게 맡겼다.
법사는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그 황금과 그리고 공주의 편지를 신라의 궁중에 옮겨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묘한 변통이 경이로와, 무척 존경하게 되어 항상 글을 띄워 안부를 묻곤 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잡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서동, 즉 무왕이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로 거동하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 3존이 못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수레를 멈추고 경계를 올렸다.
왕비는 왕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다 큰 가람을 세우는것이 진실로 소원이노라고. 왕은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지명법ㅅ에게로 가서 그 못을 메울 일을 여쭈었다.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 못을 메워선 평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다 미륵상 셋과 그리고 그것에 부수되는 회전.탑.낭무들을 각각 세곳으로 세우고 이름하여 미륵사라 했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