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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천 ☞ [자연생태계] 스크랩 병목안의 유래와 담배촌
학의천 추천 0 조회 68 11.04.03 22: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병목안(後頭尾洞)

 

새마을교에서 안양 채석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초입(새마을교)은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谷)이 깊고 넓다고 하여 병목안이라 부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後頭尾洞)라 칭했고,

행정규역 명칭으로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동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후두미동의 두 자는 豆와 頭를 함께 사용하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頭로 통일된 것으로 보이며, <<晋州 柳氏世譜>>(1982)에는 後屯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頭의 誤記로 보인다.

 

 

 

 

 

병목안에 사람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것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촌로들의 증언과 이 곳에 소재한 묘소 등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조 숙종 년간에 진주 류씨에의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인조년간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柳詢(1597-1638)의 둘째 아들인 柳命才 (1623-1703)의 묘를 이곳에 쓴후부터인데, 류명재는 자가 有道, 호가 思齋 로 통정대부에 올라 안산군수와 영천군수 및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81 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인물이다.

 

 

진주류씨의 묘는 류명재외에 류명재의 아우 柳命雄(1636-1722, 돈지돈령부사 역임. 1973년에 화장)을 비롯 하여 류명재의 큰 아들, 손자 및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인 姜世晃 (1713-1791)의 처(晋州柳氏) 묘(후에 진천으로 이장) 등이 있었다. 그 중 류석의 誌石을 이곳 토박이인 邊源信이 수습, 현재 안양시 문화공보실에 의해 보존.관리 되고 있다. 진주류씨 이후 병목안에 세거한 성씨는 원주 원씨, 순창 조씨, 달성 서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병목안을 기점으로 서쪽지역을 새마을, 서남쪽 지역을 창박골, 남쪽지역을 담배촌이라 각각 칭한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에 진주 류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날마다 찾아오는 食客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이 이르기를 마을초임(새마을교)산밑에 묘를 쓰고 탑을 세우시오 라고 이른 후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가다고 한다. 그 후 류부자의 하인이나 가족이 죽으면 스님이 일러준대로 묘를 쓰고, 그 옆에 탑(돌탑)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자 과연 류부자 집에 찾아오던 손님(식객)의 발길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진주 류씨가 일 거에 패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병목안 동쪽에 있는 뉴골든아파트 뒷산이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산 끝에다 묘와 돌탑 등 무거운 것을 쌓았으니 배가 뒤집혀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새마을교 옆에 있던 돌탑은 손을 대거나 치우면 병목안 주민들이 위해 를 당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에 그래도 있었다가,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갔고, 묘는 1980년대 초에 대부분 화장되었다. 마을 동남쪽에 있던 안양채석장은 1930년대 초에 개장되었다가 1989년에 폐장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차응설이 이곳에 야학을 세워 문맹퇴치에 헌신 하기도 하였다.

안양3동 15통.17통.18통.24통에 속해있는 병목안에서는, 일제 중엽까지 만 해도창박골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창박골 앞산(약수 터 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출처:http://www.byongmokan.co.kr/

 

 

담배촌

병목안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3동 24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하동 정씨를 비롯하여 금녕 김씨, 원주 변씨, 청주 한씨 등의 세거지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신부인 崔良業(1821-1861)의 아버지 崔京煥 (1805.10.15-1839.9.12)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1837년 7월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 이라 칭한다.

 

 

담배촌은 급경사진 곳이 많아 담배는 주로 저지대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 경작했는데, 일제강점기만 해도 한강 이남에서는 담배촌에서 재배한 담배를 일등품으로 칠만큼 품질이 우수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 담배촌 주민들은 담배 경작 외에 땔나무와 토종꿀을 채취해 이를 안산장(시흥시 수암동), 군포장(호계3동 구 군포), 안양장(안양1동 시 대동) 등에 팔아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이 산간 오지의 마을이라 한 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본부가 주둔하기도 했고, 근래에는 병목안에서 담배촌에 이르는 골짜기마다 연중무휴 휴양객으로 붐빈다.

 

성지에는 福者 최경환의 묘가 있으며, 성지입구 못미처에 잇는 福者강당은 1977년 대홍 수 직후 중건 되었다.

출처:http://www.byongmok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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