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행: 2025. 10. 31.~11. 1.(금,토) - 음력(9. 11.~12.), 일출 06:57~일몰 17:35
●산행지: 감악지맥(紺嶽枝脈) 1박2일 졸업
●산행코스: 신지고개~한강봉~은봉산~소사고개~하우고개~노아산갈림길~게네미고개~264m봉~세우게고개~노고산~수르네미고개~266.1m봉~한터고개~무건리고개~365.7m봉~설마치(어룡)고개~감악산~간패고개~안흥임도~마차산~도감포갈림길~양원리고개~396.5m봉~아머니고개~163.9m봉~223.1m봉~도감포(한탄강/임진강 합수점)
●먹거리: 생수1.5리터, 초코다이제스트2, 다이제스트2, 크림빵3, 단팥빵3, 사탕7
●준비물: 바람막이, 고아텍스, 윈드스터퍼, 보온의류, 반팔, 팔토시, 텐트, 1회용 우의, 스페츠, 메트리스, 은박메트2, 스틱, 말방울, 헤드랜턴, 구급약,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장갑, 안대, 귀마개, 칫솔, 양말, 띠지9
●거리: 약 54.7Km
●소요시간: 31.5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국철3,900원, 김밥3,500원, 야구르트2,000, 국철2,550원
●날씨: 7~19, 야간에 비
●산행경과:
- 10. 31.(금) : 30.54km, 35.3km
- 07:47 : 홍복고개 출발
- 08:11 : 한강봉(474.8m)
- 08:58 : 은봉산(378m)
- 09:25 : 소사고개
- 09:57~10:28 : 하우고개
- 12:17 : 해유령/ 게너미고개
- 13:07 : 새우게고개/ 삼현터널
- 13:35~14:00 : 노고산 오른쪽으로 우회
- 14:30 : 차유령/ 수레너미고개
- 16:51 : 무건리고개
- 17:08 : 감골
- 17:25 : 365.7m봉
- 18:00 : 격납고 비박
* 11. 1.(토) : 54.7km
- 04:00 : 기상
- 04:45 : 출발
- 04:55 : 상산김씨묘표
- 05:16 : 설마치고개
- 06:42 : 가스실습장
- 07:27 : 악귀봉(616m)
- 07:48~59 : 임꺽정봉갈림길
- 07:51:~56 : 임꺽정봉(676.3m)
- 08:10~22 : 감악산(675m)
- 08:35 : 삼시군봉(650m, 양주시, 파주시 → 연천군)
- 09:12 : 철탑
- 09:36 : 간패고개/ 황방리고개/ 삼읍면경계면
- 10:14 : 삼시군봉(311m, 연천군, 양주시 → 동두천시)
- 10:32 : 정자, 다솜농장갈림길
- 11:26~32 : 마차산(588.4m)
- 11:53 : 밤골재
- 12:00 : 431m봉
- 12:43 : 양원리고개
- 13:06 : 수철성(396.5m)/ 봉수대
- 14:26 : 어마니고개
- 14:38 : 163.9m봉
- 15:20 : 223.1m봉
- 15:37 : 도감포/ 삼읍면경계면/ 통일부 미래센터 연수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감악지맥(紺嶽枝脈)이란...
한북정맥의 한강봉(460m)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해서 436m봉, 느르미고개, 은봉산(379.8m), 소사고개, 319m봉, 팔일봉(463m) 어깨까지 백석읍을 서북으로 가르고, 그 이후 지맥은 북으로 달려 하우고개, 노아산(337m)갈림봉(330m)을 지나 게네미고개를 넘어 264m봉 지난 둔덕봉까지 양주군 광적면과 백석읍의 면계를 가르고, 274m봉, 세우게고개, 노고산(487m)까지 양주군 광적면 내를 북으로 가르고, 58번 도로 수르네미고개, 266m봉, 무건리고개까지 파주시와 양주군의 경계를 가르며 흐르고, 368m봉, 설머치(어룡)고개/349번지방도까지 파주군 적성면 내를 흐른다. 임꺽정봉(676m), 감악지맥 주산인 감악산(675m)까지는 양주시와 파주시 적성면 경계를 따르고, 지맥은 여기서 동남 방향으로 머리를 틀어 간패(황방리)고개, 마차산(588m)을 거쳐 431m봉까지는 경기도 연천군과 양주시, 동두천시의 시계를 가르다가 431m봉 직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구정산(412m)을 지나 3번국도를 넘고, 372번도로를 따르다가 한탄대교(한탄강과 신천의 두물머리)에서 맥을 다하는 약 42km의 산줄기가 있고, 또 하나의 산줄기는 동북쪽으로 진행하여 398m봉, 아마니고개/37번국도를 넘어 한탄강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도감포에서 맥을 다하는 약 39km 정도의 산줄기가 있다. 앞의 산줄기는 한탄강과 신천의 두물머리에서, 뒤의 산줄기는 한탄강과 임진강의 두물머리에서 끝나는데 능선 길이는 한탄대교 쪽이 약 3km정도 길다. 박성태님의 신 산경표에서는 도감포 방향으로 감악지맥이 이어진다고 되어 있는데, 한탄대교 방향으로 종주를 하는 산꾼들도 있다.
♤ 감악지맥 지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감악지맥을 지나는 동네
* 양주시(楊州市)
경기도 동북부에 위치한 시로, 동으로는 포천시, 남으로는 의정부시 및 서울특별시 강북구와 도봉구, 서쪽으로는 고양시와 파주시, 북으로는 동두천시와 연천군에 접한다. 과거에 의정부시, 구리시, 남양주시, 동두천시, 서울 일부 지역 등과 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시 양주에서 가장 큰 동네이자 현 구리, 남양주를 포함해 양주 전체의 가운데에 해당되는 의정부에 군청을 두었고 1963년 의정부시의 분리 이후에도 군청이 의정부 시내에 있다가, 2000년에 가서야 의정부 생활을 마감하고 양주목 관아 터 근처인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2003년 양주시로 승격되면서 시청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여러 모로 경기 남부의 광주시와 비슷한 포지션이다. 광주시도 옛날에 성남시, 하남시 그리고 서울 강남 대부분 등 넓은 땅을 관할했으며 2001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시로 승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경기도 밖에서 인지도가 낮은 동네라는 것, 시 승격 이후 적극적인 신도시 개발과 서울 인구 흡수를 통해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여 도시 잠재력이 비교적 높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다만 광주시(당시 광주군)는 1917년 진작에 경안동 쪽으로 군청사를 자리잡았기 때문에 양주군과 달리 군 밖에 군청이 있는 사태는 피했다. 양주시는 군사 시설이 매우 광범위하게 많이 있으며, 8사단, 25사단, 72사단 등 주요 육군 사단과 국군양주병원이 위치해 있다. 양주라는 지명은 1018년 경기도가 경기라는 지명이 부여되었을 때부터 고려시대의 임금 현종이 "이 지역은 버드나무가 무성히 자랐다." 라는 의미로 '버들고을' 이라고 부르면서 '양주(楊州)'로 지명을 정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시대에는 '매성'이나 '창화'로 불렸고, 신라 시대에는 '내소'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때 '견주(見州)'로 불렸던 것을 양주로 지정했다. 그래서 '양주' 라는 지명을 사용한 역사를 되돌아보면 1000년은 훨씬 넘어간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으로 품계상으로도 매우 높은 동네였고, 원래는 현재의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 연천군 전곡읍, 서울특별시 동북부 일대의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등에 이르며, 더 나아가 고려 시대에는 서울 강북 대부분(용산구 일대 제외)과 고양시 일대도 양주 소속이었던 매우 큰 고을이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고양주면(오늘날의 광진구 동부와 송파구 잠실 일대)이 고양군으로(이후 1949년 서울에 편입), 전곡(당시 영근면)이 연천군으로 넘어가고,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오늘날의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일대가 뜯겨나가고 동시에 군청 소재지이자 가장 발전된 곳이었던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떨어져나가고, 1980년에는 월경지였던 남양주(구리 포함) 지역이 아예 남양주군으로 분리되고, 이듬해인 1981년에는 동두천읍마저 시로 승격돼 떨어져나가면서 쩌리 지역만 남게 되어 양주군은 발전이 꽤나 늦었다. 만약에 양주시 영역이 1949년 이후에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양주시의 인구는 284만 명이 된다. 1980년 남양주군을 분리할 때 지금의 양주를 '북양주'로 개칭하려 했으나, '북'이라는 어감 때문에 그대로 양주라는 이름을 유지해 현재에 이른다. 사실 (북)양주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양주읍치가 소재한 '오리지널 양주'라고 할 수 있으므로 굳이 '북'이 없어도 당위성이 충분하다. 경기도 광주시와 상당히 흡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고려 시대때 존재했던 양광도의 '양광'이 바로 양주와 광주를 뜻하는 것이었다. 각각 한강 이북과 이남을 대표하는 큰 고을이었다. 양주시는 도락산-불곡산을 잇는 능선이 정중앙에 있으며, 이 능선을 기준으로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뉘는 다핵 도시 구조로 되어있다. 그래서 위성 지도로 양주시를 바라보면 감악산, 도봉산, 북한산, 홍복산, 불곡산, 도락산, 천보산, 칠봉산, 사패산, 노고산 등의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분지 지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양주시 서부 지역 광석지구의 광적면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는 넓은 들판' 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서쪽은 신천 주변으로 펼쳐진 백석읍, 광적면, 남면 등이 해당되고, 동쪽은 회암천과 청담천 주변의 동 지역이 해당된다. 그리고 이 물줄기는 은현면 용암리에서 합류하여 동두천 쪽으로 나가는, 임진강 유역에 해당한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동두천에서 전곡으로 나가는 길이 좁은 회랑이기 때문에 양주시와 동두천시 전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있는 분지 지형이다. 그러나 남쪽의 장흥면은 임진강 수계가 아니라 한강 수계로, 양주시 타 지역과는 산줄기로 분절되어 있으며 의정부시로 넘어가는 길도 고갯길일 정도로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다만, 그렇다고 고양시 생활권은 아니고 산 너머 의정부시 생활권에 속하는데 의정부시가 분리되기 전에는 양주시의 중심지가 의정부읍이었다. 흔히 양주시가 항상 의정부시의 북쪽이나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장흥면의 존재 때문에 양주시의 극남이 의정부시의 극남보다도 더 남쪽에 있다. 그동안 전형적인 도농복합 지역으로 주한미군 등 군부대가 밀집해 있어서 도시의 발전이 더뎠으나, 2009년 이후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로 인해 덕정역과 덕계역 주변을 중심으로 새롭게 아파트 중심의 양주신도시가 새롭게 조성되고 있다. 양주시의 주민 구성은 과거에는 토박이가 많았으나 2010년대 이후로는 대체로 서울 강북 지역에서 양주신도시의 신축 주택으로 이사 온 주민들이 대다수이다. 기존 주민들은 주로 농업이나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이지만 농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양주신도시 건설로 새롭게 유입된 주민들은 젊은 층이 많으며, 주로 경기 북부 지역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거나 서울 강북으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또는 양주시 내부에 있는 섬유 산업 등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다. 덕정동과 고암동에 걸쳐서 새로운 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덕정고등학교 주변으로 아름다운 밭이 펼쳐져 있었으나, 현재는 고급 빌라들이 들어섰다. 다만, 지금도 삼숭동에는 논이 많은 편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연장을 놓고 포천시와 경쟁 및 협력관계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중소기업 단지들이 동두천시의 중심으로 덕정동, 남면, 은현면, 광적면 일대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집성촌으로는 율정 및 옥정의 풍천 임씨 소간공 임유겸 후손, 율정동과 주내 일대의 해평 윤씨 월정공 후손 일부, 은현면 하패리와 상패동 일대의 의령 남씨와 김녕 김씨, 은현면의 정종 왕자 도평군 말생 일가, 주내의 밀양 박씨, 은현면과 남면 상수리, 광적면 일대의 남양 홍씨인 홍천민과 홍일민의 후예 등이 있다. 양주와 포천 등에 있는 청주 한씨 양절공 한확의 후손, 은현면 외에도 당시에는 양주였던 남양주 별내에도 집성촌을 형성한 의령 남씨 등이 있다. 의정부에서 양주시청이 옮겨오기 전의 현 양주시청 부지는 해평 윤씨 문중의 묘소가 있던 자리였다. 예전에는 교외선으로 양주시, 의정부시, 고양시를 지나는 철도가 있었다. 2004년 이후로 운행이 중단되었지만, 2024년 12월부터 다시 재개통 계획이 세워졌으며 2025년 1월 11일 개통하였다. 장흥역을 기점으로 주변 일대에는 일영 그린랜드와 일영, 장흥, 송추유원지 등이 있는 장흥국민관광단지와 같은 근교에 휴양지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광적면, 은현면, 덕계동(회천2동)에 인접한 도락산에 있는 '가래비채석장' 은 겨울에는 다른 의미로 유명한데, 이 곳 폭포가 겨울엔 얼어붙어 빙벽이 형성되기 때문에 매니아들에겐 인기가 많은 곳이다. 남면에는 감악산, 덕정동(회천1,3동)에는 태봉산, 옥정동(옥정1동)에는 독바위, 고암동(회천3동)에는 고장산, 봉양동(회천1동)에는 칠봉산, 회암동(옥정1동)에는 천보산과 회암사, 남방동과 유양동(양주1동)에는 불곡산, 백석읍에는 호명산과 은봉산, 한강봉, 장흥면에는 북한산국립공원(도봉산, 오봉, 사패산, 상장봉, 우이령 등)과 노고산이 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파주시(坡州市)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시로 북쪽·서쪽으로는 북한 개성시의 장풍군·판문구역, 남서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 동쪽으로 양주시와 연천군, 남쪽으로 고양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서울특별시보다 크고 경기도에서 6위며, 전국에서는 60위다. 2010년대부터 운정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동부 지역에 한북정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솟아 있고, 북쪽 경계 너머로는 마식령산맥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대체로 동쪽이 높고 서북쪽은 낮은 동고서저형(東高西低型)의 지세를 이룬다. 동쪽에는 감악산(675m)·노고산(401m)·팔일봉(462m)·고령산(622m)·개명산(622m) 등이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에는 황룡산(135m)·명봉산(247m) 등이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중앙부에는 파평산(496m)·봉서산(216m)·월롱산(246m)·박달봉(360m) 등이 솟아 있다. 동부 지역은 해발고도 500m 안팎의 높은 산지가 분포하며, 남서부 지역은 대체로 넓은 구릉지와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다. 북한과 접해있는 접경도시이며 파주출판도시, 판문점, 임긴각국민관광지, 경의선, 1번 국도, 헤이리 예술마을, 프로방스 마을, 오두산통일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다. 과거에는 농촌, 최전방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컸지만 2000년대 이후 운정신도시와 LG디스플레이가 들어서면서 신도시, 공업도시로서의 이미지도 생겼다.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년)에 술이홀현이라 불렀다. 현재 파주읍에서 적성면으로 가는 길 이름이 이 이름을 따 '술이홀로'이다. 이후 신라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 봉성현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명종 4년(서기 1174년) 서원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조 2년(서기 1393년) 서원군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태조 7년(서기 1398년)에 파평현과 병합하여 원평군이 되었으며 태종 14년(서기 1414년)에는 교하현을 원평군에 병합했다. 이듬해에는 원평군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태종 18년에 원평군으로 격하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회복되었다. 이는 무력으로 왕권을 차지한 태종의 논공행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세조 5년(1459년)에는 원평군이 파주목으로 승격되었고 고종 32년(서기 1895년) 파주군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 3월1일에 교하군을 파주군에 편입했다. 생활권이 다소 분리되어 있으나, 주요 시가지들이 경의중앙선 선로를 따라 위치해 있기에 시흥시나 남양주시처럼 아주 파편화된 정도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파주읍이 옛 파주목의 명목상 중심지였지만, 1904년 파주군청이 문산읍으로 옮겨가면서 아주 약간이나마 중심지 역할을 했던 파주읍 지역은 급속도로 쇠퇴하고 문산이 파주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면서 군청이 금촌으로 다시 옮겨갔고 이후로는 금촌과 문산이 파주의 양대 핵심 지역으로서 줄곧 자리매김해 왔다. 그러나 2010년대 초반 이후론 현재는 운정신도시 개발로 인해 운정·교하 등 구 교하면 일대가 크게 성장하여 파주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2024년 기준 운정 일대 인구가 28만명에 달해 파주 인구의 절반을 넘을 정도. 따라서 2020년대 현재 파주의 양대 중심지는 대규모 신도시가 자리잡은 운정, 시청이 위치한 행정 중심지이자 주택단지가 밀집된 금촌 정도이고 그나마 이에 준하는 구 중심지는 인근 군부대 수요와 경의선과 평택파주고속도로(서울~문산) 등으로 먹고 살고 있는 문산 정도가 있다. 세 지역 모두 경의·중앙선 연선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며, 과거 파주의 인구가 1번 국도 연선으로 몰려 있었지만 현재는 2011년 운정신도시 건설과 2014년 경의·중앙선 완전 개통으로 도시의 중심축이 경의선 쪽으로 완전히 움직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금촌 이남의 1번 국도 연선 지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운정신도시가 아직도 개발 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경의선 축으로의 도시 중심 이동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되고 있고 운정에 대한 파주시민들과 외지에서 온 방문자들의 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아 파주=접경지대라는 인식을 운정신도시가 개선시켜 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접경 지대라는 특성 때문에 북부의 개발이 어려워서 일산과 접하는 운정과 경의선이 지나는 금촌 같은 파주 남부 지역에만 거의 대부분의 인프라를 몰아 준다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존 중심 생활권인 금촌과 문산, 그리고 파주읍, 법원읍 등 기타 낙후된 읍면 지역의 공동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파주시를 중심으로 도시재생지원센터, 도시재생대학, 재개발, 도시재생 뉴딜 등 국가시책인 균형발전에 부응하여 지자체 자체적으로 적극 추진 중이다. 서울로 진입할 때는 크게 다섯가지 루트로 나뉜다. 자유로, 통일로, 혜음로(=의주가도), 평택파주고속도로 및 경의선으로 분산된다. 제2자유로가 뚫리면서 자유로를 대체하는 보조 노선이 하나 더 개통되었다.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법원IC가 2024년 개통했고 나머지 구간이 2026년 개통될 예정이며 추후 기존 교통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꿀 것으로 기대된다. 6.25 전쟁 이후부터 지리적 특성상 "냉전의 최전방" 역할을 맡고 있는 지역으로, 유사시 북한군이 서울로 빠르게 내려오는 루트로 꼽힌다. 그렇기에 파주는 경기도에서 인천, 수원, 서울, 평택, 연천, 포천, 동두천, 의정부, 고양처럼 군대와 밀접한 곳이다. 거기다 인천처럼 북한과 밀접한 지역이고, 서부전선의 최전방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써 임진강이 막고 있긴 하지만, 북한군이 다시 남침을 시도할 경우 이곳 파주를 지나가는 것이 수도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최단거리(1번 국도인 통일로와 77번 국도인 자유로, 그리고 평택파주고속도로와 경의중앙선)가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파주에는 군부대들이 포천ㆍ고양ㆍ서울처럼 어마어마하게 많이 밀집해 있으며, 운정신도시, 일산신도시, 행신-화정-지축신도시도 서울의 인구를 분산시킬 겸 유사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만든 일종의 방어형 도시이다. 과거에는 군인 및 군부대가 뿌리는 돈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전방 지역 군사도시이자 농업의 비중이 더 높았던 농업도시였다. 하지만 LG 디스플레이가 들어오면서 산업도시로 변모함과 동시에 일산신도시를 잇는 운정신도시 개발로 전방도시 이미지를 약간이나마 벗어났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감악지맥이 연천군을 지나는군요. 기대가 됩니다.
* 연천군(漣川郡)
경기도 최북단 중앙에 있는 군으로 연천군은 남쪽으로는 파주시와 동두천시에 접해있고, 동쪽으로는 포천시와 철원군, 북쪽과 서쪽으로는 북한과 접해있다.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국도와 경원선이 통과하던 지역이었으나, 군 북부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산이 많아 경기도의 군 가운데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군청소재지는 연천읍 차탄리이다. 전곡읍 일대에서 구석기 및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대량으로 발굴되어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의 해명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또는 고구려라고도 함)의 공목달현(工木達縣) 또는 웅섬산현(熊閃山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공성현(功成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장주(獐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1175년(명종 5)에 감무가 설치되어 독립하고 승령현(僧嶺縣, 강원도(북한) 철원군 가승리 일대)도 함께 다스렸다. 1308년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이름과 지명의 발음이 동일하다 해서 연천으로 이름을 바꾸어, 조선시대에도 연천현을 유지했다. 그러나 1414년(태종 14)에 마전에 병합, 마련현(麻漣縣)으로 고쳤다가 1416년에 다시 분리했다. 별호는 장포(獐浦)·연주(漣州)였다. 1896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경기도 연천군이 되었다. 1906년의 월경지 정리로 철원군의 두입지인 관인면을 편입했으며, 1914년 군면 폐합 때 삭녕군·적성군·마전군·양주군의 일부를 편입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45년 8·15해방 이후 설정된 38°선이 군의 남부를 지남에 따라 연천군은 남북으로 나누어졌으며, 남쪽의 적성면·남면 전역, 백학면·전곡면의 일부를 파주군에 이관했다. 그러나 6·25전쟁 후 38°선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수복함에 따라 연천군이 다시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수복된 지역은 장단군 대강면과 장도면 일대로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1963년에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이 연천군에 편입되고, 1979년에 연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 관인면 일원을 포천군에 이관했다. 1985년에 전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에 백학면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었다(→ 마전군, 삭녕군, 적성현). 1989년 원당출장소를 장남면으로 승격했다. 1998년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통구리를 행정리로 복원했다. 군의 동부에 높이 500~800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부·남부·북부는 200m 내외의 낮은 산과 구릉지가 곳곳에 솟아 있다. 동부산지에는 야월산(487m)·고대산(832m)·지장봉(877m)·향로봉(600m)·종자산(643m)·종현산(589m)·마차산(588m) 등이 군계를 따라 솟아 있다. 중앙부에는 남북방향으로 추가령구조곡이 지난다. 임진강이 군남면 남계리 도감포 부근에서 군의 남부를 거쳐서 흘러온 한탄강과 합류한 뒤 서쪽으로 흘러가며,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남류하는 차탄천은 전곡읍 전곡리에서 한탄강에 유입한다. 한탄강 연안에 발달한 용암대지는 주로 논으로 이용된다. 한탄강은 용암대지상의 현무암이 침식된 주상절리의 수직단애가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이용되며, 경관도 빼어나다. 삼림은 주로 6·25전쟁 이후에 심은 소나무·잣나무·밤나무·떡갈나무 등으로 이루어졌다. 예로부터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이 군에는 대전리성지·보개산성·옥녀봉성지·수철성지·옥계리성지·차탄리성지·초성리성지 등 성터들이 많다. 또한 충혼탑·대광리전투기념비·38°선돌파기념비 등 6·25전쟁과 관련된 전적기념물들이 곳곳에 있다. 경원선과 철원-동두천을 잇는 국도가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군 동부지역을 남북으로 나란히 통과한다. 서울-원산을 잇던 경원선의 현재 종착역은 신탄리역이다. 그밖에 문산-포천을 잇는 국도가 전곡리를 지나 동서방향으로 가로놓여 있다. 서울과는 2시간 이내의 거리이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동두천시(東豆川市)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시로 원래는 양주군 이담면, 은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80년대 동두천시로 분리 및 편입되었고, 양주군은 2003년 양주시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른다. 도시 이름은 주한미군 동두천기지인 캠프 케이시(Camp Casey)와 턱거리 근처의 캠프 호비(Camp Hovey) 경내 일대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인 동두천에서 유래했다. 동쪽으로는 포천시, 서쪽과 남쪽으로는 양주시, 북쪽으로는 연천군에 접하고 있다. 전방에 속하는 지역으로 군사 시설이 많다. 고구려 시절에는 내을매현(內乙買縣)이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천현(沙川縣)으로 승격되어 견성군(堅城郡, 현 포천시 일대)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현종 9년(1018) 양주에 속했다. 조선시대 때는 태종 13년(1413) 양주도호부에, 세조 12년(1466) 양주목에 속한 일담면(一潭面)이었으나, 후에 이담면(伊淡面)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양주군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의정부와 비슷하게 원래 있던 면 이름이 그대로 읍으로 승격된 것이 아니고, 면의 중심지인 동두천리의 이름을 따라 개칭된 것이다. 1973년에는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塔洞里)를 편입시켰다. 이후 1981년 7월 1일 시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가 편입되었다. 해방 전에는 보산동 일대가 중심이었으나 6.25전쟁으로 동두천 일대인 보산동 일대가 폐허가 된 이후 미군이 그 일대에 주둔하게 된다.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된 동두천 보산동 일대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그 일대는 미군과 외국인을 위한 위락 시설이 집중됐고 민간인의 생활 공간은 이보다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현재의 생연동이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절반 가량이 군사보안지역인 만큼 그 외 지역의 개발 정도가 낮아지고 시의 경제 또한 주한미군에 의존하는, 즉 외국인 의존도가 큰 지역이었다. 특히 캠프 케이시 정문 코앞인 보산역 주변은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미국인지 이태원동인지 헷갈릴 정도로 미군 및 필리핀인 관련 편의 시설이 엄청나게 많으며, 훈련 기간 중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A-10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툭하면 도로에서 K-1 전차 편대가 질주하는 모습도 간간이 볼 수 있다. 종종 들리는 밀덕들에겐 눈이 즐거운 지역이 될 수도 있다. 국군 제28보병사단의 각종 차량들도 눈앞에 흔하니 밀덕들에겐 눈이 즐겁다. 기행부대(행정병과)들이 몰려있는 용산기지, 대규모 신축인 캠프 험프리스(평택기지), 미군의 엘리트들이 몰린 대구 공군기지, 군산 공군기지와는 다르게 동두천시는 전투병들만이 주둔하는 지역이니만큼 KATUSA들도 캠프 케이시 배치를 다소 기피하는 편이고 분위기가 꽤나 걸걸하고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활보하는 문신의 근육돼지 미군들이 많다. 주한미군에서 군 가족에게 영외 거주를 적극 권하면서 주한미군들의 가족들이 동두천 아파트단지에 많이 살게 되었는데, 미국이라는 동네 자체가 아파트보단 단독주택 문화에다가 파티 문화 & 반려견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아파트 주민들과의 충돌이 자주 벌어지자 보다 못한 동두천시가 한미 아파트 주민들간의 우의를 다지는 잔치까지 열었다. 하지만 2006년 이후 미군 부대들이 단계적으로 평택시로 이전함에 따라 반환된 기지를 중심으로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며 1990년대까지의 암울한 역사를 뒤로 하고 점차 인구와 재정자립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위도상으로도 꽤나 북쪽이라 제28보병사단의 본부와 제8기동사단의 일부 부대가 동두천에 있다. 옆의 양주시 은현면이나 남면 지역은 제25보병사단 위수지역이다. 동두천의 근대 건축물이 대부분 1960년대 이후에 생연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조성, 분포돼 있는 것은 6.25 전쟁 이후에 보산동 남쪽 생연동을 중심으로 성장한 동두천의 도시 연혁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두천에 주둔했던 미군부대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경제적 궁핍기에 동두천을 여타 지역에 비해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미군을 통해서 유입되는 첨단 서구문화로 국내 여타 도시보다 오히려 앞서 문화적인 풍요를 누리기도 했다. 한 때 동두천과 의정부 일대는 서울의 미8군 클럽과 함께 1970.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는 대중가수들의 요람이기도 했다. 1998년 11월 내행동과 광암동을 통합하여 불현동을 설치하고, 생연3동과 생연4동을 통합하여 중앙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동안동과 소요동을 통합하여 소요동으로 변경했다. 2007년 5월, 인구 과밀로 인하여 기존의 불현동을 불현동과 송내동으로 분동했다. 양주, 의정와 함께 동일한 의정부 생활권을 공유하고 있다. 간혹 양주 내에서도 동두천 생활권인 덕정동, 회천동, 은현면, 남면 지역은 동두천에서 출퇴근하거나, 혹은 동두천으로 출퇴근하는 이들이 있는 편이다. 한강 이남의 수원-화성-오산과 생활권 관계가 비슷하다. 의정부/수원, 화성/양주 포지션이라면 동두천은 오산과 유사하다고 볼 수있다. 면적이 넓지 않은 분지라는 특성과 생연동과 지행동이라는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거주하는 특성상 경기 북부임에도 시의 북쪽과 동쪽 남쪽이 산으로 틀어막히고 서쪽은 양주시로 넘어가서 산으로 틀어막혀 있는 지형 특성상 여름철 기온이 높은 곳이다. 최근에는 뜸하지만 강수량이 많은 년도에는 폭우로도 자주 언급된다. 동두천 시민들은 지행역 인근 지행동, 송내동을 신시가지라고 부른다. 통상적으로 지행역에서 동두천꿈나무정보도서관까지의 지행로 일대를 신시가지라고 부른다. 흔히 미군부대와 주변 상인, 기지촌을 생각하기 쉬우나 1960년대 이후 상봉암동, 하봉암동, 동두천동 지역과 인근 양주시 남면, 은현면, 회천읍 등지에 가죽, 염색, 원단공장 등의 중소규모의 제조업 중소기업이 생기면서 형성된 도시였다. 주요 관광지로는 소요산,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있고 매해 여름마다 소요산에서 동두천 락 페스티벌이 열린다. 소요산은 가히 노년층들의 홍대거리라 불리울 정도로 노인들이 많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을 타고 올라와서 놀다가는 노년층들이 매우 많아 저렴한 식당, 주점들이 늘어서 있다. 동두천의 순수 토박이로 불릴 성씨는 동두천동, 안흥동, 소요동 일대의 수성 최씨, 강릉 김씨, 생연동의 남양 홍씨, 안동 권씨, 내행동의 어씨, 상패동과 은현면 하패리의 김녕 김씨, 의령 남씨 등 소수이고,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중소기업이 형성되면서 타 지역에서 이주한 집안이다. 2~3대 정도 되었으며, 토박이가 적어서 텃새는 거의 없는 편이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세부 구간거리
한강봉-3.0km-소사고개-1.6km-하우고개-1.7km-노아산갈림길-1.4km-게네미고개-0.8km-264m봉-1.6km-세우게고개-1.2km-노고산-1.7km-수르네미고개-2.4km-266.1m봉-1.4km-수레미고개-2.4km-무건리고개-1.5km-365.7m봉-2.0km-설마치(어룡)고개-3.3km-감악산-3.7km-간패고개-1.2km-안흥임도-2.3km-마차산-1.5km-도감포갈림길-2.6km-안말임도-1.9km-409.7m봉-1.7km-291m봉-1.6km-한탄강
♤ 구간거리
- 접속 :
1)양주 말머리고개 ~ 한강봉(분기점) 1.75km,
2)고비골고개/ 여행스케치 ~ 한강봉(분기점) 3.2km,
3)신지고개 ~ 한강봉(분기점) 1.28km, 0.24h
- 한강봉(460m) ~ 설머치(어룡)고개 22.4km
-. 한강봉 ~ 쓰르레미고개 12.5km
- 설마치(어룡)고개 ~ 남계대교(도감포) 20.4km
-. 간패고개 ~ 합수머리 13km
* 식수 보충 및 참고사항
- 게너미고개, 식수보충, (인가 두채)
- 황방리고개, 식수보충, (공장지대)
- 무건리고개 : 오른쪽 임도로 내려서면 인가
- 감골고개 : 오른쪽에 인가 한채
- 전곡 택시: 031-832-0322
* 말머리재 가는 교통편
- 지축역 ~ 말머리고개 15-1번버스 07:30
- 양주역 ~ 고비골 15-1번버스 08:55: 0.40h
- 의정부역 5번 출구 동부광장: 23번버스, 부곡리 부대앞 종점 고비골고개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도감포 ~ 전곡역 택시 16,000원
- 통일부 한반도 통일미래센터 연수원 ~ 전곡역: 연수원에 50분 도착, 2~3시간 간격 마을버스 운행, 15분 소요
- 전곡역 막차: 인천행(~, 20:19, 21:49), 광운대행(23:37)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감악지맥에서 가을에 퐁당 빠져 가을색에 흠뻑 물들고 왔습니다. 왕방지맥보다 벙커가 더 많더군요. 단단한 안보도 역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감악지맥은 군부대가 출입을 강하게 통제하면 절대 갈 수 없는 지맥입니다. 군인정신이 투철한(꽉막힌) 상사를 만나 노아산갈림길에 이르지 못하고 C진지에서 방출 당해 홍죽리를 우회했는데, 10분이면 지나는걸 45분 돌았습니다.ㅋ
3번 격납고에서의 비박은 탁월한 결정이었어요. 비소리를 들으며 자다깨다, 고라니 한마리가 뻬엑~ 울고 가던데 제가 비피할 자리를 빼앗은건 아닌지, 깰 때마다 옷을 하나씩 더 껴입고 춥지않게 보냈고요. 설마치에서 올라서서 능선을 찾지 못하고 알바 짧게 했고, 그 바람에 계곡에서 물을 보충해 2.5리터를 지고 감악산에 올랐네요.
한강봉에서의 조망도 좋았지만 감악산 정상 악귀봉, 장군봉, 임꺽정봉에서의 조망을 넘어서진 못하더군요. 특히 악귀봉에서 바라보는 임진강 고랑포유역의 조망이 압권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개성과 옹진반도가 그 위에 있었으니깐요.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인 도감포 통일부 미래연수원에 15:37분 내려섰는데 버스가 50분에 들어와 전곡역으로 빠르고 편하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15분 소요.)
전곡역에서 청량리까지 요금은 2,550원입니다. 전방 지역 지맥을 다녀오며 여러번 덕을 보네요. 감악지맥은 일정에 없었지만 와룡산선배님이 황학지맥에서 남한 전지맥 종주를 졸업하시게 되어 축하를 드리러 가다보니 한국전쟁과 연관지어 의미를 부여하고자 감악지맥을 서둘르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엔 황학지맥에서 인사 드리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수심이 낮은 임진강은 조선시대 의주로로 대륙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습니다. 고래로부터 한국전쟁까지 대내외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38도선은 옹진반도 위 개성에 연해 있었으나 전력이 월등한 북한군의 주공이 왕방지맥 좌우로 집중되자 퇴로가 끊어지는 위협으로 국군 제1사단의 방어선은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한국전쟁 개성-문산 지역전투/ 6.25 초기전투
북한군은 제1단계 작전목표인 ‘서울 점령과 국군 주력의 격멸’을 달성하기 위해 제1군단과 제2군단이 협조된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의 경기도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공격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축선에 공격을 집중했다. 개성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접근로에는 국군 제1사단(사단장 대령 백선엽)이 청단에서부터 고랑포까지 약 94㎞의 광정면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1사단은 제12연대와 제13연대가 전방에 배치됐고, 예비인 제11연대가 수색에서 교육훈련 중이었다. 1차 방어선(경계진지)에 배치된 개성에 있는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와 적성 방향의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 3대대는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각개격파 당했다.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인민군 제6사단에게 당일 5시간 만에 개성을 피탈 당했는데, 이는 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가 송악산 경계진지 상에서 국군 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를 공격할 때 인민군 제6사단 제15연대가 기차를 이용하여 개성역으로 과감하게 치고 들어와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데다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인민군은 철저하게 사전 분석을 하고 치밀한 작전을 세운 것이다. 6월 25일 개전 당일 개성-문산지역으로는 북한군 제203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공격해 왔다. 개성에서 분산하여 퇴각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한강변으로 퇴각, 민간 선박을 이용하여 김포반도로 도강했다. 일부는 문산방향으로 철수했다. 인민군 제6사단은 철수하는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를 추격하며, 김포반도와 강화도 방향으로 도하를 서둘렀다. 따라서 38선에서 서울에 이르는 첫 번째 통로인 김포 축선은 전쟁 첫날인 6월 25일부터 무방비상태로 인민군에 노출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에 전방 2개 연대가 각개 격파됐고, 패퇴하는 부대를 수습해 임진강 남쪽 주저항선에 배치하는 한편, 예비연대인 제11연대를 수색에서 급히 문산지구로 진출시켜 임진교를 중심으로 문산 지역 일대에 종심으로 배치해 방어를 했다. 북한군은 6월 26일 임진강 철교를 통해 5대의 전차를 선두로 보·전·포 협동공격으로 제13연대 동측방으로 우회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제11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가 불가피했으나 반격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사단 주력부대는 금곡리 방면으로 진출했다. 27일 아침까지 봉일천 북쪽 위전리-도내리를 연하는 최후저항선으로 재배치했다. 국군 제1사단은 봉일천 일대에서 북한군의 서울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28일 오전까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진지를 사수하고자 싸웠으나 패배가 불가피했다. 우측의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 제3대대도 후방에서 인민군 전차가 나타나 임진강 방향으로 철수한다. 이렇게 38선 경계진지를 돌파한 인민군은 좌측 지역에서는 임진강 철교를 확보하려 하였고, 우측 지역인 가여울 지역에서 임진강 도하를 서둘렀다. 철수하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장으로 부터 전방 상황을 파악한 국군제1사단 제11연대장은 임진강 철교(개성-서울방향으로 이르는 철교)를 폭파하려 했으나 사단 공병중대의 기술부족과 인민군의 빠른 진출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인민군 제1사단은 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의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을 따라 임진강 상류 가여울 지역에서 도하하여 적성 방면으로 공격하고, 일부는 임진강 북안의 국군 진지를 공격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는 여기에서 인민군의 진출을 화력으로 저지시켜 전쟁 1일 차에 임진강 주변의 주방어선을 확보했다. 6월 26일, 국군 제1사단은 2차 방어선인 임진강 차안의 파평산 등을 점령하여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우측의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 제1대대는 인민군이 전차를 이용하여 공격해 오자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하여 퇴각시켰다. 사단장은 육본의 조치에 따라 서울 특별연대(육사 교도대대, 보교 교도대대) 등이 지원되자, 사단 병력을 보강하면서 반격을 계획하였다. 인민군 공격부대가 문산 돌출부에 급속도하 후 후속부대의 진출 지연으로 공격이 지체되자,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가 과감한 역습으로 실지를 회복했다. 하지만 우측의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 지역이 공격당하면서 2차 방어선마저 위협받자 26일 19시경에 3차 방어선인 봉일천 및 금촌 일대로 철수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한북정맥을 하실 때에 아무리 바빠도 홍복약수터에 꼭 들러 시원한 감로수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 홍복고개(275m)/ 신지고개/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대중교통은 없다. 신지에서 홍복으로 넘어가는 한북정맥 상의 고개이다. 홍복고개라고도 한다. 양주시 백석면 복지리 동화아파트와 복지2리 홍복마을을 연결하는 한북정맥 호명산과 한강봉 능선 사이에 있는 고개로 아스팔트 포장을 하였다. 한북정맥의 신지고개는 홍복약수터(신천의 발원지)에서 물을 뜰 수도 있지만, 그 보다 한강봉과 호명산이라는 두 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양방향으로 두 산을 오를 수 있는 최단코스의 기점이 되는 곳이다. 홍복고개는 홍복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만백성을 복되게 한다'는 뜻을 가진 홍복산(弘福山)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홍복산(洪福山, 463.3m)/ 시계/ 경기도 의정부시 - 양주시
여러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먼저 서울의 주산이 되어 백성들의 복을 누리게 하는 산이라는 데서 홍복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 종루처럼 생겨서 온 겨레를 깨우치는 산이라는 이야기나 부처 모양으로 생겨서 산이 보이는 지역에서 문장가나 명필가가 많이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남양 홍씨의 선조들이 서울에서 낙향할 때 산마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남면 상수리가 적지라고 판단되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서 가문이 영화로워지자 홍씨가 번성하게 된 산이라 하여 홍복산(洪福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수리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전국을 순행하면서 감악산을 거쳐 상수리를 둘러보고 홍복산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복산에서 뒤를 돌아보며 상수리를 향해 “이것은 과인의 홍복이로다.”라고 말한 데서 홍복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5세기 중반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1448년(세종 30) 12월 10일 기록에 홍복산(洪福山)을 경기 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講武場)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성종과 연산군 시대에도 강무장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1486년(성종 17) 10월 2일 기록부터 홍복산(弘福山)으로 되어 있어 변화가 감지된다. 홍복산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양주목읍지, 신편조선지지, 조선환여승람에도 실려 있다. 홍복산 정상에는 군사시설이 있으므로 정상은 막혀있다.
♤ 고비골고개/ 고비굴고개
윗가마골에서 석현리 고비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예뫼골(레스토랑)이 나온다. 고비 즉 고사리가 많이 난다는 고비골로 넘어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행스케치의 계단을 올라 챌봉(516m)을 경유해 감악지맥의 들머리로 이용된다.
♤ 챌봉(遮日峯, 516m)/ 채일봉/ 읍면계/ 장흥면-백석읍/ 삼리봉
홍복마을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장흥면 석현리, 부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옛 족보에는 차일봉(遮日峯)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봉우리 모양이 차일을 친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 오두지맥갈림길
Y자 갈림길 삼거리로 백석읍 기산리, 복지리, 장흥면 석현리와 삼리경계면이다. 감악지맥은 직진이다. 챌봉까지 거리는 0.9km, 감악지맥의 분기점 한강봉까지의 거리는 0.8km이다.
정작 한강은 보이지 않고, 주변에 감악산, 마차산, 파평산, 삼봉산, 불곡산, 도봉산 북한산은 아주 잘 보였습니다.
♤ 한강봉(漢江峯, 474.8m)/ 봉화등/ 팔각정/ 4등삼각점(문산 470/ 1992 재설)
양주군 백석읍 복지리와 기산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이다. 옛날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봉화등이라고도 한다. 이 봉우리에 올라서면 한강이 한눈에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맑은 날 이 산 정상에 서면 산그리메 가운데로 한강이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복약수터와 호명산 등산로 입구 방향이 한북정맥길이고, 감악지맥은 은봉산으로 이어진다. 감악지맥은 여기부터 빗물이 남쪽으로 흐르면 한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흐르면 임진강이 된다. 감악지맥의 왼쪽은 문산천을 오른쪽은 신천을 이루며 모두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즉, 감악지맥은 동사면은 임진강으로 서사면은 서해로 바로 흘러들어가는 지맥이다. 삼파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
♤ 434.2m봉/ 삼리봉(백석읍 기산리, 복지리 → 가업리)
옆으로 자란 소나무 밑에 받침대를 해 놓은 쉼터를 지나고 다시 밴치가 있는 쉼터를 만나면 은봉산약수터 방향으로 좌틀해야 한다. 직진방향의 길이 더 넓고 이정표도 리본도 없기 때문에 주의 해야 한다. 동화아파트 갈림길을 지나 임도사거리를 만나고 좀 더 진행하면 느르미고개이다.
♤ 양주시 백석읍 가업리(加業里)
한강봉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업리란 땅이름은 옛부터 이 지역에 가래나무가 많으므로 가래비 또는 가업·추곡이라 하였다가 가업리로 되었다고 한다. 혹은 마을 모양이 소를 닮았다고 하여, 소처럼 일하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가업리의 남쪽에 있는 한강봉과 은봉산 자락에서 여러 갈래의 계곡이 흘러나오고 있어, 땅이름은 이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여러 갈래의 물길이 흘러 나와 대지를 적셔주는 곳에 위치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갈래마을’ 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가래비〉가업리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과 광적면 가납리에 걸쳐 12가래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 느르미고개(305m), 장현(獐峴)/ 시계/ 읍면계/ 리계
양주시 백석읍 가업리 남서쪽 은봉산 자락에서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턱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은봉산0.6km, 한강봉1.8km 이정표가 서있다. 노루목처럼 좁은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장현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상구너미/ 턱굴고개라고도 한다. 턱굴고개라는 땅이름은 광적면 덕도리에서도 확인된다. 느르미 고개는 가업1리와 기산저수지로 내려서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은봉산에 軍 기갑&전차부대가 주둔했던가 봅니다. 소사고개까지 군용도로로 사용했던 임도를 계속 따르네요.
♤ 은봉산(隱鳳山, 378m)/ 4등삼각점(문산 468/ 2007 복구)/ 삼리봉(백석읍 기산리, 가업리 → 홍죽리)
양주시 백석읍 가업리와 홍죽리, 기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19세기 중반의 문헌인 양주목읍지(1842)에서부터 기록이 확인되고 있으며, 양주목읍지(1871),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에도 차례로 기록이 나타난다. 은봉산은 은(銀)이 난다고 해서, 또는 부엉이가 숨어있던 산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 때 일인들이 이곳에서 은을 채굴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은봉산 중턱에는 당시에 은을 채굴했던 굴이 남아있다고 한다. 윗가래비 남쪽 은봉산 정상 부근에 부엉이묘가 있다. 옛날에 어느 집에서 장사를 치르는데 지관이 말하기를 이곳을 파서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묻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은 시신을 돌 위에 올려놓고 묻을 수 없어 바위돌을 들어내었는데 마침 부엉이 3마리가 이곳에서 날아갔다고 한다. 그 후 이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군용헬기장이 들어서 반쪽만 남았다. 은봉산 정상에는 삼형제바위가 있다. 바위 세개가 형제처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삼형제바위라는 이름은 회천4동의 율정동와 백석읍 홍죽리에서도 확인된다. 홍죽리의 삼형제바위는 가업리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두 바위 세 개가 형제처럼 사이좋게 서있다는 뜻이다. 산48번지와 홍죽리의 경계부분에 있다. 철조망을 넘어 왕복 약 350m 거리의 삼각점이 있는 은봉산 정상을 다녀온다. 삼각점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기산저수지 뒤쪽으로 한북오두지맥 말머리고개가 보입니다. 소사고개 절개지에서 오른 봉우리에 산불감시초소와 등로 이정표가 있습니다.
♤ 소사고개/ 소사현(所沙峴)/ 소샛고개/ 소새고개/ 39번국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안골에서 기산리로 넘어오는 방호벽이 있는 고개이다. 소사고개라는 이름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에서부터 확인된다. 여지도서(1757∼1765)에서는 이곳을 소사현(所沙峴)으로 소개하면서, 읍치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으며,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1757~1765)에 읍치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으며 소령원(昭寧園)으로 가는 통로라고 설명하였다. 이밖에도 대동여지도(1861)·대동지지(1864)·증보문헌비고(1908)에서도 확인된다. 소사현을 ‘소사현(素砂峴)’이라 한 것은, 고문헌에 따르면 잘못된 표현으로 추측된다. 안골을 지나 높은 고갯길을 오르면 기산저수지가 펼쳐진다. 저수지 옆에 있는 집 뒤로 가느다란 산줄기가 마치 뱀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근방에 묘지를 쓰면 ‘소새’라는 새가 뱀을 찍는 모양이 되므로 가세가 기운다고 하였다. 실제로 허씨 집안이 묘소를 쓰고 망했다고 한다. 인근마을 사람들은 소새고개가 있는 산자락의 형상을 항상 ‘소‘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소사고개 혹은 소새고개라는 이름이 유래한 이유는 ‘소 사이의 고개’가 그대로 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 마장호수
마장(馬場)이란 지명은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조선시대에 말을 키운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 말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에서, 마장의 동쪽 경계가 양주(馬場東畔是楊州)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장호수 아래쪽에는 조선조 숙종의 후궁이면서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묘소가 있는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후궁의 자리까지 올라 왕자를 출산했던 숙빈의 묘소지만 유적 보존을 위해 봉쇄 조치를 했다고 한다.
김신조루트를 하며 지난 곳이기에 팔일봉은 패스하기로 합니다.
♤ 팔일봉갈림봉/ 읍면계(백석읍-광적면)/ 삼리봉(백석읍 홍죽리, 기산리 → 광적면 비암리)
지맥의 왼쪽이 백석읍 기산리에서 광적면 비암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백석읍 내를 지나온 지맥이 광적면과 만나, 지맥은 팔일봉에 오르지 않고 6부능선으로 지난다. 팔일봉 6부능선인 Y자 갈림길에서 동사면 방향인 오른쪽 임도 사면길로 내려가면 바로 임도를 만난다. 왕복 약 1.8km 거리의 팔일봉을 다녀오기도 한다.
김신조루트는 팔일봉에서 마장호수로 내려서고 다시 고령산(622m)에 올라, 형제봉에서 일영 내려서기 전에 신세계공원묘지 능선을 지나는데 유명한 트로트 가수 배호가 여기에 묻혀있습니다.
♤ 팔일봉(八日峰, 463m)갈림길/ 경기 양주시 광적면 비암리
팔일봉은 석골 북쪽에, 기산리와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기갑부대 훈련장으로 사용되어 평소에도 포성소리가 요란하다. 여덟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산을 통해 해를 맞이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조선 21대 왕인 영조와 생모 최씨에 관련된다. 영조의 생모 최씨는 무수리였는데, 최씨가 죽자 아들 영조는 살아서 천대를 받던 어머니를 좋은 곳에 묻어주고 싶어 명당을 찾아 다녔다. 여러 곳을 찾던 중, 양주에 와서 명당을 발견하였으나 그곳에는 조선 초에 영의정을 지낸 윤지운(1416~1475)의 묘가 있었다. 이에 탄식하다가 근처 산에 올라 8일 동안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좋은 묏자리를 내어 달라고 기원하는데 이로부터 팔일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거룻봉이라고도 하는데 산등성이의 생김새가 마치 거룻배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 김신조루트길
감악지맥 북노고산삼거리에서 갈라지는 파평분맥이 고량포까지 가지않고 왼쪽으로 도는군요. 저는 김신조루트길로 2018. 1. 20~21.(주말) J3클럽 17명의 산우와 파주 한강병원 샘내교에서 13:05분 출발하여 청와대 앞까지 약 63.8km를 내려왔는데 약 19시간 소요되었습니다. 감악지맥과 팔일봉갈림길에서 북노고산까지 같이 합니다. 1968년 1월, 고랑포를 건넜던 북한 124군 부대의 운명입니다. 개성에서 출발한 김신조 등 31명의 침투조는 고랑포를 건넌 다음, 장좌리와 답곡리의 국사봉(國事峰, 150m) 서쪽 기슭을 지나 파평산, 비학산, 노고산, 팔일봉, 고령산, 북한산 비봉을 거쳐 청와대 후문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초의 침투목적은 실패했고, 총격전 끝에 대부분 사살되었지요. 그들의 도하지점인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에는 ‘침투지점 비’가 서 있고, 그들의 유해는 고랑포 도하지점으로 되돌아와 답곡리 북한군 묘지에 묻혀서 북쪽 고향 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홀대모 大-rock선배님이 홍죽 1리에 거주하신다고 하네요. 고개에서 200m 아래가 집이시랍니다.
♤ 하우고개(215m)/ 하오고개/ 갈림길 오거리/ 읍면계/ 리계(백석읍 홍죽리-광적면 비암리)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하우고개는 거칠지 않고 둥그런 형태의 고개를 주로 말한다. 둥그런 형태의 두룸고개를 두루미고개로, 이게 한자로 학(鶴)고개로 쓰이다가 하오로 변형이 되었다. 양주시 광적면 비암리와 백석읍 홍죽리를 넘나드는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고개로, 임도로 진행해도 되지만 오른쪽의 능선으로 향한다. 10분 정도 후에 다시 임도로 내려서야 하기에 그냥 임도를 따라 진행하기도 한다.
♤ 290.5m봉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르기도 하고 마루금으로 향하기도 하는데 마루금이 직행이다.
♤ 노야산 갈림길/ 헬기장/ 3등삼각점(문산 314/ 1994 재설)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왕복 약800m 거리의 노아산을 다녀온다. 지맥은 오른쪽 철조망 뒤로 진행한다. 노야산은 홍죽사거리에서 하우고개를 통해 궤도차량 수십대가 이동하는 전차포 및 기관총, 박격포 사격훈련장이다.
♤ 노야산/ 노아산(老兒山, 337m)/ 노야산/ 월암산
냅대 뒤 서쪽에 있는 산이다. 홍죽리와 연곡리, 광적면 비암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36.6m이다. 산에 바위가 많아 밤에 뜨는 달빛이 바위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사람들이 매년 10월 1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 산등성이에 묘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그 후손들만 번창하고 다른 사람들은 질병과 가난에 시달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곳의 묘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노아산(老兒山)이라고도 한다.
♤ 268m봉/ 읍면계/ 삼리봉(양주시 광적면 비암리, 백석읍 홍죽리 → 연곡리)
읍면계이자 지맥의 오른쪽이 백석읍 홍죽리 → 연곡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김신조루트를 하면서 노고산과 노야산 사이에 이 게너미고개를 지난 기억이 있습니다.
♤ 해유령(蟹踰嶺)/ 게너미고개
해유령은 피난말 북쪽에 있는 고개로,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피난말에서 광적면 비암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게(蟹)가 넘어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적성현의 토산물 가운데 하나가 게(해·蟹)라고 하였다. 고개의 이름은 대개 게너미고개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인근 노고산에 노고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노고할머니가 오줌이 마려워 다리 한쪽은 노고산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반대편 도락산에 걸친 후 광적면 우고리와 광석리 경계 지점 부근 황새등고개에 있는 요강바위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그런데 요강바위의 오줌이 넘치면서 인근 개울에 뜨거운 오줌이 흐르게 되었다. 개울에 살던 민물 게들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이 고개를 넘기 시작하여 이웃한 광적면 비암리와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쪽으로 갔다고 한다. 실제로 연곡리에는 민물 게가 보이지 않지만 비암리와 발랑리에는 민물 게가 있다 한다. 혹은 400여년 전 소나기 빗줄기를 따라 양주 게가 파주로 넘어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고개의 이름은 대개 게너미고개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해유령(蟹踰嶺)·해현(蟹峴)·해유현(蟹踰峴)이라고 한다. 게너미고개는 16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선조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선조수정실록25년(1592) 5월 1일조에는 해령(蟹嶺)이란 지역이 등장하는데, 이는 게너미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장군의 묘도 연천군에 있습니다만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단박에 서울로 쳐들어오자 몽진을 나선 선조...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속수무책으로 밀리다 관군이 육지전에서 처음으로 소규모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
♤ 해유령전투(蟹踰嶺戰鬪)/ 양주전투(楊州戰鬪)/ 360번군도/ 읍면계(광적면-백석읍)
이곳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5월 23일에 일어나서 5월 25에 동래성이 함락되고 서울까지 왜군의 손에 넘어간 뒤인 6월 25일에 해유령에서 북상중인 왜군을 처음으로 몰살시켰다. 해유령(蟹踰嶺) 전투(戰鬪)/ 게너미고개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조선군이 육지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해유령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부원수 신각이 경기도 양주에서 조선 육군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나 작은 전투이고 이치전투에 밀려 잘 조명되지 않고 있다. 전투가 벌어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양주전투(楊州戰鬪)라고도 불린다. 조총이라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동래포구를 통해 상륙한 왜군은 속전속결의 작전을 펼치며 전쟁 발발 20여 일만에 도성인 한양에 도착하게 된다. 한양도성을 침탈한 왜군은 몽진하는 선조를 따라 북진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 때 지나야만 했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양주였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전투사상 최초의 육지 전투인 해유령 전첩이 벌어지게 된다.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도성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당시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은 체직시키고, 부원수 신각은 군율에 따라 엄격하게 죄를 주자는 논의를 진행하였다. 물론 당시 신각은 도성을 방어하는 도중 이양원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면서 도망쳤다. 그런데 5월 초 왜적들이 양주 지방을 염탐한다는 소식을 듣고 함경병사 이혼의 군사와 합류하여 해유령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적을 급습하여 70여 명의 왜병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대동지지(1864)에서는 부원수 신각(申恪)을 중심으로 전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경도 남병사 이혼(李渾), 인천 부사 이시언과 함께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고개를 넘는 왜군을 급습,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보낸 선발대 70여 명을 한자리에서 몰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의 모함(탈영 신고)으로 세 사람은 사형을 당한다. 승전보가 임금에게 올라갔을 때는 이미 형이 집행된 뒤였다. 우리 역사에 치욕을 남겼던 임진왜란 당시 육지 전투 최초의 승전지로서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첫 승전이었지만 슬픈 역사로 끝난 유적지가 바로 해유령이다. 해유령 전투는 이후 위축되었던 조선군의 사기를 올리고 일본군에 대한 전의를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여지도서』(1757∼1765)는 해유령(蟹踰嶺)이 치소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거리에 있고, 파주로 통하는 길이라고 소개하였다. 양주 시민들은 1997년 해유령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전첩지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0.6m의 해유령 전첩비(蟹踰嶺戰捷碑)를 세웠다.
앵자지맥을 하며 만난 퇴촌 조영무 장군을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 퇴촌 조영무(趙英茂) 장군 별묘(別廟)/ 양주시 향토유적 제 12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 2리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는 조영무 장군의 별묘이고 시조에서 부모까지 지단이 모셔져 있다. 조영무장군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趙之壽)의 고손으로, 증조부는 조린재(趙麟才), 조부는 조순후(趙珣厚), 父는 한산백 세진(世珍)이다. 본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산 16에 있다. 이성계(李成桂)의 사병이 되어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령으로 조영규(趙英珪), 이숙번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죽인 뒤 이성계를 추대,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백(漢山伯)에 봉했졌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봉해졌다. 1405년 우정승,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완규(趙完珪)는 조선 개국공신이면서 태종 이방원을 도운 조영무(趙英茂)의 친 손자다. 세조가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癸酉年에 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잡고서 단종을 옹위하던 세력을 참살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조완규도 김종서.황보인.성상문.박팽년.. 등과 교류하였다고 하여 처형당하자 성산(星山)으로 유배를 가던 조완규의 장자 조범(趙範)은 비통함에 울분을 피로 토하며 한세상을 마감하였다. 또한 조완규 부인인 영인이씨(令人李氏)는 딸과 함께 우물에 몸을 던져 한세상을 마감하였으니, 조범의 부인은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같이 따라 순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해유동(蟹踰洞)의 오지로 도망와 살게 되니 오늘날의 한양조씨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 시조~ 조영무의 단과 후손의 세장지지(世葬之地)가 된 연유다. 그러다 단종이 복권(復權)되니 조완규도 신원이 회복되어 손자인 조윤수(趙允璲)가 어모충좌위대호군(御侮忠佐衛大護軍)이 되었다.
지맥이 백석읍과 헤어지고 광적면 우고리 내로 들어서서 파주시와 만나는 노고산까지 진행합니다.
♤ 290.5m봉/ 딱다구리 리조트 임도/ 삼리봉(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광적면 비암리 → 광적면 우고리)
지맥의 왼쪽이 광적면 비암리 → 우고리로 바뀌며 딱다구리 리조트 임도를 따른다. 지맥의 오른쪽도 백석읍 연곡리와 헤어지고 지맥이 완전하게 광적면 우고리 내로 들어서 파주시와 만나는 노고산까지 진행한다.
♤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遇古里)/ 우골마을
여러 개의 골짜기가 여기서 만난다는 뜻의 遇谷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맥이 완전하게 광적면 우고리 내를 지난다.
터널이 지나는 세우개고개는 절개지 상단의 안부에서 왼쪽으로 진행해야 동물이동통로를 지날 수 있습니다.
♤ 세우게고개(200m)/ 삼현(三峴) 터널/ 39번국도/ 현석로/ 생태이동통로
우골마을 북서쪽에 있는 고개로, 세우게고개는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를 넘나드는 39번국도/ 현석로/ 2차선 포장도로 위로 생태이동통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노고산 자락이 동, 서, 북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남쪽으로만 계곡이 트여 물이 흐른다. 세 고개(우골고개/ 점말고개, 언굴고개/ 갈곡령, 자작고개/ 화암고개)를 넘어야 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를 지나온 지맥이 파주시와 처음 만나는 지점입니다.
♤ 노고산(老姑山, 487m)/ 석적산(石積山)/ 시계(파주시-양주시)/ 읍면계/ 사리봉(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 덕도리 → 효촌리)
노고산은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덕도리, 효촌리와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경계에 있다. 지맥은 노고산을 지나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와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의 경계인 임도를 따른다. 정상을 공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직진하는 노고산 오름 대신 왼쪽으로 임도를 따라 우회하기도 한다. 노고산 정상은 삼국시대 보루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올렸던 곳으로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관련 유구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띠지를 따라 군부대 오른쪽 철망울타리를 따라 우회하면 이중 철망이 나온다. 이중 철망 바깥으로 진행해야 한다. 위험지대 경고 안내문에서 철망울타리와 헤어져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선다. 설화 한편이 전해 내려오는데 노고성 할머니가 치마로 돌을 옮겨 성을 쌓다가 도락산과 노고산에 두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그 때 노고성 할머니 밑에 있던 게가 뜨거운 소변에 놀라 그만 할머니를 물어 뜯어버렸다. 화가 난 노고성 할머니는 게를 파주 너머로 던졌다. 이로부터 양주에는 일절 게가 없고 밤의 소산지가 되었으며 파주는 게의 소산지가 되었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에는 노고산(老姑山)이라 하였고, 『대동여지도』에는 석적산(石積山)으로 표시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서석적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 파주시 법원읍(法院邑)
파주시 동부에 위치한 읍이다. 이 곳 역시 북위 38선 부근이며 서쪽으로는 문산읍과 장단면, 남쪽으로는 광찬면, 북쪽으로는 적성면과 파평면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양주시 광적면, 남면과 접해있다. 조선시대에는 천현면(泉峴面)이라 불리던 지역으로, 1895년 천현외패면(남부)과 천현내패면(북부)으로 분리되었으나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 때 내패면과 외패면이 다시 합쳐지고 여기에 파평면 지천리 일부까지 병합하여 천현면으로 재통합되었다. 현재 이름인 법원은 부군면 통폐합 당시 법의리(法儀里)와 원기리(院基里)를 통합해 법원리를 만든 데서 유래하며, 1989년 천현면이 읍으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아예 읍명이 읍내인 법원리의 이름을 따 법원읍으로 바뀌어버렸다. 따라서 법원읍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 한자까지 똑같게 됐을 뿐 법원(court)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참고로 파주에는 지원은커녕 시군법원만 설치되어있으며 이마저도 운정신도시 인근에 있다. 6.25 전쟁 직후인 1950~60년대에는 읍내에 미군 부대가 있어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1960년대에는 군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한 이후부터는 쇠퇴를 거듭했으며, 1967년 기준 3만 명을 넘길 정도로 많았던 법원읍의 인구는 현재 1만 명을 겨우 넘기는 수준으로 전성기에 비해 1/3로 토막나고 말았다. 2019년 5월 기준 지난 10년간 인구의 21%가 감소하여 파주시 전체에서 가장 큰 하락폭을 보이기도 했다. 인구가 하도 줄어들다 보니 면 지역인 탄현면과 광탄면에 추월당했으며, 법원읍의 전성기였던 1970년 개교한 법원초등학교는 인구 감소의 여파로 개교 50주년을 1년 앞둔 2019년을 끝으로 폐교하고 말았다.
♤ 북노고산삼거리/ 시계/ 읍면계/ 삼리봉(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 오현리)
묘지지대로 지맥의 왼쪽이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 오현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감악지맥이 김신조루트길이 오가는 비학산으로 갈라지는 비학지맥? 갈림 지점이다.
♤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
오현리는 조선시대 천현 내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리동과 부작동의 일부 지역인 황발리·샘골·동두라지·차현동 등을 병합하여 오리동의 오자와 차현동의 현자를 따서 오현리가 되었다. 법원읍 오현리를 둘러싼 산은 전쟁 때 인민군과 중공군이 밀집해 있어 전투기 공격으로 산비탈에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묻어 주었지만, 다 묻지 못한 시체는 임진강으로 흘러갔고, 부작골 맞은편 멀원리는 피란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던 피란길이었다고 한다. 1976년에 설치된 무건리 훈련장은 경기 파주시 적성면 법원읍 무건리·직천리·오현리·비암리 일대 1100만 평 규모의 서부전선 주요 군 훈련장이다. 포병과 전차, 기갑부대 합동 군사훈련장으로 매년 대대급 이상 170여개 부대가 찾는다. 주변으로 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형태가 천혜의 군 훈련장 부지임을 알 수 있다. 군 훈련장 확장부지에 포함된 오현리 주민들의 이주 거부로 군의 고충이 크다.
♤ 수레너미고개/ 차유령(車踰嶺)/ 56번국도/ 350번지방도/ 화합로/ 해태상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와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거미울을 넘나드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가는 고개로, 수레가 끊임없이 넘나들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미울은 원래 마차길이 지나는 곳으로 수레거(車)자와 말마(馬)자를 써서 거마울이었는데 거미울로 변형이 되었다. 왕복 20분 거리 적성삼거리에 파주휴게소(구멍가게)가 있다. 게가 열지어 이동하는 해유령이나, 수레가 이동하는 차유령이나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빈번한 오늘날의 고속도로였던 것을 말한다.
♤ 266.1m봉/ 삼각점봉/ 시계/ 읍면계/ 삼리봉(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 → 직천리)
차유령에서 임도로 올라서서 갈림길인 삼거리에서 계속 임도를 따르면 우회하게 되는 봉우리이며, 직진 숲속으로 들어서서 묘지 위를 지나 만나는 삼각점이 있는 벙커봉이다.
♤ 307.7m봉/ 조망바위/ 시계/ 읍면계/ 리계(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하다가 가끔 나타나는 군사용 시설, 군사격장 경고판을 지나 산길로 오르니 좌우 조망이 시원한 바위가 있는 암봉이다. 김신조루트인 파주시 파평산(490m)과 비학산이 조망된다.
♤ 옛 수레너미고개(205m)/ 차유령(車踰嶺)/ 시계/ 삼읍면봉(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 남면 매곡리)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수레미고개는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와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를 넘나드는 1차선 양회임도로, 수레길이 지나는 고개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양주시 광적면에서 남면으로 바뀌는 삼읍면봉 지점이다. 지세가 험하고 도적이 많아 쉰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으므로 '쉰고개' 또는 '쉰넘이고개'라고도 하며 '회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 이 곳을 지나는 수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차유령, 차유현으로 불려졌다. 16세기 초반의 문헌인 "연산군 일기"에 차유령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 양주시 남면(南面)
희한하게도 이름과 달리 양주시의 최북단에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래 옛 적성군의 남쪽에 있다하여 적성군 남면이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개편으로 적성군이 연천군에 병합되면서 연천군 남면이 되었고, 1945년 해방 직후 파주군에 편입되었다가, 이듬해인 1946년 다시 양주군에 편입되는 복잡한 과정에서 면 이름을 그대로 둔 채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로 옆 지역은 파주시 적성면과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이고 파주와 함께 감악산 홍보를 하는 곳이다. 또한, 은현면만 넘어가면 바로 동두천시가 나와서 동두천도 가깝다. 생활권은 적성과 동두천에 가까운데 적성이 동두천보다 더 변두리인데다 적성 중심가에 가려면 감악산을 타면서 고개를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동두천으로 더 많이 간다. 연천군이 다시 수복되었어도 환원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전곡으로 넘어가는 길도 구불구불한 산길이기 때문에 일제 당시에도 생활권은 사실상 동두천 생활권이었다. 참고로 양주에서 가장 휴전선과 북한에 가까운 곳이고, 이 때문에 규모가 큰 군부대가 곳곳에 산재해 옆 동네인 파주시의 최북단 적성면과 함께 최전방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지역이며 면 전체에 걸쳐 중소기업 공장들이 줄지어 있다.
임도를 따르면 우회하게 되는 봉우리입니다.
♤ 300m봉/ 시계/ 삼읍면봉/ 삼리봉(양주시 남면 매곡리,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 적성면 무건리)
지맥의 왼쪽이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적성면 무건리로 바뀌는 삼읍면봉 지점이다. 약간 가파르게 올라서고 바닥에 바위가 깨진 것처럼 널려 있다.
♤ 파주시 적성면(積城面)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면으로 현재는 남북분단으로 가장 피해를 본 지역 중 하나이다. 지금은 파주의 일부이지만, 과거엔 구한말까지 존재하던 행정구역인 적성군의 중심지였다. 임진강의 원래 이름인 칠중하(七重河)를 담당하는 칠중성(七重城)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 중심지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 나당전쟁 과정에서 칠중성 전투가 여러차례 있었을 정도로 요충지였다. 적성군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연천군에 병합되어 사라졌는데, 1945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연천군 대부분 지역이 38선 이북에 속하게 되자 미군정의 임시조치로 38선 이남의 연천군 지역이 파주시(당시에는 파주군)로 편입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연천군 대부분 지역을 수복했지만 적성면은 연천군으로 반환되지 않고 그대로 파주에 속하게 되었다. 영국군 글로스터셔 대대 전적지가 이곳에 있으며, 25사단 사단본부와 군사경찰대, 최전방 GP/GOP 부대 제외 대부분의 부대도 파주에 있다. 적성면 어유지리의 일부 지역은 북위 38도 이북에 있다. 바로 북쪽이 연천군이므로 군내면, 진동면보다 북쪽에 있으나 민통선 내부가 아니다. 철원의 김화권 지역과 적성면은 비슷한 처지인데, 둘 다 단지 현재 편입되어 있는 지역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었으나 북한으로 인해 분단되면서 각각 파주와 철원이라는 인접한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적성면 내에서도 적성면 중심가를 기점으로 생활권이 나뉘는데, 적성면 중심가 이서 지역은 파평면/법원읍과 같이 문산 생활권이고, 적성삼거리 이동 지역(감악산, 어유지리 등)은 동두천/전곡생활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적성삼거리에서 남면 방향은 동두천 생활권으로 보면 되고, 북동 방향에 있는 동네는 전곡 생활권으로 볼 수 있다.
♤ 326m봉/ 시계/ 읍면계/ 삼리봉(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양주시 남면 매곡리 → 신암리)
지맥의 오른쪽이 양주시 남면 매곡리 → 신암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시야가 트이고 좌우로 묘지들이 자리하는 곳이다. 묘지 뒷쪽 둔덕에 군삼각점이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으로 동두천시가 바라보인다.
♤ 양주시 남면 신암리(神岩里)
신암리는 양주시 남면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양주시 남면 황방리·한산리, 북서쪽은 파주시 적성면, 남쪽은 남면 매곡리·신산리와 접한다. 북쪽의 감악산에서 뻗어 나온 산자락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남쪽에 평야 지대가 약간 있고 북쪽엔 신암저수지가 있다. 신암1리와 신암2리의 2개 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마을로는 부도골(부두골)·서뉘골[선유동(仙遊洞)]·양짓말·웃신앙골·음지말·점말[점촌(店村)]·주막거리 등이 있다. 신암리(神岩里)라는 땅 이름은 18세기 후반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데 이 마을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감악산 바로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유래에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 조선시대에 신을 모신 바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둘째, 이곳에 남선굴(南仙窟)로 불리는 신선바위가 있었으며, 여기에서 신선바윗골·신암골·신앙골·신암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곳에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골, 즉 시낭골로 불렸는데 남을진(南乙珍)이 감악산으로 들어오면서 귀신바위를 붙들고 울었다고 하여 귀신 ‘신(神)’자와 바위 ‘암(巖)’자를 따서 신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현재 신암리는 감악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관계로 양주시에서 가장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파주시 적성면을 넘나드는 설마치고개를 중심으로 파주시와 양주시를 연결하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한편 감악산이 만들어 놓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따라 사시사철 수많은 등산객과 낚시꾼이 신암리를 찾아오고 있다.
♤ 무건리고개(270m)/ 초소/ 시계/ 면계/ 리계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양주시 남면 신암리와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를 넘나드는 비포장 임도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군부대 초소 있는 곳에서 왼쪽 산길로 능선을 따르기도 하고, 임도를 따르다가 주차장이 있는 양회임도를 만나고 진행방향 왼쪽에 잘 조성된 가족묘지 위로 오르기도 한다. 오른쪽 아래에 인가 한채가 보인다.
♤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武建里)
옛날 설인귀가 이 곳 산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고 하여 무건리라 했다고 한다. 2002년엔 무건리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이동 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두 여중생이 깔려 죽는 일이 있었다. 설인귀는 당 태종과 고종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당나라 무장이다. 고구려 정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당이 옛 고구려 지역 통치를 위해 총독부 격인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자 그 최고 우두머리 장관에 임명됐다. 이후 나당전쟁에서 신라군과 맞서 여러 전투를 지휘했지만, 연이어 패하고는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런 설인귀가 느닷없이 감악산신으로 한반도에 다시 나타난 셈이다. 감악산은 비단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신라 이래 줄곧 영험한 산이라 해서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신라시대 산신이 설인귀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조선 전기 이전에는 감악산신이 설인귀라는 설화가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적성현에 있는 신사로 감악사를 소개하면서 "항간에 전해 오기를 신라에서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고 했다. 이 때문인지 적성면 일대에는 설마리와 설인귀굴을 비롯한 설인귀 관련 지명이 더러 있다. 심지어 설인귀는 칠중성에서 태어나서 말을 타고 훈련을 하며 감악산을 누비고 무예를 닦았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 감골/ 양주시 남면 신암리
양주시 남면에서 파주시 적성면으로 설마치고개를 넘기 직전에 감골입구 버스정류장에 있는 감악산낚시터에서 감악지맥 능선까지 도로가 올라오며, 감악지맥 무건리고개와 상흥봉의 가운데에 있는 군훈련장으로 고개 오른쪽에 인가 한채가 있다. 고개 주변으로 세계 기독교 통일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 상흥봉(365.7m)/ 3등삼각점(문산 305/ 1996 재설)
오르내림이 모두 된비알의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단풍나무에 매어 있다. 군용삼각점도 있다. 삼각점봉에서 방화선이 보이는 직진 방향이 아니고 바로 우틀로 진행해 내려서면 철망울타리가 나오고, 철조망을 통과해 아래로 내려서면 넓은 임도의 유격장이 나온다. 한동안 유격장으로 사용하다 폐쇄된 군훈련장을 비켜가야 한다. 궤도차량 격납고를 오른쪽으로 지난다.
격납고가 좌우로 네개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아 입구에 식재한 소나무와 초피나무 등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밖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날도 저물고, 빗방울도 떨어지고 예정대로 여기서 비박을 하기로 합니다. 3번방에서 비박을 하였고, 한밤중에 비가 꽤 내리던데 튼튼하고 안온하고 비박지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헤드랜턴 고장 원인을 찾았고, 안경점에 가서 소형 나사를 풀고 순간접착제로 단극을 고정하여 수리했습니다. 자전차포에 가서 충전용밧데리만 예비로 하나 더 구입할려고요.
♤ 설마치 전 봉우리/ 시계/ 면계/ 삼리봉(양주시 남면 신암리,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 설마리)
상산김씨 12대손 가족묘지가 있는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 설마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어룡고개로 내려선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에는 설인귀에 대한 전설이 많다. 이는 설인귀가 실제 인물이요, 또 적성에서 고구려 원정을 한 장수이므로 자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기록상으로 설인귀사, 설인귀 산신(山神)추대, 설인귀비(몰자비-沒字碑), 글안병의 퇴각 등에서 설인귀의 전설을 볼 수 있다. 설인귀는 본래 지금의 적성면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힘이 장사이므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지냈다. 설인귀가 얼마나 힘이 셋던가? 한번은 세도가 상산 김씨(김덕함)의 묘를 쓰는데 묘자리에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하여 당시의 권세로 각 동리에 배당하여 그 나무를 캐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월리에 배당된 나무는 설인귀가 자청하여 자기가 캐겠다고 하므로 동리 사람들도 그의 힘센 것은 알고 있는 터라 쾌히 승락하였으나 묘쓸 날이 다가와도 도무지 나무를 캐내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 나무를 묘 쓰는 전날까지 캐내지 못하면 온 동리가 큰 곤욕을 당하는 것이다. 동리사람들이 걱정하고 독촉하니 설인귀가 술 세독을 준비하라 하고 당일이 되자 술 세독과 돼지 한 마리를 먹고는 나무를 뽑아내는데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뽑아버렸다고 한다. 설인귀가 한번은 지금의 율포리 앞 강 석벽에 이르렀더니 석벽이 갈라지면서 용마(龍馬)가 뛰어나오는게 아닌가, 설인귀가 그 용마를 잡으니 용마는 가만히 있었다. 또 백운리(白雲里)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리는 것을 캐어보니 큰 궤가 나오는데 그 속에 갑옷, 투구, 칼이 들어 있어서 설인귀 이외에는 입을 사람이 없기로 설인귀가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용마와 갑옷, 투구, 칼을 얻은 설인귀는 적성일대를 돌아다니며 훈련을 하였다. 그의 말발굽이 가장 많이 지나간 지금의 마지리(馬智里)는 실은 마제리(馬蹄里)였던 것이다. (이것은 『여지승람』에도 馬蹄里로 기록되었다) 또 설마치 계곡에는 설인귀가 가지고 놀던 "공기돌"이 6.25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 감악산 산정에 비가 남아있는데, 글씨가 다 지워져서 알 수가 없으므로 이를 몰자비(沒字碑)라 하는데 이를 현주민들은 "빗돌 대왕"이라 한다. 이 빗돌은 군 작전상 철거를 하였더니 자주 사고가 나서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본래는 갓이 없었던 갓을 만들어 씌웠다. 이 빗돌 대왕은 본래 설마치 길가에 세워져 있어 오고가는 사람들이 비 뒤에서 남에게 보이지 않기때문에 용변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또 수령(守令)이 통과할 때도 이곳에 이르면 모두 하마(下馬)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감악산 7개 부락에 소 가진 사람에게 한결같이 현몽하기를 흰 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소를 하룻밤 빌려 달라고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굿간의 소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으나 소의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빗돌 대왕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후에 알아보니 그 빗돌 대왕이 감악산 꼭대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의정부에서 적성을 오가는 25번 버스가 자주 지납니다.
♤ 설마치(雪馬峙)고개/ 어룡고개/ 사기막고개/ 371번지방도로/ 시계(파주시-양주시)/ 면계/ 리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와 양주시 남면 신암리를 넘나드는 4차선 포장도로/ 371번도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설마치고개는 어룡고개 혹은 어영고개로도 불리는데 임금님이 넘어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설마치 고개는 옛날 설인귀 장군이 말을 타고 무건리에서 무술을 연마하다 눈오는 겨울 이 고개 마루에서 건너뛰어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달렸다 하여 유래되었다 한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말을 타고 훈련했다 하여 설마치, 또는 설인귀가 겨울에 눈이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고 하여 설마리라고도 했다. 가스실습장까지는 일반 육산과 다르지 않다. 사기막골의 25사단 유격장은 전통시절 삼청교육대를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왼쪽으로 감악산출렁다리에서 올라오는 등로가 합류한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워낙 극렬하였으므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고립무원의 결사항전 끝에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 설마리 전투(Battle of Solma-ri)/ 파주시 적성면 마지리
글로스터 고지 전투 (Battle of Gloster Hill) 혹은 임진강 전투 (Battle of the Imjin River)로도 불린다. 6.25 전쟁이 한창인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 경기도 북부 파주시 임진강에서 감악산을 배경으로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셔 대대와 5차 공세를 위해 남하한 중공군 19병단 63군 사이에 벌어진 처절한 전투를 지칭한다. 파주 적성면에는 걸어서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 두 곳이 있다. 장좌리의 고랑포와 주월리의 가여울이다. 국사봉(國事峰, 150m)은 고랑포와 가여울 사이에 걸쳐 있는 야산으로, 맞은편의 호로고루성과 함께 남북왕래의 통로를 지키는 교두보였다. 오랜 세월 현무암 지대를 깎아가며 흐르는 임진강과 한탄강은 양쪽에 10m가 넘는 수직 절벽을 만들어 놓았고 그 때문에 임진강과 한탄강은 20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역할을 했다. 이곳은 임진강 중류의 남쪽 강가에서 감악산을 끼고 있어 임진강 북안에서 남진할 때 반드시 제압해야 하는 요충지로 『삼국사기』에는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蘆河)라 불렀다 하였으며, 실제로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졌던 고구려와 신라, 나당전쟁 때는 당나라와의 칠중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 격전지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말 중공군은 한반도에서의 유엔군의 완전 축출을 목표로 단기간에 서울을 재점령하고자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가한다. 4월 춘계 공세의 주공 방향으로 서부전선을 선택한 중공군은 유엔군 4개 사단 섬멸과 서울 점령을 목표로 3개 병단을 투입했다. 그 가운데서도 국군 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파주-연천은 1개 야전군급 부대인 19병단에 더해 북한군 제1군단이 배치돼 중공군이 전 전선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누리는 정면이었다. 피아 병력 비율은 1:8에서 1:10에 달했다. 4월 22일 고랑포를 건너온 중공군 우익은 국사봉 서쪽으로 진격, 문산 쪽으로 몰려가서 4월 25일까지 국군 1사단과 봉서산전투를 벌였으며, 한편 같은 날 가여울을 건너온 중공군 좌익은 국사봉 동쪽으로 진격, 감악산으로 몰려가서 영국군과 3일간 설마리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사단과 영 29여단은 밀려오는 중공군의 파도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인접 전선의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 글로스터 대대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압도적인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3일에 걸친 영웅적인 분투를 벌이나, 연이은 소모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종국에는 탄약까지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의 전투 지속이 불가능해진다. 최후의 순간 글로스터 대대원들은 분산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미 포위당한 상태라 D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의 명예로운 저항은 헛되지 않았다. 대대가 벌어다준 천금 같은 시간으로 유엔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고, 마침내 중공군이 목표로 하던 서울을 지켜냄으로써 4월 공세를 좌절시킨 것이다. 이 전투가 벌어진 장소 근처에는 영국군 추모공원이 있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서 마지리로 넘어가는 371번 지방도 옆에 위치하고 있다.
♤ 범륜사(梵輪寺) 갈림길/ 운계사(雲溪寺)
임도길을 지나 준희선생님 힘힘힘! 격려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갈림길(←범륜사1.6km) 의자가 있는 곳에서 계단을 오르면 도상의 ‘540봉’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파주 감악산과 관련한 많은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적성현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현의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산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감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북으로는 마미산(馬尾山), 서로는 월라산(月羅山), 남으로는 차거산(硨磲山) 등을 형성한다. 조선 왕조가 개국하자 의령 출신의 남을진(南乙珍)이라는 사람이 감악산 석굴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않아 태조가 그의 거소를 찾아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감악산 서쪽 정상에는 용지(龍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가물거나 장마가 져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감악산에는 감악사(紺岳寺)·운계사(雲溪寺)·신암사(神巖寺) 등의 절이 있었다 전해지나 모두 소실되었고 1970년 운계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의 범륜사가 들어서면서 감악산 대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 540m봉
540m봉 직전 처음으로 올라선 봉우리에서 조망이 트이는데, 신 한북정맥의 끝부분 월롱산과 기간봉, 오두산까지 훤히 건너다 보인다.
♤ 악귀봉
나무계단으로 악귀봉에 오르며 감악산 주능선에 올라선다. 멀리 장군봉, 임꺽정봉이 조망된다.
♤ 장군봉(652m)
등로상에 있는 장군봉에는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 임꺽정봉(676.3m)/ 매봉재/ 2등삼각점(문산 22/ 1982 재설)/ 시계/ 면계/ 삼리봉(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양주시 남면 신암리 → 황방리)
좌우측으로 등산로가 계속 합류되고, 감악산 최고봉인 임꺽정봉은 지맥에서 약간 벗어나 오른쪽으로 잠시 다녀와야 한다. 조선 전기 양주 불곡산 아래에서 백정으로 태어나 관리들의 탐학과 신분차별을 참지 못해 도적떼의 수괴가 되었던 임꺽정은 그 시기에 활빈당, 살주계, 대동계 같은 정치적인 리더쉽을 발휘하기도 하였으나, 신분이 미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그저 일개 도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그의 앞 시대의 홍길동(洪吉童),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감악산에 위치한 봉우리로 부도골 북쪽에 있으며 생긴 모양이 매와 비슷하다 하여 응봉이라고도 한다. 현재 봉우리 밑에는 굴이 있으며 다섯 걸음을 걸어가면 구덩이가 나오는데 컴컴하여 깊이와 넓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일명 응암봉(鷹巖峰)이라고도 하는데, 적성헌지(1842), 적성현지(1871)에 모두 등장한다. 한편 응암봉 밑에 있는 굴에 대해서는 설인귀굴 또는 임꺽정굴이라고 부르는데, 일설에서는 고려 말 충신 남을진 선생이 은거한 남선굴이 바로 이 굴이라고도 전하여 진다.
♤ 양주시 남면 황방리(篁芳里)
신암리와 더불어 양주시의 최북단이다. 감악산의 남동쪽 능선에 자리잡았고, 신천의 지류인 상패천의 발원지이며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봉암저수지와 원당저수지가 있다. 황방리(篁芳里)라는 땅 이름은 원래 감악산 아래 대나무가 무성하였고 그 모습이 흡사 꽃과 같아 황방·황뱅이·황방동이라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기록에 적혀 있는 황방리의 한자를 통해서 볼 때에는, 감악산 남쪽에 위치한 이곳에 무수히 많은 골짜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1914년 이전에는 적성 무녀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원당저수지 북쪽에 있는 굿당의 무녀들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주로 봉암저수지 옆으로 지나가는 375번지방도(양연로)를 통해 면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으며, 원당저수지 옆을 지나가는 삼육사로327번길을 이용해서도 갈 수 있지만, 도로가 좁고 근처에 공병부대가 있어서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독립유공자이자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낸 조소앙이 이 동네 출신(실제는 파주 월롱면 출신이고 황방리는 본적이며, 그의 동생들과 자녀들은 이 곳 출신이다.)으로 봉암저수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그 공원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부터 지맥길은 늘목리(연천군 설치)와 초록지기마을(양주시 설치) 이정표를 철탑봉까지 따라갑니다.
♤ 감악산(紺岳山, 675m)/ 몰자비/ 강우레이더 기상관측소/ 헬기장/ 시계/ 면계/ 삼리봉(양주시 남면 황방리,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 객현리)
감악산은 가평의 화악산, 개성의 송악산, 안양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산세가 험하고, 폭포, 계곡, 암벽 등이 잘 어우러진 파주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감악산은 '검푸른 바위산'이라는 뜻으로, 한자어 '紺岳山(감악산)'의 紺(감)이 검푸른색을 뜻하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또한, '감(紺)'이 우리말 '신(神)'을 의미하기도 하여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산에 신들이 거주하고 지역민들이 신성하게 여겨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신라 시대부터 명산으로 여겨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별기은이라는 제례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산 서쪽 자락에는 법륜사와 운계폭포가 자리 잡고 있고,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굴과 임꺽정봉이 있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설마계곡 입구에 영국군 참전기념비가 있다. 지난해 9월 개통된 출렁다리는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감악산은 해발 675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영험한 곳으로 내내 꼽힌다. 예로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해서 감악(紺岳)이란 이름을 얻었다. 산 전체가 거대한 돌덩이라 신성성이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보호시설로 묶여서 일반에 개방된 지는 오래되지 않는다. 감악산은 예로부터 임진강을 낀 남과 북의 교통 요충지이자 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 지배권을 다투던 군사 요충지였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서쪽은 파주시 적성면, 북동쪽은 연천군 전곡읍, 남동쪽은 양주시 남면 등 3곳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국경 분쟁이 심하던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영토 싸움의 현장이었다. 산 정상에는 삼국시대 고비(古碑)가 있다. 높이 170㎝인 이 비석은 일명 '빗돌 대왕비' 또는 '설인귀비'라고도 한다. 그런데 비석엔 글자가 없다. 애초에 없었는지, 아니면 차츰 마모돼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선 후기 정계 거물이자 당대 제일의 명필인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현장을 답사하고 남긴 글을 보면 그때도 비석엔 글자가 없었다. "(1666년) 9월29일…(송상사<宋上舍>)라는 분과 함께) 감악산을 유람하니, 저녁엔 견불사(見佛寺)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깎아지른 벼랑 정상에 올라 신정(神井·우물 이름)에서 물을 마셨다. 그 위가 감악사(紺嶽祠)다. 돌로 쌓은 단이 세 길인데, 단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으니, 오래되어 글자가 없어졌다. 옆에는 설인귀(薛仁貴) 사당이 있는데 왕신사(王神祠)라고도 한다. (삿된 귀신을 제사하는 사당인) 음사(淫祠)인데, 그 신이 요망하게 화복(禍福)을 내릴 수 있다 해서 제사를 받고 있다." 감악산 정상에 선 옛 비석은 지금도 허목이 말한 상태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비석은 전체 생김새라든가, 그 받침돌 모양이 북한산 비봉과 마운령, 황초령에서 각기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렇다면 왜 비석에 글자가 없을까. 아예 처음부터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비석은 미리 주문 제작에 들어간다. 이 비석 역시 진흥왕이 언제 감악산에 행차한다는 계획에 따라 제작에 들어가 그 행사 장소인 감악산 정상에 제반 준비를 하고 미리 세워놨을지도 모른다. 왕이 다녀가고, 모종의 행사를 치른 다음에 비석에다가 그 내용을 새길 예정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 왕이 행차하지 못하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못한 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덩그러니 남게 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허목의 감악산 유람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감악산에 설인귀 사당이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비석이 설인귀비라는 전설이 있다.
설인귀는 당태종을 따라 안시성을 공격한 장군으로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당나라 장수가 어쩌다가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신라 조정의 현지화 전략이었습니다.
♤ 감악산(紺岳山)과 설인귀(薛仁貴)
경기오악의 하나인 감악산은 경기도 양주와 연천, 그리고 파주에 걸쳐있는 산이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감악산은 한반도의 서북지역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중요 통로였으며, 대표적인 영산(靈山)으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이 감악산 산신의 존재를 믿으며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를 올렸다. 감악산이 국가 주도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된 것은 신라시대부터였다. 신라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빌었는데, 7~8세기 무렵 소사(小祀)에 감악산이 포함되었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수도를 둔 신라가 멀리 있는 감악산에서 제사를 올린 이유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진흥왕이 한강 하류를 장악한 이후 감악산 인근은 고구려군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장소였다. 만약 감악산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되면, 한강 유역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감악산 일대는 신라를 정복하려는 당나라에 맞서 전투를 벌이던 장소로, 신라의 존망 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신라군의 영령을 위로하고, 감악산 산신이 신라의 승리를 도와준다고 믿게 만드는 제사는 자칫 돌아설 수 있는 감악산 인근 지역의 민심을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감악산의 산신으로 당나라 장수 설인귀(613~683)가 지목되었다는 점이다. 설인귀는 당 태종과 고종 시기에 활약했던 중국 장수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궐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중국인들의 영웅이 된 인물이다. 중국인들이 설인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설인귀를 주인공으로 다룬 《설인귀정동》 《설정산정서》 등이 작품은 시대가 바뀌어도 늘 사랑받았다. 심지어 설인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18세기 이후 《설인귀전》으로 번역되어 많은 이들이 읽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설인귀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신라와 전쟁을 치른 적대적 인물이다. 그런데도 설인귀는 감악산 산신으로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감악산이 위치한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 결과 감악산 일대는 당과 신라에 대항한 고구려가 부흥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특히 임진강 건너 호로고루에서는 신라와 당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에 궁예와 왕건이 감악산에서 멀지 않은 철원과 개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것도 신라에 대한 이 지역의 반감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신라는 늘 감악산 일대의 민심을 다독이고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 군대 2만 명을 평양 안동도호부에 주둔시켜 고구려인을 죽이고 억압하던 설인귀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통일신라는 엄청난 괴력으로 고구려인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설인귀의 위명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을 진압했다. 그 결과 이 지역 백성들이 발해로 이탈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보았다. 고려시대에도 감악산 산신 설인귀에게 국가 주도로 제사를 지냈던 기록이 《고려사》에 나와있다. '현종 2년(1011년) 2월 거란군이 장단에 침입하자 때마침 바람과 구름이 세차게 일어 감악산 신사에 군기와 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이니 거란군이 두려워하여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였다. 이에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제사를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는 내용에서 설인귀가 거란군을 내쫒는 신기하고 기이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고려왕은 보답의 의미로 설인귀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중국 장수로서 고구려와 통일신라를 괴롭히던 설인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고려 초의 설인귀는 더이상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 장수가 아니었다. 설인귀이 아버지는 감악산이 있는 파주 적성 출신의 역관으로 중국 당나라에 가서 출세한 뒤, 고향과 고국을 못 잊어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백성들은 설인귀가 이민족의 장수가 아닌 우리 선조로서 고려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란군을 신비한 능력으로 내쫒고 왕과 나라를 수호했다고 믿었다. 이후 설인귀는 지역사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넘어 왕실과 국가를 지키는 막강한 신으로 승격되었다. 거란이 물러난 이후에는 사람들이 설인귀에게 가족을 만들어주었다. 고려 조정은 설인귀 부부와 두 아들 부부, 총 6명을 산신의 대열에 올렸다. 이들에게 봄,가을로 제사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고, 국난이 생기면 감악산을 수시로 찾아가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충렬왕 13년(1287년) 원나라 황제를 돕기 위해 모반을 일으킨 내안(?`1287)을 토벌하기 직전, 고려 조정이 설인귀의 둘째 아들을 도만호(치안 담당 장관직)에 책봉했다는 《고려사》 내용을 통해서도 감악산 산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고려 조정이 나라의 운명을 기댈 정도로 설인귀를 높이 평가하자. 백성들은 더욱더 감악산 산신의 존재를 믿었다. 감악산 산신이 영험한 능력으로 자신들을 영구히 보호해 주기를 원했다.
♤ 감악산 성모마리아상
뜬금없이 감악산 정상에 성모마리아상이 서있는데 아무런 연유나 설명이 없다. 풍문으로는 1998년 25사단 비룡성당 신자들이 주도하여 성모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북녁을 바라보는 성모마리아상의 경우 평화, 통일 등의 염원을 담아 천주교 군종교구에 의해 전방지역 산정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지맥이 파주시와 헤어져 우틀하여 여기부터 양주시와 연천군의 경계를 따라 내려섭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하늘아래 첫동네 쪽으로 내려서면 성모마리아상이 나오고, 이정표에서 초록지기 마을 이정표를 따릅니다.
♤ 병풍바위/ 삼시군봉(양주시 남면 황방리,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
가야할 마차산 오른쪽으로 봉암저수지와 동두천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오른쪽으로 동광정사 갈림길도 지난다. 병풍바위를 지나자마자 내려서서 동광정사 0.9km 이정표 방향으로 조금만 돌아나가면 능선이 나타난다. 좌 동광정사(1.2km), 직 동광정사, 늘목리(3.1km) 방향으로 진행한다. 삼거리 안부에서 조금 진행하면 헬기장이 나오는데 병풍바위를 올려다보는 조망처이기도 하다.
♤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訥木里)
본래 적성군 동면지역으로, 전곡읍 늘목리는 고려말 눌처사가 살았다하여 늘목, 늘메기, 늘무기, 눌목동으로 불리워 오다 늘목리로 전곡읍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늘목동은 앞자리 부근에 있는 마을로 감악산 정상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도 한다. 늘목리와 간파리는 실질월경지로 전곡읍내보다 동두천시 은현면, 양주시 남면이 더 가까우며, 그 쪽 생활권이다.
♤ 철탑봉/ 군계/ 읍면계/ 리계(양주군 남면 황방리-연천군 전곡읍 늘목리)
철탑봉에서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친환경 농법으로 쌀농사를 짓는 자연 친화적인 마을이라서 붙여진 봉암저수지 '초록지기 마을'로 내려서는 길을 오른쪽 능선으로 떠나 보내고, 조금 가다 늘목리 1.06km 지점 이정표를 지나고 지맥길은 오른쪽으로 향한다. 가족묘지를 지나 간패고개로 내려선다.
간패고개는 전곡읍과 양주시 남면, 은현면이 만나는 삼읍면경계면입니다.
♤ 간패고개(干坡峴, 180m)/ 황방리고개/ 375번지방도로/ 시군계/ 삼읍면계(연천군 전곡읍, 양주시 남면 → 은현면)/ 사리경계면(황방리→봉암리, 늘목리→간파리)
지맥의 오른쪽은 양주시 남면 황방리 → 은현면 봉암리로, 지맥의 왼쪽은 전곡읍 늘목리 → 간파리로 바뀌는 삼읍면 경계면으로, 양주시 남면 황방리(篁芳里)와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干坡里)를 넘나드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양주시쪽에서는 황방리고개, 연천군쪽에서는 간패고개로 달리 부른다. 고개 정상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 임도길로 진입한다. 여기부터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와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경계를 따라 마차산으로 올라선다.
♤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干坡里)
간파리는 본래 양주군 영근면 지역으로 '간파' 또는 '간패'라 하였는데 1945년 광복 후 3·8선 이남 지역이 되면서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해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따라 연천군으로 편입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효자 정문이 있는 마을로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집성촌이다.
♤ 양주시 은현면(隱縣面)
은현면은 양주시의 7개 읍면 가운데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동두천시, 남동쪽으로는 회천읍, 서쪽으로는 남면 및 광적면, 남쪽으로는 백석읍과 접해 있다. 남쪽에는 도락산(道樂山, 440.8m), 북쪽에는 감악산(紺嶽山, 675m) 자락, 북동쪽에는 소래산(蘇萊山, 228.8m)에 둘러싸여 있으며, 신천의 지류인 상패천이 서에서 동으로 휘감아 돌아 나가면서 선암리를 중심으로 분지가 발달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은 한반도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을 근방에 둔 지역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쟁탈 장소였다. 먼저 고구려·백제에서는 이곳을 내을매, 혹은 내이미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경덕왕대에 이르러 마을 가운데로 사천이란 하천에서 비롯된 사천현이었다가 조선조에 현내면이라 하여 상·중·하패의 3개 리를 관할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묵은면·석적면·이담면의 각 일부와 남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묵은과 현내의 이름을 따서 은현면이라 하였다. 사실상 동두천 생활권이며, 양주시 타 읍면동으로 가는 것보다 동두천 나가는 것이 더 편하다. 동두천시 상패동도 원래 은현면 소속이었다. 용암리 기와집말은 한씨 종가 집터이며, 향년 47세로 사망한 남양부부인홍씨의 묘가 있다. 조선초기 재상인 양절공 한확의 부인이며, 인수대비 한씨의 어머니이고,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이 외할머니가 되는 분이다. 여성으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는 신도비(연산군 때 간신중의 한 사람인 임사홍이 비문을 지었다.)가 서있고, 그녀의 무덤 바로 밑에 구전설화로 내려오고 있는 코끼리 무덤이 있다.
♤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鳳岩里)
양주시 은현면 북쪽에 있는 봉암리(鳳岩里) 일대는 예부터 바위가 많았고 봉황을 닮은 바위, 즉 '봉바위'가 있는 곳이어서 봉암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봉바위는 부엉이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원래는 논밭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으나 1952년 미군 부대 주둔 이후 많은 지역에 군부대가 자리 잡게 되었다.
♤ 임시정부에서 삼균주의를 제창하신 조소앙 선생 가묘
1887년 4월 8일 경기 교하군(현 파주시) 월롱면(月籠面)에서 아버지 정규(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2년부터 조부 성룡(性龍)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02년까지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1902년 7월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하여 유교 경서, 역사서, 세계지리, 산술, 작문 등을 배웠다. 1903년 정부에서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기려고 하자 신채호(申采浩), 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성균관을 그만두었다.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균관 경학과를 마치고 관료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것이다. 1904년 7월 황실특파 유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11월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정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37년 8월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우익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결성되자 재건 한국독립당 대표로 이에 참여하였다. 1939년 10월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독립외교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외무부 산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연합국들 사이에서 한국문제의 처리방안으로 국제공동관리(國際共同管理) 방안이 거론되었다. 이에 국제 공동 관리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의 당위성과 논리적 근거를 밝히는 다양한 외교 언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국,영국,중국 3국의 수뇌가 회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를 전개하였다. 1943년 7월 김구 주석 등과 함께 장제스를 만나 영국과 미국이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방식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 독립을 주장하고 관철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장제스로부터 힘써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결과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국제적 약속이 공표되었다.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균등생활을 실시하려는 삼균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기본이념이되었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에 다녀왔다. 1948년 5・10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의회 활동을 통해 삼균사회 건설 작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1950년 6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6・25전쟁으로 납북되어 1958년 9월 10일 평양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평양시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이곳 양주시에 가묘를 만들었다.
황방리고개에서 올라서며 더울것 같아 커다란 벙커를 지나 얇은 바지로 갈아입고 출발합니다.
♤ 266.1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삼시군봉에 올라 마차산 방향으로 좌틀로 내려서서 늦은고개를 지나 임도를 따라 한동안 올라서야 한다.
지맥이 양주시와 헤어지고 동두천시와 처음 만나는 지점입니다.
♤ 310m봉/ 삼시군봉 삼거리(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 동두천시 안흥동)
동두천 6산종주 합류지점으로, 지맥의 오른쪽이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 동두천시 안흥동으로 바뀌는 삼시군봉이다. 내려서면 채석장 옆을 지나며 마차산 2.9km, 동광교(종주 끝) 6.0km 이정표가 서있는 갈림길이다.
♤ 늦은고개/ 낮은목이/ 임도삼거리
반바지운영자님의 코팅지가 이정표에 매어 있다. 늦은고개는 동두천시 동광교, 웃안흥리(0.7km) 버스회차지점으로 넘어가는 갈림길이다.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고개로, 한동안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동두천역 삼거리에서 고개 왼쪽으로 ’다솜농장1.0km‘ 갈림길을 지나면 오르막길 옆에 정자가 있다.
암릉구간을 왼쪽으로 우회합니다.
♤ 422.1m봉/ 봉화대터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 가지에 높이 매어 있다. 산성 흔적이 둘러져 있다. 감악산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와 파주시 적성면 간파리와 늘목리를 바라본다.
♤ 508.9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때죽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 마차산성
암릉구간을 만나 사면으로 왼쪽을 따라 우회하여 오른다. 마차산 정상 0.1km 직전에 동두천역(3.7km) 갈림길 이정표를 지난다. 동두천 6산종주에서 동두천역 방향으로 진행하는 삼거리이다. 곧이어 마차산성에 도착한다.
♤ 마차산(磨釵山, 588.4m)/ 정상석, 전망데크/ 3등삼각점(포천 301/ 1997재설)/ 시군계/ 삼리동봉(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동두천시 안흥동 → 상봉암동)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진산으로 경원선철도와 3번국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있다. 산마루에 오르면 사방으로 막힘없이 조망이 탁 트이고 산의 남쪽에는 마고개가 있으며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있다.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보루가 남아있고 이 산의 정상에는 동쪽의 포천 방향과 서쪽의 늘목리 봉수지와 연결된 삼국시대 봉수지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6.25 전쟁 이후에는 군사기지가 있었을 정도로 널찍한 공터가 있다. 한탄강 선사문화권에 인접한 북쪽 산기슭에서는 고인돌, 선돌 등과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양주편 등에 ‘마차(摩嵯)’라고 표기돼 있는 것을 보면, 정상 수리바위의 높고 험준한 모습을 본뜬 ‘摩嵯’가 옳은 표기라 생각된다. 삼신할미가 수리바위에 앉아 구슬을 맷돌에 갈고 머리 단장을 고쳤다 하여 갈마, 비녀차를 따서 마차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나라 장수가 마차를 끌고와서 밤을 새울 만큼 험준한 험하고 가파른 산이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마차산 정상부의 깎아지른 바위가 수리바위다. 소요산 뒤로 왕방지맥을 이어본다.
♤ 마차산 전투
1950년 6월 25일 13만 5,000여 명의 병력에 T-34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남침하였다. 인민군의 공격 목표는 서울 장악이었다. 그래서 공격에 투입된 인민군 2개 군단의 작전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인민군 1군단은 연천·운천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주공격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였고, 개성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공격 축선에는 조공을 투입하였다. 그리고 2군단 역시 춘천-가평-서울로 이어지는 공격 축선에 조공을 투입하였다. 연천에 배치된 인민군 4사단과 운천에 배치된 3사단이 한국전쟁 개전 당시 인민군 주공격 축선에 배치된 인민군 최정예 부대였다. 인민군 4사단은 6월 25일 전차연대와 협공하여 38선을 돌파하고 동두천으로 남하하였다. 인민군 4사단 공격 축선에는 국군 7사단 1연대가 동두천 정면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 38선에 배치된 병력은 2대대였고, 나머지 연대 주력은 의정부에서 훈련 중이었다. 인민군 4사단은 전차 2개 대대가 증강된 16연대를 38선 북방의 전곡에서 38선 남방의 청산면 초성리와 동두천 방향으로 공격토록 하였고, 18연대를 서쪽 파주군 적성면 적암리에서 동두천 봉암리로 이어지는 축선에 조공으로 투입하였다. 작전을 개시한 인민군 16연대는 전곡에서 한탄강을 건너 곧 바로 국군 7사단 1연대 2대대 경계진지를 돌파하고 초성리를 점령한 후 계속해서 전차를 선두로 하여 동두천으로 남하하였다. 이때 국군 1연대 2대대는 동두천 북방 소요산 일대로 철수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동시에 국군 1연대 1대대가 서쪽의 마차산에, 3대대가 마차산 남쪽 봉암리에 각각 투입되어 배치되었으나, 이미 인민군 17연대 1대대와 3대대 병력이 우회하여 양주군 덕정까지 진출한 이후였다. 한편 인민군 4사단은 107전차연대 소속의 전차 수십대를 앞세우고 국군 7사단 2대대가 저항하고 있는 소요산 일대에 대해 총공세를 펼쳤다. 이미 탄약마저 떨어진 국군 2대대는 철수하였고, 6월 25일 저녁 해질 무렵에 인민군은 동두천 시내까지 진입하였다.
♤ 455.7m봉
철탑봉이다. 감악산과 간파리 채석장을 둘러본다.
♤ 369.0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쪽동백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좌틀이다.
♤ 댕댕이고개
소망기도원 1.7km 지점으로, 소요산역(2.2km)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지맥은 초성교 방향이다.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452m봉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높이 매어 있다.
♤ 밤골재
밤골재 이정표가 서있다. 사거리 안부인 밤골재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면 밀알기도원의 간파리(전곡읍),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소망기도원(2.0km)과 상봉암동, 소요산역(동두천시)으로 갈 수가 있다.
감악지맥의 끝머리가 두 군데로 갈라지는 지점이며, 도감포로 향하는 지맥이 동두천시와 헤어지고 완전하게 연천군 내로 들어서는 지점입니다.
♤ 431m봉/ 도감포, 한탄대교 분기점/ 시군계/ 삼리동봉(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동두천시 상봉암동 →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이정표가 참나무에 넘어져 있는 벙커봉이다. 삼각점이 있는 431m봉 직전의 분기점에 군벙커가 위치하고 있다. 지맥은 군벙커에서 좌틀이며, 지맥의 오른쪽이 동두천시 상봉암동 →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로 바뀌며 동두천과 헤어지고 완전하게 연천군으로 들어서서 전곡읍 간파리와 양원리의 경계를 따른다. 무명봉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동두천시와 연천군 전곡읍의 경계를 따라 감악지맥의 또하나의 합수점인 한탄대교로 향하는 지점이다.
♤ 369.0m봉
송전탑으로 한고비 내려섰다 올라서면 산벚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지맥길은 좌틀로 한동안 내리막이 이어진다.
♤ 348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 조금 진행해서 지맥길은 우틀로 휘어진다.
대안 학교에서 산사태 방지공사를 하는건지 굴착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 양원리고개/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兩遠里) 서편말
너덜너덜하다던 반바지운영자님 코팅지는 사라지고 없다. 넓은 공터가 있는 양회임도가 지나는 사거리 안부로, 간파리에서 양원리 서편말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전곡읍 양원리는 마차산 북쪽사면에 위치한 산촌이다. 옥녀봉에 위치한 초성1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옛 양주군 영근면의 지역으로, 옛 양주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멀원리라 부르다가, 후에 상원리(上遠里), 하원리(下遠里), 고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양원리라 하였다. 오른쪽 조금 아래에 '화요일아침예술고교'가 자리잡고 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기숙형 예술 대안학교이다.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와 양원리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여기부터 완전하게 양원리 내로 들어서서 아마니고개로 향합니다.
♤ 무쇠봉(396.5m)/ 수철성/ 봉수대/ 4등삼각점( / )
준희선생님 산패가 물푸레나무에 매어 있다. 글씨가 없는 삼각점이 두개 있고 조망은 그닥 좋지않다. 전곡읍 양원리에 있는 고려시대 봉수대 흔적과 성터가 있는 봉우리로, 아미성과 함께 양주와 적성, 연천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를 지켰던 산성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유적지이다. 무쇠봉 정상에 위치한 퇴뫼식 석축산성의 성의 둘레는 약 250m 동서의 폭은 70m 장방형 산성으로 성 내부는 헬기장으로 곳곳에 군 참호가 구축되어 있다.
♤ 205m봉
바위가 잡석처럼 나타나 있는 군용삼각점(336FOB B8508)이 있는 봉우리이다. 지맥은 급좌틀하여 능선으로 내려선다.
♤ 230m봉
바위가 있는 봉우리로 우틀로 진행한 후 다시 좌틀로 내려서야 한다. 오른쪽으로 나무 사이로 옥녀봉이 보인다. 오른쪽에 은사시나무가 보이면 왼쪽으로 수레길이 있다. 트랙을 놓치면 고생이다.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내를 지나온 지맥이 감악산에서 헤어졌던 파주시 적성면과 잠시지만 다시 만나는 지점입니다.
♤ 181m봉/ 시군계/ 읍면계/ 리계(파주시 적성면 적암리-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내를 지나온 지맥이 여기 암릉 봉우리에서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와 만나 경계를 따라 교통호와 참호로 아마니고개로 내려선다.
♤ 아마니고개(100m)/ 37번국도/ 시군계(파주시-연천군)/ 국도37호선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와 양주시 전곡읍 양원리의 경계로 국도 37호선이 지나간다. 옛날 양주시 전곡읍 양원리에 어떤 과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과부는 살기가 어렵고 남자 품이 그리워 이 고개를 넘고 고릉리 쪽에 있는 서방고개를 넘어 밤나들이를 다니며 남자를 몰래 사귀었다. 이 사실을 안 어린 아들이 어머니를 말리기 위해 기와말 뒤에 있는 고개에서 어머니를 불렀다 하여 부른고개/ 부릉고개라고도 불렀고 어머니가 넘어다니던 고개라고 해서 어머리고개/ 아마니고개라고 이름 붙여졌다. 현재는 적성과 연천을 잇는 도로가 나 있으며 감악지맥의 등산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고갯마루에서 오른쪽으로 임도길이 보이고, 바로 숲으로 치고 올라야 한다.
♤ 163.9m봉/ 4등삼각점(포천 403/ 1998 복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이내 좌틀로 꺽어져 내려선다. 철탑 부근에 칡넝쿨이 무성해 여름엔 우회가 필수이다.
지맥이 파주시와 헤어지고 연천군 전곡읍 내로 들어서서 전곡읍 양원리와 마포리의 경계를 따릅니다.
♤ 임도안부/ 시군계/ 읍면계/ 리계(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 연천군 전곡읍 마포리)
지맥의 왼쪽이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 연천군 전곡읍 마포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지맥은 파주시와 헤어져 연천군 내로 들어서며 전곡읍 마포리와 양원리의 경계를 따른다. 임도삼거리에서 조금 올라 송전철탑으로 가서 능선으로 오른다.
지맥이 전곡읍 마포리와 양원리의 경계를 벗어나 마포리 내로 들어서는 지점입니다.
♤ 223.1m봉/ 마지막 벙커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한탄강이 보이고 왼쪽으로 임진강도 희미하게 보이는 벙커가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이다. 벙커봉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직진해서 내려서면 양원리이고 합수머리에서 500m쯤 떨어진 곳이 되니 알바에 주의해야 된다. 벙커봉을 내려서서 90m쯤 진행하면 왼쪽 계곡사면으로 빠지는 희미한 길이 보인다. 내리막길에 교통호가 같이 한다. 내려서는 길 마지막에 잡목넝쿨이 무성하다. 한반도통일미래센터에서 오른쪽 임진교 방향으로 남계로를 따라 진행하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점이 있는 남계대교에 이른다.
계단으로 올라, 강변 벙커들 왼쪽 임도로 50m 정도 가면 울타리 쳐진 합수머리 전망대가 있습니다. 도감포의 한탄강 남쪽은 연천군 전곡읍 마포리, 한탄강 남계대교 아래 모래톱이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왕재지맥 합수점입니다. 한탄강에 합수하는 임진강의 왼쪽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입니다. 삼읍면 경계면이네요.
♤ 도감포(都監浦)/ 삼읍면경계면/ 도가미(陶哥湄, 陶家湄)/ 옹암탄(甕岩灘)/ 남계대교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남쪽,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합수머리에 있던 포구 마을로 지금은 차박을 즐기는 사람들만 찾는 한적한 강변이나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강화에서 배에 싣고 온 새우젓, 소금 배들이 정박하며 철원 포천 동두천으로 공급하고, 연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 땔감, 도자기 등과 물물교환하던 꽤나 북적였던 장이 형성되었던 포구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제주 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민통선으로 묶여 외지인들의 출입이 불가하게 되었고, 1988년 이후에야 출입이 자유로워졌는데 그 영향으로 도감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지명이다. 옛 지리지나 여러 기행문에는, 이곳 합수머리에서 임진강을 따라 전곡읍 마포리 지역에 넓게 펼쳐진 꽃답벌과 미산면 동이리 썩은소 앞의 강폭이 좁아지는 지점까지의 지형이 항아리의 형태와 닮았다 하여 '독안이(壺內)' 또는 '호구협(壺口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항아리와 닮았다고 하는 지형 안에 있는 도감포의 원래 의미는 '항아리 형태의 지형 안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독안개(壺內浦)'또는 '독안이'로 불리던 것이 '도감', '독암'으로 음이 변하여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도감포' 외에 여러 한자 명칭으로 표현되었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남계대교에서 오른쪽으로 한탄강이 흐르고, 왼쪽에 주상절리 아래 임진강이 흐른다. 한탄강은 북한 강원도 평강군 추가령곡에서 발원해 철원과 포천을 지나 연천 미산면과 전곡읍 경계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136km의 강이다. 한탄이란 '한탄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큰 여울'을 뜻한다. 도감포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병풍같은 동이리 주상절리가 펼쳐진다. 동이리 주상절리 석벽은 10만~50만 년 전 한탄강을 따라 흐르던 용암이 임진강 쪽으로 거슬러 올랐음을 보여준다. 도감포는 연천군 군남면 남계대교 아래에 위치해 있고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로 주상절리와 자갈, 모래밭으로 펼쳐져 있다. 남계대교를 건너다 주상절리 절벽도 구경하고, 왕재지맥의 합수점 날머리도 확인하며 남계리 도감포마을 남계교회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전곡리행버스를 기다린다.
♤ 한탄강(漢灘江)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산정리에서 발원하여 북한의 땅을 적시고 비무장지대를 유유히 통과하여 남한땅 강원도 철원군으로 흘러와서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두군데 중 하나인 철원 평야의 젓줄이된 다음에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남계리의 임진강으로 유입하는 총길이 136km의 큰 강이다. 북한에 속한 한탄강의 길이는 55km, 남한땅을 가로지른 한탄강의 길이는 86km다. 포천의 한탄강 길이는 남한땅이 품은 한탄강물 전체 길이의 절반에 가까운 40km에 이른다. 하지만 포천의 한탄강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그 동안 포천 구간의 강물이 상수원보호구역에 묶여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왔기 때문이다. 맑은물과 깍아지른 절벽, 그리고 울창한 수목이 어울려 뛰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는 한탄강의 유래는 옛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경덕왕 16년(757년)에 당나라제도를 도입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대부분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기전에 구전된 이강의 이름은 섬내, 한여울, 큰개울 등으로 불러오다가 체천 또는 대탄으로 한자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또한 맑고 큰냇물이 흘러 대탄(大灘)이라 한것 등은 실체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한탄강이라는 이름에는 역사적 배경등 여러 유래담이 전해오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탄강이란 본래 "한여울" 즉 "큰여울"의 뜻으로 은하수와 같이 깨끗하고 넓고 길다고하여 은하수 한(漢)자와 계곡(溪谷)과 절벽(絶壁)을 휘돌아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에서 여울탄(灘)자를 붙여 한탄강(漢灘江)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 이 강을 한탄강(恨嘆江)이라고도 하는데 후삼국시대에 철원에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부하인 왕건에게 쫓기어 명성산으로 갈때 이 강을 건너가며 한탄(恨嘆)하였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한다. 그러나 한탄강(漢灘江)보다 한탄강(恨嘆江)으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비극이 이강에 깊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은 조국이 자유,공산 양 진영의 대치장소로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자 자유를 갈구하는 많은 월남인들이 이 강을 건너다가 한맺힌 최후를 마쳤고 6.25사변 때는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간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이 산하를 피로 붉게 물들기도 한 한(恨)맺힌 강이기도 하다. 지금 남북으로 갈린 1천만 이산가족의 한이 이강에 막혀 민족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한탄강으로 더더욱 그 유래가 남아있을 것만 같다.
버스가 불규칙적으로 들어온데서 걸어나갈 요량으로 남계대교를 걸으며 합수머리 풍경을 감상하는데 버스가 연수원으로 들어갑니다. 앗! 저것이 무엇이냐... 사타구니 요령소리나게 달려가니깐 남계대교 입구에서 태워주시네요.
♤ 임진강(臨津江)
경기도 파주시에는 남북의 분단을 상징하는 임진강이 있다. 임진강은 함경남도 마식령에서 시작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되는 강이다. 임진강의 길이는 254㎞이고 유역 면적은 8,118㎢로서 북한에서 9번째로 넓은 유역 면적을 갖고 있으며, 한강의 제1지류이다. 전체 유역 면적 중 남한 지역이 약 3,008㎢, 북한지역이 5,108.8㎢를 차지하고 있다. 강원도 북부를 흐르면서 고미탄천(古味呑川)과 평안천(平安川)을 합류하고, 경기도 연천에서 철원·평강 등을 흘러온 한탄강(漢灘江)과 합류한다. 고랑포를 지나 문산 일대의 저평지를 흐르는 문산천과 합치고 하구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이 강의 고유한 이름은 ‘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더덜매’였다고 한다. 이러한 임진강은 시대마다 부르는 이름을 달리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칠중하(七重河)’라 불렀고,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표로하’ 또는 ‘호로하’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신지강(神智江)’ 또는 ‘구미강(龜尾江)’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고려의 왕은 공양왕이었다.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될 것을 알고,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몰래 송도를 탈출했다. 늦은 밤 은밀하게 도성을 빠져나왔지만, 이성계의 부하들이 공양왕을 쫓았다. 공양왕은 간신히 추격자를 따돌리고 고랑포에서 배를 탔다. 하지남 지금의 임진강에 이르러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이때 송도에서 모셔온 신주는 강물에 가라앉았고, 공양왕만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추격자를 피해 도망 다니던 공양왕은 결국 간성에서 잡혀 처형당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강을 공양왕이 신주를 빠뜨린 강이라 하여 ‘신지강’, 또는 ‘구미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린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임진강’이라 이름 지으면서부터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 가토 기요마사는 군사들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고,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선조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의주로 대피하기로 했다. 피난길에 오른 선조의 일행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파주목 관아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선조는 한밤중이라도 신지강을 건너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조 일행은 서둘러 동파나루에 도착했다. 그러나 날은 깜깜했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대신들이 한참을 의논하던 중에 이항복은 불현듯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율곡의 말이 떠올랐다. 이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파나루에 있는 화석정을 틈날 때마다 기름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율곡은 임종을 앞두고 “항복아! 앞으로 큰 어려움이 닥치면 이 봉투를 열어보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항복이 스승이 남긴 봉투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질러라.”라고 쓰여 있었다.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지르니 근처가 대낮같이 밝아져서 선조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때 동파나루에 이르렀다. 선조는 나라를 위해 죽어간 백성들과 죽은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나루터 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선조는 지난날 의주로 피난할 때 폭풍우 속에서 겪었던 고생을 떠올리며 죽어간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였다. 이때 선조는 “그래도 하늘이 도와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라며 통곡하였다. 그리하여 신지강의 이름을 임할 ‘임(臨)’자와 나루 ‘진(津)’자를 붙여 ‘임진강(臨津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임진강은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으며,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첫댓글 퐁라라운영자님의 감악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일박이일동안 비박을 하며 산하와 동요되는 생생한 산행담을 접합니다.
마지막 벙커봉(223.1봉)에서 예전에 대락님과 번개치던 날에 머물던 기억이 나네요. ㅎ
만추의 계절에 멋진 발자취를 남기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화이팅!입니다.
방장님!
덕분에 감악지맥을 그런대로 잘 마쳤습니다.
지맥 하나하나가 저의 소중한 놀이터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놀이터이죠.
그래서 더욱 아껴서 가고 싶어요.
서둘르지 않고 오래오래 길게 갈려고요.
겨울엔 짧은 지맥으로 다니는 것도 요령 같습니다.^^
감사합니다.^^